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368
◈ 절세고수 (3)
* * *
정연신이 삐걱거리는 수레의 녹슨 손잡이를 이끌며 느릿하게 걸어가는 와중이었다.
멀리서 그를 뒤따르고 있던 정파 무인들은 아득한 느낌을 받았다.
고동빛으로 매끄럽게 다듬어진 정문과 하얀 담벼락 너머로 천재지변마냥 무지막지하게 번져 오는 압력 탓에.
후욱―!
장원 주변에서 일어난 흙먼지가 사방으로 밀려 나가고 있었다. 흐릿한 분진이 연기처럼 일렁였다.
천하의 어디에서도 접하기 힘든 기파. 대방파 수장에 준하는 절대자들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저대로 들어가도록 둬도 되는 겁니까?”
“만에 하나 정말 마광익주라고 해도, 저기서는 전황만 어지럽히는 게 아닌지…….”
“그래도 우리보단 훨씬 도움이 되겠죠.”
십수 명의 무리 중 일부 후기지수가 염려 섞인 표정으로 말을 주고 받았다.
청성파와 아미파 고수들의 얼굴은 더욱 침중했다.
후기지수 중에서도 몹시 예민한 기감을 타고난 금장신녀와 적운룡은 물론, 사문의 어른인 청은 도장과 자미신니 역시 늘 띠고 있던 초탈한 표정을 지운 지 오래였다.
청운 도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느새 문지방을 넘어선 흑포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신니.”
“음.”
“십삼천주가 둘입니다.”
“느끼고 있소.”
중년의 비구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담담한 품행과 달리 무거운 눈빛. 마광익주를 자칭한 청년이 들어간 장소는 이미 명부에 준하는 장소였다. 복마전이 따로 없었다.
전장에서나 쓰일 법한 패도적인 공력.
사람의 등줄기에서 소름을 이끌어내는 마기.
십전문과 순마련 특유의 공력 파동이 아주 농밀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각 거대 방파의 절대자들이 문하의 고수들을 이끌고 직접 왕림한 모양새였다.
청성과 아미는 오래된 문파다. 인근의 양대 사마외도가 얼마나 강력하고 무자비한지 잘 안다. 지
금 당문에 현현한 힘이 항거 불능의 산사태에 가깝다는 것도.
“본산의 장문인들께서 하산하시지 않으면…….”
청은 도장이 말끝을 흐렸다. 끊기지 않고 일렁이는 기파의 바람이 그의 수염을 목 안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했다.
본래 청성파의 장문인이었던 적하검존(赤霞劍尊)이 패검종주에게 패사한 뒤, 적하검존의 사제가 새로이 장문령부를 쥐었다.
그는 어지러워진 사문의 질서를 바로잡고 속가 문파들을 보호하는 한편, 청운검법과 적하검법을 합일시킬 인재를 기르느라 바빴다.
문파의 미래를 복수보다 우선시하고 있는 형편이다. 십삼천주들과 부딪쳐 불운한 일이라도 생긴다면 한 대에서 두 명의 장문인을 잃는 셈.
청성파 장문인이 지닌 위상을 고려하면 결코 벌어져선 안 될 일이다.
무림 정사마의 세력 구도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줄 테니까. 오히려 가만히 있을 때보다 난세를 촉발시킬 여지가 크다.
―불존(佛尊)께서는 아직 용안부에 계시겠지요?
청은 도장이 전음으로 아미파 장문인의 안부를 묻자, 다시 한 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자미신니.
뇌명불존(雷鳴佛尊)이란 별호를 지닌 아미파 장문인은 보름 전에 본산을 비웠다.
사천성 군무의 총책임자인 도지휘사(都指揮使)에게 초빙을 받은 까닭이었다.
비밀리에 이루어진 초청이라 했다. 하지만 내용을 짐작하기란 쉬웠다. 사천은 험준하면서도 고립되어 있는 분지다.
