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332
◈ 조손 (5)
* * *
성휘대검군 모용중락과 연화나타 정연신.
제각기 검을 들고 출수한 직후였다. 고아한 백색 의복과 칠흑으로 새까만 장포가 양쪽으로 대비됐다.
쩌엉!
날카로운 흰색의 빛줄기들을 온몸에 휘감다시피 했다. 모든 게 검격의 잔영이다. 두 검객이 부딪칠 때마다 대기에 새겨지는 검로가 인세를 벗어난 무언가로 다가왔다.
마치 연기처럼 나타나자마자 사라지는 까닭에, 선계의 신선들이 입는 옷자락으로 비치기도 했다.
반면에 휘몰아치는 충격파는 무시무시하다. 경천동지의 대결이었다.
입황성의 명문가 출신이 보기에도 그랬다.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견문이 넓어지는 듯했다.
“화아…….”
패협이 우뚝 서 있는 비탈길 쪽.
흑백이 분명한 신소빈의 동그란 눈에 힘이 들어갔다. 초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궤적을 제대로 좇기 힘들다 해도 뇌리에 무언가가 새겨지고 있다. 신공을 달인지경으로 연마한 자들의 영성이 부딪치는 까닭이다.
흑색 승단식에서 대주들의 무위를 익히 봤음에도, 모용가주와 정 선배가 만들어내는 광경은 극도로 고절했다. 얼핏 보기에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다.
민생을 크게 보위하여 입황신가의 영명을 드높이고자 했던 소녀에게, 정연신의 청색 승단을 봤던 후배에게 새삼스러운 경악이 스몄다.
“광화검류를 저렇게까지나…….”
섬예 일맥 수행자의 흰색 무복이 경력의 여파와 함께 팔락거린다.
두 강자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기이하게 무거웠다. 그들이 연성한 공부의 격이 다른 까닭일 것이다. 깊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모용가주에게서는 느껴져야 마땅한 성취다. 허나 입황성에서 가장 어린 흑색은 다르다. 누구라도 이적이라 얘기할 만했다.
‘느껴지는 투로가 완벽해. 검법만 수십 년을 고련한 것 같아.’
상대가 팔대세가주이기에 두드러지는 걸까.
그녀는 자신이 떠받드는 동년배 대종사에게서 벽을 느끼지 않는다. 정 선배를 문파의 개파조사쯤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인연을 맺는 데 서투른 성품에, 다소 오만하면서도 어딘가 어설픈 기질까지 친근하게 받아들인 지 오래였다.
허나 이따금 서로 다른 시간을 걷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것은 어떤 괴리감에 가까웠다. 자질의 격차로만 설명되는 게 아니었다.
신소빈은 생각했다. 마광익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저게 광화검류에 근본을 둔 검법이 맞나? 검뢰섬릉식… 그러고 보면 그간에 여유가 없어 몇 번 받아보지 못했는데. 대주의 지도 대련이 뜸했지.”
“어린 대주가 검법을 신공으로 탈바꿈시킨 지가 언제냐. 네 눈이 혀와 같았다면 진작에 알아봤을 거다.”
급박한 와중에 여유를 가장한 말들. 헌원창과 태염룡이다.
저벅.
두 사람이 그녀의 앞을 슬쩍 가린다. 몰아쳐 오는 경파의 폭풍이 한결 옅어졌다. 신소빈에게 몹시 익숙한 광예결의 기파가 바람을 풀어 준 것이다.
늘 든든하면서도 조금쯤 미덥지 못한 선배들은, 가만히 보면 마광익 내에서도 광예결의 조예가 특별히 깊은 편이었다.
“양귀비 선배는 왜 그리 열심히 익히죠?”
“…음?”
콰아아아아앙!
대답이 늦었다. 굉음과 함께 공터에서 날아간 정연신을 따라, 태염룡의 고개도 재빠르게 돌아갔다.
격전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양귀비를 우물거리는 입매만 변함없이 움직여댔다.
신소빈은 타박하지 않았다. 그녀도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쿠구궁―
두 강자가 딛고 있던 벼랑이 무너져 내린다. 대주가 격이 다른 상대를 홀로 대적하고 있었다.
심무련주의 팔을 뽑아버린 불가해의 본성 선배는 분명히 엄청난 우군이었으나, 지금 팔짱을 낀 품새에서는 오연한 기질만 묻어나왔다.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을 기세였다.
