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287
◈ 연꽃 (6)
장원 바깥에 늘어진 대로가 흥분으로 물들었다.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흉년에 대두된 강자가 누구냐에 따라 민초들의 삶도 갈렸다.
무공을 익힌 초인들의 손은 무지막지하게 컸다. 수탈의 규모가 달랐다.
성동격서의 전술 간격이 무지막지하게 넓은 강호인들 가운데 어떤 자가 첫째가는 인물로 행세하게 될까.
광활한 산서성을 통틀어 이루어지는 비무대회는, 그 의의가 몹시 무거웠다. 장원 안에서는 더욱 그랬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엄청나게 거대한 식탁이 구(口) 자로 펼쳐져 햇볕을 받는 연회장.
“귀가의 철혼신도(鐵魂神刀)가 일절이라 했네.”
“평양부 무맥의 근본은 공야세가일세. 대공녀와 이공자 남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는가? 저잣거리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용모일세. 필시 무공도 마찬가지겠지.”
“살협을 빼놓고 산서의 젊은 무인을 논한다고? 웃기지 마라. 오월검법의 칼부림에 악인들이 얼마나 죽어 나갔는데! 시체에 대고 시를 읊는데, 풍류를 아는 염라가 따로 없단 말이지.”
“고가검문(高家劍門), 수월문(收鉞門), 창천방(蒼天幇)의 귀공자, 귀공녀들도 만만치 않네. 실전 무공을 극한까지 갈고 닦은 자가 산서에 한둘인가?”
기파가 맑든 불규칙적이든 명가로 인정받는 문파들이 모였다.
무복들의 색채가 다양했다.
저마다 깨끗하게 관리된 병장기를 패용한 채 담소를 나누는데, 흉년의 난세에 강자로 군림하는 자들 특유의 여유로움이 묻어나왔다.
“대회가 어찌 되든 무슨 상관이야. 한가롭게 비무대회의 향방 따위나 헤아릴 때가 아닐지도 모르는데. 인근의 혈귀들이 산불을 맞은 멧돼지마냥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더만.”
“혈사교검도 아니고, 잡졸들은 별 위협이 못 돼. 나도 한 놈의 목을 베고 왔네. 흡정과 약탈에 임할 정신머리도 없어 보이는 놈이었지. 공포에 질려 있더군.”
“자네의 검기가 그토록 빼어났나?”
“글쎄…….”
분위기는 대갓집의 잔치에 가까웠다. 세가라 불리는 가문에서 연회를 열었으니, 실제로도 그렇다고 할 만했다.
넓은 장원의 부지가 인파로 채워졌다. 익히 이름을 떨친 문파와 무인들만 들어왔는데도 그랬다. 천하는 이토록 넓었다.
“공야정.”
“…귀일태(貴泆殆).”
형형색색의 차양막이 펼쳐져 햇볕을 가리는 공터였다.
공야정은 허리에 맨 붉은 복대를 매만졌다. 정확히는 복대로 감아둔 검집을 손가락 끝으로 건드렸다.
무의식중에 발검을 강요하는 자가 근거리에 들어선 까닭이다. 산서귀가의 귀일태.
“여전히 기세가 삼엄하군. 무형검기(無形劍氣)라도 연성한 줄 알겠어.”
콧잔등의 흉터를 꿈틀거리며 말을 건다. 조잡한 말본새였다.
풍채는 그렇지 않았다.
품이 넓은 황색의 털옷을 걸쳤다. 신장이 큰 편인 공야정을 내려다보는 눈높이였다.
도객으로서 크고도 날렵하게 닦인 몸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풍부한 표정을 지녔다. 천하에 거칠 게 없어 보이는 기도였다.
그럴 만했다. 녹림 무맥의 총화를 한 몸에 이어받았다는 자다.
무공을 익힌 산적들이 양지에서 활동하고자 만든 가문이 산서귀가였다.
굉천광도(轟天狂刀) 귀일태라 하면 산서에서는 모르는 자가 드물었다. 오만한 성정으로든, 가차 없는 손속으로든.
공야정을 깔아보던 귀일태가 웃었다.
“매파를 내쫓았다던데. 명문가의 처사로는 무례한 게 아닌가. 대대로 글선생까지 불러다가 글줄을 외는 집안이.”
