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268
◈ 무서(武書)의 주인 (5)
“흐…….”
패검종주의 직전제자는 움직이지 못했다. 침음만 흘렸다.
마광익주에게 디뎌진 팔을 지지대마냥 내뻗은 채였다. 전에 없이 약해진 정연신을 떨쳐내지 않는다.
기도휴의 안법이 당대 마광익주의 몸상태를 제대로 훑었는데도 그랬다.
분명히 정연신의 기파는 몹시 흐리고 불안정했다.
주화입마에 가까운 내상, 상반신을 피투성이로 만든 외상. 고강한 초고수들을 연달아 상대한 참이다.
스승과 산보하듯 올라온 기도휴를 어찌 쉽게 감당할까. 패검종주의 직전제자는 초상비마저 자연스럽게 펼치는 고수일진대.
기도휴의 발밑에서는 여전히 풀잎이 고개를 들고 있다. 기이한 일이었다.
“가만히 있어라.”
정연신은 두 발을 모아 선 채 말했다.
입황성주의 두 번째 가르침. 그녀가 알려준 허초는 상대 고수의 기감을 흩트린다.
정연신은 기도휴의 공력 파동에 자신의 기파를 일치시켰다.
언젠가 고향땅 신야현에 찾아왔던 경극단을 생각하면서다. 패검종주를 대하고 불현듯 떠올렸다.
자신을 따돌리는 고을 아이들의 뒤꽁무니를 따라가다가, 여러 가닥의 실에 묶여 움직이는 인형을 먼발치에서 살핀 적이 있다.
노리개 경극이었다. 넋을 놓고 봤더랬다.
‘오의가 내 안에도 있었지.’
강호인의 무(武)는 그 삶과 맞닿는 법이다.
정연신은 어린날의 심상으로 기도휴가 발하는 기파를 희롱했다.
아주 미약해진 광륜기의 파동을 실타래마냥 정교하게 움직여 내공 감각을 빼앗았다.
고수의 기감은 오감과 연동되어 있다. 심법 공부가 깊을수록 등 뒤의 일격에 재빨리 반응한다.
기감이 흐트러지면 감각마저 착란에 빠진다는 의미다. 심검 허초의 오의였다.
“심검이라고……?”
기도휴의 여유로운 신색이 참담함으로 물들었다. 마땅히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둘이다.
팔을 거두려 하는 순간 다른 관절이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직감, 마광익주의 힘빠진 각법에 자신의 머리가 박살날 수도 있다는 통찰.
신검단 산하의 대주쯤 되면 온갖 대응 수법을 지니는 법이다.
정연신은 입황성 흑색에 걸맞은 격으로 위험을 찍어눌렀다. 초고수의 자세였다.
기도휴의 기감을 아무렇게나 흩어내는 한편, 화산 장문인과 패검종주의 싸움을 살폈다.
그들을 감싼 검로가 수백 줄기로 얽히고 있었다.
눈에 보이기로는 폭풍의 실타래 같았다. 섬서 제일을 가리는 생사결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요동쳤다.
쩌저정―!
두 절세고수의 검 궤적에 햇빛이 이지러진다.
폭발성이 아득히 늦게 뒤따르는 쾌검 줄기들이었다.
단타 검격조차 환강보다 강력한 충격파를 터뜨려대는데, 시천법을 발동한 눈으로도 투로를 따라잡기 힘들었다.
율하낭랑의 몸놀림에 낯익은 기질이 보여 겨우 좇을 정도였다. 꽃가지가 흔들거리는 듯한 검로에서 멸절사마총람의 요결이 묻어나왔다.
‘밀어붙이고 있어.’
절세고수들은 다른 시간을 살았다. 수백 합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극히 미세한 차이였으나, 율하낭랑의 검이 조금 더 일찍 극점에 이르는 듯했다.
조금은 도움이 된 걸까. 멸절사마총람에 저술된 검의(劍意)가 지금 내치는 패검종주의 검격에 깃들어 있던 모양이다.
