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353
◈ 질주 (2)
* * *
“…….”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금시문의 장원을 둘러싼 강호의 구경꾼들도, 잿가루처럼 흩어진 술법진의 흔적 위에 어정쩡하게 선 양대 십삼천의 고수들도 침묵했다.
누가 봐도 예사롭지 않은 사건이 벌어진 직후였다.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던 미청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인신공양의 제물로 잡아 온 무림인 수십 명에, 십전문과 금시문 전력의 반절에 해당하는 고수들과 함께.
본래는 모두가 자리를 비웠어야 했다. 그리되도록 설계한 대법이었다. 천하의 다른 누구도 아닌 ‘사천제일 금시문주’가.
사락.
그녀의 소맷자락이 아래로 늘어졌다.
작게 다문 입술은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고, 눈동자는 굉장히 건조한 질감으로 가라앉았다.
그것만으로도 주변이 얼어붙었다.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이 장원에 내려앉은 것처럼, 누구에게도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는 존재감. 내공 이상의 무언가였다.
침묵을 깰 수 있는 자는 절세의 반열에 오른 달인뿐이었다.
“이보시오.”
그녀의 곁에서 호법을 서고 있던 인물.
금시문주를 부른 뒤 잠시 침묵한 십전문주가 다시 한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찌 된 거요? 내 당만연이란 애송이의 몸에서 불현듯 거미줄 같은 기파가 흘러나오는 걸 느꼈소만. 대법의 막바지에 말이오.”
“…빼앗겼어.”
“그놈이 공능의 통제력을 앗아갔다?”
“그래.”
“어찌 그럴 수 있소? 아니, 그대가 어찌 그걸 빼앗길 수 있는 거요? 만에 하나 그놈의 용모에 사람을 홀리는 요력(妖力) 따위가 존재했다 해도, 어찌 그런 애송이에게…….”
“고강해. 정체를 모르겠어.”
금시문주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십전문주를 비롯해 공터에 자리한 무인들의 눈이 커졌다.
사천성 십삼천의 정예 고수들은 금시문주의 성향과 언행을 익히 알고 있었다. 좌우호법에게도 무공이 높다는 칭찬을 하는 법이 없는 그녀였다.
“두 문주께서 그자의 기파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신 건가……? 기운을 갈무리하는 수법이 얼마나 고절하기에?”
“반박귀진의 경지다. 제대로 기만당했어.”
“입황성에서 절세고수를 세작으로 보내기라도 한 건가?”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황실의 번견들에게 그런 여력이 어디 있습니까? 당장 우리가 놈들의 사천지부를 부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겁니다.”
“명교의 소교주가 아닐까요? 소천무적 야율진. 애초에 절세고수들이 전부 술법진을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그 교만한 자가 정체를 숨기고 시종 행세를? 그쪽도 말이 되지 않긴 매한가지 아닌가?”
“조용.”
불현듯 십삼천 고수들의 입씨름이 멎었다. 금시문주가 발을 돌린 까닭이었다.
사박.
“다시 거행하면 돼.”
그녀가 말했다.
누구도 부정적인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애초에 대법(大法)이었다.
금시문은 한두 번의 실패를 가정했다. 진법을 다시 구축할 여분의 법구를 구비해 뒀다는 의미였다.
* * *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당대 마광익주, 그와 연이 닿아있는 가련한 당가 남매, 자신이 길잡이로 선택된 줄 모르는 금시문의 우호법.
정연신은 술법진에 부린 수작이 성공했다는 데 별달리 큰 감회를 느끼지 않았다.
기이한 감각을 선사한 심장의 광륜에 신경을 쏟은 것도 잠시였다.
완전한 삼화취정, 호신강기, 공월무, 두 번째 광륜.
못해도 두 가지는 곧 성취하게 될 것이다.
눈앞에 집중하는 게 옳다. 중요한 일이 닥쳤으니까.
진법.
무공 못지않게 신비로운 기예. 몸 내부가 아니라 대자연의 이치를 비틀어 파고든다.
굉장히 난해하고 복잡한 공부로 알려져 있다.
