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375
◈ 제전 (5)
하늘에 투명한 햇살이 스몄다.
군중들의 그림자가 가장 작아진 시간이다.
거지인지 낭인인지 구분되지 않는 행색으로 자리를 펴고 누운 자들, 팔짱을 낀 채 높은 나뭇가지 위에 두 발을 모으고 선 보신경의 고수들, 비단옷의 호위무사들을 거느리고서 가마에 앉아있는 남녀노소까지.
개중 지루한 기색을 내비치는 자는 없다시피 했다. 해가 솟아오를수록 대다수의 얼굴에 맺힌 흥분만 조금씩 더 짙어졌다.
그리고.
“온다! 온다!”
“뭐? 드디어……!”
“어디 말이오? 누구요?!”
먼 산길 아래를 삼엄하게 채우는 기세가 있었다. 철갑이 일정한 간격으로 부딪쳐 절그럭거리는 소리도 울렸다. 점차로 커졌다.
군중들이 벌 떼처럼 술렁였다.
“십전문! 만병천군(萬兵天君)이 왔어요! 문도들을 이끌고!”
“정말로 응했군… 긴가민가했는데…….”
“천하의 십전문주가 중인환시에 무공을 펼친다니…!”
“오늘 만종혼원공으로 눈을 씻겠구만.”
거대 방파의 수장들은 하나같이 평생을 살아도 보기 힘든 존재다. 민초는 물론 웬만큼 명망이 있는 강호의 고수들에게도 그렇다.
격이 맞는 자리가 아니면 좀처럼 행차하지 않고, 잠시나마 같은 땅 위에 있었다 해도 그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기 힘든 하늘 위의 태양.
무림인들에게는 더욱 의미가 깊다.
절세고수의 손짓과 발짓에는 지고한 무리가 깃들어 있어,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견식을 넓히고 큰 깨달음을 얻는 것도 가능하다는 풍문 탓에.
“이러면 화중암왕도 볼 수 있는 거네? 송옥과 반악이 울고 갈 용모라던데!”
“그 정도는 아니겠지. 풍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비켜! 안 보인다! 비키라고!”
“거 좀 밀지 마쇼! 더는 못 간단 말이오!”
“강호인들이 진을 치고 있다고요! 더 앞으로 갔다간 사달 날 테니까 그만 좀…!”
기나긴 능선을 빼곡히 채운 인파.
사람들 사이에서 몸싸움이 벌어졌다.
조금이라도 앞으로 가려는 이들이 고개를 비죽비죽 내밀고,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사람은 제자리에서 껑충 뛰기도 했다. 가장 높은 봉우리를 눈에 담기 위해.
천하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서다.
절세고수들의 무공을 목도하는 것도, 오늘 있을 비무의 결과를 제각각 속한 집단에 가장 빨리 알리는 것도.
무수히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설령 싸움을 제대로 목도하지 못한다 해도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자리. 쩍쩍 갈라져서 풀이 나지도 않는 땅을 멍하게 내려다보는 일보다는 백번 나았다.
풍문으로만 듣고 평상시 흠모하고 있던 절세고수들을 어찌 등지고 내려갈까.
민초들과 달리 명당자리를 차지한 강호인들과 고관대작들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침음을 흘렸다.
“십전문… 정말로 왔군…….”
“실로 무시무시한 위용입니다.”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언덕을 오르는 일단의 무리.
햇살에 요란스레 번쩍이는 갑주를 걸쳤다.
관절의 이음새에서 하나 된 쇳소리가 번지는데, 삼엄한 군기를 내뿜는 모습이 얼핏 보기에는 무림인 같지 않았다.
철컥. 철컥.
소름끼치는 백광의 갑옷을 걸친 십전문주를 따라 발맞춰 걸음을 옮기는 이들이 마흔 명가량. 보이지 않는 공력 파동이 엄청났다.
완전히 합치된 내공 호흡을 따라 흘러나오는 기파가 풀잎을 짓눌렀다.
그저 걷는 것뿐인데도.
북경의 출병식과 같은 화려함이 있다. 같은 내공을 연성한 자들만이 가능한 의례였다.
“저 풍모 좀 보게. 혈염교주와 부딪쳤다면서도 근래 들어 왕성히 활동하더니…….”
