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322
◈ 경천
* * *
태원.
광활한 대도시다. 살문의 본단이 숨어있다고 했다.
모용세가와 심무련이 그들에게서 천마의 유산을 약탈하고자 한다. 십수 년 전에 벌어진 천마총의 난 때 미처 수확하지 못한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다.
정연신과 무관한 일이다. 민초와 동료가 해를 입지 않으면 된다.
적들이 자신을 어찌 여기든 상관없다. 그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른이기에.
‘백 명쯤 남았어.’
정연신은 자신의 수양이 아주 깊다고 생각했다.
그를 변수 따위로 취급하던 심무련의 비익혈존이 다소 거슬릴 때도, 모용 소가주가 법력옥 운운하던 모습이 무척 아니꼬울 때도 그랬다.
도발 몇 마디에 초식의 정교함을 잃어버리던 원숭이들과 달랐다.
그의 출수는 냉정하다. 어느 때고 전력을 드러낸다. 실로 격이 다른 마음 수양을 방증하는 일이었다.
이 순간 몸이 다소 지쳤다 해도, 명정단 한 알이면 만전에 준하는 무위를 회복하는 것이다.
달칵.
목함을 열자마자 맑은 냄새가 피어올랐다. 절간에서 피우는 향내였다.
둥글게 뭉쳐진 흰색 단약 하나가 담겨 있다. 소림 비전의 내상약, 명정단이었다.
효능이 천하에서 가장 좋기로 유명했다. 한 번 먹어본 입장에서 정연신 역시 공감하는 바였다.
탁.
소림의 갈혼(褐鼲:털옷 다람쥐), 정연신에게 명정단을 전달한 영물이 그의 어깨를 풀쩍 밟고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주인인 원적대사는 어디에 있는 걸까. 어지간한 사건은 소림 사대금강의 승포에 흠집조차 내지 못할 텐데.
“꼭꼭 씹어 드시오.”
검을 내려 쥔 채 곁으로 다가온 헌원창이 말했다.
그의 뒷머리로 흘러내린 영웅건의 매듭 두 자락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규칙적으로 너울지는 모양새였다.
몸에서 번져 나오는 공력 파동이 심상치 않은 까닭이다. 평소와 크게 달랐다.
‘공력이 전보다 훨씬 강해졌어.’
정연신은 생각했다.
살갗을 스치는 기파의 밀도가 굉장히 짙다. 입황신협의 축기량이 두 배 이상으로 증진됐다.
아니.
이 정도면 거의 세 배 어림에 가깝다.
단 일 합을 중시하는 살수 무공에 실린다면 누구라도 위협할 만한 내가진기. 공력 대결로는 태염룡에게도 버틸 만하겠다 싶을 정도다.
여러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입황신협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원적대사에게 어떤 사정이 생긴 건지.
허나 물을 상황이 아니다.
정연신은 명정단을 입에 넣으면서 체내를 관조했다.
실로 즉각적이었다. 단약을 씹어 삼키자마자 효능이 퍼졌다.
명족 비술과 소림 약왕당의 의술이 조합된 보물이다. 전신 경혈에서 청아한 향기가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신비로운 공능이 온몸으로 뿌리를 내린다. 혈도의 탄력을 회복시키고 온몸 세맥을 다시금 단단하게 조이는 느낌이 엄청났다.
백미려와 청명을 비롯한 마광익 선배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늘 손이 부족한 입황성의 사정 탓에 개별 임무를 나가서도 정연신을 염려할 사람들.
이제 됐다. 걱정을 시키지 않을 수 있겠다.
“안 돼! 시간을 주지 마!”
“전원 산개! 마광익주의 회복을 막아라!”
“살검을 쓰는 놈은 무시해!”
쿵! 스아악!
소가주의 죽음에 얼어붙어 있던 모용세가의 고수들이 검을 고쳐 쥐고 도약해 온다.
곳곳에서 일어난 공력 파동이 땅을 거칠게 밀어냈다. 스스로 광풍을 일으킬 수 있는 정예 검수들이었다.
무공 군세와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지휘하는 자를 잃어도 곧장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군세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힘든 자들. 수백 년을 이어온 무공 씨족이자 명문가의 무림인들이다.
정연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몸 안의 약효를 최대한 퍼뜨리는 데 집중했다. 천천히 발을 옮기면서.
당대 마광익주는 동공의 달인이다. 어지간해서는 가부좌를 취할 필요가 없다.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면서 운기요상을 행하는 게 가능했다.
저벅.
그의 신공급 호신강기가 앞장섰다. 그야말로 살수처럼 호리호리하게 닦인 몸으로, 칼날에 유달리 짙은 음영이 새겨진 입황검을 손에 든 채였다.