제대로 연성하면 다른 사람을 환각에 빠트리는 건 예사인 데다, 경지에 이르러서는 제갈가주처럼 호풍환우하여 날씨마저 뜻대로 다룬다고.
그리고, 그 위.
묘용이 하늘에 닿은 진법은 공간과 공간 사이에 신비지처(神秘之處)를 만들기도 한다 했다.
바깥에서 쉬이 인식하기 힘든, 또 다른 공간. 장보도 한 장으로 천하에 혈겁을 일으키는 전대 고인들의 무덤이 그랬다.
대개 불가사의하기 그지없는 장소로 회자되곤 했다.
교룡이 천부적으로 펼친다는 진식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바깥과 완전히 괴리되어 별천지를 이룬 초원. 그저 규모가 뭇 인간들의 술법공부와는 격이 다를 뿐이다.
‘자연지기가 짙어. 평소에 비할 바가 아냐.’
정말로 선계가 있다면 이럴까. 살갗에 운무마냥 농밀히 끼치는 느낌으로 따지면, 진법에 들어서기 전보다 칠 할은 더 짙은 듯했다.
정연신은 주변을 둘러봤다.
진법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이토록 광대할 줄 몰랐다.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는 광경도 상상치 못했다.
“촌장께 알려야 하는 거 아닌가?”
“아냐, 저자 좀 봐. 권각 악귀라고! 참룡맹회의……!”
“기어코 여기까지…….”
“함부로 움직이지 마. 짓밟힐 거야.”
“저 아이들, 사천의 당문 혈족 아닙니까? 손에 기름내가 물씬 배어있어요. 무복도 비슷하고…….”
“오……!”
해진 복식에, 행색부터 남루한 십수 명의 키 작은 사람들이 일행을 힐끗거리며 자신들끼리 귓속말을 해댔다.
어조가 요즘 말투나 방언 같지 않았다.
목소리의 높낮이나 꺾이는 구간 따위가 몹시 낯선 게, 마치 오래도록 고립되어 자신들만의 질서를 갖춘 도시 사람들 같은 느낌.
그들 너머로 펼쳐진 삼림은 끝도 없이 푸르고 또 푸르렀다.
철족.
기파가 미약했다. 민초로 보였다.
“저는…….”
살짝 상체를 숙이며 양쪽 무릎을 짚은 정연신이 그들을 향해 입을 열 때였다.
“문주님의 공부가 이렇게나 깊다.”
긴 날숨과 들숨, 깊디깊은 내공 호흡에 빠져 있던 완양이 불현듯 눈을 뜨며 그의 말을 잘랐다.
“구천현녀가 현세에 강림한 격이지. 천하의 어떤 인물이 교룡의 진법을 제자리에서 찾아 들어올 수 있을까.”
“…그래, 대단하군.”
“경지가 하늘에 이르렀음이지. 네겐 삼생의 영광일 것이다.”
완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의 몸을 감싼 기운은 매끄럽게 다듬어진 비단처럼 투명하게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실로 영묘한 모습. 호신강기를 상시로 발현하는 경지였다.
정연신은 그를 멀뚱히 바라볼 뿐 별달리 반박하지 않았다. 겪어본 적 없는 신비에 몸을 담근 상황이기에.
‘금시문주.’
술법과 무공의 절대자.
명 건국 이래 기나긴 세월을 들여 온갖 법구와 영약, 술법공부를 쌓아 이적을 일으켰다.
끝내 천고의 영물이 똬리를 튼 진법을 열어젖힌 것. 만고에 드문 업적이라 할 만했다.
정연신에게 자색의 무림을 펼쳐 줬다. 고마운 일이었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가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낸 걸까.
“교룡의 진법? 정말로?”
“꼼짝없이 죽는 건가 싶었는데……!”
녹빛 무복을 입은 채 굳어 있던 독봉과 독룡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린다.
사천제일호족 집안의 영애와 영식. 놀랍도록 닮은 겉모습만큼이나 몸가짐도 비슷한 까닭에 다소 우스웠다.
