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55)
55화 – 용의 허울(2)
사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긴 했다.
나는 진짜 용사가 아니었고, 마법소녀 역시도 아직 용사가 된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엘프들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길 수밖에.
과연 진짜 용사는 어디에 있을까에 대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는 거다.
“설마 용사가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넌 알았냐?”
“그럴 리가. 나는 지금 여신도 아니잖아. 내가 뭘 알겠어?”
“언제는 여신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고작 페어리 주제에.”
“..너 그러다 진짜 천벌 받아 죽는다?”
나는 벨의 말에 코웃음 치며 엘프들이 준 더럽게 쓴 차를 한 입 머금었다.
“푸헤엑!”
그리고 곧장 뿜어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쓴 거 아니야? 설마 독이 든 건 아니겠지?”
입 안 가득 쓴맛이 퍼져나가는 것이 몸에는 좋을지 몰라도 정신에는 해로운 차일 것 같다.
그나저나 이 딱딱한 의자도 그렇고 이 차도 그렇고.
손님 대접이 좀 지나치게 박한 거 아닌가?
“손님 대접이 이래서야 원.. 엘프도 변했군.”
“손님이 아니라 포로 대접이겠지.”
짧은 투덜거림에 벨이 반박한다.
그래, 무엇을 숨길까. 나는 지금 엘프들에게 사로잡힌 상태였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자발적으로 잡혀줬다고 해야겠지만.
‘그대로 도망치는 방법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내가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다면 설령 상대가 대정령사라 해도 견뎌낼 수 없었을 거다.
비록 그 과정에서 나 역시 중상을 입게 되겠지만 내게는 재생의 권능이 있지 않은가.
싸움이 장기적으로 이어지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내 승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거다.
다만 그렇게까지 싸울 이유가 없어서 포기했을 뿐.
뭐, 그마저도 마법소녀를 건드린다면 뒤집어 버릴 작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차이가 나기는 하네. 아까 라나를 보니까 꿀차랑 다과를 받고 있던데.”
“마법소녀는 날 잡아두기 위한 인질 같은 거니까 잘 대해줘야지. 안 그러면 내가 무슨 깽판을 부릴지 모르는데. 그리고 아무리 인간을 싫어해도 어린아이에게까지 험하게 손을 쓰지는 않겠지.”
“..그래도 엘프들은 믿는 눈치네? 인간들에게는 그렇게 삭막하게 대하더니.”
“너 같으면 안 그럴까?”
나는 결국 찻잔을 내려놓았다.
맛도 맛이지만 더 이상 마시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벨은 그런 나를 보며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벨제뷔트.”
“지금은 데이브야.”
“그래.. 데이브. 우선 사과해 둘게. 어쩌면 나는 너희 마족들에게 큰 잘못을..”
“어쩌면 이 아니겠지.”
냉정하게 답하고는 있지만 사실 감정의 동요가 크지는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 모든 것이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겠지.
당시의 사건에 배신감을 느낀 것도, 지금까지도 화가 풀리지 않은 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들끓는 듯한 감정을 느끼기엔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흘러버린 것이다.
그날의 상처는 그 모습 그대로 굳어 흉터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아물지는 않을지언정, 그렇다고 해서 아픈 것도 아닌.
영원히 내 기억 속에 새겨져 있을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흉터가..
“부연 설명은 하지 마. 괜히 아픈 기억만 들쑤실 뿐이니까.”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쯤을 기다렸을까.
닫혀 있던 문을 열고 조금 전의 붉은 머리 엘프가 들어왔다.
“그 꼴은 뭐냐? 설마 요즘 유행하는 거냐?”
그런데 왜 저렇게 머리가 엉망이 된 거지?
저건 마치 누군가에게 쥐어뜯긴 듯한 몰골인데.
“네 딸에게 당한 거거든?”
“아, 그래? 그러게 잘 좀 대해 주지 그랬어?”
나는 마치 내 탓이라는 것처럼 따지고 드는 엘프를 향해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 순하디순한 마법소녀가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라면 보통 험한 짓을 한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해서다.
‘그런데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저런 것을 두고 적반하장이라고 하는 건가?
나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엘프를 향해 턱 끝을 들어 올려 보였다.
그렇게 보면 네가 뭐 어쩔 건데?
“그래.. 우선 넘어가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사설이 너무 길긴 했지. 본론은 언제쯤 들어갈 작정이야?”
“..우선은 네 소개부터 듣자고. 자칭 용사.”
자칭이라.
아무래도 이놈은 이곳에 있다는 또 다른 용사를 진짜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뭐, 그게 사실이지만.’
