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354
◈ 질주 (3)
허억―
마을의 수문장이 뒤늦게 헛숨을 들이켰다.
죽기 일보직전까지 몰렸던 그의 눈에, 몹시 희미한 연기를 두른 절세 미청년의 모습이 비친다.
어떤 강호인이라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호신강기는 무인의 몸과 일체된 내공 기예로, 결코 옷가지 따위가 아니다.
시전한 본인조차 타인에게 씌우기 힘든 수법. 강탈당하리란 상정 자체가 무의미했다.
공력의 흐름을 샅샅이 헤아리는 감각과 형용하기 힘든 내공 지배력을 타고난 게 아니고서야.
“네놈… 누구냐?”
거대한 금시문 내에서도 손꼽히게 지체 높은 자.
용령신권의 반응은 당연히 경악일 수밖에 없었다. 첫수부터 어그러졌으니, 마땅히 제이초를 시전해야 하는데도 멈칫 굳은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정연신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살짝 모았다.
그의 온몸을 희미한 연기처럼 둘러친 내공의 옷, 지금도 끊임없이 흩어지고자 하는 호신강기의 얼개를 자신이 가진 기운으로 옷감마냥 기워내면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하품(下品)의 호신강기가 어떤 단점을 지니고 있는지 살폈다.
타격을 흡수하기보다는 공격초의 충격을 극대화하는 데 치중된 진기 구조. 겉면이 제법 단단히 뭉친 반면에 호신강기의 내부를 채운 기운은 활발하게 돌아다닌다.
‘거추장스럽게 꿈틀거리는군.’
완양의 공력은 기이했다. 용살공을 익혔다더니, 진기 자체에 발산하는 성질이 있다.
이 신비지처에 깃든 자연지기를 동력으로 삼아 끝도 없이 뻗어나가고자 하는 게 당가 남매의 내공과는 기질 자체가 달랐다. 본래 이런 환경에서 창안된 내가공부인 것처럼.
‘여하간, 또 쓰긴 힘들겠어.’
정연신은 생각했다.
상대의 호신강기를 벗겨 입는 기예.
공월무가 난무하는 절세고수들의 생사결에서 시도했다간 반격초를 맞고 즉사할 요량이 크다. 상대가 얼빠진 원숭이가 아니라면 다시 꺼내기 힘들 것이다.
“해괴한 놈… 어찌 이런……!”
지척에서 마주한 완양의 눈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근접 박투의 거리였다.
정연신이 곧바로 재차 출수했다면 저항할 새도 없이 치명상을 입었으리라. 경련하는 눈가에서 굴욕이 묻어났다.
더불어 완양은 모종의 확신을 얻은 듯했다.
“네가 정녕 당만연이냐? 당가 무맥에 이처럼 변칙적인 가르침이 내려온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정연신이 보기엔 아닐지라도, 초고수의 반열에 오른 이들은 예외 없이 천하 기재다.
자존심과 성품, 여러 사연이나 환경 따위가 오성을 종종 흐리게 만들지언정 본질적으로 날카로운 안목을 지녔다.
완양도 그러했다.
“그러고 보면, 문주께서 네 만천화우를 두고 말씀하신 이야기도…….”
홀로 중얼거린다.
금시문의 호법이 섬예 무맥의 핵심을 꿰뚫어봤다.
어떤 상황이 닥치든 자신의 무공을 믿고 위기를 헤쳐나가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무공을 상황에 맞추게 되는 자질과 기질. 어떤 강호인에게든 이질적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
정연신은 속이 쓰렸다. 이미 금시문주에게 만천화우의 깊이를 지적당한 뒤였으니까.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릴 적 정가장에서도 늘 그랬듯이.
대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쪽은 완양이었다. 그는 정연신의 내공 운용에 경악한 것만큼이나 크나큰 분노를 느낀 듯했다.
애초에 금시문주의 몹시 흠모하여 시종 행세마저 하고 있던 자다. 깊은 형세를 헤아리기보다 눈앞의 감정에 충실했다.