“대주, 저놈들이 노리는 살문의 본단에 백묘와 양귀비쟁이가 있소. 눈치를 보아하니 본단의 위치를 알아차린 모양이외다.
쥐덫을 놓은 것처럼 잠잠히 있더니, 대주가 오자마자 개떼처럼 나선 걸 보면 말이오.”
밀폐된 본단에서 대주 같은 강자와 보물을 두고 다투는 건 좀 그렇지―
뒷말을 잇는 헌원창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묻어나왔다.
대주의 호법을 서는 상황이 즐거운 걸까. 모용 소가주를 죽일 때부터 시종일관 시원스러운 언행을 보여 준다.
“바로 합류하시겠소?”
그가 물었다.
정연신은 입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날숨을 한 번 끊어 쉬는 걸로 충분했다. 입황신협의 감각은 마광익에서 손꼽힐 만큼 예민한 편이었다.
검을 들어 올리는 헌원창의 뒷모습으로부터 짧은 물음이 들려왔다.
“오래 걸리지 않겠지. 대주의 내공 운용력이면.”
구태여 할 필요가 없는 말.
입황성 무인들 특유의 화법이다. 임무를 수행할 때 중의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정연신은 바로 알아들었다. 전음을 보낼 여력이 없다는 뜻이고, 운기요상이 오래 걸리면 곤란한 상황이란 의미다. 급격한 공력 증진과 관련 있을 터였다.
‘집중하고 있구나.’
해야 할 일이 정리됐다.
심각한 내상을 회복하는 게 먼저다. 이후에 헌원창의 인도를 따라 살문 본단에 당도한다.
살문에 어떤 보물이 있든 상관없다. 동료들과 합류하는 게 최우선이니까.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정연신도, 헌원창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부딪쳤다. 눈앞을 덮쳐 오던 모용세가의 검수들과.
스아악―!
쇠붙이들끼리 닿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 순간 정면에서 달려들던 검객 셋의 목만 떨어진다.
검격이 지나간 뒤로 소리 없이 불어오는 역풍과 함께였다.
살수 무공이다. 충돌을 지양한다.
―저…… 혹시 이름 높은 세가의 자제이시오?
입황시 때 어린 정연신의 쾌검을 보고 놀라던 헌원창은 없다. 굉장한 쾌검을 내치면서 길을 연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달려드는 모용세가 검수들의 옷자락 소리만 요란했다.
스악! 쿵!
허공에 무수한 검흔이 새겨진다. 헌원창이 일검을 내칠 때마다 못해도 두 사람이 쓰러졌다.
입황대협의 검격 경파는 개기일식을 연상케 했다.
광예결에 살수 비기가 녹아 있다. 흐린 백광 속에 거뭇거뭇한 암살자의 경파가 묻어나왔다.
희끄무레한 경파의 기류를 눈속임으로 쓴다. 그 너머에서 기척 없는 칼질이 싸늘하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
솟구치는 핏물.
머리를 날리는 검의 잔상.
음험한 검법을 펼치고 있는데도 전진이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호쾌해 보였다. 영웅건의 사신에게 호위를 받는 귀공자는 그저 느릿하게 다리를 옮기기만 했다.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포위진 속에서였다.
존귀한 자.
겁도 없이 도시의 골목골목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민 문사들이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봤다. 강호의 호사가라도 되는 것처럼.
스아악―!
격렬히 튀어 오른 돌조각과 흙먼지 속에서 사람의 목이 단칼에 갈라진다.
머리 잃은 시체들로 이루어지는 길.
헌원창이 입황검으로 그려내는 광경은 명백히 상리를 벗어났다. 일 합 승부를 포위망 속에서 끊임없이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순간순간마다 칼끝에 목숨을 걸었다. 살검이 정면대결에서 시전되는데도 제대로 받아내는 자가 드문 이유였다.
애초에 모용명준이 후계권을 공고히 다지고자 키워낸 방계 무리였으니, 모용세가의 최정예라 할 수는 없다. 허나 고수로 보기 힘든 자들은 아니었다.
“살법을 쓰는군. 섣불리 접근하지 마.”
“유성검을 익힌 형제들은 빠지시오! 강검으로는 안 되오! 은하사류검(銀河絲流劍)의 달인들이 먼저요!”
놈들도 머리를 썼다. 무공의 상성을 완전히 파악했다.
타다닥.
검진을 이룬 고수들이 일사불란하게 교체된다. 가전무공의 이름을 대놓고 말한 이에게 누구도 질책하지 않았다.
죽은 소가주의 정체가 마광익주에게 밝혀진 이상, 살인멸구가 답이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렇게 포위망의 전면에 나선 십수 명의 칼은 굉장히 얇았다. 가볍게 늘어뜨린 검신의 폭마저 좁다. 협봉검에 가까운 형태였다. 환검이나 쾌검의 달인들인 듯했다.
