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54)
54화 – 용의 허울(1)
팔레아스 령을 나선 우리는 그대로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 움직였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우리의 인상착의가 알려진 만큼, 더 이상 인간의 영역에 머물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우리는 말을 타고 왕도를 벗어나 숲길을 따라 움직였다.
목적지는 인간 세상의 소식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아마도 이 길을 따라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엘프의 영역에 도착하게 되겠지.
“야! 길치 주제에 멋대로 방향 바꾸지 말랬지!”
물론, 이대로 갈 수만 있다면 그렇다는 거지만.
“젠장. 가호가 생긴 김에 길잡이의 가호도 주면 안 되는 거냐?”
“그 가호를 내가 내린 줄 알아? 보니까 나도 모르는 가호던데!”
“쯧. 쓸모없는 녀석.”
“어휴! 진짜!”
나는 내 머리를 두드리는 벨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말에게 박차를 가한다. 잔소리를 듣기 싫었던 탓이다.
“아저씨.”
그렇게 얼마를 걸어가고 있었을까.
불현듯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마법소녀가 입을 열었다.
“정말 다른 도시에 가도 괜찮은 걸까요?”
“안 될 이유는 또 뭐냐?”
“하지만 제가 있으면. 또다시 연금술사들이 찾아올지도 모르잖아요. 차라리 제가 없는 게..”
아무래도 팔레아스 령에서의 사건에서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다. 얼굴이 창백하다.
쥴리와 있었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아무래도 강한 척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러모로 참 골치가 아팠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이토록 소리 없이 곪아가다니.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하긴, 뭐든 간에 내 삭막한 감수성으로는 될 일도 안 될 거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벨을 향해 고갯짓했다.
어떻게든 해보라는 의미의 행동이었다.
“라나, 너에게는 죄가 없어.”
“하지만 벨.. 제가 있는 곳마다 사람들이 죽는걸요.”
마법소녀 역시도 이 모든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연금술사 놈들에게 있다는 걸 알기는 할 거다.
그리고 마법소녀 자신이 뭔가를 한다고 해서 결말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도.
“그건 다 그놈들이 잘못한 거야. 네 잘못이 아니라고.”
“하지만 절 쫓아온 거였잖아요.”
단지 마법소녀의 양심은, 인간적인 부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다.
용사라는 놈들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타인의 불행과 자신의 책임을 연관 짓고야 마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이대로 가면.. 아저씨나 벨도 다치게 될 거예요.”
“나보다 약한 주제에 내 실력을 의심하는 거냐?”
“이번에도 그랬잖아요. 피도 그렇게 많이 흘리고, 기절까지 하시고..”
음. 기절만 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무래도 내 몸의 모든 뼈가 한 번씩 부러졌었다는 사실은 숨겨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뭘 하고 싶은 거냐? 이대로 영원히 떠돌며 살아가고 싶냐?”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고작해야 열 살. 아니 이제 열한 살을 먹은 꼬마 아이.
그런 아이가 제 죽음을 고민하는 것을 보며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로서는 쉽게 떠올리기 힘든 난제였다.
나는 인간에 대해서도, 아이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으니까.
“..도망치지 마라.”
“..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마법소녀를 강하게 만드는 것.
언젠가 내가 마법소녀를 대신하여 죽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
“네가 죽는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네 안의 아르카나가 존재하는 한, 언젠가 또 다른 마법소녀가 탄생하게 될 테니까. 네가 지금 하려는 건 네가 짊어질 짐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것밖에 되지 않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모진 말들을 내뱉는다.
물론 이 방법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을 몰랐다.
인간으로서의 나는 마법소녀보다도 미숙했으니까.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저 아이는 용사였으니까.
두드리는 만큼 강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저 불안감의 방향을 틀어낼 수 있다면..
“그러니 견뎌라. 네가 느끼는 그 감정을 다른 누군가가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면.”
“..아저씨는.”
그런데 어째서일까. 마법소녀가 날 보는 눈이 묘하다.
“솔직하지 못하네요.”
“그러게. 연기 더럽게 못 하는구나. 너?”
아무래도 입을 열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던전이군.”