“무례한 건 네놈의 가문이었지. 일문의 후계자에게 시집 따위를 운운하고.”
대공녀 공야정은 그와 눈길조차 마주하지 않았다.
얼굴에 환히 끼치는 겨울 공기처럼 싸늘하게 말을 섞었다. 연회의 주최자로서 주변을 살피기 바빴다.
귀일태가 제 허리춤의 도갑을 매만졌다.
“생각이나 해 보라는 전언이 어찌 희롱인가. 법력 높은 승려에게 가 봐라. 네 머릿속에 마군(魔軍)이 잔뜩 끼었다고 할 거다. 고고한 척해도 이권을 지키기에 급급하니, 그릇이 넓어질 리가 있나.”
공야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검 문주의 조언을 되새겼다.
―패해선 안 되는 위치라면, 호흡과 파지를 일치시켜 상대를 보기 전까진 비무에 임하지 말아야 합니다. 싸움은 변수의 집합체이지요. 내공 호흡을 다듬기 전의 저는 어떤 양귀비쟁이 한 명에게도 상시 필승을 자신하기 힘들었습니다. 하수들의 영역에서는 더하겠지요.
귀일태는 불시에 와서 말을 걸었다.
지금의 그녀는 만전이 아니다. 싸움의 빌미를 줘선 안 된다.
‘검 문주.’
차양막 아래에 마련된 탁자 한켠을 바라봤다. 주변의 이목을 끌어모으고 있는 앳된 얼굴의 청년.
용모를 보는 순간 현실감이 다소 멀어지는 자태를 지니고서는, 주위의 젊은 무인들에게 힐끗 눈길을 주며 순박한 견문을 드러냈다.
비무대회에 참가할 호걸들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모양새였다.
공야정에게는 오히려 검운비가 신비로웠다.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해.’
무인으로서 현천문주를 흠모했다. 달빛 아래의 검무가 풍겼던 묘한 회한과 애틋함, 고적함을 잊기 힘들 것이다.
십 년을 두고 수련할 비기를 주저 없이 알려준 배포도 그렇다. 용모가 저런 까닭일까. 존귀한 영물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세가의 후계자와 낭인으로서 신분의 격차가 있다 해도 대하기 힘들었다.
“너, 무얼 보나? 음?”
두꺼운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헤쳤다.
굉천광도 귀일태. 살협과는 또 다른 동년배 숙적.
산서의 결핍은 귀일태 같은 자들로 인해 커졌다.
이렇듯 공적인 자리에서는 명가 문하로 행세하고, 바깥에서는 보신경을 십분 발휘하여 민초들의 귀한 식량을 빼앗는다.
신출귀몰한 경공 탓에 신분을 특정하기도 쉽지 않았다. 확증이 힘든 까닭에 알 만한 자들끼리만 쉬쉬할 뿐이었다.
강호는 점차 야만적으로 변해 갔다.
녹림 비전을 계승한 산서귀가의 대공자로서는 제 세상을 만난 격일 터였다.
어디에서든 오만해도 될 법한 신분에 폭급한 성정, 강력한 무공을 지녔다. 자신이 천하의 중심인 자다.
먼발치에서 몽환적인 자태로 흑발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신예를 보고는, 두꺼운 입술을 살짝 비틀어 올렸다.
“별 희한한 놈을 다 보겠군. 공야 대공녀의 눈에 띌 수밖에 없겠어. 노리개인가?”
저벅.
큼지막한 털옷이 공야정의 오른쪽 시야를 가리고 지나갔다.
그녀는 막지 않았다.
검운비가 산서의 뭇 명사들과 안면을 텄으면 했다. 낭인으로 객사하기에는 아까운 사람이다.
차라리 은공에 가까웠다. 녹림 귀가가 권세로 검 문주를 누르고자 한다면 뒷배가 되어 줄 요량이었다.
“저쪽으로 소흥주를 돌려라.”
공야정은 등 뒤에 선 시종에게 명했다. 현천문주 검운비의 주변을 가리키면서였다.
* * *
사락.
거뭇한 소맷자락이 탁자를 스친다. 옷감 쓸리는 소리에 주변의 눈길이 몰렸다.
