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3
◈ 멸문지화 (2)
‘뭐지?’
얼른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영문 모를 시선이었지만 큰 의미는 두지 않았다.
‘종남파 고수들이 여기서 무공을 보여 줄 것도 아니고.’
직접 보면서 기도를 느껴 본 걸로 족했다.
도교 발원지 종남산의 선기는 과연 세속의 때에 찌든 정가장의 무인들과는 달랐다.
내공심법의 공능이 얼마나 현묘하면 청량한 느낌이 피부로 와닿을까 싶을 정도였다.
“고개를 드시오. 배분을 자랑하러 온 게 아니니.”
여전히 웃음기 섞인 여일신의 말. 사람들은 분분히 일어나 자세를 바로했다.
얼른 이마의 식은땀을 닦은 가주 정대명이 입을 열었다.
“원행을 오셨는데 결례를 범했습니다. 종남의 검선들을 세워두다니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가주를 따라 종남파 고수들이 걸음을 옮겼다.
여일신은 가솔들을 스쳐 가며 다시 한 번 정연신을 묘하게 바라보았다.
“날 보신 것 같은데.”
“네가 아니라 나겠지.”
뒤에서 투닥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저 고명한 종남파 장로가 누구를 어떻게 보든 무슨 상관인가. 제자로 들여 줄 것도 아닐 터인데.
정연신은 돌아섰다. 곧장 연무장으로 향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정가동공은 더 오를 데가 없는데.’
이제 무엇을 수련해야 하는가.
무공 하나를 대성하고 종남파 고수들의 기세를 대면하니 시야가 달라지는 듯했다.
성취욕이 거부감을 넘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검······. 이제 검을 수련해 볼까.’
제대로 된 검법으로 대성의 경지를 맛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정연신은 어릴 때 본 정종신검의 구결을 낱낱이 해체하며 연무장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가문은 떠들썩했으나 소년 하나가 있는 연무장은 더없이 고요했다.
몸통까지 검을 들어올린 중단세. 호흡은 잔잔했다.
정가동공으로 깊어진 숨결은 들숨 한 번에 구름 같은 충만함을 일으켰다.
그리고 날숨, 내쉬는 호흡은 대지를 쓸어내는 빗물처럼 잡념을 녹여 내렸다.
정연신은 무아에 이르렀다. 호흡 한 번으로 오롯이 검에 자신을 담은 것이다.
정종신검, 기화일령식(氣華溢翎式).
검이 움직였다.
세 가지 검의와 스물하나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정종신검은 장중했다.
종남 검공을 얕은 깊이나마 그대로 들여와 도교 현문정종 특유의 느낌이 묻어있다.
본산 무공이라면 정대하고도 현묘할 것이다. 정종신검은 정대하기만 했다.
부자연스러움. 속세의 칼잡이가 도사 흉내를 내는 격이다.
정연신은 생각 이전에 본능적으로 그리 느꼈다.
도문에서 내려온 세속의 검객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부와 공명이다.
앞길을 막는 자는 단칼에 죽이면 족하다.
깊이가 없는 검객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빠름이다. 검이 쾌속해야 할 것이다.
휘익!
검세가 변했다. 무게감 있게 휘둘리던 칼이 가벼워졌다.
기운이 새로운 의념을 따라 전신 혈도를 질주하고 있었다.
정가동공진기가 격하게 꿈틀거리며 온몸의 근육을 수축시킨다.
검법에 쾌검의 구결이 실리고, 자연스레 새로운 검로가 열렸다.
스아악!
대기를 찢어발기는 철검에 놀라 새소리로 흩어지는 밤공기.
정종신검의 어디에도 없는 일격이다. 완전히 새로운 검결이었다.
“하아.”
벅차오르는 충만감에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연신은 검파를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검세를 시작할 때는 정종신검의 파지법에 따라 다섯 손가락 모두 굳게 쥐고 있었는데, 지금은 엄지와 검지의 힘이 적당히 풀려 있었다.
이렇게 하는 거군.
“이게 쾌(快)구나.”
쾌검 구결을 스스로 깨닫고 검초 하나를 창시해 낸 소년은 몹시 들떴다.
실을 한 땀 한 땀 기우듯 인내심으로 완성한 심공인 정가동공과는 달랐다.
종남파 고수들을 보고 떠올린 단상 하나로 곧장 새로운 노리개를 만든 것이다.
