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82)
182화 – 봉인(1)
다행히 릴리스를 설득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기야 그녀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부탁이었을 거다.
릴리스를 가둔 이 탑은 그녀에게 있어 더없이 지루한 장소인 반면.
누군가를 악몽에 가두는 일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을 테니까.
“젠장..아무래도 내 생각이 맞았나 보네.”
하지만 지금쯤 릴리스는 당황을 금치 못하고 있을 거다.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내가 눈을 뜬 곳은 그녀의 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의 눈에는 내가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을 테지.
“..미안하다고 해둘 걸 그랬나.”
고개를 들어보면 잿빛의 하늘이 보인다.
악몽의 세계 특유의 붉은빛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다.
삼상 세계. 그러나 내가 아는 그 어떤 심상과도 다른 모습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심상에 도달해 있었다.
본래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본디 나의 안에는 나와 ‘태양신’의 심상만이 존재해야 했으니까.
“벨. 아니..아리벨이라고 불러야 하나?”
뒤돌아선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이고 있었다.
차마 혼란을 숨기지 못한 채 주위를 살피는 아리벨의 모습.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너의 심상이 이렇게 변해버린 건데?”
아리벨은 결국 참지 못하고 나를 향해 소리쳤다.
나는 그런 아리벨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여긴 내 심상이 아니야.”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잘은 몰라. 깨닫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고.”
“..설명이 필요해.”
아리벨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벨, 너는 파라켈수스를 부활시킨 게 신룡이 아니라고 말했었지.”
“..그래, 신룡에겐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신의 짓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그러면 파라켈수스를 부활시킨 건 누구지?”
“그건..”
아리벨의 말문이 막혔다. 하기야 그녀로서는 알기 힘든 이야기였을 거다.
그도 그럴 게 이 정체불명의 심상을 품은 나로서도 가까스로 알게 된 사실이 아니던가.
나는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회색의 세계가 보인다. 마치 내 검은 태양과 태양신의 심상이 합쳐진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다.
“나는 이 심상의 주인이 그 범인이라고 생각했어. 릴리스를 찾은 건 그래서야. 범인은 분명 이 심상의 너머에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꼭 지금이어야 했어? 곧 파라켈수스와 싸워야 할 텐데.”
아리벨은 내 설명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사실, 그녀의 걱정은 타당했다.
사태는 손쓸 수 없이 긴박해져 있었고, 세계의 위험은 코앞에 당도해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예감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파라켈수스에 의해 조작된 예지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 바알이 말한 ‘태양신의 심장’이 나에게 무언가를 전해오고 있었다.
“지금 파라켈수스를 쓰러트리는 건 의미가 없어. 너도 봐서 알잖아. 지금의 놈을 죽여봤자 놈은 다시 부활할 뿐이야. 아니, 애초에 놈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올 테니 쉽게 당하지도 않겠지.”
“..라나를 왜 두고 왔나 했더니 그래서였어?”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라나의 이름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 길지는 않은 침묵이었다.
“..만약을 대비하는 거뿐이야. 괜찮아. 이만한 전력이면 쉽게 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 여기는 꿈속의 세계야. 바깥과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지.”
“그러다 만약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되돌려야지. 무슨 짓을 해서든.”
“..한 번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없다는 건 너도 알잖아.”
“그래, 그러니까 가는 거야. 더 이상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나의 등에서부터 뻗어 나온 날개가 하늘을 향해 펼쳐진다.
참을 수 없는 열기가 하늘을 물들인다.
“그러니 너와는 잠깐 이별해야 할 것 같아.”
“자, 잠깐! 내가 없으면 너의 왜곡점은..!”
“괜찮아. 너도 알다시피 여기는 꿈속의 세계니까.”
나는 짧은 작별을 전하며 날아올랐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느 이름 모를 초원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 * *
아직은 괜찮을 거라던 데이브의 생각과는 달리, 사태는 예상보다 긴박했다.
한창 피난이 이뤄지고 있던 마왕령에 불현듯 뜨거운 불길이 일어났다.
이윽고 피난민들을 덮쳐드는 화염의 파도.
“공격이다! 방어 태세!”
다행히 병사들의 대처가 빨랐다.
병사들은 순식간에 민간인들을 감싸며 앞으로 나섰다.
마기로 된 장벽이 펼쳐지며 불길을 막아낸다.
“민간인들을 대피시켜! 여기는 내가 맡는다!”
“맡는다고? 그거참 오만한 이야기로군. 감히 자네 따위가 내 공격을 막겠다는 말인가?”
이변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었다.
본신의 모습을 뽐내며 병사들을 이끌던 친위대장.
그런 친위대장의 앞에 웬 소년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설마..’
그 모습에서부터 파라켈수스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친위대장의 눈에 경계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상대가 어리고 약해 보인다는 생각은 옛 저녁에 지워버린 지 오래다.
순식간에 부풀어 가는 친위대장의 몸.
본신으로 강림한 그의 양팔이 소년을 향해 휘둘러진다.
“..어?”
그런데 왜 팔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자신은 분명 저 소년을 공격하려 했을 텐데..
“데이브 클락. 그 남자는 어디에 있지?”
아니, 이상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소년의 눈을 보는 순간, 남자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멍하다.
“그렇군. 마왕성 내에 있다는 거지?”
친위대장의 숨이 끊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쿵!
거대한 마족의 본신이 지면을 향해 쓰러진다. 그와 동시에 울려 퍼지는 굉음.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과도 같은 모습이다.
“알려줘서 고맙군.”
파라켈수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양팔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떨어져 내리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늘어선 기계 군단의 모습이다.
과거, 기계신의 종이라 불리며 세계 하나를 멸망으로 이끌었던 그들.