“감히 문주님을 기만한 게로군. 그러고 보면, 대법이 벌어진 이후에… 네놈들 셋만이 나와 함께 자리한 것도 범상한 상황이 아니었지. 필시 네놈의 수작이렷다?”
혼잣말이 재촉으로 변한다. 완양은 자세를 바로 하고 정연신의 눈을 노려봤다.
“누구냐? 무슨 목적으로 당씨 혈족을 가장했지? 네 괴이한 자질로 미루어, 그때 보인 만천화우는 당문의 정통 구결이 아니라 네 기교에 불과한 잡기(雜技)일 터.”
“중요한가?”
격분한 완양에게 조용히 대꾸하는 정연신. 신비지처의 씨족들에게 거대한 공포를 불러온 용령신권의 면전인지라, 그의 무심한 표정과 언행은 차라리 도발에 가까웠다.
두 사람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엉거주춤 서 있던 석벽의 수문 무사들이 숨죽일 정도였다.
“건방진 놈! 한 수로 득을 봤다 하여 네놈이 석년의 당가주라도 되는 줄…….”
“너희 금시문이야말로.”
묵묵히 듣고 있던 정연신이 입술을 뗐다.
“입황성의 무인을 인신공양에 쓰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
“뭐?”
강대한 공력이 깃들어 무색으로 번뜩이던 완양의 눈에 의문이 어린 순간, 그의 귓가를 향해 상체를 기울인 정연신이 속삭였다.
“나는 마광익주다.”
“……!”
용령신권은 삼화취정의 초고수다.
반응이 빨랐다.
완양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다시 한번 전신을 호신강기로 휘감을 때.
스윽.
곧장 왼손으로 놈의 뒷 머리칼을 잡아 아래로 눌러 내렸다. 더 이상의 선수 양보는 없다.
한쪽 발바닥의 용천혈 아래로 경공술 십리광요 특유의 희끄무레한 광채가 번뜩인 찰나, 그것을 추진 경파로 삼아 솟구친 무릎이 놈의 안면을 강타했다.
쾅!
가격한 직후에 굉음이 울렸다. 소리가 뒤늦게 출수를 따라온 것이다.
순간 반투명한 원형으로 번진 무릎 슬격(膝激)의 파동이 주변에 서 있던 수문 무사들마저 넘어뜨렸다.
그들은 일어서지 못했다. 완양과 정연신 사이에서 충격파가 거듭 뻗어나왔기 때문에.
쾅! 쾅! 콰앙!
완양은 환골탈태한 정연신의 금나수를 감당하지 못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완양의 얼굴은 슬격의 반동에 위로 올라올 때마다 다시 아래로 짓눌리며 무릎에 짓이겨졌다.
콰아앙!
반격하고자 했던 완양이 팔다리에 연신 강력한 경파를 일으켰지만, 발산을 이뤄야 할 용살공의 형(形)은 매 순간 미처 완성되지 못하고 분쇄당했다.
정연신의 몸에서 줄기줄기 뻗어나온 무형의 실타래 수십 가닥이 놈의 발산형 진기를 끊임없이 풀어헤친 까닭에. 심검의 묘리였다.
그렇게 열 번의 슬격초가 더 이어졌다.
정연신은 굳이 이름 짓지 않았으나, 그조차 하나의 무공이었다.
참고 참다가 마침내 목적지에 이르러 폭발한 인내의 무학. 일전에 격살한 언가제일권 언화련에게서 얻은 영감도 스며 있었다.
‘쓸데없는 수법만 늘어서는.’
정연신은 완양의 뒷머리를 놓아 주며 생각했다. 내가 이뤄야 할 건 공월무인데.
털썩 엎어진 완양의 안면부 주변으로 핏물이 베어나왔다.
놈의 호신강기는 거듭된 경파의 축적을 감당하지 못하고 산산조각 났다. 질 나쁜 내공 방벽이었다.