“재밌다. 정말.”
막 얻은 쾌검결을 몇 번 더 펼쳐 보던 정연신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묵빛 비단이 깔린 듯 새까만 하늘.
온누리에 구름이 끼었는지 별은 물론 달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에 동공을 수련하려면 이제 자야겠지.’
뿌듯하게 미소 지은 그는 곧장 침소로 향했다.
정가동공으로 갈고 닦인 몸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씻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 소년은 곧장 잠들었다.
* * *
일찍 일어나 새벽 수련을 마친 정연신은 곧장 조찬장으로 향했다.
평소에는 하인을 시켜 홀로 아침을 먹었으나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가주는 언제까지 머무를지 알 수 없는 종남 고수들과 함께 식사를 할 것이 분명했다.
‘뻔뻔한 건 대수도 아니야.’
그들의 정명한 기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영감을 얻지 않았던가.
크나큰 성취를 맛본 소년은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가족 조찬 자리에 참석했다.
놀란 눈으로 그를 흘겨보는 가솔들에게는 관심없다.
정연신은 상석에 앉은 종남파 인물들에게 시선을 두었다.
“큼. 왔으면 앉거라.”
헛기침을 한 가주 정대명이 말했다.
고명한 무인들 앞에서 자식을 타박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정연신이 노린 바가 그것이었다.
식사가 시작됐다.
소년은 티 나지 않게 노력하며 여일신을 비롯한 종남 문인들을 흘깃흘깃 바라보았다.
어떤 공부를 쌓아야 그들이 내비치는 여일한 기도를 가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사람의 기운이란 감정에 따라 성질이 다를진대, 종남산 정기를 그대로 가져온 듯 청명한 기세가 신기했던 탓이다.
그러다 명족 장로 여일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가주의 영식께서 지닌 안광이 굉장히 맑구려. 참으로 총명해 보이오.”
“흠······! 정말 송구합니다. 셋째의 수양이 많이 부족하여······.”
기겁한 정대명이 몸을 살짝 뒤로 빼고는 정연신에게 눈을 부라렸다.
소년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소채를 건져 먹었다.
기이하게도 대놓고 인상을 쓰는 정대명보다는 여일신의 은은한 웃음이 더욱 부담스러웠다.
뭔가 다르다.
‘맑은 게 다가 아니야. 짙어. 저런 걸 극강의 공력이라고 하나?’
체내에 응집된 진기가 몸 바깥으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경지는 처음 보았다.
보이지 않아도 선명히 느껴지는 강력함이다.
내공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는지 견문의 한계를 한차례 부순 느낌이었다.
‘정가동공이 끝이 아니야. 더 발전할 수 있겠어.’
입으로 들어가던 소채가 멈췄다.
새로운 무공의 단초를 엿보았다.
그러고 보면 정연신이 지금껏 정가동공으로 연성한 건 자신의 육체였다.
아둔하게도 그 다음이 있음을 몰랐던 것이다.
모두의 무관심과 은은한 적대감 속에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몸은 그릇이구나. 저런 기도를 가지려면 기운을 연성해야 해.’
해 왔던 게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오롯이 단련에 집중하여 진기가 돌아다니는 터를 완전히 다졌다.
선정후기(先精後氣). 그릇을 먼저 닦고 물을 채운다.
이제 기운을 부으면 되는 것이다.
정연신은 지금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지극한 이치를 완전히 깨우쳤다.
정가동공은 더 나아갈 수 있다.
다시 한 번 진화하여 새로운 무공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이번엔 진짜 심공이구나.’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온갖 영감의 단상들이 벼락처럼 뇌리에 꽂히고 있었다.
토납법으로 천지간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무수한 방법들이 뒤엉켜 얼개를 짜올렸다.
‘정가동공 다음은 뭐라고 할까.’
순간적으로 소년의 눈이 하늘색으로 빛났지만, 이를 목도한 이는 종남의 여일신뿐이었다.
이질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에 의구심이 피어났다.
* * *
“생각보다 터가 좋은 곳입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만한 지기(地氣)라면 패검종이 탐할 만합니다.”
장로의 수발을 들기 위해 동행한 종남파 제자 두 사람이었다.
여일신을 비롯한 세 무인은 정가장 장주가 내어준 귀빈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이 구파의 제자임을 의식한 듯 정갈하게 꾸민 방과 은은한 차향 덕에 나름의 운치가 흘렀다.
