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47
◈ 조우
다음날 아침에 임무 준비가 끝나 있었다. 정연신은 각종 물품과 건량, 여비가 든 행낭을 받았다.
청색무사로서 그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더하여 입황성 무복에 새겨진 글자를 비단 조각으로 덮었다. 제법 절묘했다.
“명문세가들을 상대해야 하는 자리다. 위험한 임무이니만큼 변복은 하지 않는다.”
마진의 말에 총관부에서 나온 도유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황성의 정식 무복에는 천잠(天蠶)이란 영물의 실이 들어갑니다. 상당히 값진 물건이라, 급소 부위마다 한 줄씩이지요. 종으로 수를 놓았습니다. 횡으로 오는 참격이나 찌르기로부터 극히 찰나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철판을 덧대면 고수들의 눈썰미를 피할 수 없으니 말이다. 괜한 이목을 끌겠지.”
“아아니 이걸 가리라니! 나와 정 소협의 전부인 것을!”
헌원창이 짐짓 광분하는 기색을 보였다.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황 자를 매만지면서, 오른손으로는 정연신의 어깨 밑 황 자를 쓰다듬었다.
아주 기괴했다. 정연신은 약간 떨어졌다.
헌원창이 살짝 울상을 만들며 말했다.
“화산파 때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저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이제 입황성이 곧 나일진대!”
“입황신협을 조용히 시켜라.”
마진의 차분한 말에 백미려가 다가갔다. 그제야 움츠러드는 헌원창이었다.
슬쩍 멀어진 그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궁시렁거렸다. 후배인 신소빈이 고개를 저었다.
“섬예 선배와 동기 아니에요? 잠행이 제대로 될까 모르겠네.”
“헌원 소협은 겉보기와 달라. 네 기우일 거야.”
“그랬으면 해요. 저도 첫 임무고, 이제 손을 맞춰 볼 테니까. 섬예 선배의 무공도 승단식 때 잠깐 견식한 것뿐이죠? 명성만큼의 실력을 강호행 때도 보여 주실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신소빈이 입매를 올렸다. 당돌한 미소였다.
정연신은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발목만 잡히지 않길 바랐다.
청색이 된 걸로 끝이 아닌 바, 다음 승단 무복인 흑색은 대주의 격을 지닌다 했다.
백색에서 청색보다도 아득한 차이가 있다고.
‘한 걸음 디뎠어. 이제 임무 실패는 없어야 해.’
혈염교 칠사도 제압이 실패했을 때 느낀 불안이 떠올랐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황보세가의 소가주가 태양신맥이든 뭐든 의미가 없는 이유였다.
그저 공적을 쌓아나갈 뿐이다. 정연신은 마진에게 포권했다.
“나중에 뵙지요.”
“그래, 네가 임무를 완수하는 순간 황보세가와 부딪친다. 그때 보도록 하지.”
마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어 잠깐 침묵한 뒤에 다시 입을 열 때는 입매의 흉터가 머쓱해 보였다.
“······임무는 실패할 수 있다. 네 안위를 먼저 생각해.”
마광익주로서 나온 말이 아님을 안다. 정연신은 숙부에게 묵례했다.
외조부 마연적과는 달랐다. 온전히 죄책감을 느끼고 계속해서 다가오려는 마진을 마냥 밀어낼 수는 없었다.
정연신은 살짝 시선을 돌렸다.
“대주님도 나중에 무리하지 말고요. 황보세가주가 산동에서 손꼽히는 고수라던데.”
“비무가 아니라 전쟁이다. 합공을 해야지.”
마진이 슬쩍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실망이라는 듯이 고개를 저은 정연신은 옆에 있던 갈색 준마에 올라탔다.
엉덩이를 탄탄하게 받치는 안장을 느끼며 말의 목을 살짝 두드렸다.
정가장에 살 때는 천리마 같은 삶의 동반자를 생각했다. 달랐다.
입황성은 준마를 쉴 새 없이 바꿔대는 곳이라 말에 정 붙이기가 힘들었다.
“역참까지 잘 부탁한다.”
몸을 기울인 정연신이 속삭였다. 여러 마광익 선배들이 배웅해 주는 가운데 고삐를 들었다.
양옆에서 헌원창과 신소빈 또한 말을 타고 다가왔다.
“다시 강호행이구려. 늘 두근거리는군.”
헌원창이 씩 웃으며 말했다. 미덥지 않다는 듯 눈을 흘기는 신소빈을 잠깐 본 정연신이 고삐를 튕겼다.
입황성 청색무사로서의 첫 번째 임무였다.
* * *
입황성의 표식을 가린 것만으로 다른 세계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선배들 없이 일행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일까. 헌원창도 아닌데 허전함을 느꼈다.
뭇 사람들이 존중이나 두려움을 표하던 배경이 사라진 것이다.
‘무림에서 입황성 고수들이 겪는 멸시도 있다고 들었는데.’