그게 이놈만의 생각인지 엘프 전원의 생각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생각을 가진 이가 이 자리에 나왔다는 건 뻔했다.
다른 엘프 역시도 그 생각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다는 거겠지.
자, 그럼 이제부터 내가 취해야 할 방침은 무엇일까.
“자기 이름도 안 대고 남의 이름부터 묻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냐?”
우선은 정보부터 얻어봐야겠다.
나는 의도적으로 엘프를 도발했다.
딱 봐도 성격이 급해 보이는 게 찌르면 찌르는 대로 반응이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일이 잘못될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때는 그때다.
숨겨둔 단검도 있으니 여차하면 싸우면 그만이라는 거다.
“..누가 보면 네가 나보다 오래 산 줄 알겠군. 그래, 내 소개부터 하도록 하지. 푸른 새 부족의 대전사 엘리아다.”
“데이브 클락. 근데 이건 너희 장로가 말했으니 알고 있지 않나?”
“내가 듣고 싶은 건 네 이름이 아니니까 묻는 거다.”
바로 내 정체를 묻겠다는 건가?
처음부터 생각하긴 했지만 참 성격이 급하다.
엘프답지 않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유별나다고 해야 할까.
‘확실히 특이하긴 하군.’
나는 마왕의 눈을 사용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이 엘프의 모든 기척은 일반적인 것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저 붉은 머리칼이나 오러의 기질, 그리고 아까부터 느껴지는 기묘한 힘까지도.
이쯤 되면 혼혈이 맞는지조차 헷갈릴 지경이다.
정말로 엘프의 피가 섞이긴 한 건가?
“왜 대답이 없지?”
“..그렇군. 너.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용족의 피가 섞인 거냐?”
“..너.”
“그것도 순혈에 꽤 가까운 용족이군. 설마 드래곤은 아닐 테고. 드라칸이나 드라고니안인가?”
추측 삼아 내뱉은 말에 놀라기라도 한 것일까. 엘프의 눈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파충류 특유의 눈이다. 진녹색의 홍채 위로 덧씌워진 금색의 동공.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이 엘프가 드라칸의 자식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순혈주의인 엘프들이 순순히 널 받아들일 리는 없었을 것 같은데. 심지어 대전사라. 그러고 보니 장로라는 자의 이름이 엘리야였지. 엘리아와 엘리야. 그럼 가족인가? 자식은 아닐 테니 손녀겠군.”
“질문은. 내가 한다고 했을 텐데?”
엘프의 입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미적지근한 온도.
나에게는 무의미한 위협이었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이 혼혈과 눈을 마주했다.
그나저나 신기한 일이다. 설마 그 자존심 높은 드라칸이 엘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볼 줄이야.
“근데 여긴 밥은 안 주냐?”
“너!”
나는 쏘아지는 화염을 주먹으로 쳐 날렸다.
우선은 이 엘프의 고압적인 태도부터 지우고 볼 생각이었다.
“야! 불붙었어!”
그 순간 들려온 벨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나는 그대로 단검을 뽑아 들었을 테지.
콰아앙!
뒤쪽에서부터 굉음이 들려온다.
아무래도 불꽃을 좀 엉뚱한 곳으로 날려버린 모양이다.
고개를 돌려보면 벽 한쪽 전체가 활활 타고 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불타는 게 당연하긴 하다.
엘프 놈들의 건물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는 뻔한 일이었으니까.
“야, 혹시 물 마법 쓸 줄 아냐? 아니면 정령이라도..”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녀가 절반 정도는 엘프라는 점이었다.
제아무리 혼혈이라 하더라도 엘프는 엘프.
물의 정령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마법 정도는 쓸 줄 알겠지.
무엇보다 아비인 드라칸 역시 뛰어난 마법 실력으로 유명한 종족이 아니던가.
“..난 불 속성에만 친화력이 있어서.”
그런데 못 쓴다는 거군.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 * *
이제 막 데이브의 심문이 시작되고 있을 무렵.
라나는 홀로 격리된 채 덩그러니 방 안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쏟아지는 이 시선은 뭐지?
역시 그 엘리아라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던 것이 잘못이었던 건가?
‘아니야, 그건 그 여자가 잘못한 게 맞아.’
그러나 사정도 알지 못하면서 데이브를 욕하던 엘프를 가만히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데이브의 사정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지만, 그가 자신을.
연구소와 팔레아스 령의 수많은 인간을 구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 속내가 무엇이건 간에 지금까지 데이브가 행한 업적만으로도 그는 영웅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그런데 그런 데이브를 두고 사칭범이라니? 더러운 사기꾼이라니?