몹시 중대한 순간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대문파 수장급이 엮인 임무조차 감당해낼 개세 전력이 태동하기 직전이라고.
‘너무 이른 건 아닐까?’
신소빈은 그가 대주와 나눈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 생사결을 성취의 발판으로 삼을 셈이다. 일대일 격전에 개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초조함을 삭여야 했다.
그래서 입술을 달싹였다. 구순술로 재빠르게 심중의 말을 내뱉었다.
“광예결 말이에요. 황보세가의 무공도 어지간한 신공에 준하잖아요.”
“…본 공자쯤 되는 자질이면, 좋은 무공을 많이 익힐수록 득이 되지. 견문을 넓히는 게 곧 무위의 상승을 가져오는 경지라서 그래. 이래 봬도 삼화취정이 머지않았거든.”
“양귀비 선배의 자질이래 봤자 대주님 가죽신이나 신겨 줄 정도 아닌가요? 발끝을 따라갈까 말까 한 정도요.”
“하수에게 들을 얘기는 아닌 듯싶군. 여하간 광예결은 연성하는 재미가 있단 말이지. 비급에 쓰인 투로는 하난데, 한결 격 높은 기법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아. 너희한테는 별달리 기대를 안 한다는 것마냥 감춰둔 걸 찾는 맛이 제법이지. 그런 걸 갖고 놀다 나온 게 염강이고.”
“만류귀종이라 했어요. 한 우물만 파도 부족하지 않나요?”
“뭐든 쉽게 질려서 그래. 무(武)의 그릇이 큰 만큼 워낙 변덕스러우니까. 저기 저 괴력난신, 성휘대검군은 모용세가의 열아홉 검법을 전부 익혔을걸? 무공을 증진시키는 데 수단 방법 안 가리는 인물이니까. 알게 모르게 연나라 왕족 혈통에 한이 맺혔다는 풍문도 있고.”
“…….”
“여하간… 너는 못 느끼겠지만, 저 괴물은 검만 쓰는데도 대주보다 여유로워 보이거든. 깊이가 달라.”
태염룡이 한쪽 발을 정신 산만하게 까딱거렸다. 반대편의 헌원창은 다소 굳은 어깨를 측면으로 튼 지 오래였다.
정연신이 절벽의 옆면을 평지마냥 디디며 질주한 방향이었다.
“기파의 무게가 전부 제각각이오. 하나하나 헤아리기 힘들지만… 강유(剛柔)와 쾌(快)를 두루 겸비한 게 분명하오. 그것도 절세 경지로.”
“애초에 우습고 수치스러운 일이야. 모용가주쯤 되는 위치와 연배로 우리 대주와 진지하게 검을 섞는 게.”
“어찌 되리라고 보는 거요?”
“대주의 무공은 강검과 속공 일변도지. 명가에서 배출한 절세 검객에게는 통하지 않을지도 몰라. 단기 결전의 무공은 동격의 고수조차 일격에 참살할 만한 가능성을 지닌 대신에… 장기전과 반격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지. 원창아, 내가 신호하면 이 몸을 힘껏 던져라. 본가의 여조천왕경(麗藻天王經)이면 대주에게 한 수는 벌어줄 수 있을 거다.”
그때.
콰아아아앙!
측면 절벽에서 모용중락과 정연신의 몸이 거대한 빛에 집어삼켜졌다.
또 다른 태양이 뜬 듯했다. 모용가주의 경파로 이루어진 구체가 불현듯 현현하여 햇볕을 튕겨냈다. 신묘한 기질이 느껴지는 무언가였다.
절세 경지에 이르면 무(武)와 술(術)의 경계가 희미해진다더니, 언뜻 보기에는 술법 무공으로 펼친 진법 결계로 보였다.
“원창아!”
태염룡이 외친 순간.
세 사람의 움직임이 한꺼번에 멎었다. 압도적인 기운이 그들을 옭아맨 까닭이다. 순간 점혈이라도 당한 듯했다.
“진정으로 하늘이 내린 기재는.”
말없이 서 있던 마연적이 입을 뗐다. 팔짱을 풀지 않은 채였다.
“듣지 못한 것을 익히고, 겪어 보지 않은 것을 안다. 용을 먹는 금시조는 배우지 않고도 하늘을 향해 날개를 떨치는 법이다. 헌데 눈앞에 이무기가 있다면 어찌 되겠느냐.”
