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28
◈ 남존 (7)
* * *
불안지유불(佛眼只有佛).
절세의 신공 궁술을 지닌 어느 군주에게 왕사(王師)가 내뱉었다는 말이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의미였다.
―그 기운… 미친놈에게 과분한 인연이 닿았음이다.
앞서 들은 목소리와 같다.
불문의 혜광심어를 연상케 할 만큼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는 음성.
무당 장문인께 듣는 첫마디가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
무인들이 천하제일검을 꼽을 때 반드시 언급되는 분. 솔직히 검객으로서 내 몸이 제법 괜찮게 닦였다는 칭찬을 기대했다.
‘검법과 안법은 불가분의 관계니까.’
한편 현공진인의 신형은 허공을 가로지르며 내게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굉장히 환한 태양을 등지고 계신 탓에 그림자만 보이는 인영.
화악!
살갗이 우그러지는 듯한 압박감이 점점 짙어져 온다. 온 천하의 자연지기가 날 적대하는 느낌이었다.
약한 현기증이 일었지만, 나는 짐짓 예를 취하는 척 자연스럽게 양손을 모아 올림으로써 몸의 균형을 되찾았다.
일석이조. 신검단주의 체면과 격조를 동시에 지킨 것이다. 대총관께서 보셨다면 칭찬이 이어졌을 터였다.
“입황성, 정가 섬예입니다.”
―섬가 정예에게 이르노니, 천하에서 가장 맑은 싹은 미치광이의 심상에서 자라지 않는다. 당연히 꽃을 피울 수도 없다. 네 한계가 그렇느니라.
기이한 음성이었다.
한 호흡에 날숨과 들숨이 제멋대로 튀는 느낌이다. 음성에 깃든 숨결이 불안정하고, 짧은 몇 마디에도 말소리가 뚝뚝 끊어졌다.
나는 물었다.
“싹은 삼청력, 꽃은 삼청력의 대성입니까?”
―애석하구나. 저팔계의 혀가 인삼과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너무나도 안타깝다… 차라리 용가가 그것을 얻었다면, 입황성은 지금쯤 난세의 태양으로 자리매김했겠지.
아무래도 현공진인께선 아주 가 버리신 듯했다. 불안지유불. 광인의 눈엔 모두가 광인으로 보일 테니까.
나는 아까 삼청력으로 추정되는 힘을 환익보에 실었는데, 현공진인의 말씀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런데도 출수하실 기세였다.
―아쉬운 일이다.
하아―
현공진인의 한숨이 흐릿한 검풍(劍風)으로 화하며 휘몰아쳐 오더니, 나의 발 앞을 채찍처럼 후려갈겼다.
순간 큼지막한 콰가각 소리과 함께 지면이 십여 장 넘게 패여 들어갔다.
정확히는 십 장 하고도 삼 척 오 촌 반 푼에, 언젠가 내가 떼어준 조카 혜아의 눈곱만큼이 더해진 깊이였다.
공격초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넓다. 몸에 닿았다면 호신강기가 바스라졌을지도 모른다.
범허 스님과 함께 정종 무학의 태산이라는 무당의 장문진인. 선제(先帝) 건릉 폐하의 몇 없던 칼 동무.
숨결조차 검풍이 된다.
‘신선…!’
그 멋스러움에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섰다. 동시에 새삼스러운 충격도 느껴졌다.
주화입마.
심법에 맞추어져 있던 심상이 크게 어긋나는 현상. 당연히 경혈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앓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무위를 깎아 먹는다.
입마에 빠진 세월이 현공진인쯤 된다면 크게 영락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고도 이 정도라고…?’
맞상대할 수 있을까.
많은 인연들을 두고 요절하게 될까 두려워졌다.
아직 신검단주 대리의 무공은 항주에서 본 소림의 방장 스님께 미치지 못하고, 지금 현공진인께선 주화입마란 두통을 심하게 앓고 계시니까.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공손한 마음가짐으로 말했다.
“초면에 외람된 말씀이지만, 상승의 검격으로 상단전을 자극하면 노혼(老昏:치매)쯤은 여반장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거듭 출수하실 요량이라면 후배가 선수를 가져가도 될는지요?”
“……!”
현공진인의 날숨이 내려앉은 이후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옥검, 옥엽, 옥암진인과 주세화의 눈이 커진다.
그들은 상상도 못 했던 말을 들은 것처럼 내 쪽을 홱 돌아봤지만, 그 이상 무언가를 하진 못했다.
입황성 자색.
그리고 신검단주 대리.
어느 문파의 장문인과도 동격 이상이어야 한다. 무당의 신선들도 존귀하지만, 나 역시 단오절의 그네 놀이를 탐내던 아이가 아니게 된 지 오래였다.
한편 이제 현공진인은 면전에 둥둥 떠 계셨다.
내 시야에서 태양을 온전히 가린 모습인데, 봉두난발로 흘러내린 머리칼과 잔뜩 헤진 도복이 돋보인다. 둘 모두 희뿌연 회색 빛깔을 띠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희끄무레한 안개를 붕대처럼 두른 탓이었다.
