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466
◈ 절세 대제전
* * *
고풍스러운 원형의 창문은 새하얬다.
투명한 햇살이 둥그스름하게 흘러들어오다 막힌 까닭이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얼굴이 그려진 족자처럼 방 내부에서 가장 선명한 빛깔로 자리하고 있었다. 방의 주인이 그렇게 정해 뒀다.
어둑어둑한 마기(魔氣)가 안개처럼 흐르는 장내.
침상 옆에 백미려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명상에 잠긴 것마냥 눈을 감은 얼굴에, 유난히 새까만 머리칼이 청색 무복의 등허리를 덮고도 바닥까지 닿은 모습. 양쪽 무릎 위에는 기다란 입황검을 얹어 뒀다. 검객이었다.
황금빛 융단이 깔려 화려한 침상은 한 번도 쓰이지 않아 패인 자국이 없었다. 마광익 백미려의 머릿속 상태와는 달랐다.
“…….”
그녀의 흰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일이었다.
―신임 자색이 죽었어.
언젠가 소천무적이 대뜸 방에 들어와 툭 내뱉은 말.
심지어 대막(大漠)의 신기루마냥 기이한 술법무공으로 당시의 상황마저 보여줬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 수면을 걷는 삿갓의 맹인, 거대한 빙산, 암천제… 그리고 정연신. 명교주에게 전신 혈도를 제압당한 채 소리 없이 끌려 나갔던 저잣거리엔 대주의 여뢰가 우두커니 꽂혀 있었다.
태모산성이 연화나타의 신검을 확보했다는 이야기도 흔하게 들렸다.
그런 뒤에 다시 유폐당했다.
소천무적이 몸소 펼쳤다는 명마단천진(明魔斷天陣)의 한복판이었다. 이름 그대로 공간을 단절시키는 듯한 진법인데, 입황성 청색의 무위로는 탈출이 불가능했다.
문득 백미려의 내공 호흡이 흐트러졌다.
깊은 심마였다.
“소교주님, 조식입니다.”
문 바깥에서 웬 중년 여인의 공손한 음성이 울렸다. 기척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력 파동이 강맹했다.
입황성에서라면 청색 무복을 입고도 남을 내가공부. 심지어 은은하게나마 패도적인 마기까지 묻어났다.
본색을 감춘 명교의 시종으로, 신분과 달리 고강한 무공을 지닌 존재인 까닭이다.
당대 명교주의 뜻을 받들어 백미려를 소천무적의 후계자로 여기고 있었다. 본래는 방계 무맥이자 순마련 출신인 백미려를 경멸해야 마땅한데도.
“…….”
하지만 시종의 부름에도 그녀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백미려의 명상은 무(武)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깊은 죄악감과 오고 갈 곳마저 잃은 가엾음이 뇌리에서 물결쳤다.
언젠가 임무 중에 산산조각 난 정연신의 입황검과 북명검처럼.
대주를 죽음으로 내몬 죄.
그의 눈앞에서 자결하지 못한 죄.
짧았던 천명마저 끝까지 누리지 못하게 만든 죄를 어찌할 텐가. 어린 대주가 못다 본 세상은 아직도 넓게 펼쳐져 있다.
‘…해묵은 과거에게 패한 죄.’
백미려의 심마가 깊어져 갈 때였다.
불현듯 건너편 문의 경첩이 끼익― 마찰음을 냈다. 흑단을 덧씌우고 황금빛 용의 수실마저 새긴 가죽신이 저벅 하고 들어왔다.
“복수할 준비는 됐나?”
거무스름한 안개를 매끄럽게 유영하는 듯한 음성.
여인의 것이었다.
백미려는 그제서야 눈을 떴다.
“준비?”
“본 교주의 무공을 한 몸에 받아들일 준비 말이다. 정연신의 무공에 내 마공까지. 다시 생각해도 네겐 과분한 복락이야.”
마기의 흑무(黑霧)조차 가리지 못하는 얼굴이 존재했다.
말 그대로 정연신처럼 신비로운 이목구비. 명교주 소천무적이 백미려를 내리깔아 보며 한쪽 입매를 희미하게 올리고 있었다.
“…….”
“언제까지고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어. 네 생각은 다르겠지만, 본좌는 나름대로 널 예우했다. 주지육림에 대궐 같은 방, 아랫것들의 품행… 어찌 됐든 너도 광예결의 전인이니까.”
양어깨 너머로 흘러내린 흑발이 백미려의 것보다 새까맣다.
사람의 모발이라기보단, 황제에게 허락된 면류관과 같은 존재감을 지닌 머리칼. 흐린 안개를 오뚝하게 흘려내는 콧대에선 광오한 성품이 묻어났다.
