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48
◈ 조우(2)
“연신, 그 아이를 저리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늙은 목소리가 울렸다.
입황성의 성주 집무실이었다.
자줏빛 장포를 입은 늙은 무인과 흑색 무복의 마진이 입황성주 앞에 공손히 앉아 있었다.
완전히 뚫린 벽면에 햇살이 드리웠다. 입황성주의 머리칼에 연녹색으로 맺히는 빛무리가 있었다.
마진이 부친을 흘겨봤다.
“다가갈수록 물러설 수 있습니다. 혈연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지요. 누이가 떠나고 어떻게 컸는지 짐작이 갑니다. 내놓은 자식이었다고 했습니다.”
“정가장 따위가 감히.”
정연신의 외조부, 마연적이 마진과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질색에 가까웠다.
“저희가 무슨 낯으로 그쪽 집안을 탓합니까? 멸문조차 몰랐다가 자질을 보고서야 혈족의 연을 말했습니다. 생면부지의 외조부에게 욕설 내뱉지 않은 것만 해도 군자라 할 수 있지요.”
성주의 앞이었다. 목소리 자체가 크지 않았다.
마진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하며 신랄한 이야기를 했다.
“어엿한 무림인으로 성장했으나 스물도 되지 않은 아이입니다. 그런데도 사리에 밝고 선후 구분이 명확하니, 오히려 어른보다 대하기 어렵습니다. 손아귀에 두려 하지 마십시오.”
“무턱대고 큰 가문의 득을 보려 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독으로 돌아올 걸 아는 까닭이겠지. 강풍에 휘둘리지 않고 혼자 오롯이 서려고 해. 허나 그렇기에.”
마연적은 한마디씩 똑바로 내뱉었다.
종래에는 마음을 짐작하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는 입황성주를 바라봤다.
“더더욱 방치해서는 아니 됩니다. 천자, 황제 폐하께서 하늘이라면, 연신이는 그 창천에서 가장 빛나는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신검단주로는 모자랍니다. 연신이는 능히 성주님의 곁에 둘 만한 보검이 될 겁니다.”
“그건 성주께서 정하실 일입니다. 은퇴하신 아버지께서 논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친에게 면박을 준 마진이 눈을 돌렸다.
시선 끝에 가장 존귀한 사람이 있었다. 입황성의 모든 이들이 받들어 모시는 절대자였다.
입황성주의 얼굴에는 좀처럼 변화가 없었다. 섬예를 편애한다는 이야기가 이유 없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태양의 광휘와 같다. 언뜻 따스하게 다가와도 무심히 세상을 비추는 햇볕이었다. 늘 그래 왔다.
미동도 하지 않던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계속해 보라.”
그녀가 말했다. 나무둥치에 홀로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도 존재감이 달랐다.
마진이 침을 삼켰다. 자색고수조차 승산을 논하기 힘들다는 절대적인 무력은 모르는 이가 드물다.
명나라가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스무살의 외모도 그랬다.
양양 사람들에게 그녀는 살아있는 옥황상제였다.
“아직은 머나먼 일이지요. 허나 성주께서 은퇴, 금분세수를 말씀하신 지가 벌써 수십 년입니다.”
마연적이 자신의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 아이를 임무로 내돌리지 않고, 우선 십 년간 본성에 두고 가르쳐 무인으로서 완성시키는 겁니다. 어린 나이에 강호의 천박한 물이 들지 않도록······. 그 과정에서 혼처를 정하고 무력을 쌓다 보면 달라지겠지요. 온전히 성주님만이 휘두를 수 있는 신검이 될 겁니다.”
“······연적.”
입황성주가 입을 열었다. 미려한 얼굴에 감정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예, 성주.”
“네 마음에 삿됨이 없느냐?”
“삿됨이라 하심은······”
“너는 지금 전대 신검단주가 아니다. 입황마가의 혈족으로만 보이는구나. 가문의 영명을 드높이려는.”
“······.”
마진은 부친의 성격을 안다. 완전히 몰두하게 된 대상을 쟁취하지 못한 적이 없다.
신검단주에 오를 수 있었던 것 또한 그런 성정 덕분일 것이다.
문득 마연적이 고개를 숙였다.
“성주의 말씀이 맞습니다. 참기 힘든 일이었지요. 신검단주의 보검을 현 단주에게 물려 줄 때가 참으로 참혹했습니다. 제가 성주님의 수십 년 친우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아버지! 말씀을 가려서 하십시오!”
커다란 덩치의 마진이 안절부절못했다.
“네 누이의 일이 아니면 네가 이런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지. 날 용서하지 않아도 좋다. 가문은 오래도록 존속되어야 해. 우리는 죽어 진토가 되어도 우러름 받으며 불멸의 삶을 누릴 거다. 본디 인간에게 남는 건 이름이 전부임에.”