바깥 소식을 제때 접하기 어려운데다 난세에 입황성의 도움을 마냥 기다리기도 힘든 노릇이니, 많은 속가 문파를 거느린 아미파로 하여금 입황성 신검단을 대신하게 할 요량인 듯했다.
당장 사천당문에 도움이 될 일은 아니었다.
쩌저정! 콰아아아앙―!
끊임없이 터지는 경파의 충돌음과 병장기 부서지는 쇳소리들이 몹시 거셌다. 휑하게 숨죽인 도시에서 천둥처럼 두드러질 만큼.
주변의 민초들이 모습을 감출 만했다. 지금 당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앞으로 강호 전역에 두고두고 회자될 격전이다.
청은 도장은 구파의 중견 고수로서 그렇게 생각했다.
“사숙, 본문 사형제들의 기파가 느껴집니다.”
훤칠한 청년 도사가 다급하게 말했다.
청성파의 적운룡이었다. 청은 도장의 사질이자 귀천한 전대 장문인의 제자이기도 했다.
장차 문파의 기둥이 될 검객이란 의미다.
“기다리거라. 섣불리 들어갔다간 당문의 기관진식에 휘말리는 수가 있다. 내가 가마.”
청은 도장이 말했다. 자미신니와 짧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기감으로 장원 내부를 훑은 차였다.
독진과 기관이 지천에 깔린 당문에서 아군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거든 필히 그래야 했다.
오히려 성급하게 먼저 문지방을 넘은 흑포 청년이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무공 수위가 높다 해도 그래선 안 되었다.
‘쏟아지는 비침 사이에서 십삼천주에게 기습이라도 당했다면, 이미 고혼이 되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별탈이 없기를.
허리춤의 검파를 쥔 그가 정연신이 사라진 정문을 향해 발을 딛자 적운룡이 따라붙었다.
“여기서 잠자코 있을 수는 없습니다. 뭐라도 해야지요.”
“어허, 멈추거라.”
“소질에게는 방금 들어간 청년이 미치광이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공 수위도 굉장한 듯했지요.”
“무얼 말하고 싶은 게냐?”
“그가 어떤 식으로든 전황에 틈을 만들 테니, 저는 동문 사형제와 강호 동도들의 안전을 도모하겠습니다. 금장 스님과 함께라면 가능합니다.”
옆에서 함께 걸음을 옮기고 있는 아미파의 자미신니와 금장신녀를 힐끗한 적운룡이 말했다.
청성파 사숙질과 달리 두 비구니는 별다른 갈등도, 말도 없이 당연스럽게 당가의 정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소 헤졌음에도 곱게만 보이는 승포 자락을 휘날리면서.
구파의 격조였다.
청성과 아미의 교류는 오늘내일 일이 아니다.
동년배인 적운룡과 금장신녀는 서로의 무공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빛나는 자질을 지닌 천재들의 연수 합격은 가르침에 임한 사문 어른들의 진땀을 빼놓기 일쑤였다.
스스로 후기 제일에 가깝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언젠가 하북의 젊은 무인 중 가장 고강하다는 팽가인후를 만나 패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교전을 피하겠습니다. 사숙께서는 먼저 들어간 청년과 손을 맞춰 주십시오.”
적운룡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잠시 침묵 속에서 전장의 요란한 소음만 울렸다. 청은 도장은 더는 사질을 설득하지 않았다.
그저 먼저 간 전대 장문인을 향해 어쩔 수 없노라고 내심 고개를 숙였다. 사형, 이만하면 잘 크지 않았습니까.
‘청운적하(淸雲赤霞). 패검종주에게 보복할 무공보다 구하기 힘든 심성입니다.’
사박.
당문의 형세 파악은 끝났다. 사람들이 어지럽게 흩어진 전황과 기관진식의 파편들, 그 속에서 절대적인 기세를 두르고 있는 순마련주와 십삼천주.
한없이 낮은 승산을 알고도 걸어들어간다.
뒤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천 무림세가의 후기지수들은 오히려 기껍다. 어쭙잖게 따라왔다간 방해만 될 테니까.