정연신이 몇 년쯤 더 살았다면 저랬을지도 모른다. 이 순간 백미려의 뇌리를 스친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스승으로 대하지는 않겠다.”
서늘한 음성.
대답 대신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사락.
다음 순간 백미려의 눈앞에서 사라진 소천무적이 그녀의 등 뒤편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길게 치솟은 몇 가닥의 흑발이 백미려의 어깨를 살짝 치고 떨어진다. 백미려는 미미하게 움찔했다.
“정가 아우가 만든 것보다 못하지 않아야 할 텐데. 뭐… 그 친구 본인이면 몰라도, 네 평가가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특별히 많은 숨결이 섞이지 않았는데도 어떤 속삭임마냥 목덜미를 훑어내리는 목소리. 명교주의 마성(魔性)이었다. 백미려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 * *
항주 목가장(木家莊).
몹시 거대한 장원이었다. 동쪽 땅에서도 가장 문전성시인 장소이기도 했다.
장원을 둥글게 감싼 담장은 낮은 편인데도 성벽처럼 튼튼했고, 그 담장을 또 한 겹씩이나 둘러싼 인파 덕에 굉장한 위압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주로 대지주들과 부호들이 고용한 낭인들이었다. 항주의 토착 문파로서 자발적으로 호위를 서는 경우도 존재했는데, 목가장의 내부도 바깥과 마찬가지로 인산인해였다.
백 명 이상의 민초가 활발하게 마당과 내원을 오고 갔다.
“신의 어르신! 여기 개황초(開遑草) 한 무더기 가지고 왔는데, 이거 어디다 둘깝쇼?”
“어르신은 지금 안채에 계십니다. 우선 저쪽 곳간에 두시지요.”
“아, 오늘 총관은 운 학사시구만! 그럼 내일은…….”
“연암 상단주께서 일을 보시기로 했습니다.”
영촉신의(永燭神醫)란 별호를 지닌 이의 장원.
의원의 성이 목씨(木氏)이기에 목가장이다. 항주의 부호들과 다수 군중이 자발적으로 세웠다. 단기간에 지어졌음에도 서호보다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명승지가 된 지 오래였다.
이미 절세지경의 의술로 온갖 기이한 병을 지닌 항주인들을 전부 치유하다시피 했는데도 그랬다.
은혜를 갚기 위함이었다.
그중 일부는 신의를 암천제보다 위계가 높은 신선으로 여기며 복을 얻어가고자 장원에 머물렀다. 저마다 온갖 허드렛일을 스스로 맡으면서.
모든 사람이 항주였다.
바깥에서 어떤 난리통이 벌어지든지 이방인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 자연히 이 순간 목가장의 입구를 향해 걸어오는 무리를 향해서도 눈길이 모였다. 무인들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저벅.
커다란 관 하나를 수레에 실은 일행.
절도 있는 걸음걸이들이 흙먼지를 동반한다. 누가 봐도 백도 정파의 무인들이다.
녹색과 청색의 무복을 주로 걸친 모습에, 본래는 깔끔했을 행색이 칼자국과 먼지로 가득했다.
문사풍의 소녀가 선두를 이끌고 있었다. 정심안 제갈청아였다.
두어 걸음 뒤쪽에선 검을 찬 귀공자가 그녀를 호위하듯이 걷고 있었다. 짧게 친 머리칼에 연녹색 비단 무복. 마찬가지로 팔가의 일익인 공손세가의 소가주였다.
“말들이 죽지만 않았어도…….”
공손민은 눈그늘이 내려앉은 얼굴을 손등으로 쓸어냈다. 그의 말에 제갈청아가 고개를 저었다.
“군마녹림에 만상수로채였어요. 차대 십삼천으로 꼽히는 무리를 헤치고 나온 셈이니, 이 정도면 이르게 당도한 거죠. 오히려 고위 인사를 만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제갈 소가주의 말씀이 옳긴 합니다만…….”
그들에겐 여전히 격조가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의 몰골은 패잔병에 가까웠다.
문득 제갈청아의 손짓에 멀리서 무인 한 명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 왔다. 정찰을 나갔다 온 모양새였다.
제갈청아는 목가장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지체없이 그를 향해 물었다.
“알아 오라고 한 건? 정 공의 행적부터.”
“풍문으로 추정컨대 사흘여 만에 이곳으로 당도한 듯합니다. 입황성의 무인들에게 듣기로, 일련검매가 당한 뒤 신임 자색이 궁명왕과 기싸움을 벌인 게 사흘입니다. 거기서 시작이었지요. 정 공이 출도한 뒤 천중오검객 태반과 본래의 태모산성 소성주가 격살당하기까지 또 사흘이었습니다. 정 공의 행적은 총 엿새로 끝이 났습니다.”
“어찌 그런 속도로…….”