“십전문주는 역시 건재하군요. 당가의 절진을 몇 개나 부숴 버렸다는 것도 헛소문이 아닌 듯싶습니다.”
“사마외도의 친구들이 기세등등할 만해. 저래서야 비무가 제대로 이루어질지 모르겠군.”
“예? 어찌하여 그리 생각하십니까?”
“뭇 강호인들은 대개 물정에 어둡기 마련이지. 어지간한 대방파 출신이 아니면 말이야.”
“음…….”
“유명한 무인들을 몰라보고 목이 달아나는 칼잡이들이 얼마나 많나? 필시 대세가 된 십삼천에 잘 보이고자 나서는 자들이 나설 걸세. 사리에 밝지는 않으나, 나름대로 고강한 이들이… 예컨대 십전문의 산하 문파 말일세.”
“아! 그러고 보니 이 비무, 대진 따위가 정해져 있지 않았지요?”
“아무나 참가할 수 있네. 막말로 칼 좀 갈고 닦은 무명의 놈팽이가 모욕을 핑계로 마광익주한테 검극을 들이댈 수도 있는 게지. 어중이떠중이들은 감히 그러지 못하겠지만.”
“별 의미는 없지요. 그들은 아미와 청성의 장문인은커녕 마광익주의 초식조차 세 번을 채 받아내지 못할 겁니다.”
“자네는 사마외도의 수좌인 십삼천을 힘만 센 벽창호로 보고 있군. 저들이라고 명분 싸움을 못하는 게 아닐세. 오히려 상대를 농락하는 데 도가 텄지. 작은 희생으로 큰 살코기를 취하는 재주 말일세.”
“저는 도무지 낭성(浪星) 어르신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두고 보기나 하세. 실은 비무의 결과야 내 알 바 아니고, 십전문주의 만종혼원공이나 제대로 봐 둬야겠네.”
각계의 인사들이 위를 올려다보는 사이.
문주 만병천군을 선두로 한 십전문의 행렬이 약속된 언덕에 올랐다. 순간 철컥거리던 쇳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아주 넓군. 보신경을 펼칠 만하겠어.”
십전문주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띤 얼굴로 중얼거렸다.
주변을 둘러보며 왼쪽 허리춤의 도를 쓰다듬는 모습. 절대자 특유의 여유로운 기백이 묻어나왔다.
곁에 있던 수하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경회봉(庚會峰), 경회릉(庚會陵)이라 합니다.”
“별들이 한데 모이는 언덕이라. 사천에 이만큼 높고 넓은 봉우리가 있는 줄 몰랐네.”
“죽은 용봉쌍독을 장사 지낸 자리라고…….”
“용봉쌍독?”
“당가주의 직계들입니다. 그날, 금시문 진법의 공양물로 삼은 남매 말입니다.”
“아, 이름을 술안주로 즐긴 적이 있네. 요즘 아해들의 별호가 참으로 과장스럽다 했지.”
십전문주는 느릿하게 머리를 주억였다.
그리고 불현듯 눈을 돌렸다.
“물론… 자네 정도 되는 무인이라면, 그 명호를 두고 용이니 봉이니 해도 그다지 우습지 않을걸세.”
수하에게 건넨 말이 아니었다.
문주를 따라 눈길을 돌린 십전문도들이 흠칫했다.
잠시나마 몸을 두껍게 감싼 갑주가 작은 소음을 낼 정도로. 부릅뜬 그들의 눈에 새까맣게 너울거리는 옷자락이 비친 까닭이다.
언제 당도한 걸까.
수풀들의 틈새로 희미하게 바스러지는 빛무리가 있었다.
사아아―
언덕 한가운데 선 청년의 발치에서 산산조각으로 흘러내리며 자취를 감춘다.
경공의 추진 경파인 게 분명한데, 오늘 산자락에 자리한 누구보다도 신비로웠다.
이 순간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몽환적인 느낌을 선사하는 청년의 얼굴과 함께.
섬예 정연신.
무표정에서 고적한 기질이 묻어났다.
“마광익주.”
십전문도 한 명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순간 산자락을 둘러싼 인파 속에서 거대한 함성이 터졌다. 일순간 대기마저 크게 요동친 듯했다.