‘그래, 잘한 거야.’
진짜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어쩌겠는가.
라나는 최대한 뻔뻔하게 있기로 했다.
솔직히 지금 가장 힘든 것은 자신보다는 데이브일 테니까.
데이브가 자신을 지켜주려다가 제 실력을 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라나로서는 불만을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그런데 그만 좀 보면 안 되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굳게 마음을 먹었다 한들 한계는 있었다.
마치 신기한 물건이라도 보는 것처럼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
최근 들어 더욱 감각이 예민해진 라나에게 있어 저러한 시선들은 실로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 보는 거지?’
고개를 돌려보면 어린 엘프들의 모습이 보인다.
물론 어리다는 건 외견만을 일컫는 것일 뿐, 실제 나이는 라나의 몇 배는 될 거다.
‘..왜 날 노려보는 거지?’
그런데 소년들의 눈빛이 어딘가 심상치가 않다.
경멸과 혐오로 가득 찬, 호의라고는 한 조각도 담겨 있지 않은 시선이다.
자신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는듯한 눈빛이 라나를 찔러온다.
동화 속에서 보던 엘프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저 눈..’
문득, 라나는 그 눈빛에서부터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를 오직 실험체로만 대하던 연구소의 사람들의 모습.
저 아이들의 눈은 그 연구원들을 닮아 있었다.
살아 숨 쉬는 인간이 아니라 사물이나 동물을 보는듯한 눈.
“왜 나를 그렇게 보는 거야?”
결국 불쾌한 기억을 참아내지 못한 라나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허나 그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어린 엘프들.
그들에게선 진한 악동의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야, 우리한테 말하는 거 같은데?”
“오, 이런. 우리를 부르다니. 그럼 답해줄 수밖에 없잖아?”
“인간 아이와 이야기하지 말라던 어른들의 말을 어길 수밖에 없겠어.”
“뭐, 어쩌겠어. 질문을 하는데 무시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잖아?”
슬금슬금 다가오며 하는 소리가 참 가관이었다.
지금 저런 걸 두고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저런 소리를 진심으로 믿을 사람 따위는 어디에도 없을 텐데.
“저 모습을 보라지. 저 짧은 귀와 빗자루 같은 머리 색이라니.”
그러나 엘프 소년들은 제 행동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눈빛에 깃드는 것은 덜 배운 소년 특유의 잔혹함이었다.
자신과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편견과 고집으로 가득한 눈빛.
“그냥 확 태워버릴까?”
“그것도 좋지. 형체도 안 남기고 태워버리면 어른들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걸?”
그들의 눈에 비치는 라나의 모습은 그저 장난감에 불과한 것 같았다.
어려도 지나치게 어린 탓이겠지. 기본적으로 멍청한 탓도 있을 테고.
“..경고하는데, 그런 짓을 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러나 겨우 저런 눈빛에 겁먹을 라나가 아니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녀는 나이만 먹은 저 소년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실전을 경험한 전사였으니까.
아직 백전노장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저까짓 놈들에게 겁을 먹을 정도는 더더욱 아니라는 거다.
물론, 뻔한 도발에 넘어갈 정도로 미숙하지도 않았고.
“핫. 가만히 있지 않으면 뭘 어쩔 건데? 괜히 센 척하지 마. 결국 장로님한테 붙잡혀 간 그 인간처럼 아무것도 못 할 거면서.”
“아저씨를 욕하는 거야?”
“그러니까 묻잖아. 욕하면 네가 뭘 어쩔 거냐고.”
“무슨 짓을 할 거냐고?”
그러나 상대가 선을 넘는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
당했다면 그 이상으로 갚아줘라. 그것이야말로 데이브의 가르침이 아니던가.
라나는 그대로 검을 뽑아 저들을 응징하려 했다.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면 참을 수 있었지만, 데이브를 욕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으니까.
“이렇게 할 거야.”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화를 내는 것.
그 마음가짐 자체는 정말로 칭찬해 줄 만한 것이겠지.
그런데 하필 그 타이밍이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게 라나가 엘프 소년들을 향해 다가서는 그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엘리아가 실수로 불을 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부, 불이야!”
“부, 불이라고? 서, 설마..”
실로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이래서야 마치 라나가 불을 낸 것 같지 않은가.
‘..어? 저건 내가 한 거 아닌데?’
당황한 라나와 엘프 소년들의 눈이 마주친다.
그러나 라나에게 변명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소년들의 눈은 이미 공포로 질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