일행 중 한 명이 탄식하다 말고 입을 다문다. 그 이후에 태모산성이 정연신의 죽음을 대대적으로 공표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
무림맹회의 무인들은 저마다 제갈청아의 눈치를 살폈다. 임시 총군사가 짧은 시간이나마 마광익주 밑에서 객원무사로 있었음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 와중에 제갈청아가 신임 자색에게 한 수라도 배웠다면 옅게나마 사제지간이라고 봐야 했다.
입황성 신임 자색의 죽음.
정연신은 여러모로 논란이 많은 인물이었다. 단기간에 급속도로 고강해진 무위부터 그랬다.
하늘이 내려 준 자질로 무수히 많은 무공을 창시하고 다닌다는 소문은 물론, 근래에 강호 전역에 퍼지고 있는 ‘멸절사마총람’의 집필자가 정연신이라는 위험천만한 말도 있다.
죽지 않는 불사지체(不死之體)를 타고나 다시금 항주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낭설도 존재했다.
깨끗하고 확실한 정보를 접하기 힘든 난세다. 어떤 소문도 쉽게 믿을 수가 없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제갈청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에는 검성 현소백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목숨이 얹어져 있었다.
그 책임은 무게추와 같았다. 언젠가 마광익주 정연신이 등에 지고 있던 것과 동일했다.
“그나저나 신의의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라고 하던데… 당연히 총군사께서 전적으로 맡으실 일이지만, 저로서는 먼저 어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미 줄을 선 환자들이 많을 거예요.”
공손민이 허리춤의 검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제는 상당히 희미해진 기억 속, 언젠가 연화나타가 빌려 썼던 병장기였다. 공손민의 가보이기도 했다.
“기다려야죠. 새치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
짧게 대꾸한 제갈청아가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목가장의 총관이라는 학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셈을 치르고, 잠시 머물 전각을 배정받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림맹회 일행은 묵묵히 장원 한구석에 있는 전각으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목가장 민초들의 말이 트였다.
“정파는 정파인가벼.”
“무림 호족들이 많이 섞인 것 같던데, 크게 경을 치는 줄 알았습니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외지인들을 경계하던 사람들은 한시름을 놨다. 대뜸 와서 내상 따위를 치료하라며 강짜를 놓는 무림인들이 구름처럼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칼잡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주변의 분위기가 검날처럼 곤두서 있었다.
그렇게 날이 저물어 갔다.
* * *
저녁나절이었다.
석양의 주황빛 숨결이 담벼락으로 구붓하게 떨어졌다.
그 와중에.
돌연 한 남자가 무림맹회 일행이 머물게 된 전각의 문을 쾅 두드렸다. 문 바로 앞에서 경계를 서던 무인의 눈이 커졌다.
그는 옆에서 무언가가 지나가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마치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같았다.
‘고수……!’
침입자의 얼굴을 보고는 더욱 놀랐다. 기다란 귀에 아름다운 얼굴이 인세를 벗어나 있었다.
소문의 영촉신의다.
먼지투성이의 황삼을 차려입었는데도 거목 같은 존재감을 지녔다. 말 그대로 커다란 나무가 뿜어낼 법한 목기(木氣)였다.
제대로 된 기감을 지닌 무림맹회의 무인은 몹시 청량한 기운을 느꼈다.
“이리 오거라!”
신의는 소란을 피운 이들에게 의술을 베풀어도 될는지 시험에 보겠다며 일행의 장을 불렀다.
맹주의 목숨이 달린 일. 경계 무인은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영촉신의의 조화로운 이목구비와 풀잎향 같은 체취도 그러한 태도에 한몫했다.
제갈청아가 곧장 밖으로 나왔다. 무림맹회의 다른 무인들도 재빨리 병장기를 챙기며 저마다 머물던 방을 박차고 나섰다. 공손민도 마찬가지였다.
쿵! 쿵쿵!
“문짝을 다 부숴버리는구나. 변상은 하고 가겠지?”
혀를 끌끌 찬 신의가 뒷말을 덧붙인다. 이래서 강호인들이란.
“아.”
제갈청아가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문득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은 신의가 활짝 열린 방문 너머를 턱짓했다.
무림맹회 일행이 신주단지처럼 모셔 온 관이 거기에 있었다.
“저것 때문에 온 겐가?”
“예, 목(木) 어른. 소생은 제갈가에서 청아란 이름을 쓰고 있사온데, 항주 무림맹회의 군사 된 도리로…….”
“아니.”
공손히 포권을 올리던 제갈청아의 말이 끊어졌다. 신의라고 알려진 사내가 어느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의술로 어찌할 수 없네. 그런 상태야.”
“…영촉신의께서 신묘한 술법무공을 부리신다고 들었습니다. 한 번 직접 살펴봐 주신다면…….”