본래 한 가지 종파에서도 수십 갈래의 무공이 뻗어나오는 법이니, 실로 다행이라 할 만했다.
“너는… 종주님을, 모른다…….”
발치에서 기도휴의 음성이 울렸다. 정연신은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섬예. 네놈 같은 절세 기재는, 절대로 알 수가…….”
그때였다.
돌연 패검종주의 검세가 변했다. 무색으로 이글거리는 대검의 형태가 수십 자루씩 일어나더니, 삽시간에 검신으로 합쳐졌다.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일 검이 완성 된 듯했다.
화아아악―!
어마어마한 압력이 살갗을 짓눌렀다.
순간 기도휴의 몸도 움직였다. 반드시 죽여 놓겠다는 듯 반대쪽 손을 내쳐 왔다.
그때 이미 정연신은 오른발에 광륜기를 집중시키고 있었다.
짧게나마 혈도를 칼로 저미는 듯한 통증을 감내하면서, 발바닥 용천혈로 공력을 터뜨렸다.
콰직!
발 앞코에 몹시 단단한 감촉이 끼쳤다. 그대로 짓눌려 부서지는 느낌과 함께였다.
기도휴의 머리를 터뜨리고 착지한 순간, 정연신은 뒤로 쓰러지는 율하낭랑을 봤다.
핏물이 솟구치고 있었다. 복부가 사선으로 갈라진 듯했다. 대검을 내친 패검종주의 눈에서 광망이 번뜩였다.
콰아아아아아―!
무시무시한 기운이 그의 주변을 아우르며 꿈틀거렸다. 절대자의 공력이었다.
율하낭랑의 어깨를 넘어, 정연신에게 향하는 시선과 함께 공간을 침식하며 드리운다.
명실상부한 섬서제일인.
눈이 마주쳤다.
패검종주의 흑안은 제자를 잃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광기에 가까운 평정심이었다.
“독문무공을 손쉽게 만든다고 들었다.”
그가 두꺼운 울림으로 말했다.
“나는 그렇지 못하여, 어렵게 하나를 만드는 중이다. 파황삼식(破荒三式). 방금은 일 식이었다.”
“…….”
“죽이지 않았다. 섬서에서 나를 두드려 줄 자는 성화뿐이니.”
정연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율하낭랑을 품에 안고 복부의 혈도를 두드려 지혈시키는 데 몰두했다.
그러면서도 패검종주를 시야에 담았다. 마광익주의 눈동자에 새파란 벼락이 작렬하고 있었다.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패검종주가 입을 열었다.
“나와 많은 것을 주고받은 애송아.”
저벅.
놈이 몸을 돌렸다.
“신검이 될 날을 기다리지.”
* * *
여령의 소령주가 죽은 자리에서 살아나온 이들이 많았다. 섬서 십삼천의 고수들, 수왕문도들, 당시 외곽에 있던 백도 정파의 무인들…….
천년하수오가 두 뿌리였다는 사실을 입에 담는 자는 많지 않았다.
다수는 마광익주를 뒤따르지 않고 칠녀봉에 오르거나 그대로 하산했다.
당시 자리에 있던 고수들은 자신의 이득에 과묵했고, 당대 마광익주가 보여준 광경만이 충격으로 남아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곧장 산자락 아래까지였다.
―여령의 작은 주인이 천년하수오를 빼앗겼다!
날개를 지닌 영물들과 몇 마리 전서구가 하늘을 날았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스친 날개들이 광활한 비탈길 아래로 향했다.
혈염교의 이염혈령진이 사라진 순간, 지평선마냥 펼쳐진 산자락이 인파로 가득찼다.
입황성 마광익주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필연이었다.
이염혈령진 탓에 진입하지 못했던 이들이 산을 올랐다.
낭인, 명가 문하의 고수, 호위를 대동한 상단 사람들의 경공 질주가 눈바닥에 무수한 발자국을 남겼다.