허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한낱 소드 마스터만도 못한 힘만을 가지고 있는 군단이다.
“모조리 죽여라.”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넘실거리는 불길.
이 순간, 안드로이드들은 일시적으로나마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아마도 불완전하게나마 태양신의 권능이 더해졌기 때문이겠지.
콰아아앙!
쏟아지는 것은 진녹색의 광선이었다. 파라켈수스의 심상에 젖어 맹독을 머금은 빛.
설령 상대가 마왕이라 하더라도 녹여버릴 수 있을 빛줄기가 마족들의 육신을 덮쳐가는 것이다.
콰르릉!
절체절명의 순간, 티타르의 푸른 뇌전이 마족들을 구해냈다.
굉음을 내며 충돌한 두 개의 빛.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충돌의 결과는 완벽한 호각. 그리 좋은 결과는 아니었다.
티타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다들 조심해라. 보통 위력이 아니야.”
“그래, 그런 것 같네.”
뒤이어 비앙카와 돌레스가 한데 모여 파라켈수스를 향해 내달렸다.
단숨에 적들을 분쇄하며 내달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차와도 같았다.
분명 안드로이드 역시 소드 마스터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 텐데도 그렇다.
두 사람의 그 걸음은 조금도 더뎌지지 않은 채 파라켈수스를 향해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용사들이라..역시 스승님 이외의 용사들은 쓰레기나 다름이 없군.”
허나 파라켈수스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고작해야 클라리스의 열화품에 불과했을 뿐이다.
힘이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를 떠나 우선 마족의 편을 든다는 것부터가 자격 미달이었다.
“사라져라. 가짜들.”
휘둘러지는 칼날이 칠검을 향해 쏟아진다.
진녹색의 검격.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녹아내릴 칼날이다.
“사라져야 하는 건 너지.”
그런데 그 순간, 파라켈수스의 팔을 잘라내는 이가 있었다.
무형검 예이츠. 그 이름에 걸맞게 소리소문없는 공격에 성공한 남자다.
“탕 티르!”
이어지는 것은 검의 폭풍이었다.
형체 없이 불어오는 투명한 검풍.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예이츠는 탕 티르의 이름을 소리쳤다.
“알겠어!”
이해할 수 없는 등장이었다.
탕 티르가 한때 용병대의 대장이긴 했지만 그래봤자 익스퍼트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을 터.
조금 전의 광경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은 건 가상하지만, 그의 실력은 아직 이 싸움에 참전할 만큼 대단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게 탕 티르는 그랜드 마스터는 고사하고 이제야 막 익스퍼트 수준에 접어든 수준이 아니던가.
“추적의 가호.”
허나 여기서 신의 가호가 나타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파라켈수스의 몸에 찍히는 추적의 낙인.
물론 가호 하나만으로는 무언가를 하기엔 부족하다.
“추격의 가호.”
그런데 만약 여기서 가호가 하나 더 추가된다면?
“잡았다!”
탕에게서부터 쏟아진 일곱 가닥의 사슬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파라켈수스의 몸을 감쌌다.
“날 붙잡겠다고?”
파라켈수스는 그런 탕의 모습을 가소롭다는 듯 조소했다.
예이츠에게 잘려 나간 팔은 재생을 마친 지 오래였다.
거칠게 휘둘러지는 양 팔. 파라켈수스는 그대로 사슬을 찢어버릴 작정이었다.
“…”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의 몸을 구속한 사슬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 까닭은.
무언가가 심상치 않았다. 사슬의 단단함이 일반적인 수준을 아득하게 넘어서 있었다.
파라켈수스는 곧바로 심독을 일으켜 저항하려 했다.
본래라면 이까짓 사슬쯤, 단숨에 녹아버리고도 남았을 테지.
“소용없다. 그건 보통 사슬이 아니거든.”
“그래 맞아, 아무리 네가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어도 쉽지 않을걸?”
고개를 들어보면 어느덧 사슬의 끝을 움켜쥐고 있는 용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구속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사슬에서부터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 드워프군.”
“맞아. 이렇게 보니 반갑지?”
예이츠가 능글거리는 웃음으로 답했다.
파라켈수스로서는 배알이 뒤틀리는 웃음이었다.
“그래, 날 붙잡은 것까지는 인정하마. 그런데 고작 이게 전부더냐?”
“오, 세게 나오는데?”
“정말 이까짓 쇠붙이로 나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뭐, 틀린 말은 아니네.”
예이츠가 파라켈수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조금 전부터 사슬에서부터 느껴지는 진동이 심상치가 않았다.
이대로 가면 굳이 파라켈수스가 뭔가를 하지 않더라도 사슬이 박살 나고 말 거다.
기껏 ‘강철의 정수’를 두드려 만든 사슬임에도 이렇다.
아무리 노력해봤자 필멸자의 힘으로는 태양신의 힘을 가진 이를 봉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한번 공격할 틈만 있으면 되니까.”
“설마 마왕을 기다리는 거냐? 안됐지만 마왕은 성에서 나올 수 없는..”
“맞는 말이야. 하지만 이건 생각하지 못했을걸?”
예이츠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와 동시에 사슬을 뒤덮는 것은 오러의 힘이었다.
점점 더 질기고 견고하게 변해가는 사슬.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파라켈수스를 붙잡기엔 부족하다.
“사라!”
“네!”
하지만 이 순간, 파라켈수스의 몸을 관통하는 창 하나가 있었다.
무형검 예이츠의 제자인 사라가 이 거대한 구속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지금이야!”
하늘 가득 어둠이 물드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었다.
“파라켈수스!”
하늘에서부터 해골이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