묵묵히 걷던 정연신의 다리가 멈칫한다. 헌원창의 안위를 염려해서다.
허나 입황대협은 어깨만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이어서 그대로 걸음을 옮기며 검을 비스듬히 올려 치는데, 큼지막한 팔 궤적에서 어떤 주저함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쩡!
최초의 충돌음이었다. 교차된 두 자루의 검에 막혔다.
하얀 무복을 걸친 모용세가의 검객 둘이 무미건조한 눈으로 헌원창을 바라봤다. 그들은 짧은 순간 시간차를 두고 살법 기예를 받아냈다.
표적이 된 검객이 먼저 헌원창의 입황검에 칼을 갖다 댔고, 그 검력을 감당하고자 또 다른 고수가 쾌검으로 밑을 받친 것이다.
“근본 없는 검법을 쓰는군.”
왼쪽의 검객이 말했다. 헌원창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극찬을.”
대적하기 죽을 맛이란 얘기 아닌가― 헌원창이 놈의 어조를 그대로 따라 했다. 마주한 검객들의 눈빛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스가각― 쩡!
호위하는 자와 죽이려는 무리의 충돌이 이어졌다.
어지럽게 얽힌 검로들 속에서 검객 두 사람의 목이 먼저 잘려 나갔다. 헌원창의 몸에서도 피가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런 싸움 방식은 입황대협과 어울리지 않았다. 본래 살수의 검은 불시에 기습할 때 위력을 발휘한다.
지금 보이는 헌원창의 검법은 그가 검동 시절에 익힌 투법과 광예결, 살검을 한데 녹인 기예였다. 과장해서 근본 없다는 말을 들을 만했다.
“자잘한 상처요!”
그가 기합처럼 외쳤다. 정연신이 요상을 그만두고 끼어들까 저어한 탓이다.
대주를 아끼는 마음 탓만은 아닌 게, 사면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최선책이라 할 만한 건 연화나타의 현현뿐이었다.
정연신은 입황대협의 뜻을 받아들였다.
저벅.
개입하지 않고 회복에 집중하면서 걸었다. 고작 이 각 정도에 불과한 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도심의 외곽 가까이, 분지처럼 푹 꺼진 황무지에 들어설 때까지도 그랬다.
“아직은 입구의 진법을 풀지 못했을 거요! 주변에서 알짱거리는 놈들의 기척만 봐도 알 것 같소!”
헌원창이 다소 쉰 목소리로 외쳤다. 인파로 이루어진 칼 숲이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다 말고 갈라지는 와중이었다.
목적지에 도달했다.
황무지의 벼랑 아래, 절벽으로 둘러싸인 분지였다.
후우우―
굉장히 건조한 흙바람이 그들을 스쳤다. 귀신의 울음 같은 소리가 났다.
“하늘이 열렸을 때 일어난 싸움의 여파라 했소.”
헌원창이 거친 숨을 삼키며 말했다. 멀쩡함을 가장하고자 하는 모습이 다소 어설픈데, 두 사람을 둘러싸고 절벽까지 내려온 적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 듯했다.
모용세가의 검객들.
민무늬 가면을 쓴 채 온몸에 두른 기도가 하나같이 엄중했다.
머릿수가 많이 줄었다. 마흔 명 정도였다.
그때.
사박.
포위망을 헤치고 소뿔이 새겨진 우마왕의 가면을 쓴 자가 걸어 나왔다. 놀랍도록 가벼운 발걸음이 보신경의 경지를 방증하고 있었다.
“네 말이 맞다.”
가면을 쓴 검객이 중년의 목소리로 말했다.
백색 장포의 밑단을 가죽신까지 늘어뜨린 채다.
육 척을 훌쩍 넘기는 거구에서 보이지 않는 검기가 흘러나와 땅을 저미고 있다. 누가 봐도 초상승의 고수였다.
“입구는 찾았지. 저기 아닌가.”
그가 절벽 한쪽을 가리켰다. 포위망 너머로 움푹 패인 자리였다.
웬 문사풍의 남녀 열 명이 그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정연신과 헌원창을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몸가짐. 입구를 막고 있는 진법의 축을 찾는 듯했다.
“낯짝들이 크게 변하지 않았군. 어릴 적 내 몸에 침을 꽂고 핏줄을 헤집던 자들이오.”
헌원창이 이를 갈았다. 순간 정연신의 투명한 시선이 그들을 훑고 지나갔다.
우마왕 검객은 손을 내렸다.
사락.
그의 새하얀 소맷자락이 허리춤을 스쳤다.