“적하검은 지양하거라.”
“압니다. 난전에선 청운검이 낫지요.”
“무공을 익히지 않은 당문의 방계 식솔들을 먼저 데리고 나오자꾸나. 다음이 본문의 제자들이다.”
“예.”
청은 도장, 적운룡, 자미신니, 금장신녀.
사숙질 두 쌍의 발이 흙먼지를 헤치고, 이내 당가의 문지방을 밟았다.
그리고 장내에 펼쳐진 광경을 목도했다.
“…….”
광활한 앞마당에 쌓인 시체들.
죽은 시기가 저마다 다르다는 게 눈에 보인다.
공력이 실린 화골산(化骨散)에 하반신이 녹아버린 노인, 복부가 완전히 검게 물든 채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내, 엎어진 자세로 크게 경련을 일으키는 소년.
“망향마노(亡鄕魔老)……?”
소년을 본 청은 도장이 작게 헛숨을 삼켰다.
극성의 동자공을 익혀 어리디어린 모습으로 악행을 일삼은 순마련의 마인. 내부의 경혈이 완전히 박살 난 모습이다.
비교적 최근에 숨이 멎은 자들로 이루어진 길이 나 있는데, 그중 망향마노가 첫 번째였다.
구파 일행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길 끝에 낡은 수레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고, 그 너머로 흑포 청년이 백색의 경갑을 걸친 중년인과 마주한 광경이 비쳤다.
굉장히 위태로워 보였다.
검은 장포를 걸친 청년의 몸에서는 일말의 기파도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한 반박귀진을 이루어 공력을 깊이 갈무리하는 경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르지만, 상대는 그러한 무위조차 아래로 굽어볼 만한 절대자였다.
정연신을 흥미로운 눈길로 훑어보고 있는 사내.
체격이 아주 거대하다. 검에 베인 듯 뭉텅 떨어진 귀 한쪽은 흉하다기보다 백전불패의 명장 같은 기세를 선사했다.
화아아악―
무시무시한 기파가 전신을 감싼 채 땅바닥에 수십 겹의 동심원을 새기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폭풍을 갑주로 삼아 둘러친 듯한 모습.
반면 눈매는 언뜻 선해 보였다. 황소의 눈망울 같은 동공이 유달리 새까만 빛을 품고 있을 뿐.
큼지막한 원을 그리며 널브러진 당문 고수들의 시체가 그의 개세적인 손속을 방증했다.
십전문주다.
북방의 요족 일만여 머리를 취하고 귀향했다는 절세고수.
십팔반병기 모두를 수족처럼 다루는 대종사로, 정종 무공의 노고수들조차 그와의 장기전을 꺼린다 했다.
청성파와 아미파의 장문인도 마찬가지라는 풍문이 있을 정도였다.
“마광익주를 자칭하더니, 구파의 말코와 땡중들을 끌고 들어왔군.”
십전문주가 말했다. 눈매가 주는 느낌마냥 점잖은 어조였다.
방심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가 정연신의 온몸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군부의 대장군 출신이라 했지. 전장에서 연성한 안법이야.’
정연신은 날숨을 소리없이 길게 내쉬었다. 십전문주의 시선이 날카로운 화살촉 같다. 철붙이가 살갗을 훑어 올리는 듯한 느낌.
당문의 입구에서부터 수레를 끌고 이곳까지 당도하는 동안 열다섯 명을 격살했다.
시화무극수와 내가중수법 따위를 아무렇게나 한 손으로 내치면서 십전문주를 향해 올곧게 걸었다.
길을 따라 뼈와 살이 박살나고 핏물이 치솟았다.
사마외도니 뭐니 그럴듯하게 일컬어도 본질은 민초를 수탈하기 바쁜 도적단. 우두머리부터 어찌하는 게 옳았다.
명성 높은 고수들이 즐비한 전장.