“말 돌린다. 쟤.”
“하핫.”
그래도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던전이 등장한 것은 진짜였다.
보아하니 한 번도 공략된 적이 없는 던전인 것 같았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건가?
“곧 터지겠는데?”
“던전 브레이크 말하는 거야?”
“그래, 던전에서 느껴지는 힘이 보통이 아니야. 기껏해야 일주일 정도 버티려나?”
형태로 보아 뱀이나 도마뱀 종류의 마수들이 사는 던전인 것 같았다.
용족이나 리자드맨은 아닐 것 같고 반인반사의 마수 나가나 불도마뱀이 살 것 같은 환경이다.
던전에서부터 화염의 기운이 진하게 느껴지고 있다.
“뭐든 간에 빨리 처리해야겠군. 내버려 뒀다간 조만간 터질 거야.”
“네가 던전을 공략하겠다고? 보상도 없는데?”
“인간 놈들을 돕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 근처에 있는 건 팔레아스 령이잖아. 어쩔 수 없지. 거기엔 빚이 있으니까.”
안 그래도 방비가 약해진 상황이다.
마수들까지 나타나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팔레아스 령에 종말이 찾아오겠지.
나는 곧장 앞으로 나아가 던전 위에 손을 댔다.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공략을 시도할 작정이었다.
“..화살?”
그 순간 내 머리를 노리고 쏘아진 화살이 없었다면 말이다.
“엘프들이군.”
기척으로 보아 그 숫자는 대략 서른 명.
그리고 하나같이 익스퍼트 수준의 강자들이다.
우리를 포위한 엘프들. 나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지만..”
“처리해라.”
이어지는 것은 화살의 비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화의 여지는 없다는 건가?
나는 그대로 마법소녀를 감싸며 검을 휘둘렀다.
안타깝게도 그 과정에서 타고 온 말이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었지만, 그래도 마법소녀는 지킬 수 있었다.
“야! 나는 안 구하냐!”
“잊고 있었군.”
“너 진짜!”
시끄럽게 구는 벨을 무시하며 몸을 일으킨다.
슬슬 검을 든 팔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힘에서야 내가 앞서고 있다지만 그게 전부라는 거겠지.
내 검술은 기본적으로 방어와는 거리가 멀다.
오러가 담긴 화살을 일일이 쳐냈다가는 끝이 없다는 거다.
‘아무리 그래도 좀 심하긴 하네. 조만간 방어 기술도 만들어야 하나?’
물론, 가장 큰 원인은 저 중에 숨어 있는 보우 마스터일 것이다.
남몰래 화살에 강기를 실어 쏘아낸 적. 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살기를 쏘아 보냈다.
어찌어찌 흘려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마법소녀가 다칠 뻔하지 않았나.
“이봐,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인간의 말 따위 듣지 마라. 공격해!”
보아하니 저 여자가 엘프들의 우두머리인 모양이다.
엘프답지 않게 붉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여성이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엘프들은 붉은 머리 색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혼혈인가?
뭐든 간에 일단 대처가 먼저다.
나는 그대로 마법소녀를 들쳐메고 도약했다.
데모닉과의 싸움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던 공중도약이었다.
“부, 불이야!”
“저 자식! 숲에 불을 지르다니!”
그런데 피하는 데에만 급급한 나머지 이 기술을 쓰면 불이 붙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곳이 숲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대가였다.
하기야 지난 3천 년간 계속 마왕성에서만 싸워온 사람에게 뭘 바라는가?
‘사실 불이 나건 말건 내 알 바는 아니기는 한데. 조만간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면 결국 불이 나는 건 마찬가지였을 테고.’
그래도 결과가 좋으니 된 건가?
나는 그대로 공중을 박차며 날아갔다. 마법소녀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고작해야 하늘을 나는 일 정도가 아닌가. 언젠가는 겪었어야 할 일이다.
“우에엑..”
“으아악!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음.. 저건 모른 척하는 게 낫겠군.
“벨, 엘프들이 왜 우리를 공격하는지 알고 있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내가 엘프의 신인 것도 아닌데.”