정연신은 생각했다. 아직은 겪지 못했으니 다가오는 바가 다를 수밖에.
목적지는 남직례 휘주(徽州)였다. 양양에서 휘주까지는 조금 둘러 가는 역참로가 있었다.
지금껏 말의 휴식 시간을 길게 가져가야 했던 임무들과는 달랐다.
일행은 빠르게 내달렸다.
신소빈은 명문세가의 직계답게 기마에 능했다.
승마를 오래 하는 건 또 다른 일인데도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헌원창 또한 아주 잘 달렸다. 강호 유람도 임무 후에 즐겨야 제맛이라고 했다.
스무 날이 흘렀다. 정연신에게 경공으로 성 사이를 주파할 만한 공력은 없었다.
백색인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말에 의지해야 했다.
휘주 근처에 당도할 때까지 별다른 일이 없었다.
녹림의 산적과 수로채의 수적이 지천에 있다는데도 그랬다.
헌원창이 입황시를 치르고자 산서에서 양양까지 올 때는 숱하게 만났다는데, 다 허풍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감이 잡히는데.’
그동안 정연신은 검가를 연마했다. 점차 음공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었다.
월령조화결의 구결을 해체하는 일도 함께였다. 최소한 용봉지회가 끝나기 전에는 새로운 심공을 창안할 수 있을 듯했다.
우우웅.
휘주를 앞두고 있는 관도가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길가에 유난히 커다랗게 서 있는 은행나무 아래, 정연신의 양반다리 위에 놓인 북명검이 울었다.
입황검은 없다. 소속을 숨겨야 하는 까닭에 청명에게 맡겼다.
‘검명 크기를 키우는 건 쉬워졌어.’
내공을 검에 불어넣어 쉽게 부러지지 않도록 한다. 흔한 수법이었다. 고수들의 세계에서는 그랬다.
정연신은 더 나아갔다.
그는 소리의 본질을 느꼈다. 시극경의 묘리로 진기 두 가닥을 나누어 검신에 넣었다.
잘게 출렁이는 기의 물결이 거세질수록 소리가 커졌다.
구우웅!
진기의 신비로움은 놀라웠다.
타고난 감각으로도 힘겨울 만큼 극도로 섬세한 운용이 들은 바 없던 울림을 가져왔다.
음의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었다.
여기서 퍼지는 음률에 발산형 진기를 실어넣으면 음공이 되는 것이다.
‘이 무공의 위력도 결국 내공량이 정하겠어.’
문제는 더 있었다. 음공 역시 심오한 무학이라 했다.
수련의 세월이 얕은 정연신의 검가는 적아의 구분이 힘들다. 그는 헌원창과 신소빈을 떠올렸다.
음공의 시전 직전에 내공으로 귀를 보호하라고 전음을 보낸다? 그 정도 여유가 있는 싸움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 해도 성취감이 컸다. 일 대 다수의 전투에서는 큰 효용을 발휘할 테니까.
“검가라고 했죠? 역시 이목을 굉장히 끄는데.”
흰색 옷을 입은 신소빈이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였다.
그녀가 사박사박 다가와 무릎에 손을 짚고 허리를 굽혔다.
길게 묶은 머리칼이 윤기 있게 흘러내렸다.
정연신은 고수도 아닌데 머리를 저리 기르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근접 박투를 할 때 잡아채기 좋게 생긴 까닭이었다.
“미안하다.”
정연신은 상념을 흘려 보내며 사과했다.
휘주는 굉장히 큰 도시였다.
엄청나게 번화한 곳이라 고급 찻잎이나 은전 같은 물품을 실은 상단들이 수시로 안팎을 오간다고 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관도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건너편 길에서 이쪽을 흘끔거리며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많았다.
“나는 듣기 좋소! 제법 운치가 있거든.”
헌원창이 건량을 뜯어먹으며 싱글거렸다.
거칠 황의 글귀를 가린 까닭일까. 주목받는 일이 묘하게 기꺼워 보였다.
그때 천천히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아하니 용봉지회에 참석하는 자들인 듯한데. 실로 안하무인이로군.”
“백주 대낮에 싸움도 없이 검명을 울려댄다? 알량한 무공을 뽐내고자 하는 게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지.”
비범한 기도를 지닌 젊은 남녀였다.
고급스러운 황색 비단 무복을 입었는데, 정연신은 그들의 허리춤에 걸린 검을 먼저 봤다.
무림인들이었다. 범상치 않은 가문 출신들로 보였다.
헌원창처럼 영웅건을 이마에 맨 청년과 눈매가 조금 올라간 여인이다.
둘 모두 스무살 정도로 보였다. 얼굴에서 조금 앳된 티가 났다.
뒤로는 수행인들로 보이는 무리가 있었다.
헌원창이 뭐라 하기 전에 정연신이 먼저 일어섰다.
“제가 경솔했지요. 두 분의 말씀이 마음 깊이 와닿습니다.”
