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248
◈ 징벌, 인연 (5)
사파 두령의 입에서 정사품 관리를 향한 추포 명령이 떨어졌다.
‘무슨?’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면전에서 대하고도 믿기 힘들 수밖에 없는 언행이다.
순간 지부대인 왕위수의 새까만 눈썹이 좌우로 모였다. 이 비천한 놈이 뭐라 한 게지?
추관이 먼저 반응했다. 눈앞에 앉은 정연신의 냉엄한 눈동자를 조심스레 살핀 직후였다.
“피하십시오!”
그녀의 허리춤 검파에 묶인 붉은 수실이 확 들쳐 올라왔다. 검 손잡이를 쥔 왼손으로 강력한 기파를 일으킨 것이다.
금령추화검식(金領秋花劍式)의 발검 검세였다.
북경에서도 지체 높은 자들의 검법으로 이름난 기예인데, 한 번 출수하면 꽃잎 모양의 경파가 주변을 휩쓸어댄다.
고위 관직자가 즐비한 북경 상류층에서 즐겨 연마하는 검공이었다.
‘광예채주는 두려울 정도로 고강한 자다. 허나 내상과 외상이 몹시 중해! 어차피 우두머리부터 어찌해야 하는 바!’
그녀가 다급히 오른손으로 검파를 잡아챌 때였다.
천장에서 아랫바닥까지.
불현듯 일어난 흰빛이 기다랗게 명멸했다.
스윽.
추관의 어깻죽지를 훑고 내려앉았다. 별다른 기척조차 없었다. 그저 음습하고 소름 끼치는 살기가 한 줄기 궤적으로 화한 듯했다.
새하얀 아지랑이 너머, 어느새 한쪽 발을 굽히고 몸을 낮춘 헌원창의 뒷머리에서 영웅건의 매듭이 휘날렸다.
무심한 표정이 돋보인다. 피 한 점 묻지 않은 검극을 바닥에 댄 채였다.
그 옆으로 추관의 오른팔이 떨어졌다.
푸확!
“아아악―!”
뒤늦게 그녀의 어깨에서 핏물이 터졌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매끄럽게 정련된 살검의 여파였다.
헌원창은 광예결에 자신의 검술을 녹이고 있었던 것이다.
천년 도시 서안을 관할하는 추관을 일격에 무력화시켰다. 기척을 감추고 일격필중의 검을 뻗기로는 마광익에서 제일이다.
명실상부한 입황성 청색의 경지였다. 모든 마광익이 그들의 대주를 줄기차게 따라가고 있었다.
“멈추어라!”
엉거주춤 일어선 지부대인 왕위수가 크게 외쳤다.
광예채주를 향한 호통이 아니었다. 손을 뒤로 들어 객잔 입구를 밀고 들어오려는 자신의 기마 무인들을 제지했다.
“귀백신검을 벤 자가 즉살을 입에 담았다. 너희 잡것들은 마땅히 수하의 본분을 다하여 무기를 거둬라. 본관을 해할 셈이냐?”
“몇몇 관리들은 제법 눈치가 좋단 말이지.”
어느새 홀연히 나타난 청명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몹시 빠르고 자연스럽게 내려섰다.
명족의 보신경은 살수가 지닌 몸가짐과 비슷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다.
그가 왕위수의 목에 가볍게 들이댄 검신에서 하얀 광채가 스쳤다.
“…….”
본래도 조용한 객잔에 더욱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한켠의 창틀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햇볕 속에서 먼지 무리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입구까지 밀고 들어온 지부대인의 무인들이 걸음을 멈췄다. 제각각의 기색에 경악을 띠었다.
왕위수는 침음했다.
“절도가 하늘을 찌를 기세다. 보통 사파 무리가 아닌 게로군. 네놈들, 정체가 무엇이냐?”
“네가 알 바 없다.”
홀로 담담히 앉은 정연신이 말했다.
왕위수가 기막힌 웃음을 지었다.
그는 지닌 바 높은 권세만큼이나 고절한 무인의 가치를 잘 안다.
눈앞에서 손가락조차 까딱이지 않고 대방파 정예급의 고수들을 부리는 자.
관무를 아울러도 비범한 지위였다.
일신의 무위와 경륜은 십삼천과 구파 장문인에 못 미칠지언정, 그에 조금쯤 가까운 전력을 지닌 것이다.
직접 대하고 보니 명확해진 사실이었다. 칠대문중의 제자들을 아래로 보던 추관이 일검에 땅을 구를 듯 괴로워하고 있다.
그래서 왕위수는 더욱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약육강식의 세상이었다. 기세가 본인의 가치를 방증하는 시국인 바, 이 자리에서 살아나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권세를 더욱 곱게 포장해야 한다.
그는 음침한 기질만큼 소리 없이 죽은 운양부의 지부대인과 달랐다.
출신과 처세, 기반 도시의 격이 훨씬 높다.
그가 시구를 읊조리듯 말했다.