마광익 세 사람은 듣지 않았다. 그들의 몸에서 일어난 공력 파동이 대기를 날카롭게 쓸어댔다.
허나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주변에서 자리를 지키던 살문의 인사들, 온갖 신분을 지닌 태원의 명사들이 숨을 죽였다.
* * *
이백삼십 합.
정연신은 모용가주와 나눈 초식을 헤아렸다.
뒤로 몰리기까지 그렇게나 많은 합이 있었건만, 정작 실제로 흐른 시간은 일 각도 되지 않았다. 모든 검초가 빛살 같은 쾌검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반 토막 검으로 펼치는 검뢰섬릉식은 여전히 강력했다.
허나 천변만화하는 유성검을 너끈히 받아내기는 힘들었다. 시화무극수로는 모용가주가 아니라 절벽만 부쉈다.
찰나마다 선택의 연속이었다.
종극뢰와 선룡이화결은 겸용되지 않는다. 둘 모두 몸의 한계를 깨부수는 절기인 까닭이다. 동시 시전이 불가능했다.
무당파의 양의심공 같은 신공절학이 있다면 몰라도, 내공 운용의 극한을 내달리는 기법을 함께 쓸 수는 없었다.
힘이 필요할 때는 종극뢰를, 반응 속도가 중요한 순간에는 선룡이화결을 시전했다.
그 와중에.
모용가주는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토막 난 북명검을 향해 만천화우를 펼치는 것도, 어검 기예로 칼과 마음을 합치시키는 것도 노회한 술수로 차단했다.
거리를 둬야 하는 술법무공을 익히고도 근접해 왔던 제갈가주와 달랐다. 성휘대검군은 절대 거리를 내주지 않고 절세 검법으로 정연신을 몰아쳐 왔다.
주변의 공기가 극한까지 팽팽해졌다.
그들 사이를 거울 부스러기 같은 형태로 배회하는 경력의 파편들. 모든 게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했다. 싸움이 절정에 이르렀다.
‘충격이 너무 강해. 검격 경파를 전부 내 쪽으로 밀어붙였어.’
상대는 검의 달인이다.
한 호흡을 수백으로 쪼갠 시간 속에서, 정연신은 몸을 가누고자 애썼다. 눈앞의 모용중락이 희끄무레한 일검을 가한 직후였다.
신검을 부러뜨릴 수 있는 건 신공밖에 없다. 신공 격 호신강기도 갖추지 못한 상태다. 북명검을 동강 낸 검격이라면 당장 그의 목을 베어낼 수도 있다.
우웅.
이백삼십일 합째.
“네 검재에 질렸다. 여기까지 하자꾸나.”
돌연, 모용중락이 그간 터뜨려 온 경력의 파편들이 어떤 영역을 이뤘다.
정연신이 앞서 감지한 검권이 진기로 구체화된다. 느낌이 왔다. 나아가는 칼을 가일층 쾌속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돌이 떨어지고 바람이 부는 주변을, 삼라만상이 자유롭게 유영하는 우주로 탈바꿈시킨다는 의념으로.
또 다른 신공이 움텄다.
지닌 수법이 몇 가지일까. 수백 년 역사를 지닌 대방파 수장의 저력이다.
우우우우웅―
수백 개의 고동이 우는 듯했다. 동시에 사방이 어두워졌다.
경파의 조각들이 만들어낸 음영이었다. 신공에 이른 검법이 자아내는 신령스러운 공간이기도 했다.
사방의 공기가 무거운 울림으로 공명한다. 시천법의 안법에 쬐이고도 흐릿한 음영만 구분될 뿐이었다.
누구에게나 구명절초가 있다.
나려타곤일 수도, 어떤 의외의 한 수일 수도, 혹은 싸움 와중에 강해지는 연환식일지도 모른다.
허나 절세고수라 불리는 자들의 구명절초는 다르다. 그들의 목숨은 무겁다.
절세 영역의 구명절초는, 무공의 달인이 수시로 구사하는 자신만의 비기다. 성휘대검군 모용중락에게는 자신의 검권을 현현시킨 이 공간일 터였다.
밤하늘 아래의 물결에 둘러싸인 듯했다. 모든 흐름이 정연신을 향해 이어졌다.
정연신이 검파를 쥔 손에 힘을 준 순간, 메마른 의념이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신공을 이루는 영성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단전까지 전달된 것이다.