수풀 짓밟히는 소리도 요란했다. 목에 잇자국이 선명한 시체들을 뛰어넘고, 사인을 짐작하기 힘든 혈귀들의 시체 더미까지 외면하고 들어섰다.
본래 태백산을 헤매던 자들. 새로이 진입한 자들.
다수가 한 사람을 찾아냈고, 또 찾아 헤맸다.
무공을 익힌 약초꾼들의 거대한 동선이 산등성이 어느 지점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천라지망이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그 중심.
“장문인, 의식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나지막한 음성이 하얀 입김과 함께 흘러나왔다.
사박.
정연신은 율하낭랑을 업은 채 눈옷 입은 나무들을 지나쳤다.
옷깃이 길게 쓸렸다. 유난히 선명한 감촉으로.
발걸음이 무거웠다. 기감도 예전처럼 넓지 않았다.
귀백신검과 섬서제일마부터 태백산의 십삼천 합공과 초고수들까지. 누적된 내외상이 정가동공으로 짜인 몸조차 깎아 버리는 듯했다.
능법광륜기마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그저 희미한 아지랑이처럼 전신 혈도를 돌아다닐 뿐이었다.
신경에 거슬리는 놈들도 문제였다.
“혈귀들이 몰살당했어. 피칠갑을 한 여자가 비틀거리면서 사라졌대.”
“내분으로 추측하는 자들도 있더군. 안법으로 멀리서 살핀 놈들이 그리 말했다던데.”
“저자, 성화검신이 틀림없군! 절호의 기회야……!”
“여령의 소령주와 호법도 죽었고, 낭왕은 시체로 발견됐지. 수왕문 놈들은 문주를 잃었고…….”
“기력이 쇠할 만해. 아니, 서 있는 게 기적이 아닌가. 어찌 그들을 이긴 거지? 경이롭기 짝이 없다.”
“저 걸음걸이 봐. 힘이 느껴지나?”
거대한 포위망이 정연신과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속닥거리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대놓고 목소리를 죽이지 않는 놈들도 존재했다.
이염혈령진이 풀린 뒤로 활짝 열린 산등성이였다.
처음에는 하나둘씩 숨어서 모여들더니, 명적(鳴鏑:피리 구조의 화살)과 영물들의 날갯짓 소리가 요란해질 때쯤에는 수백 명이 정연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기력을 잃은 마광익주는 일부 무지렁이들에게 탐스러운 먹잇감이었다.
천년하수오를 품은 채 화산파의 장문인까지 들쳐업고 있다. 영초와 명성을 모두 선사해 줄 영물에 가까웠다.
천하 물정에 해박한 자들의 품행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황실의 신검에게 원한을 가진 강호인들이 흔한 세상이다. 흑색 대주의 목을 또 어디서 구할까. 입황성의 보복을 뒷전으로 밀어둘 만했다.
승냥이 떼였다.
온갖 병장기들이 절그럭거렸다.
눈 밟는 소리도 제각각이었다. 조심성 없고, 은밀하고, 뛰쳐나가고 싶어 안절부절못하고, 정련된 칼처럼 다듬어진 기척 등이 엄청나게 커다란 원을 이루며 내려왔다.
중앙에 정연신을 가둔 모양새였다.
그는 이따금씩 율하낭랑을 고쳐 업으며 말없이 발을 디뎠다.
사아아―
불현듯 불어온 겨울바람이 목덜미의 머리칼을 밀어냈다. 입김이 턱선을 타고 뒤로 흘렀다.
동시에 목덜미로 미약한 숨결이 끼쳤다. 내상이 중한 자 특유의 단내가 났다.
“마광, 익주야….”
등에 업힌 율하낭랑이었다. 정연신은 담담히 입술을 뗐다.
“장문인.”
“두고 가거라.”
“사마외도가 지천에 깔렸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자들이 많으니, 분명히 해코지를 당할 겁니다. 여기에 하수오를 두고 가도 마찬가지겠지요.”
“네 성품과… 자질이 아깝다. 이런 곳에서 귀천해선 아니 될 일이야. 네 한 몸은, 뺄 수도 있지 않느냐?”