“돌아갈 때 필요하니 살려둔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완양을 힐끗 내려다본 정연신이 말했다.
대답은 없었다. 몹시 희미해진 숨소리만 들려 왔다.
“대협께서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수문 무사들 가운데 우두머리가 물었다. 아주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완양과 담담히 서 있는 정연신을 번갈아보는 눈길에서 불신이 느껴진다.
자신답지 않은 성질머리를 갈무리한 정연신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바였다.
그들의 시선이 아니라, 환골탈태 이후 몹시 고강해진 듯한 자신의 무위에 대해.
그는 생각했다. 나도 자색을 엿볼 수 있게 된 걸까.
그때였다.
“당만연, 아니, 마광익주…….”
밑에서 들렸다. 완양의 목소리였다. 내공 호흡이 흐트러진 듯 불규칙적으로 흘러나오는 숨결에서 어마어마한 집념이 묻어나왔다.
금시문이 십삼천으로 일컬어지는 이유도 느껴졌다.
“본문에 협력해라. 네놈이면 된다. 네놈이 온전히 가세한다면, 우리는 능히 교룡을…….”
“이런 빌어먹을!”
순간 악에 받친 수문장이 욕설을 내뱉었다.
“교룡은 없소! 그런 인외의 영물은 이제 이곳에 없소이다! 사라진 지 오래란 말이오!”
“뭐?”
“그런 괴력난신은 한곳에 머무르는 법이 없소이다! 사람의 손에 닿지 않는 허상의 존재이기에 용이지, 짐승마냥 서식지 따위가 있는 줄 아시오? 그런 허허로운 존재가 당신들처럼 아집에 사로잡힌 무인들에게 정녕 잡히리라 생각한 거요?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오산이오!”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네가 감히…….”
“이곳은 이제 당신들 같은 목적으로, 온 세상에서 몰려온 강자들이, 이미 사라지고 없는 영물의 내단을 갖고자 서로 견제하고 피를 뿌리는 지옥이 된 지 오래요.”
불현듯 정연신을 힐끗 본 수문장이 꾹꾹 눌러담는 듯한 느낌으로 또박또박 얘기했다.
“이곳엔 우리 인간들뿐이외다. 그걸 믿지 못하는 전대 고인이란 작자들이 쌍왕(雙王)이니 삼군(三君)이니 하면서 좁은 땅을 갈라서 소유하고 있지. 바깥에는 멸문했다고 알려져 있을 곤륜파의 노도사도, 먼저 들어온 하북팽가와 황보세가의 전대 가주들도. 모두가 당신네처럼 미쳐서, 교룡이 떠나고서 곧 소멸할 것마냥 좁아지는 이 땅을 피로 물들이고 있소.”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완양의 말이 완전히 멎었다.
정연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처음부터 하나였으니까.
“정연신입니다. 입황성이란 방파에서 왔습니다.”
그는 물정 모르는 촌부에게 말하듯 자신을 소개했다.
진법으로 이루어진 신비지처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사람이라면 천하제일방파를 모를 수도 있으니.
“입황성?”
“그럼 그 무위도 납득이…….”
“어려 보이지 않습니까? 귀 큰 씨족도 아닌데.”
“정연신! 이름이 정연신이랍니다! 입황성에서 왔답니다!”
햇볕이 서리서리 맺힌 정연신의 이목구비에는 그 자신도 모르는 공능이 있다.
앞으로 나서자마자 무거운 분위기가 환기됐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차로 크게 번졌다. 석벽에 서 있던 수문 무사들부터, 어느새 그 아래쪽에 모여서 위를 올려다보는 수십 명의 마을사람까지.
“정연신?”
“은공이시라고요?”
사박.
삽시간에 벌어진 강자들의 출수를 지켜보던 당가 남매가 돌벽으로 이루어진 성채에 올라섰다.