“여기서 수련하면, 축기량이 어마어마하겠는데?”
“저기 저 꽃 좀 봐. 뭐지? 본 적 없는 종이야. 독이 있을까?”
압도적인 강자 둘을 곁에 두고도 호들갑을 떤다. 남매는 원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있다가, 이내 동시에 시선을 돌리며 정연신을 향해 슬그머니 다가왔다.
사박.
“정말로 방계 형님인가요? 어느 분 계통이죠? 당만연, 만 자나 연 자 돌림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가주께서 암암리에 가르치신 건가?”
“얼른 얘기해 보고 싶었어요. 망할 지렁이잡이들이 자꾸 감시하지만 않았어도…….”
키 작은 소년 소녀가 재잘거릴 때였다.
“입 닥쳐라.”
완양이 싸늘하게 명령했다.
사아아―
그의 음성에서 넘쳐흐른 기파가 주변의 수풀들을 쓸어넘겼다. 일부 풀잎에는 강하게 짓눌린 자국까지 남았다.
“……!”
당문 남매의 움직임이 흠칫 멎었다.
그들이 드넓은 사천성에서 무공으로 후기지수 제일을 다투는 기재라 한들, 오랜 시간 금시문의 양대호법으로 무명(武名)을 높인 중견 초고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혈기와 자존심이 강하다 해도 환명오절의 일좌가 되지는 못했다. 그들이 동경하는 입황성 섬예의 발꿈치를 따라가기도 힘들었다.
“누가 말소리를 내도 좋다고 허락했나?”
완양이 준엄한 어조로 남매를 꾸짖었다.
“비단 영물 사냥에만 기강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낯선 험지에 왔다면 마땅히 호흡을 다듬어 기량을 끌어올려야지. 그래야 미끼라도 될 것 아닌가.”
혀를 끌끌 찬다.
얼핏 당문의 친족 어른으로 보일 만큼 오연한 태도. 하지만 철족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맺은 뒷말은 그렇지 않았다.
저벅.
“당문이 몰락한 이유를 알겠다. 참으로 볼 만했지. 명색이 당가주란 작자가 형편없이 비검(飛劍)을 빼앗기는 꼴이란…… 아무리 상대가 우리 문주셨다지만.”
“뭐라고?”
“당신! 당신이 감히!”
쌍둥이의 눈매에 날이 섰다. 격분에 가까운 반응.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화아악―!
정연신은 부친 정반악이 아닌 마광익의 무인이 모욕당했을 때 자신이 어찌 반응할지 생각해 봤다.
이 순간 당가 남매의 발치에서 얇게 일어난 소용돌이가 풀잎을 헝클어뜨리는 광경을 보면서.
‘난세… 강호와 무림의 갈등이 갈수록 깊어진다지. 언젠간 터질 거야.’
그는 묵묵히 한 손을 비스듬히 내려 남매를 막아섰다.
교룡의 진법은 낯선 곳이다. 이곳에 당도해 본 적이 있는 자가 자발적으로 안내하도록 둬야 한다.
어떤 사정이 생겼는지, 당장 이 자리에 합류하지 못한 칠사도와 명교의 소교주를 생각하면 더더욱.
정기신 합일을 이룬 초고수에게는 분근착골 따위의 고문도 통하지 않을 터였다.
‘여하간, 오긴 온 건가?’
안대를 낀 칠사도가 매끄럽게 웃는 얼굴이 그의 뇌리를 스칠 때.
“아니! 안 됩니다! 마을의 진법을 개방하라니요!”
“세월이 길게 흘렀군. 교룡에게 눈요깃거리나 만들어 바치는 천것들이 말대꾸를 하고.”
“용령신권께서 그리 말씀하신다 한들…….”
어떤 철족의 말이 끊어진 직후,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짧은 비명이 억― 울렸다.
완양이 한 사람을 걷어찬 것이었다.
“탐욕스러운 교룡이 이곳에 천하목의 묘목을 가져다 뒀단 걸 안다.”
금시문주의 오른팔이 신경질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낮은 웃음소리에 주변의 대기가 반투명하게 물결쳤다.