제갈청아의 말에 신의의 미간이 모였다.
“강호에서 쌈박질이나 일삼는 자들에게 그처럼 귀한 재주를 베풀어 달란 말인가? 그리고 저건 내 소관이 아니라니까? 저치를 저리 만든 놈을 찾아가야 해결될 일일세. 혹은 그놈이 죽거나.”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대가라면 무엇이든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애초에 자네들 순번도 아니었네. 그저 머리나 식힐 겸, 침 놓을 때 손끝이 떨리지 않도록 마실을 나온 김에 잠시 들른걸세.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게.”
그때였다.
돌연 담장을 타고 수십 명의 복면인들이 떨어졌다. 사박사박하고 흙을 밟는 소리가 나지막했다.
바깥 무인들의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야습해 온 것이다. 볼 것도 없이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다.
으레 있을 법한 일이다.
뛰어난 재주는 탐욕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것이 사람 살리는 의술이라면 더욱 그랬다.
당연히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닐 것이다.
유유자적한 신의의 태도만 봐도 알 만했다. 그는 곧장 반응하여 병장기를 짚은 무림맹회의 무사들과는 달랐다.
산책을 나올 때마다 겪는 사건인 것마냥 몹시 익숙해 보였다.
“신의께선 매번 똑같은 말씀만 하시는구려.”
침입자들 중 한 사람이 검파에 손을 올렸다. 방금 시술을 거절당한 무림맹회 측을 아군으로 여기는 기색이었다.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라? 아주 우스운 소리요. 이제 인근에는 환자도 얼마 없지 않소?”
“그래서?”
뒷짐을 진 신의가 물었다. 그의 발 주변에서 몇 가닥 돋아있지 않은 풀잎들이 살짝 흔들렸다.
전신의 분위기에서 묻어나는 느낌이 난공불락의 성벽과도 같았다.
“사지가 잘린 이들도 한 식경이면 고쳐낸다고 들었소. 그처럼 하늘이 내린 재주를 아끼는 건 죄악이오. 따라오란 말은 않겠소. 칼을 든 자라 하여 차별하지 마시오. 환자 명부에서 이름을 밀어내지 말란 말이오.”
복면 사내의 말에 신의가 웃었다.
“이맘때면 급체한 민초들이 몇 명이고 여기로 올라오곤 한다네. 내겐 그들이 우선일세.”
“잘린 팔다리 따위도 하루 만에 붙여 버린다는 자가 어찌…! 정녕 강호인을 희롱하는 거요?”
“급체한 민초가 오늘 밤 숙면을 취하면, 다음 날에는 무조건 벼 이삭이 두어 마디는 피어오르네. 흉년이라 해도 마찬가지지. 하지만 자네들은 무엇을 만드는가? 이 나라에 어떤 보탬이 되지?”
빙글거리는 신의. 뒷짐을 진 채 신랄하게 말을 내뱉는 모습이 묘하게 세속을 벗어난 듯했다.
제갈청아를 비롯한 무림맹회의 무인들이 보기에, 신의의 언행은 누가 봐도 격장지계였다.
어떤 강호인이 듣건 한 귀로 편히 흘려보낼 수 없는 말. 도발에 일가견이 있는 것이다. 당장 검성을 부탁하러 온 고수들마저 여기저기서 호흡이 흐트러졌다.
제갈청아는 차마 입술을 열지 못했다. 신의는 명족이다. 입에 발린 말이나 거짓 따위가 통하지 않는다는 의미. 그녀는 고민에 잠겨야 했다.
무력을 쓰는 것 외에 저 괴팍한 의원의 협조를 받아낼 방도가 존재하는 것인지.
“제법 긴 생애를 살아오며 겪은 바로, 강호인은 우마만도 못하다네. 나는 살리는 존재일세. 죽이는 자를 어찌 우선시하겠는가?”
신의가 빙긋 웃으며 말할 때였다.
“참된 의원이시다.”
불현듯 울린 중얼거림이 모두의 귓가에 와 닿았다. 혼잣말에 가감 없는 감탄마저 섞여 있었다. 누가 들어도 진심이었다.
좌중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담장 위로 올라갔다.
보고도 믿기 힘들 만큼 빼어나게 수려한 청년이 담벼락에 걸터앉아 있었다. 방금 떨어지기라도 한 것마냥 생기가 넘치는 팔 한짝을 어깨 위에 걸친 채였다.
그 너머로 펼쳐진 노을이 흐리게 빛을 잃는다. 동공이라도 운용하고 있는 건지, 희끗한 내공의 아지랑이가 온몸은 물론 절단된 팔에서도 끊임없이 일렁였다.
초월적이다.
광대한 석양을 대신하는 존재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