작은 몸짓조차 고아했다. 명문가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무림 호족의 격조가 묻어나왔다.
하얀 복대에 매인 흑색 보검도 마찬가지로 굉장히 귀해 보였다. 가면을 쓴 탓에 조금쯤 신비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가 가벼운 걸음으로 나서자마자 모용세가의 고수들이 고고한 자세를 잃고 움츠러든 참이었다. 존귀한 가문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 만했다.
죽어 나간 가문의 고수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여기서는 이름을 말할 수 있지. 검을 나누기 전에 통성명이나 할까. 이 몸은…….”
“대례검 모용기황!”
헌원창이 이를 드러내며 외쳤다.
“이 씹어먹을 놈이 드디어 나섰군!”
“…….”
우마왕 가면을 검객은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모용세가의 대례검.
천하의 강호 상층부에서 모르는 자가 드문 인물이다. 가주 다음가는 검객이라 했다.
검 한 자루로 쌓은 명성이 구주에 두루 닿았다. 험한 요녕 땅에서 염라대왕으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소림의 내상약을 먹었겠지. 네 소문의 진위가 궁금했다.”
모용기황이 헌원창의 어깨 너머로 턱짓했다.
“출수하겠다.”
통보의 방향이 명백했다. 우두커니 선 마광익주에게 향한 얘기였다.
천하에 드문 일대 격돌을 예고하는 말.
좌중이 숨을 죽였다. 투명하게 불어오던 바람마저 때마침 멈췄다.
정연신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헌원 형.”
“말씀하시오. 뭣하면 내가 해도…….”
헌원창이 피에 젖은 옷소매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허나 그의 영웅건 뒤꽁무니는 어느새 힘없이 내려앉아 있었다. 공력을 증진시킨 수법의 발동 시간이 끝난 듯했다. 종극뢰와 유사한 기예로 보였다.
“주변에서 헌원 형과 비슷한 기척이 느껴지는데.”
“참으로 면목이 없구려. 대주를 어찌해 보려는 노망난 늙은이들이오. 문하 제자를 생각해 주는 극소수의 원로들은 진작에 본문으로 들어갔을 거요. 아니면 다른 데서 제자들을 탈출시키고 있거나…….”
헌원창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스앙―!
돌연 모용기황이 발검한 것이다.
“마광익주. 싸움이 끝나면 내 얼굴을 보여 주마. 대적의 생김새는 알고 가야 할 것 아니냐.”
어울리지 않는 너스레가 울린 뒤.
그의 손끝에서 엄청나게 두꺼운 검광이 꼬리를 물고 번뜩였다. 동시에 하얗게 솟구친 검격 발경이 완전히 유형화되어 허공을 격했다.
순간적으로 대기를 찢어대는 소리가 무지막지하다. 숫제 범선의 돛대처럼 거대한 선을 그리면서 짓쳐들어오는 경파의 검.
동시에 흑색 피풍의를 두른 다섯 노인이 높은 절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거꾸로 내린 검극이 전부 정연신의 머리를 향해 있다.
성문 앞에서 어떤 노파에게 내친 반격에 대한 보복일까. 모용기황이 참격을 뻗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위에서 활공해 왔다.
찰나의 간격.
평화로운 쪽은 건너편에서 진법을 살피는 남녀들뿐이었다.
정연신은 눈을 감았다.
그들보다 앞선 시간축에서 구결 한 줄기를 되새겼다.
머리의 상단전이 백열했다. 백회혈에서 일어난 빛줄기들이 급속도로 하나의 형상을 그리더니, 이내 부채의 형태를 자아내면서 허리춤에 걸린 북명검의 심상과 겹쳐졌다.
정연신의 뇌리에 서늘한 질감이 일어났다.
검(劍).
‘가라.’
속으로 뇌까렸다.
동시에 검로 한 줄기가 머릿속에서 일직선으로 질주했다.
상상으로 그치지 않았다. 허리춤에서 거세게 일어난 파공음에 눈을 뜨자마자 공간이 수평으로 갈라졌다.
창백한 선이 눈앞으로 짓쳐 들던 검격 경파와 모용기황의 목을 지나서 치솟았고, 찰나에 빛살 같은 원을 그린 뒤 정연신의 검집에 쾅―! 소리를 내며 꽂혔다.
쿵! 쿠구궁!
머리를 잃은 시체 열여섯이 쓰러지고 떨어져 내린다. 모용기황과 원로 살수들, 진법에 눈길을 쏟던 무공 학사들의 목덜미 절단면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
포위망을 구성한 모용세가의 고수들이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저벅.
정연신의 발걸음이 우마왕 가면을 쓴 머리통을 지나쳤다. 네 맨얼굴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