극도로 고강한 내공 화후. 걷어차인 동료를 둘러싸고 허리를 숙인 철족들이 몸을 떨었다.
“네놈들의 촌장이라면 이 땅의 지맥을 모조리 꿰뚫고 있겠지. 그놈을 시켜 흩어진 문도들의 위치를 알아내야겠다.”
대답은 없었다. 신음 소리만 돌아왔다.
하지만 완양은 대답을 종용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천한 종자들의 눈에 어린 굴종의 빛을 알아본 까닭이었다.
“노비와 다름없는 것들. 꼭 출수를 해야 말을 알아먹지.”
사천당문처럼―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그가 입꼬리를 올린 채 정연신을 향해 눈짓했다. 당가 남매와 함께 따라오라는 의미였다.
“…가자.”
놈이 재차 출수하는 짓거리를 막고자 광륜을 돌리던 정연신은, 용봉쌍독의 어깨를 한 번씩 다독이고 천천히 걸음을 뗐다.
아직.
아직은 참아야 할 때였다.
‘선배들의 신변부터.’
그는 더 이상 천지 분간하지 못하는 소년이 아니라 어른이었다.
저벅.
습기가 적당히 낀 흙바닥. 대의에 대한 고민이 그의 발자취와 함께 자국자국 남았다.
* * *
거대한 석벽으로 둘러싸인 마을.
아니, 성채에 휘감긴 도시로 봐야 할 듯했다. 일개 마을이라 하기에는 규모가 무지막지하게 컸다.
바깥으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철 두드리는 소리와 걸걸한 외침, 이곳저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들까지도.
엄청난 활기였다.
철족 사람들이 딛는 곳을 똑같이 밟으며 따라온 일행은 잠시 침묵했다. 교룡이 똬리를 틀었다는 신비지처의 규모를 새삼 실감한 까닭이었다.
―멈춰라!
강대한 내공이 섞인 음성.
경계를 서고 있던 철족 무인 십수 명이 엄중한 눈으로 일행을 내려다봤다. 정연신을 이끈 이들과 달리 내공심법을 제대로 익힌 듯했다.
몹시 멀쩡히 살아가는 듯한 모습. 구전으로 내려오는 옛 이야기마냥 교룡의 승천에 휘말린 인물들로 보이지 않는다.
정연신이 그들을 신기하게 바라볼 때였다.
“아니……?”
석벽 위에서 소란이 일었다. 고매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일행을 내리깔아보던 철족 고수들이 완양을 눈에 담은 직후였다.
“이보게, 장삼! 지금 누구를 데려온 겐가!”
수문 무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외쳤다.
민소매 무복의 양쪽으로 짧고도 굵은 팔을 드러낸 채 백색 창을 쥔 고수였는데, 강대한 기파를 지녔음에도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송구합니다 어르신,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정연신 일행을 앞장서서 안내한 마을 청년이 말했다. 짧은 순간 그의 눈길이 옆에 선 철족 여인의 배를 스쳤다. 둥글게 솟아 있는 모습. 만삭이었다.
“이 사람아…….”
철족 창객의 탄식과 함께, 그의 양옆으로 산개한 수문 무사들이 이를 악 물고 경종을 울렸다.
따앙― 따앙―
굉장히 요란한 쇳소리가 공력을 싣고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외세의 무리를 맞이한 군부와 같은 반응. 금시문의 우호법이 홀로 일으킨 반향은 그렇게나 컸다.
피식 웃은 완양이 꼿꼿이 선 채 입을 열었다.
[촌장을 불러 오라!]사자후 같은 목소리가 터지면서 눈앞을 막아선 석벽을 따라 거대한 먼지가 질주했다.
명족 초고수 특유의 막대한 축기량이 목소리만으로 권풍 같은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비장하게 기수식을 취하고 있던 수문 무사들이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저 요악한 자가 기어이……!”
가장 먼저 균형을 잡은 수문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참룡맹회의 고수들이 처음으로 진식을 열고 들어왔을 때, 교룡을 잡아 줄 테니 맹회의 일꾼이 되라며 부린 패악질들이 그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용살공(龍殺功)이란 괴이한 무공까지 창안한 광인들.