“쯧. 엘프의 신이라고 해 봤자 나무잖아. 걔가 뭘 알겠어?”
나는 가볍게 엘프들의 신을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나는 기본적으로 신 중에는 제대로 된 놈들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는 나만이 아니라 세계수까지 욕하는 거야? 그리고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지금 나한테 길을 묻는 거야? 역시 네 길 찾기 능력도 별거 아닌..”
“어휴. 이 길치! 앞을 봐! 지금 네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벨의 목소리에 앞을 바라본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엘프들의 모습이다.
아무래도 엘프들의 본거지로 와버린 것 같다.
“저거 뭐야?”
“글쎄.. 침입자?”
그런데 저놈들도 어이가 없었던 것일까.
한동안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엘프들이 한 박자 늦게 활을 꺼내 들었다.
하긴, 누가 적의 본거지로 이렇게 당당하게 쳐들어올 거라고 생각하겠는가.
“흠. 이봐 벨. 앞으로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길 안내 좀 해주지 그래?”
“..그래야겠네. 안 그러면 네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마족과 인간 모두에게 쫓기고 있는 처지에서 새로운 적을 만드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지만. 이래서야 뾰족한 수가 없을 것 같다.
전투를 피할 방법은 없다고 봐야겠지.
“어쩔 수 없네.”
나는 순순히 포기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이유야 어떻건 간에 저쪽에서 먼저 손을 쓰지 않았는가.
나는 설령 이 숲 전체를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저들을 응징할 작정이었다.
“멈춰라!”
그러나 곧 멈춰야 했지만 말이다.
“자, 장로님?”
“다들 무기를 거둬들여라.”
모습을 드러낸 장로라는 엘프. 느껴지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다.
근육의 형태로 보아 전사는 아닌 것 같은데.. 마법사인가?
그렇다면 꽤 고서클의 마법사일 테지.
“하지만 장로님! 저자는 던전을 공략하려고 했습니다! 그 던전은 부족 회의에서 공략이 금지된 던전 아닙니까!”
나를 따라오던 보우 마스터 엘프가 장로를 향해 소리쳤다.
그런데 저 엘프. 정말로 내가 던전을 공략하려고 들어서 활을 쏜 거였나?
심지어 부족 단위로 저 던전을 방치하고 있었다고?
그 안에 있던 놈들이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저러는 거지?
“그야 당연하겠지. 그자가 바로 팔레아스의 영웅이니까.”
“..네?”
멍청하게 되묻는 엘프의 말에 장로는 말없이 팔을 들어 보였다.
장로의 손 위로 바람이 몰아친다.
마왕의 눈을 사용하지는 않았기에 아직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바람의 정령일 거다.
“못 들었느냐? 저자가 바로 이번에 팔레아스 령을 구원했다는 영웅. 데이브 클락이라고 했다. 인간들에게 당대의 용사라고 불리고 있는 그자 말이다.”
그러나 장로의 말에 경악하는 것도 잠시.
엘프들은 이내 활을 놓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무슨 속셈이지? 내가 팔레아스 령을 구원했건 말건 당신이 신경 쓸 바는 아닐 것 같은데.”
“간단한 이유다. 신께서 친히 명령을 내리셨다는 것.”
“..세계수를 말하는 건가?”
“그래, 그리고 우리의 신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용사를 지켜라.”
나는 그 말에 잠시 멈칫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신들이라면 지난 회차의 정보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거다.
용사를 지키라고 말한 건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였으리라.
“하지만 문제가 있지.”
“문제라고?”
“그래, 아주 큰 문제라네.”
입으로는 큰 문제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런 것치고는 태연한 얼굴이다.
표정만 보아서는 혹시 별일 아닌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마을에는 이미 용사가 있으니까.”
“..뭐?”
그런데 이건 무슨 소리지?
의문을 느끼는 순간, 장로에게서부터 뻗어져 나온 바람이 나를 옭아맸다.
“그러니 묻지.”
진녹색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수준으로 따지자면 소드 마스터 급인가?
아니, 이 정도면 혹시..
“자네는 누구인가?”
뭐든 간에 지금 싸우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겠지.
나는 일단 항복을 선언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