뚝뚝 끊어지는 음성에서 고집이 느껴졌다.
상대의 단념을 자아내는 언행이 외조부와 닮은 게, 절세고수들은 대개 자기 주장이 강한 듯했다.
당대 마광익주는 예전에 다짐했다. 조부님처럼 되지 않겠노라고.
“알아서 하겠습니다.”
“…….”
날숨을 뱉어낸 정연신은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문득 얼굴을 스친 갈색빛 솔잎 밑으로, 눈에 보이지 않게 이지러지는 기류가 느껴졌다.
공기의 흐름에 숨은 기파였다. 주변을 둘러싼 살기가 점차로 짙어지고 있었다.
“먼저 출수하면 내가 죽겠지?”
“저래 보여도 마광익주다. 네놈 따위는 한 수에 절명시키고도 남아.”
“시험해 볼까? 조금만 참았다가.”
“하려거든 하산부터 막아야 해. 자칭 백도 정종이란 놈들은 수치를 몰라. 그럴듯한 공을 세운 황실의 살검에게 수저를 얹는 작태가 많단 말이지.”
“저자의 위업이 널리 알려지기 전에 쳐야 한다고? 그래… 딴에는 맞는 얘기야. 사마외도의 초고수를 몇이나 쳐 죽였는지…….”
매끄러운 무복에 털옷을 덧대어 입은 귀공자들의 대화였다.
위에서 들렸다. 귀신 가면을 쓴 채 나뭇가지를 신선처럼 디디며 정연신을 따르는 사내들인데, 서로를 금협(金俠)과 금권(金拳)으로 불렀다.
대상단의 수뇌부가 가명을 쓰는 듯한 모양새였다.
뒤따르는 호위무사 십수 명의 옷차림에서도 귀티가 흘렀다.
“별별 놈들이 다 몰려오는군. 어중이떠중이든 고수든 간에.”
“이제 이백오십 명쯤 되겠어. 점점 헤아리기 힘들어지는구만.”
“초조해지는걸. 저건 내 공적이란 말이지. 천년하수오쯤 되는 걸 가져가면, 승계 경쟁에서 누이를 이길 수 있을 텐데.”
“소년 한 명에게 섬서의 무법자들이 죄다 몰려든 형국이지.”
“금권, 네놈은 저게 소년으로 보이나?”
“음?”
“조심성 없긴. 저놈은 입황성 흑색이다. 사람으로 생각해선 안 돼.”
“아, 듣고 보니 부정하기 힘들군.”
“우리는 마지막에 나선다. 어부의 이득을 목표로 하자고. 물정 모르는 천것들이 마광익주를 녹초로 만들어 줄 테지.”
어부지리를 얘기한 금협의 매끄러운 턱이 움직임을 멈출 때였다.
스악―!
비탈길을 내려가던 정연신의 한쪽 어깨가 뒤로 확 젖혀졌다.
핏물이 검날처럼 솟구쳐 올랐다. 그는 새롭게 질주하는 통증에 이를 악 물었다.
“……!”
순간 천라지망을 구성한 무인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깨달음 어린 침묵이 소용돌이마냥 주변을 쓸어낸다. 마광익주의 상세가 정말로 중하구나.
전방에서 검을 치켜세운 검객 한 명이 입꼬리를 올렸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봤나……? 천하의 입황성 대주가 이 몸의 검풍에, 허억…!”
순간 정연신이 걷어찬 눈덩이가 놈의 안구를 부수고 들어갔다.
퍼억― 소리와 함께 미량의 광륜기를 머금고 터지는데, 둔탁한 울림이 누구에게도 큰 감흥을 심어 주지 못한 듯했다.
정연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 반격이 저놈들의 눈에 훤히 보였던 거야. 일격을 허용한 것도 문제고.’
천라지망을 채운 열기가 갈수록 짙어졌다. 검객의 시체가 뒤로 넘어간 이후에도 그랬다.