대적 불가였다. 너무 고강했다.
수시로 병기를 만들어줘야 했다. 대가로 주어졌어야 할 삯은 당연히 없었다.
간혹 교룡이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울부짖음을 내뱉을 때면, 놈들은 민가로 숨어 용의 비늘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교룡이 노하지 않도록 제대로 만든 눈요깃거리를 제단에 바치게 했다.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핑계와 함께.
수탈이 이중으로 이루어졌다는 의미다.
교룡의 진법에 갖힌 씨족은 달리 갈 곳도 없이 노비처럼 부려졌다.
끝내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한 참룡맹회가 이 신령스럽고 불안정한 공간을 떠날 때까지.
그 와중에 군왕마냥 모든 마을사람들을 발아래 둔 자가 용령신권이었다. 지금은 더 고강해진 듯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수문장은 생각했다. 새로 오신 촌장께서 저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렇게, 수렁 같은 과거가 떠오른 탓에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명을 재촉하는군.”
겨우 한 걸음의 보신경으로 칠 장 높이의 석벽에 올라선 용령신권이, 수문장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하수에게 잡스러운 생각이 그리 많아서야.”
“……!”
우우우우웅―
고개를 번쩍 치켜든 수문장의 눈동자에 희끄무레한 내공의 옷을 입은 완양이 비쳤다.
언제고 무적의 갑주로 군림했던 호신강기. 금시문의 용령신권이 여타 문도들과 달리 적수공권으로 용살(龍殺)의 무공을 추구하게 만든 절기였다.
이 도시의 철족들에게는 절망과 동격이다. 수문장을 비롯한 석벽 무사들의 낯에 암담함이 어렸다.
일부는 동귀어진을 도모하는 것마냥 병장기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완양이 코웃음을 치며 한 걸음을 디뎠다. 코앞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 잊힐 만해.”
“또 무얼 하려고.”
불현듯 옆에서 끼어든 목소리.
어느새 바위 성채에 올라선 정연신이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완양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특별히 쾌속한 출수는 아니었다. 완양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속도가 더 빠를 정도였다.
금시문의 우호법은 마치 잘 됐다는 듯이 웃으며 몸을 틀었다. 구순술로 빠르게 속삭이면서.
“병기가 감히 사람 행세를 하려 드는 꼴이 같잖았다.”
정연신은 대답하지 않고 내공의 옷자락으로 둘러싸인 완양의 어깨를 짚었다.
놈의 언행은 하잘것없었다.
훨씬 중요한 사실들이 존재했다. 목적지에 당도했고, 놈의 패악질이 도를 넘어섰으며, 이 명족이 제법 흥미로운 공부를 지녔다는 것.
우웅―
찰나지간.
그는 장심에 닿은 호신강기의 공력 구조를 샅샅이 느꼈다. 늘 숨 쉬듯이 해 왔던 파훼의 과정.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후속 조치만 달랐다.
극도로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
완양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무언가를 느낀 듯 출수하기 직전으로 보였다.
정연신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명족의 반응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순간 정연신의 기감은 손바닥 중심에서부터 들불처럼 일어나 완양의 어깨를 훑으며 놈의 온몸으로 질주했고, 그 감각을 따라 무수히 번진 기운이 미세한 칼날처럼 호신강기를 내부에서부터 사각사각 잘라냈다.
공력 구조 역산.
검기(劍氣).
내가중수법.
곧이어 정연신은 손바닥 노궁혈로 만천화우의 흡자결을 일으켰다.
화아아아악―
강력하게 빨아들이는 경파를 따라 완양의 호신강기가 정연신의 손을 덮고, 팔을 타고 올라오더니, 이내 전신에 둘러씌워졌다.
“……!”
완양이 만면에 소리없는 경악을 드러냈다. 놈이 둘러치고 있던 내공의 옷을 정연신이 벗겨 입은 직후였다.
“하품(下品)이군.”
정연신은 상재에 눈을 뜬 상인처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