예민한 청력을 지닌 자들이 많은 자리였다. 감각도를 연성한 무인들 사이에서 평정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뭐 볼 게 있다고.’
정연신은 말없이 잔을 쥐었다.
관심을 갖고 다가오는 자들이 많았다. 다수가 그의 얼굴에 시선을 뒀다. 거칠 황 자가 새겨진 의복을 입고 있을 때는 겪어보지 못했다.
신분과 무위를 낮추고 보니 생각보다 험한 세상이 다가왔다. 입황성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뭘 하고 있을까.
불현듯 땅속에 묻은 행낭 속 순혈포가 떠올랐다. 매끄럽게 미소 짓는 칠사도의 모습도.
내심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기질과는 거리가 멀다.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다.
‘검룡 대협의 사제가 되지 않았을까. 종남파에서.’
정연신은 술잔을 매만지며 주변의 기척을 느끼는 데 집중했다.
‘우측에서 쉴 새 없이 고기를 집어 먹고 있는 남자는 고가검문의 제일검. 좌측 앞쪽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여자는 수월문의 젊은 문주. 창천방에서 신예로 이름이 높다던… 금씨 아무개는 뒤편 쪽문쯤에서 검파를 쓰다듬는 중이고. 멀리서 다가오는 덩치는 산서귀가의 귀 아무개. 그리고 또…….’
목표들을 하나씩 확인해 나갔다. 살수가 된 느낌이었다.
공야정을 통해 미리 알아봤다. 온갖 방법으로 민가를 수탈하는 자들이라 했다.
수확된 곡물을 주기적으로 빼앗아가는 일은 예사였고, 민초들이 공납으로 준비한 식량을 귀신같이 빼돌려서는 이중으로 납세하게끔 만들었다.
허나 정황 증거에 불과했다. 보신경을 연마한 강호인은 결코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공야세가에서도 힘없는 민초들의 증언으로 흉수들을 추측할 따름이라 했다.
힘에 솔직해지는 세태. 흉년 강호의 실상이다.
“숭산에서 백팔나한진이 다시 한번 펼쳐졌대. 흐린 날이었는데, 구름이 크게 뚫렸다는 얘기가 있어. 등봉현의 향화객들이 그 자리에서 일제히 절을 올렸다고 하니 정말이겠지. 부처의 손바닥을 봤다더만.”
“황상께서 또 한 번 내려오신 건가?”
“글쎄. 천하가 흉흉하잖아. 어떤 괴력난신이 소림 승려들에게 격퇴당한 건지도 몰라.”
“신검단주가 암야전의 궁격(弓擊) 발사대 열 곳을 쓸어버렸다는 풍문은 들어봤나?”
“별세상 얘기를. 나는 엊그제 당인(唐寅)이란 화공이 그린 신선도를 구했어. 벽에 걸어놓고 보니 공기가 산뜻해지는 게… 명장의 작품이 맞더라고. 무공으로 치면 심검의 절세고수가 남긴 그림이야.”
“여유가 넘치는군. 조만간 구경하러 가지. 우리 장원은 소똥 냄새가 심해져서.”
“흉년에 소를 백 마리나 구했다며? 먹일 여물은 있나?”
“충분히.”
현천문주 검운비의 신분을 듣고서는 관심을 거둔 남녀들이었다.
주변의 이목이 정연신에게만 쏠린 게 아니었다. 명가들의 연회다.
폐쇄적으로 모여 앉은 채 접근을 불허하는 무리가 많았다. 크게 가진 자들의 모임에 일개 빈객의 자리는 없었다.
그만큼 화려한 술자리였다.
온갖 지역의 음식과 명주가 올라왔다.
항주에서 유명한 규화계 닭요리와 사천의 마파두부, 식초로 유명한 산서 특유의 버섯볶음도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가 안개마냥 주변을 휘감은 듯했다.
화산파 신선들의 검향(劍香)도 힘을 쓰지 못할 진미였다. 수십 명이 웃고 떠들었다.
공야정의 바람과 달리, 정연신은 그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얼굴과 몸태, 기파와 이름을 확인하는 걸로 족했다.
“수줍음이 많군. 보기 흉하다.”