웬 미치광이를 보는 듯했던 장내 고수들의 시선이 바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허름한 수레를 이끌고 십전문주의 면전에 선 흑포 청년은 강호의 기이한 이야기에 나올 법한 괴인이었고, 어느새 전장은 소강 상태에 이르렀다.
정연신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십전문주와 눈길을 맞댄 채로.
“나가라.”
“음?”
“당문은 앞으로 열흘간 장례를 치를 거다.”
“재미있는 친구로군. 죽으러 와서는.”
십전문주의 입매가 슬쩍 올라간다. 광대뼈 아래가 천천히 패이는 모습이 고상한 게, 마치 문무 양면에 발을 걸친 무장 같았다.
“네 배반에 금시문주가 크게 노했다. 차라리 여기서 내게 명을 달리하는 쪽이 좋을 게다.”
“재미?”
정연신은 뒷말에 대꾸하지 않고 되물었다. 십전문주가 은은한 미소를 띤 채 턱끝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그래, 네 언행이 우습지 않은가.”
“군부 출신 아닌가? 장례를 두고 재미 운운하는 격조… 공맹과 사서삼경을 어찌 외웠지?”
“…….”
힐난이 아니다. 배운 사람인 입황신협이 품었을 만한 의문이다.
“작고하신 네 양친께서는 그리 가르치지 않았을 텐데.”
정연신은 진실로 궁금해서 물었다.
그는 뵌 적이 없는 어머니를 기리고 모친의 피를 헛되이하지 않고자 정가동공을 만들었는데, 강호인들은 어찌하여 스스로 양친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걸까.
장내가 조용해졌다.
십전문주가 잠시 입을 다물 때였다.
“고작해야 화중암왕을 사칭하는 놈의 말본새가 방자하기 이를 데 없구나!”
철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격노한 외침이 터졌다.
정연신의 측면이었다.
두꺼운 철갑을 걸친 중년의 무인이 땅을 짓이기며 쇄도해 왔다.
“저자는 명주휘성(銘朱輝星)이오!”
먼 대문 쪽에서 청성파의 적운룡이 크게 소리쳤다.
상대의 신분을 알린 것이다. 첫 수는 반드시 피하라는 의미였다.
명주휘성 정추곤(鄭秋坤). 십전문이 화중암왕 섬예에게 초고수 여럿을 잃었다지만, 십전문주의 가르침 아래에서 새로이 선봉을 맡게 된 강자다.
당문과 구파의 제자 여럿을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격살했다.
쿵!
지면이 엄청난 속도로 갈라진다. 몹시 육중한 느낌을 발하는 경공. 군부의 신공을 패도적으로 집대성했다는 십전문 무맥의 기질이었다.
놈의 은빛 갑주에서 백광으로 아른거리는 공력과 햇볕이 그야말로 혜성 같았다.
충심철천공(忠心綴天功).
부딪치는 순간 상대를 육편으로 만든다. 방파 대전과 같은 집단전에서 무시무시한 효용을 발한다 했다.
긴 대열을 이룬 채 경공 돌진을 가하는데, 어지간한 화탄에 준하는 위력 탓에 정면으로 받아내는 문파가 없다고.
‘휘성?’
놈의 별호 끝말을 내심 되뇐 정연신이 십전문주를 힐끗했다.
팔뚝 전완근 쪽 기류가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게,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즉시 출수할 듯했다.
강호의 명예를 따지기보다는 문파 전력을 보존하겠다는 생각으로.
정연신은 가만히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땅을 쾅쾅 쪼개는 소리가 급격히 가까워지고, 이윽고 명주휘성이란 사내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들이받을 때까지.
퍼어어어억―!
살점이 터지는 소리였다.
짓이겨져 산산조각 난 철갑과 파열된 근육 사이로 대량의 핏물이 치솟았다.
지반마저 원형으로 쾅― 꺼트린 반동에 형체도 없이 폭발한 명주휘성의 잔해 속에서, 어느새 희끄무레한 별빛을 입은 정연신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차를 가린 채였다.
쏟아지고 흩날리는 핏방울들이 새까만 장포에 스미지 못하고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