“거기까지 하라.”
입황성주의 나지막한 음성이 마연적의 절절함을 밀어냈다.
“섬예의 일은 내가 정하노니, 너는 이제 혈족의 권위를 앞세우지 마라.”
영롱한 목소리가 묘한 초월성을 띠고 있었다. 천하의 정점에 뿌리내린 나무 위에 그녀의 옷자락이 스쳤다.
사박.
새하얀 맨발을 뻗어 천천히 내려선 입황성주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투명한 얼굴 위로 햇빛이 살짝 내려앉았다.
“마광익주는 지금 출정하는 게 좋겠다. 섬예를 돌보거라.”
그녀가 마진을 향해 말했다.
“명을 받듭니다.”
몸가짐을 더욱 공손히 바꾼 마진이 포권을 올렸다.
* * *
정연신은 가만히 서서 생각했다.
심무련 후기지수의 목을 쳤을 때와는 달랐다. 보는 눈이 많은 자리였다.
휘주까지 펼쳐진 관도는 아주 컸고, 지나다니는 행인들은 끝을 모르고 늘어났다.
정파 무림의 영역이다. 살해의 명분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남궁세가까지 적으로 돌릴지도 몰라. 휘주에서는 감당을 못 해.’
여기서 죽일 수는 없다. 괜찮다. 그에 준하는 수치심을 안겨 주면 될 테니.
정연신은 총관부 도유원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입황성은 임무 대상의 용모파기를 갖추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혈염교의 칠사도 임무 때도 그랬다.
이처럼 오래 준비한 일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고 했다.
용모파기란 얼굴 특징이 그려진 그림인 바, 떠오른 모습이 눈앞의 사내와 닮아 있었다.
의외의 조우였다. 당황한 탓에 곧바로 대조하지 못했다.
‘놈이 그냥 지나쳤다면?’
정연신은 반성했다. 임무와 무공 수련을 저울질한다면 당연히 임무였다. 주변을 살피길 게을리하지 않아야 했다.
그가 잠시 상념에 빠진 사이였다.
“내 별호가 궁금하지 않다고? 네 말이 우습다. 근본도 없는 잡것이 말도 안 되는 오기를 부리는구나.”
황보세가의 청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연신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네 세상에 빠져 있는 것도 적당해야 할 일이다. 황보세가? 천하에 두고 보면 작아. 넌 하잘것없다.”
“······실성한 놈이었군. 보통으로는 부족하겠어.”
청년의 입매가 내려갔다. 놈이 성큼 다가왔다. 무작정 내딛는 듯해도 법도가 있는 발걸음이었다.
보법의 상승 공부가 녹아있다는 게 단번에 느껴졌다. 진기의 파동이 심상치 않다.
걷는 동안 어떤 대응도 가능해 보이는 몸가짐이었다.
‘좋은걸.’
정연신의 시선은 청년의 몸을 완전히 시야에 가뒀다. 비무가 시작된 순간부터였다.
황보세가란 이름이 나오자마자 몰려든 구경꾼들이 자신을 안쓰럽게 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침내 정파 팔대세가의 무공을 대한다. 세속 무학의 극치를 달린다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정연신은 한 발 내디뎠다. 정가동공의 진기가 발밑 용천혈에 맺혔다.
환익보의 첫걸음이었다. 뒤꿈치에서부터 흙먼지가 살짝 피어올랐다.
팔대세가 무공과의 격 차이를 가늠해 볼 생각이었다.
스릉! 콰악!
황보세가의 청년이 칼을 뽑으며 진각을 내리찍었다.
앞으로 기울어진 상체의 허리춤에서부터 보검의 눈부신 칼날이 솟아올랐다.
극히 좁은 타원을 그린 검로가 그대로 뻗어나왔다.
정연신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쩌엉-!
손등으로 칼의 옆면을 튕겨냈다. 지켜보던 무인들의 눈이 커졌다. 이곳의 누구라도 믿기 힘든 기예였다.
정연신은 손을 털었다. 진동과 함께 와닿은 놈의 검력이 가벼웠다.
이미 사선으로 나아간 환익보의 발걸음 덕이었다. 검격의 경파를 완전히 빗겨 흘린 것이다.
“뭣!”
놈의 표정이 멍해졌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이번에는 정연신이 나아갔다.
퍼엉!
시극경의 진기 증폭과 함께 뻗은 왼팔에서 시화무극권의 경력이 터졌다.
놈이 반사적으로 들어올린 검이 그대로 밀쳐 올라갔다.
이미 정연신의 온몸에 퍼진 진기가 전신 혈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오른쪽 허리의 신유혈(腎兪穴)이 내공으로 불타올랐다.
삽시간에 척추기립근과 아랫 허리의 대요근이 강력한 힘을 품었다. 이어진 연환은 찰나였다.