“지금 네가 어느 안전에서 무슨 일을 벌인 줄 아는 게냐? 본관은 북경 왕씨 재상가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 신위에 가까운 황상의 검무를 직접 목도했다. 황상께서 친히 품계를 하사하시었고, 본관의 얼굴을 기억하겠노라는 말씀으로 성은을 입었다. 네가 제아무리 고절한 무위와 수하들을 갖추었다 한들, 백주에 감히 본관에게….”
그때.
광예채주의 옆에 시립해 있던 미녀가 입술을 뗐다. 마찬가지로 냉엄한 기도를 전신에 둘렀는데, 음성이 북풍한설마냥 차가웠다.
“너야말로 어느 안전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짐작을 못 하는군. 천하 전역의 관리들이 열일곱 명의 용모파기를 즉각 갱신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꼴이 아주 우스워.”
“열일곱? 일개 호종 무사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
왕위수는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귀백신검을 맞상대한 무위, 묘한 언행, 지부대인을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몸가짐, 몹시 어린 용모, 열일곱 명…… 그는 아둔한 자가 아니었다.
뇌리에서 일어난 공황이 서서히 두려움으로 화하여 뒷골을 향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오.”
왕 지부대인은 말본새부터 바꿨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 발로 범의 아가리에 들어왔다.
우습다는 말이 맞다. 천하에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있을까.
한껏 기세가 올라 있을 입황성의 신임 대주에게 스스로 죄를 고하다니. 무림맹 개파대전을 제패한 일로 엄청난 무명까지 떨치고 있을진대.
스윽.
그는 두 손을 모아 공수를 올렸다.
본래 머리를 숙이지 않는 예법인데도 고개까지 한껏 내렸다.
명가 출신에, 지체 높은 관리로서 지닌 거드름도 몸가짐에서 없앴다. 선대 황태후를 대하는 것마냥 자세를 낮췄다.
“끝도 없이 광활한 섬서가 온통 사마외도의 도원향이 되었소. 종남 멸문은 그 정도로 뼈아픈 일이오. 관원으로서 살아남고자 한다면 딱히 다른 방도가…….”
스악!
시커먼 기류가 왕위수의 귀 한쪽에서 이지러졌다. 고절한 진기의 유형화였다.
심연에서 뽑아낸 실타래 같은 기운이 귀를 베어 떨어뜨리면서 핏물 속으로 스며든다.
“네 앞에 계신 분의 귀를 더럽히지 마라. 똑같은 느낌일 거다.”
백미려가 새하얀 손가락을 길게 펼쳤다 모으는 한편, 왕위수의 변명이 비명으로 화했다.
곁에서 끙끙거리는 추관과 함께 몸을 뒤트는데도 호위무사들이 달려들지 못했다. 앞서 왕 지부대인이 보인 모습이 극도의 공경을 갖췄던 까닭이다.
“이게 무슨…….”
객잔 입구에 선 군청색 무복의 수장이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예견한 바와 정반대의 광경이 펼쳐졌다.
당연히 술잔을 나누리라 여겼는데 핏물만 튀어버린 것이다. 애초에 범접하기 힘든 고수들 틈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저 무심하리만치 밝게 꽂히는 햇빛 속에서.
그들은 차례차례 포박당해야 했다.
* * *
유혈 사태를 기점으로 본래 있었어야 할 일이 급물살을 탔다.
지부대인과 추관이 객잔의 지하 창고에 가두어졌다. 숫제 하옥에 가까웠다. 그들은 양팔이 없는 귀백신검과 만나야 했다.
한편, 신소빈과 강창무가 갖가지 문건을 가져왔다.
서안부 관리들의 행적이 기록된 두루마리들인데, 표홀한 보신경으로 관청에 침입해 강탈한 것이었다.
상황 파악을 완전히 끝마친 지부대인과 추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입황성 대주의 면전에서 보인 행태가 어떠했던가.
변명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궤변을 늘어놓았다가 목마저 베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의 표정을 경직시켰다.
“한 놈이 아니라 줄줄이 엮였으니, 즉참하는 게 오히려 귀찮겠는걸. 안 그래도 동창에서 앓는 소리가 나온다던데. 환관 명여는 아예 실각했고.”
퀴퀴한 지하 바닥에서 쪼그려 앉은 청명이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차라리, 차라리 죽여 주시오! 마혈만 풀어주면 본관이 자결하겠소!”
황제가 내려준 품계로 사리사욕을 취하고 혹세무민을 꾀했다. 서안부 관리들의 중죄는 그들을 참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명률의 법도는 몹시 엄한 바, 삼족의 목으로 다스릴 일이다. 사안이 북경으로 올라가는 순간 온 가족이 형벌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왕위수는 자신의 목숨 하나로 모든 일을 묻어주길 요청한 것이다.
허나 시기가 좋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마광익주의 관심에서 밀려났다.
“어쩌지? 내 권한 바깥의 일이라서.”
청명이 빙긋 웃었다.
그들의 머리 위쪽, 객잔의 일 층.
귀백신검에 대한 심문을 끝마친 백미려가 손끝으로 피를 뚝뚝 흘리며 정연신에게 고했다.
“쉽지 않겠습니다. 종남제자 정혜는…….”