“그들이 당도하는 것은 확실해. 역공을 가한다는 계획은 좋네만······. 역시 이 가문의 희생이 저어되는군.”
여일신이 말했다.
“기감은 상시로 열어 두고 있습니다.”
“그들이 담을 넘기 전에 나서서 격파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이 서른을 넘긴 그들의 얼굴에 자신감이 흘렀다.
사문의 제자들이 발하는 투기를 느낀 여일신은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천하 구파의 종남 정예들이다.
만용이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사질로 받을 아이는 마음에 들던가?”
“잘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두 사람은 담백한 반응을 보였다.
이백 년을 넘게 살아오다 보면 초면인 인물이라 해도 그 몸가짐과 언행으로 말미암아 성품과 자질을 짐작할 수 있음에, 여일신이 보기에도 정가장 둘째에게 아주 비범한 면은 없었다.
“오히려 셋째라는 아이의 눈이 견정했습니다.”
“저 또한 그리 보았습니다.”
“내가 일견하기에도 보통의 그릇은 아닐세. 장차 이 가문을 대표하는 검으로 명성을 떨칠지도 모르지. 본산 기명제자가 되면 가업을 이을 수 없으니, 가주가 일부러 둘째를 보내는 게 아니겠나.”
여일신의 말은 추측이었으나 어조는 확신에 가까웠다. 두 제자의 얼굴에 놀람이 어렸다.
“그 정도란 말입니까?”
“허어. 하면 역시 셋째를 본산에 들이는 게······.”
“법도에 어긋나는 일. 본문은 이미 기명제자를 정했네. 설령 지금 번복한다 해도 가주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대종남의 행사가 그렇듯 가벼워서야.”
대장로의 나지막한 호통에 제자들이 머리를 숙였다.
자신들의 언행이 가벼웠노라고 성찰하는 그들을 두고, 여일신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묘한 아이가 맞다.’
줄곧 기이한 기질이 보였다.
명족 사이에서 ‘대자연의 사랑을 받는다’라 일컬어지는 종류의 자질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여일신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이 아이를 감싸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것과는 궤가 달랐다.
‘천지간에 그 아이가 유독 뚜렷한 듯 보였지.’
그녀와 같은 극강의 내가고수들은 하늘과 교통한다.
정수리의 백회혈을 뚫은 진기는 실로 오묘해, 상단전을 통해 예지와도 같은 공능을 선사할 때가 종종 찾아왔다.
여일신이 이만큼 이질감을 느꼈다? 분명 무언가 범상치 않은 아이가 맞다.
하지만 지금 마음을 쓸 계제는 아니었다.
“패검종은 대적(大敵)일세. 방심하지 말고 검기를 벼리게.”
* * *
정연신은 조찬을 마친 후 총관의 방문을 받았다. 용무는 짐작할 만했다.
점잖은 얼굴이 난감하다는 기색을 띤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총관.”
“삼공자.”
“내가 잘못한 게 있는지 모르겠군.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이 들어.”
“삼공자.”
“태어날 때 어머니의 기운이 다했다? 그게 가문의 귀빈들에게 얼굴도 못 비출 이유인가?”
“······장주 님의 뜻입니다.”
총관이 대답했다. 힘겨워 보이는 얼굴을 본 정연신은 입을 다물었다.
총관은 좋은 사람이다.
자신의 의사와 별개로 장주이자 가주인 정대명의 뜻에 따라 가내 대소사를 총괄하는 손발인 것이었다.
이럴 때면 본 적도 없는 외가가 그리워지곤 했다.
하나 정가장에서 보내 주지 않았다.
정연신의 외가는 몹시 강력한 세력에 발을 걸친 곳이다.
그의 친모가 눈을 감은 뒤로 외손주를 찾은 적이 없으나, 정연신을 홀대하는 식솔들은 늘 경계하고 껄끄러워 했다.
“미안해.”
소년이 말했다. 총관의 얼굴에 잠시나마 안타까움이 스쳤다.
“···도련님 연무장에 수련 자재가 부족한 걸로 압니다. 새로 구비해 두겠습니다.”
“고마워. 기다릴게.”
정연신은 뒤돌아서며 자책했다.
종남파의 고수들을 볼 때마다 깨우침을 얻은 덕에 치기 어린 조바심을 드러낸 것이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심공이나 엮어 보자.’
정가동공의 구결에 따라 호흡하며 마음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