몸을 비틀면서 오른쪽 주먹을 직선으로 뻗었다. 놈의 명치에서 퍽 소리가 울렸다.
제대로 꽂혔다. 황보세가 옷감의 매끄러운 감촉이 권면을 감싼 순간이었다.
시화무극권 진벽의 경파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갔다.
쾅!
놈의 몸이 포탄에 맞은 것마냥 날아갔다.
정연신은 천천히 오른쪽 다섯 손가락을 펴고 내려다보았다. 투로가 명확했다.
마광결이 독문무공에 녹아들고 있었다.
“황보세가의 무학은 깊은 듯한데.”
그가 입을 열었다.
“넌 별거 없군.”
담담한 말이었다. 음성에 실망감도 섞였다.
분명히 입황성의 용모파기와 닮은 얼굴이다. 그래도 저런 놈이 황보세가의 소가주일 리는 없었다.
태양신맥의 천재라고 했다. 예전에 본 백기린 남궁화신도 황보세가의 소가주와는 손을 나누지 않았다고 들었다.
연배의 차이가 있어 필패를 예상했다고.
“소가주는 아닐 거야. 이공자 정도 되나?”
정연신의 물음에 대한 답은 없었다. 모두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문 까닭이었다.
어느새 관도에 몰린 구경꾼들의 숫자가 상당했는데도 그랬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청년과 함께 시비를 걸었던 여인의 표정이 망연해져 있었다.
쓰러져 경련하고 있는 놈을 바라보는 시선에 불신이 묻어나왔다.
“대체 어떻게 잡것이······. 말도 안 돼······”
“죽이지 않았어. 황보세가라면 요상약 정도는 있겠지? 먹으면 거뜬히 일어날 거다.”
“이······!”
고개를 홱 돌린 여인의 눈이 앙칼졌다. 치켜올라간 눈꼬리에서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너, 기억해 뒀어. 난 황보명린(皇甫鳴潾)이다. 추실문의 구과. 잊지 않겠어.”
“네 손속을 받아줄 여유도 있다. 비무를 이어갈까?”
“······.”
“무림세가라면 애송이들만 보내지 않았겠지. 어른은 안 계신가? 소가주는?”
그때 누군가가 정연신의 팔을 잡았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놀라고 있던 신소빈이었다.
동시에 그녀의 입술에서 기파가 번졌다. 전음이었다.
-선배. 도발이 조금 과하지 않아요? 근처 지리는 살펴야죠. 황보세가에서 몰려오면 추격전이 될 텐데.
전음으로 말하는데도 속삭인다. 완전히 겁을 먹은 듯했다. 정연신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도발이라고? 어떤 게.’
그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천천히 걸음을 디뎠다.
‘임무가 전부야.’
몸담은 입황성에 특히 기꺼운 점이 있다. 민생이란 명분이 뚜렷하다는 것이었다.
살기 위해 쌓아야 하는 공적이 깨끗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랬다.
정파와 사파로 분류할 수 없는 문파를 정사지간이라 부른다.
현재 정연신 일행의 사문으로 가장된 추실문이 그렇다. 악질적인 행실을 지양하면서 협에 기치를 두지도 않았다.
이익과 명성을 위해 강호를 살아갔다.
‘그럼 정사지간을 흉내내야지.’
어느새 몰려든 황보세가의 수행원들이 있었다. 쓰러진 청년과 황보명린을 둘러싼 모습이었다.
정연신은 전신으로 진기를 순환시켰다. 동시에 발을 딛자마자 순풍 한줄기가 귓가를 감쌌다.
순간 황보세가의 사람들이 급격히 확대됐다. 그는 바람을 탄 잎새 같은 신법으로 모조리 뚫고 들어갔다.
“엇!”
“무슨!”
가지각색의 헛바람들이 등뒤를 스쳤다.
정연신은 누워있는 청년에게 단약을 먹이는 황보명린을 볼 수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게도 비무를 청한다. 근본을 입에 담은 건 너였지. 강호인이라면 받아들여.”
정연신이 황보명린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잠깐. 거기까지 하지.”
한쪽에서 호리병을 든 청년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술냄새가 훅 번졌다.
정연신보다 열 살쯤 많을까. 비단 무복을 입었는데도 행색이 낡은 듯 다가왔다.
입에는 양귀비까지 생으로 물었는데, 완전히 폐인의 몰골을 한 미남자였다.
검은 그늘이 내려앉은 눈으로 짓는 웃음이 나른했다.
“내 동생들이 말을 잘못했다지만, 그건 좀 심하군.”
놈의 전신에서 뜨거운 기운이 이글거렸다. 엄청난 열양(烈暘)의 신공이라도 익힌 듯 내뿜는 기세가 막강했다.
태양신맥. 정연신의 뇌리를 스친 단어였다.
용모파기와 완전히 일치했다. 놈이 바로 황보세가의 소가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