정중하게 포권하자 남녀의 자세가 변했다. 마치 오랜 시간 예법을 배워 온 듯 똑같이 답례한다.
거의 반사적인 행동으로 보였는데도 절도 있는 몸가짐이었다.
“······잘못을 쉬이 인정하는군. 보기에 나쁘지 않아.”
“우리가 짜증이 나서 기파를 내비친 탓일지도 모르죠. 겁을 먹었을 테니.”
두 남녀 모두 오만하면서도 품격이 있었다. 바로 용봉지회가 떠오를 정도였다.
명문세가의 후기지수들이 대거 참석한다고 했다. 이들 역시 그럴 것이다.
“그대의 이름과 사문은?”
남자가 턱을 살짝 치켜들면서 물었다.
천하의 명가에도 다양한 군상이 있다고 했다. 예의를 따지는 것도 그랬다.
검룡 위지묘화처럼 겸손한 이들이 있는 반면, 명문 정파의 오만한 후기지수들에 대한 이야기도 드물지 않았다.
‘무림세가의 인물들 같은데.’
정연신은 생각했다. 터잡은 지역에서 왕처럼 행세하는 무림 호족들이라면 이럴 수 있다.
용봉지회 같은 사람들 간 교류가 빈번하지 않은 시대였다.
자신의 세상에서 왕족처럼 살아왔으니 황보세가의 노역 사건 같은 게 일어나는 듯했다.
청년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뭘 그리 생각하나? 숨김없이 얘기하라.“
“추실문(追實門)의 구과(求果)라 합니다.”
“추실문? 들어보지 못했어. 근본 없는 자로군.”
청년의 옆에 있던 여인이 가차없이 말했다. 두 사람의 얼굴에 희미한 멸시가 어렸다. 어조도 변했다.
청년이 두꺼운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보다시피 우리는 정도 명문세가의 혈족이다. 황보세가를 들어봤겠지? 용봉지회에 참석할 정도문파는 내가 모두 알고 있는 바, 네 사문이 정과 사의 중간에 자리한 문파라면 좋게 보낼 수 없겠구나.”
“계도해야겠어. 너, 검명을 일으키는 경지를 허투루 쓸 수 있으니.”
여인이 한걸음 나서며 거들었다. 위세를 부려 감정을 충족하는 데 아주 익숙해 보였다.
“······.”
황보세가라니. 조금만 더 가면 휘주이긴 했다. 그래도 정연신은 순간 믿기지가 않았다.
마진에게 받은 소가주의 용모파기에 그려진 모습이 늦게 떠오를 정도였다.
얼굴이 닮았다.
청색 승단을 기념하는 연회 때 마진의 취기 어린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을 떠나간 누이, 정연신의 어머니도 실로 어처구니없게 정가장으로 시집가게 되었노라고.
강호의 운명은 문득 불어닥치는 비바람과 같다고 했다. 이런 상황도 그와 다르지 않은 걸까.
뒤에서 지켜보던 헌원창과 신소빈의 기파가 강해지는 걸 느꼈다.
긴 시간을 생각했는데 빠르게 끝낼 수도 있겠다. 그는 부처와 원시천존께 감사를 전했다.
굳이 참을 이유가 없다.
황보세가 소가주를 감당해내고 가문의 힘까지 동원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바, 애초에 정파의 영역에서 칼부림을 해야 하는 임무였다.
‘명분은 확실히 가져가야겠지.’
우선 포권으로 모았던 손을 내리고 입술을 열었다.
“근본을 입에 담다니.”
정연신은 본래 성격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황보세가의 위명이 높다 하나, 본문의 이름을 듣고도 태도가 무례하군. 강호의 예의가 그렇던가? 네 모욕이 사문의 명예에 흠집을 냈구나. 서로가 서로의 흠을 말한다. 무림인이 무엇으로 더 얘기할까.”
“뭐······?”
겪어본 적 없는 일인 걸까. 일순간 남녀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정연신은 어느새 모여들기 시작한 구경꾼들의 기척을 느꼈다.
그는 또렷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먼저 예를 취해 사과를 했다. 그대들의 무도한 언행을 대하고도 사문과 이름을 밝혔지. 황보세가를 입에 담으며 근본이 없노라 이야기한다? 그대들이라면 참을 수 있을까. 비무를 청한다.”
“말이 청산유수로구나.”
청년의 입꼬리가 말려올라갔다. 그가 팔을 들어 고운 미간을 찌푸린 여인을 뒤로 물렸다.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뚝에 핏줄이 솟아있었다. 기혈을 엄청나게 연마한 듯했다.
“좋다. 용봉지회에 정사 중간의 문파를 초대한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 내 별호는······”
“궁금하지 않다. 오라.”
놈의 말을 끊은 정연신은 천천히 북명검의 검파를 움켜쥐었다.
문득 목이 날아갔던 심무련의 검예화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