어린 마광익주는 굉장한 탈력을 느끼고 있었다. 점차로 온몸이 늘어지는 듯했다.
동료들에게 티를 내지 않았을 뿐, 몹시 심각한 반동이었다. 단기 결전을 중시하는 격발형 무공의 단점이 뼈저리게 실감될 정도였다.
관청 일행을 가둔 직후, 보혈대주 진명조와 입황성 비선을 통해 들어온 연통도 문제였다.
[섬서 임조부, 패검종 본문에서 패검종주 출관. 홀로 남하 중. 수하들이 따르지 못하는 속도.] [섬서 한중부, 혈염교 제일사도 출현. 무시무시한 경공으로 북상 중.] [그 중앙, 섬서 봉상부, 여령주의 첫 번째 검 출현. 섬서제일마 위극상(魏剋祥)이 화산파 매화검진을 무너뜨리고 탈주.] [화산 장문인, 성화검신(瑆華劍神) 율하낭랑(律霞娘娘)이 자하신검을 들고 하산.]‘뭐든 준비를 해 둬야 해. 회복을 하든, 네 번째 검초를 만들든.’
윗줄의 초고수와 맞선 대가로 합당하다 하나, 그는 그 당연함이란 한계를 부숴야만 하는 명운을 타고났다.
섬서는 대방파들의 각축장이다.
언제 또 다른 초고수들을 대면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검뢰섬릉식의 다음 검초를 구상해 둬야겠어.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검식으로.’
떠오르는 바가 적지 않다.
지금에 이르러 정연신의 영감이 될 만한 요소는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소림과 무당파 같은 정종 무맥은 어떠한지에 대한 소문, 입황성의 혈족과 선배들로부터 귀동냥한 갖가지 무학의 이치, 혹은 문득문득 살갗을 스치는 바람 줄기들까지.
뇌리에서 하얀빛으로 발광하는 상단전이 그에게 속삭였다. 네게 불가능한 일은 없노라고.
‘그래야지. 너만은 그렇게 말해야지.’
머릿속을 스치는 영감들을 정리하며 백미려의 입술에 시선을 둘 때였다.
“음……?”
불현듯 정수리 백회에 벼락이 친 듯했다. 짜릿한 느낌이 일어난 직후, 정연신의 시야가 옆으로 기울었다.
동시에 눈앞이 흐려졌다. 귓속에서 뭉그러지는 백미려의 외침과 함께였다.
―섬예!
* * *
아흐레 전, 마광익 전각.
무림맹회의 예 소저는 마광익 무명제자들과 제법 친해졌다. 광예결을 연마하는 모습에 미소를 띠고 다가간 그녀의 붙임성이 크게 한몫했다.
입황성은 호전적인 방파였다. 태생부터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월람이라는 연무장에서 싸움으로 갈등을 푸는 일이 빈번했다.
강호인을 잡아 죽이는 강호인들의 무공 군체이기에.
아이들은 자신의 선배들과 대치한 예 소저를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대주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나눴다.
연무장에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은 아름답고 고강한 손님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줬다.
입황성주가 공인하여 본성으로 들였으니, 제 대주에게 해가 되리라는 의심은 없었다.
“대주 오라버니가 마가를 안 잇는 이유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가 아닐까요? 그 얼굴에 그 나이에 그 무위에 성주님도 아껴 주시는데 아쉬울 게 뭐가 있겠어요. 또, 마가 쪽은 후계자가 정해져 있거든요. 마세인이라고. 지금은 순협(盾俠)으로 불려요.”
“대주 형이랑 꽤 친한 편이죠.”
“좋은 사람이에요! 그쪽 모친이 문제지.”
맞아, 그렇지. 자신들끼리 말하고 고개를 끄덕여댔다. 마침내 그들 대주의 행선지를 대략적으로나마 예 소저에게 말해 준 직후였다.
“모친?”
“못돼먹어서는 대주님을 핍박한 적이 있어요. 지난번에도 큰일이 있어서, 지금은 마가 구석탱이에 유폐됐다던걸요? 방계 황족이에요. 이름은 주연정이고요.”
“주연정……?”
그날 오후.
호젓한 정자에 몸을 기울이고 있던 귀부인 주연정의 오른팔이 날아갔다. 요란한 비명이 입황성의 노을과 함께 번졌다.
그렇게 목까지 베일 찰나에, 새까만 의수를 낀 당대 마가주가 빛살처럼 떨어져서 예 소저의 수도(手刀)를 튕겨냈다.
그렇게 두 번째 출수는 실패로 돌아갔다.
상대의 얼굴을 흘끗 본 그녀는 별다른 미련을 내비치지 않았다.
도주인지 산보인지 헤아리기 힘든 걸음걸이로, 마진의 마광결에 소맷자락만 뜯긴 채 나긋이 멀어졌다. 마진 역시 구태여 잡고자 하지 않았다.
“성주께 언질을 받은 대로군. 무림맹 대내총군사라 했나, 속내를 짐작하기 힘들구나.”
“아둔하긴, 천하에 나만큼 단순한 사람은 없을걸?”
그 말이 끝이었다.
예 소저는 입황성 본성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