승냥이들이 호랑이의 상태를 완전히 눈치챘다. 아래에서는 새로운 무인들의 군집이 몰려 왔다.
“정말이로군! 저기 있다!”
“하수오! 천년하수오가 그 품에 있으렷다!”
“업혀 있는 여자가 입은 거, 화산파의 도포 같은데? 신분이……?”
“마광익주를 어찌 해보러 온 판에 말코도사의 신분이 문제냐! 저 둘의 목을 가져가면 십삼천에 투신할 수 있을 텐데!”
포위망이 끝도 없이 덧대어진다. 두꺼워진 무인들의 장벽이 거센 기파를 발했다.
공력 파동과 함께 몰아친 투기와 살기가 실재하는 바람처럼 마광익주의 옷자락을 헤집을 정도였다.
“금협, 언제 들이칠까?”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곧 폭발하겠어.”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대화에 여유와 흥분이 깃들었다.
상하와 팔방을 가리지 않고 기세를 키운 자들은 어느새 마광익주보다 주변부터 견제하기 시작했다.
날것의 강호였다.
정연신은 화산 장문인을 업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말했다.
“빈도가, 내리겠다는데도…….”
“장문인은 성주님이 아니십니다.”
짧게 대답하면서 언젠가 들이닥칠 공세를 대비했다. 고개를 조금 숙인 채, 근거리 기감을 선명히 일으켰다.
사박, 사박.
선심을 주고받은 인물을 내쳐선 안 되었다. 율하낭랑의 신분과는 무관한 문제다.
모친이 자리잡은 터전에서 호의의 소중함을 깨쳤다. 지켜야 마땅했다.
마광익주의 협이다. 이 순간 하얀 발자국들과 함께 갈수록 짙어졌다.
그렇게 열일곱 걸음쯤을 더 내디딘 직후였다.
‘음?’
정연신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주변이 조용해진 까닭이었다.
겨울바람보다 서늘한 적막이 주변을 맴돌았다. 왁자지껄 소란스럽던 자들이 하나같이 말을 멈춘 채 경직되어 있었다.
불현듯 눈바닥 위로 솔잎들이 굴러다니는 기척만 선명했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고서야 이유를 깨달았다.
“…….”
스무 명이 천라지망의 삼백 여명을 포위했다.
정자세로 선 채 발치에 검을 꽂은 흑발의 미인, 새빨간 양귀비를 질겅질겅 씹으며 미간을 좁힌 귀공자, 분개한 얼굴로 군중들을 쓸어보는 영웅건의 청년, 나뭇가지를 거꾸로 디딘 채 활을 든 명족 여인까지.
제각각의 자세였다.
하늘에 담갔다 꺼낸 듯한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모든 장포들이 눈부시게 푸르른데, 그들의 어깨에 새겨진 황(荒)가 소리없이 두드러졌다.
영웅건의 청년이 입을 열었다.
“할말이 많지 않군. 그대들은 얼른 내려가는 게 좋겠소.”
“아니.”
아득히 위쪽에서 울렸다.
귀신 탈을 쓴 귀공자들의 머리 위에 있는 나뭇가지였다. 두건을 쓴 외눈의 명족 청년이 검파를 고개를 젓는다.
검파를 쓰다듬으면서였다. 산뜻한 기질을 띤 용모에 표정이 없었다.
“전부 죽여.”
콰직!
바로 아래, 경직된 낭인 한 명의 복부에 검은색 검극이 틀어박혔다.
유난히 짙은 흑발을 늘어뜨린 백미려의 칼이었다. 까맣게 유형화된 마기를 둘렀다.
“대주, 이제 돌아가지요.”
검파를 쥔 그녀의 손등에 하얀 핏줄이 맺혔다. 짧게 얘기한 직후였다.
돌연, 그대로 허리를 틀면서 낭인의 상반신을 위쪽으로 끊어버린다. 카드드득― 갈빗대가 한 번에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대량의 핏물이 솟구쳤다.
시간을 정지시키는 한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