와아아아아―!
“대체 언제…? 무슨 보신경이지……?”
“저 용모… 화중암왕이다! 풍문이 모자란 감이 있었군!”
“저런 헌헌장부였다고?”
“연모하고 있어요! 여기 한 번만 봐주세요!”
“오늘 제대로 개안하는구만!”
크게 흥분한 이들이 손을 흔들며 아우성쳤다.
열기가 어마어마했다. 당문에서 베껴 쓴 방문이 사천성 전역에 게시된 까닭이다.
누구도 감히 상상치 못한 말을 글귀로 만들어, 입황성 흑색이라는 지고한 신분을 걸고 만방에 붙였다.
비무 제전의 개최자.
신검단에서 가장 어린 대주.
당가에 만천화우를 선사한 대종사.
널리 알려진 몇몇 업적들과 아울러, 지금 사천성에서 정연신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다시피 했다.
사천에서 가장 큰 호족인 당문이 스승으로 모신다는 풍문도 그들의 호감을 샀다. 군중의 과반수가 누구 편일지는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비무의 당사자들 중에서 거기에 신경을 쓰는 이는 없었다. 그들의 명운은 지닌바 무공으로 결정되는 것이기에.
스릉.
십전문주가 자신의 손목을 매만지자, 새하얀 철로 이루어진 팔꿈치 완갑이 스산한 소리를 냈다.
“어째서지?”
그가 물었다.
“무엇이.”
정연신의 대답은 무성의했다.
백약 사태가 먼저 당도할까 저어한 탓에 십리광요를 빠르게 시전했는데, 결국 금시문주의 머리카락도 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무슨 속셈일까.’
그때 십전문주가 입매를 좌우로 찢었다.
“방문에 적힌 바와 다르군. 둘은 어디에 있나? 백약 스님과 청성의 젊은 말코 말일세.”
“너희 쪽의 둘부터 데려와라.”
“내가 먼저 물었네만. 자네가 대답하게.”
십전문주가 의뭉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몹시 사파다웠다.
정연신은 내심 순마련의 반송장과 금시문의 둔근(鈍根:새대가리)이란 말을 삼켰다. 만인이 보는 자리였다.
상대를 낮춰선 그가 올라가지 못한다. 여기서는 태생적인 격조를 보여야 뭇 사마외도의 잡것들을 짓누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민초의 등골을 뽑아먹고 살면서도 아직 대장군인 줄 아는 건가. 역적에 불과한 자가 높은 사람 행세를 하는군.”
“내게 하는 말인가?”
“수치를 모르는 거겠지.”
정연신은 단정적으로 말을 맺었다.
마땅한 대답을 기다리진 않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혼자 묻고 답하는 데 능했고, 다른 사람에게서 만족스러운 해답을 구하는 경우가 몹시 드물었다.
강호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타고난 혜안이 깊었다.
‘이자부터 이기고 시작하자.’
순마련주와 금시문주가 정말로 불참할 리는 없다. 어딘가에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이 순간 두 십삼천주의 추이를 살피고 있을 청성과 아미의 장문인처럼.
“와라.”
정연신이 말했다.
“음. 당가에서는 제법 아쉬웠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십전문주의 얼굴이 여유를 되찾았다.
“여기서 무공을 제대로 견주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저벅.
그가 한 발을 앞으로 디뎠다. 동시에 후욱― 하고 일어난 기세가 주변을 밀어냈다.
그때였다.
“격이 맞지 않소!”
쿵! 소리와 함께 언덕으로 올라선 권법가. 수투를 끼고 있었다.
중년의 연배로 보였다.
얼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흉터가 인상적인데, 몸 주변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른 아지랑이들도 강렬했다. 패도적인 호신강기였다.
“철종마권(鐵從魔拳)!”
한쪽에서 몇몇 군중이 외쳤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명이 아니었던 까닭에.
쿵! 쿵!
“아무리 입황성의 흑색 위계라 해도, 결국은 일개 무력대주에 불과한 자가 어찌 감히…….”
“상대는 대문파의 문주시다. 네놈은 자격이 없어.”
큼지막한 도끼를 든 사내가 껄껄 웃고, 세침처럼 가느다란 협봉검을 든 여인이 단정적으로 얘기한다.