머리 위에서 걸걸한 음성이 울렸다. 목소리 자체가 굉장히 컸다.
정연신은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들었다. 앞서 감지한 자였다.
산서귀가의 귀 아무개라고. 장대한 체구를 지닌 사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에 맺힌 표정이 흉흉했다.
“성이 검씨라 했나? 들은 적 없는 성씨인데, 가계도가 비천하기 때문일 터다. 근본이 없으니 공야 가문에 몸을 의탁하러 온 게지. 허면 그 고운 혀라도 부지런히 놀려야 하지 않겠나. 대공녀가 네게 바라는 일은 귀빈 응대일 테니까.”
몇몇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격조 높은 집안의 자제들은 깊은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무림인들이 모이면 으레 벌어지곤 하는 시비였다.
“근본….”
정연신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그쪽은 산적 출신이라 하던데.”
“…….”
이번에야말로 굉장히 많은 시선이 모여들었다.
굉천광도 귀일태는 공야 소가주, 살협과 더불어 비무대회의 우승이 유력한 자라 했다.
녹림 도법의 정화가 집대성된 철혼신도(鐵魂神刀)를 극성까지 연마한 인물이라고.
기마 돌격을 가해 오던 마적들 십여 명을 단칼에 베어버린 일화로 유명했다.
내려다보는 시선부터 위압적이었다. 사람을 올려다본 적이 좀처럼 없는 듯한 눈길.
정연신으로 말미암아 공야세가에 망신을 주겠다는 의도가 엿보였다.
그때.
정연신이 돌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출수했다.
발검은 없었다. 내뻗은 손에 실린 장력에 대기가 흐릿하게 휘어져 꺾였다. 귀일태의 옆쪽에서다.
안개가 형상을 갖추는 것마냥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혈귀의 등에서 핏물이 토악질처럼 터져 나왔다.
푸화확―!
“크아악!”
혈염교 혈사교검 특유의 검붉은 머리칼이 확 들쳐 올라갔다.
놈의 목표, 음식 그릇을 들고 조심스레 걸어가던 하인이 크게 놀라 주저앉았다.
“은신술인가? 기감을 곤두세워!”
“혈염교! 혈염교의 습격이다!”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일어났다. 병장기를 뽑는 소리와 공력의 충격파가 곳곳에서 폭발했다.
습격이 들통난 혈염교의 무인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쩌엉! 스아아악!
지축이 울려댔다. 한가롭던 대기가 먹먹해졌다. 쾌검을 익힌 자들이 먼저 피를 뿜어 올리고 쓰러져 균형을 잃었다.
찰나지간에 상황이 급박해졌다.
공야세가는 본래도 풍족하기로 유명한 곳인데, 흉년에 음식 냄새를 그렇게나 풍겨댔다.
비무대회를 맞이해 연회가 벌어진다는 풍문마저 지천에 알려진 판국이었다.
산서지부에서 굶주린 채 도망쳐 나왔다는 혈귀들이 노리고 있었을 만했다.
“오른쪽! 오른쪽 막으시오!”
“채찍이다! 편술을 익힌 놈이야! 호신강기의 고수 없나!”
“혈사교검이 다섯이나……!”
고수들이 대번에 응수하는 가운데 뭇 시종과 하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머릿수만큼이나 오합지졸이 많은 혈귀들이라지만, 민초들에게는 대적 불가의 요괴에 가깝다.
희생이 불가피했다.
정연신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는 고민하지 않았다.
사박.
전장을 크게 한 번 훑어본 직후에 디딘 걸음이었다.
발밑에서 은은한 빛무리가 연기처럼 피어오른 순간, 연회장에 커다란 별자리가 희미하게 그려졌다.
대기를 일그러뜨린 신형이 기다란 선을 그리며 다섯 번 꺾였다.
쩌어어어엉―!
검신으로 첫 번째 일격을 용케 막은 혈사교검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무지막지한 굉음이 연회장을 휩쓸었다. 놈은 거대한 화포에 얻어맞은 듯 피떡으로 화하여 벽면에 꽂혀 버렸다.
대낮에 흐리게 피어난 별자리 속에서.
콰드득! 푸확!
육신이 부서지고 핏물이 폭발했다. 다섯 번의 충격파가 한 번처럼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