[축신혜극(築神暳戟).]검법 본연의 오의가 음영에 섞여 들어왔다. 몹시 자연스러운 찌르기다.
중견 강호의 경험과 절세 검객의 경지가 그대로 묻어나오는 궤적. 미처 반응할 새가 없었다.
푸욱―
기다란 칼 그림자가 정연신의 복부를 관통했다.
그대로 등까지 뚫어버렸다.
통증이 엄청났다. 배 속에서 큼지막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살갗이 불타는 듯했다.
“입황성의 고위 인사들은 늘 겪는 일이지.”
신공 경파의 파편들로 이루어진 어둠 속에서 웅웅거리는 목소리.
“대문파를 이끄는 문주의 목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 임무를 완수한 자는 자색의 옷을 입었고, 그러지 못한 자는 야산에 묻혀 시체도 찾지 못했다.”
“…….”
“후배여, 안타깝구나. 요동, 요서, 요녕의 어느 쪽이든 좋았다. 네가 개중 어디에서라도…….”
“흑색이 된 이후로.”
“음?”
정연신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정가동공이 배 속의 내장을 필사적으로 끌어안는 와중이다. 핏물이 목에서 가래처럼 끓고 있었다.
“늘 고민했다.”
“정가의 아해야, 무리를 하는구나.”
모용중락이 경탄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정연신은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너 같은 자를 어찌 상대해야 할지.”
“무어라?”
모용중락은 짧게 되물을 뿐 더 움직이지 못했다. 잠시나마 무리를 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승부를 걸었고, 성공시켰으며, 극쾌의 검초를 내친 데 대한 반동을 삭이는 중일 것이다.
경파의 흐름으로 햇볕마저 가린 공간이면, 모용가주에게도 운신이 쉬운 장소는 아닐 터였다.
정연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황성주의 부드러운 숨결이 귓전에 머무는 듯했다.
―고수의 감각은 쉬이 희롱할 수 없다. 이 사실부터 심중에 새겨야 하느니라.
―당장은 어렵겠는데…….
―어렵다?
―제대로 쓰기 힘들어 보입니다. 기파를 제어해서 상대의 기감을 파고드는 것도, 실전 중에 감각을 교란하는 것도.
정연신은 과거의 자신에게 머릿속으로 속삭였다. 감각이 아니라, 기운을 지배하는 건 늘 쉬웠잖아.
사아아―
온몸에 깃든 자질이 빛살처럼 흐른다. 능법광륜기의 공력 파동이 상서로운 기질로 주변에 달라붙었다.
동시에.
모용중락이 퍼뜨린 경력의 파편들이 일제히 결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거울 조각들로 이루어진 통로가 빛을 산란시키며 통째로 뒤집히는 듯한 모습. 보이지 않는 길의 뭉치로 짜인 공간이 방향성을 바꾸는 것이다.
무수한 검로의 실타래였다. 정연신에게서 모용중락에게 이어지는 흐름으로 물결처럼 일어났다.
심검(心劍).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여명 속에 들어온 듯한 광경이었다.
기파의 검권을 지배하여 자신의 길로 만들었다. 눈앞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 모용가주의 기척이 흠칫한다.
가장 먼저 느낄 수밖에 없다. 절세고수가 기운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으니까.
정연신은 더 얘기하지 않았다.
한 손에 쥔, 반 토막 북명검의 검신에서 푸른 불꽃이 일었다.
청염이 짧은 검신을 덮으면서 삽시간에 칼날처럼 자라났다. 신기에 달한 내공 운용. 경파를 한 줄기로 빚어 올린 것이다.
모용가주의 미간이 움찔했다. 곧이어 주변이 검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성휘대검군은 삼화취정의 극의에 이른 자. 짧은 순간이나마 강하게 마음이 일어난 순간, 천마신갑의 내공 방벽이 그의 전신을 둘러쳤다. 무의식이 자아낸 실수였다.
[청염일식(靑炎日蝕).]정연신의 마음이 짧은 읊조림으로 흘러나왔다.
화아아아아악―!
오른손에서 움튼 검격의 염화가 절벽을 파랗게 물들이면서 질주했다. 절세 검객이 반응할 수 없는 속도였다. 또 다른 해가 떠오르는 듯했다.
시리도록 푸른빛이 그들을 둘러싼 검권을 채우면서, 모용가주의 전신을 격렬하게 훑고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