하나같이 강한 기파를 둘러쳤다.
화악!
강하게 밀려오는 바람 속에 군중들의 외침이 섞여 들었다.
잔극부월(殘極腐鉞) 형기중(邢企重), 찰마검(紮魔劍) 혜소(慧蔬). 정연신도 사천에서 와서 한 번쯤 들어본 이름들.
대방파에 속하지 않은 사천성 사마외도 중 손꼽히게 고강하다 했다.
“내 체면이 곤란하게 됐군.”
십전문주가 씩 웃으며 물러섰다.
사마외도의 절세고수가 출현하면, 그를 수괴로 삼아 강자로 행세하고 노략질을 일삼는 자들이 있다. 문하가 아니라 산하다.
개중에서도 특히 고강한 자들을 일컬어 사마외도의 거마(巨魔)라 했다. 말 그대로 큰 마귀라는 의미였다.
사마외도의 절대자가 만들어내는 폐해다. 민간에서는 십삼천주들보다 무서운 이들로 통한다.
흉년.
입황성이 신검단의 인원을 채우기는 어렵지만, 사파 절대자들이 추종자와 빈객을 만드는 것은 굉장히 쉽다.
설령 그 절세고수가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사파인이 협의지사로 돌아오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
“우리를 일컬어 원숭이 무리라 하던데, 가볍게 한 주먹 나눠 봅시다. 생사결 비무를 신청하오.”
철종마권이 두 주먹을 호쾌하게 부딪치며 말을 이었다.
“마광익주 당신, 우리도 부르지 않았소? 방문을 보아하니 패도를 걷는 사천 땅의 동도들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데.”
사박.
그는 가벼운 보법을 밟으며 천천히 옆으로 이동했다. 언제든지 물러날 수 있도록.
“…….”
정연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 거마의 어깨 너머에 있는 십전문주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십전문주의 입매에 서글서글한 호선이 맺혔다.
“이거 어쩐다? 여기서 마광익주가 출수를 해버리면, 비무 제전의 규칙에 따라 여기서 내려가야 하는데…….”
사마외도의 노림수.
장문인 격 절세고수들의 비무는 연승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분을 다지는 칼부림조차 그렇다.
무수히 많은 이권과 명분이 얽혀 있으니, 사후에 변수가 되거나 시비에 휘말릴 만한 것을 모두 배제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감이 천하만큼 무겁기 때문에.
“저들에게도 기회가 있지. 내 휘하의 무인들이 아니니 무어라 할 수도 없네. 물론 자네가 저들에게 맞서 다른 고수를 내겠다면, 그것도 좋네. 생사결이니만큼 목숨을 걸어야겠지만…….”
“훌륭하군. 더 없나?”
“당초에 자네가 모든 사마외도를 지적했으니, 별달리 치졸하다 할 일도 아닌… 음?”
십전문주가 눈썹을 치켜올릴 때였다.
그와 눈을 마주한 정연신의 마음속에서.
‘선룡.’
용 한 마리가 부채를 물고 일어나더니, 이내 허리춤의 검을 강하게 휘감아 똬리를 틀었다.
곧이어 신검 여뢰가 청아한 울림을 우웅― 내뱉은 순간.
천천히.
“……!”
한 겹의 수평선이 능선 너머로 길게 덧대어졌다. 어떤 색채도 없는 무색이었다.
부아아아아앙―!
거기에서 뒤늦게 일직선으로 명멸한 경파의 빛을 따라, 거마 세 명의 목에 핏줄기가 새겨졌다. 완전히 찰나였다.
번개 치듯 스친 여뢰의 칼날에 거마들의 호신강기가 그대로 찢겨 나갔고, 종잇장 뜯어지는 소리를 내며 머리만 튕겨 나간 시체들이 옆으로 쓰러졌다.
곧이어 신검 여뢰가 미려한 궤적을 그리며 되돌아왔다.
스릉―
정연신은 몹시 부드럽게 꽂힌 여뢰의 검파에 한 손을 얹었다.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리자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십전문주의 얼굴이 보였다.
“네놈, 처음부터 이리할 요량으로…….”
놈이 말했다. 정연신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대결을 속행한다.”
“뭐라?”
“미후를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