독봉과 독룡의 눈에 상단전에서 비롯된 하늘빛 안광이 스치는데, 한껏 놀란 표정을 지은 남매는 정연신에게 재차 신분을 묻지 못했다.
―정녕 후배라고?
엄청난 공력이 담긴 목소리였다. 귓전이 웅웅 울렸다.
화아아악―!
마을의 중심부에서 이곳 외곽까지.
거대한 인영이 한 번의 발 구름으로 족히 백수십 장은 될 법한 거리를 가로질렀다. 쿵― 하고 돌성채 위에 내려서기까지 한 순간이었다. 먼지가 뭉클 일었다.
착지의 반동 따위가 없는 걸까.
흑색 장포를 입은 거한이 정연신을 내려다봤다.
“각지에서 외부인이 현현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기운이 익숙한 탓에 긴가민가했지만… 네놈은 내가 아는 섬예가 아냐.”
체구만큼 두꺼운 음성. 몸속에 동굴이 있는 듯했다.
그의 존재감은 실로 엄청났다. 웬만한 순혈 씨족 못지않게 뾰족한 귀와 체구부터 그랬다. 야인마냥 머리칼을 대충 뒤로 넘겨 넓은 이마를 드러낸 얼굴도.
천림대주.
천권용력신 하후위진.
정연신의 입가에 희미한 호선이 맺혔다.
* * *
정연신은 광륜기를 드러냈다.
예전, 하후위진이 몰라서 행하지 못했다는 농에 속아 주제넘게 만들어낸 몸놀림도 잠깐 보여줬다. 부끄러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우리 몸의 경맥은 몹시 신비하지요. 진기와 근육을 멀찍이서부터 조율하는 것만으로, 족저근막까지 내려온 공력이 제 스스로 탄력을 띠게 됩니다. 십이경맥은 그렇게 이어져 있더군요. 어찌하여 이렇게 하시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익히신 무공의 체계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몰라서.
‘선배의 말씀이라고 진정 그런 줄 알았지.’
여러 선배들이 후배의 위신을 챙겨 주고 있음을, 보혈대주를 만나 깨달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좋은 기억이기도 했다.
정연신은 당가 남매, 반송장이 된 완양과 더불어 마을로 들어왔다.
철족들로 이루어진 마을사람들이 그를 굉장히 반겨 줬다. 몇몇은 현철도 아닌 영롱한 은빛 쇳덩이를 들어 보였다.
“이쪽 점포로 꼭 찾아오시오! 지금 패용하고 있는 검, 근시일 내에 부서질 것 같소! 무시무시한 충격을 연달아 감당했다는 걸 검파만 봐도 알겠소!”
“할아버지, 저 사람이 마광익주래요!”
“마연적이가 기어이 손주를 봤다고? 그 성품, 필시 요절할 팔자였는데···”
“저분도 어마어마한 고수겠죠?”
“모두들 다른 걱정은 없습니까? 이 일이 쌍왕삼군의 귀에 들어가선 안 되는데······.”
마을 자체가 뜨거웠다. 사방이 대장간이라서다.
요란한 풀무질 소리에 섞인 연기가 하늘 곳곳으로 솟구치는 터전. 새파랗게 날이 선 신병이기들이 온갖 거치대에 대충 늘어진 광경도 신비로웠다.
정연신은 길게 이어진 흙길을 걸어 촌장의 전각에 들어왔다. 좀처럼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 하후위진을 따라서.
“그래서.”
천림대주의 체구를 능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널찍한 방.
일개 마을의 촌장석이 금으로 이루어진 태사의였는데, 그처럼 호화로운 의자에 앉은 하후위진은 한참 동안 정연신을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전대 단주께서는 탈 없이 잘 계신가? 아주 긴 시간이 흘렀을 텐데.”
“외조부님은 무탈하십니다.”
“혹, 노환 같은 것은 없고……?”
지나가듯 물은 말에 묘한 희망이 어려 있었다.
“예?”
마주 앉은 정연신이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