―내려가라. 광인과 연을 맺을 일은 없다.
“이것.”
섬예 정군자는 현공진인의 덧없는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스윽.
그저 손에 쥔 보자기를 가슴께로 올려 들었다. 천하제일협객의 머리가 담긴 상자였다.
입이 무겁다.
하지만 말해야 한다. 용 단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곧잘 잃을 수밖에 없거든. 내가 금분세수를 한 뒤에는 그들의 고향 땅을 찾아다닐 작정이다. 들러야 할 곳이 많아.
나는 입을 천천히 뗐다.
“무당의 장문진인께 전해드리고자 왔습니다. 고검진인께선 천하에 다시 없을 협객으로, 당시 항주의 어떤 강호인보다도 고매하셨습니다. 입황성 신검단주의 신분을 빌려 조의를 표합니다. 고절한 선기(仙氣)를 연마하신 덕인지 시신이 아직 온전하니, 장문인께서… 눈이라도 맞춰 주셨으면 합니다.”
조심스럽게 말을 맺었다.
하지만 현공진인의 반응은 무던했다. 상자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선. 대자연과 같은 무심함이 묻어났다.
―그것은 내 자연검(自然劍)의 검로를 가로막는 미혹이다. 떨쳐도 모자랄 판국에… 내려가라.
“장문인이 바뀌어야.”
―뭐라고 하였느냐.
나는 무던한 얼굴로 내심 움찔했다. 생각이 입 밖으로 흘러나간 것이다. 언젠가 항주에서 왼팔을 잃었을 때처럼.
‘왜지?’
하지만 깊게 고민할 새는 없었다.
“…….”
내가 들어 올린 상자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던 현공진인. 이 오래된 도가 절대자의 눈매에 짙은 노기가 맺혔던 까닭이다. 종잡기 힘든 감정 변화였다.
―서둘러, 가지고, 사라져라.
무당산의 새벽 공기가 이럴까. 오싹하리만치 서늘한 느낌이 번진다. 인근의 자연지기가 움직임을 멈춘 탓이었다.
내 미간에도 노기가 어렸다.
“타계한 사제의 시신을 외인에게 맡기는 것은 어느 문파의 법도입니까? 장문인께서 수습하셔야지요. 아니면 달리 누구의 격이 고인께 걸맞습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장문진인께서 무당을 대표하여 고검진인의 넋을 기려주셔야 마땅합니다.”
무당 장문인이 고검진인의 시신을 거부했다.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왜…?’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직도 뇌리에 늪처럼 펼쳐져 있다. 머리만 남은 본성 선배들의 모습이.
“정 공.”
순간 옥엽진인이 난처하게 웃는 낯으로 거리를 확 좁혀 오더니, 내 자색 장포의 어깨 자락을 잡았다. 면장 특유의 골치 아프게 질긴 힘이 느껴졌다.
“장문인의 상태를 생각해 주십시오.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오냐.
현공진인의 음성이 그 말을 끊는다.
―신검단주란 이들은 대대로 막무가내였다. 심지어 너는 아직 입신검을 갖지 못했음에도 내게 억지로 그 상자를 안길 기세로구나.
나는 그를 말갛게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나와 어울릴 성취는 되느냐?
현공진인의 물음에서 웃음기가 묻어났다. 산뜻한 느낌은 아닌 게, 깊은 우물에서 울린 것처럼 음산한 기질이었다.
명경지수의 화신에 가까운 나와 다르게 자기 자신을 잃으신 듯했다.
속으로 뇌까린다.
‘물어.’
내 마음 깊은 곳을 유영하던 신룡이 단번에 허리춤의 여뢰를 휘감았다. 순간 키이잉― 하고 평소보다 쨍한 진동이 일었다.
그에 스스로 뽑힌 신검이 내 발치까지 내려왔음은 물론이다.
선룡이화결(扇龍履花結)
어검비행(馭劍飛行)
저벅.
눈부신 검신을 밟고 서자마자 둥실 떠오르는 여뢰. 불문곡직하고 현공진인과 눈높이를 맞춘다.
이 순간 무당산과 끊임없이 몸을 부대끼는 강풍 속에서도 내 균형은 흔들리지 않았다.
“정 공!”
“장문인…!”
옥엽진인은 물론, 앞서 놀라운 기세로 주세화를 압박하던 옥암진인마저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늦었다.
이미 현공진인께서 팔을 뻗고 있었으니까.
후웅―
대기가 구붓하게 일그러진다. 출수 한 번에 천하를 논한다는 극성의 무당 면장. 나는 환강이 실린 오른손으로 맞받아쳤다.
세 명의 신검단주들께 가르침 받은 대로 여뢰를 강하게 디디면서.
* * *
산사태가 거듭된 무당산.
쿠구궁.
멀리서 또 한 번 둔중한 울림이 일어났다. 스스로 굴러떨어지던 바윗덩이가 끝내 절벽에 부딪쳐 산산조각 나는 소리일 것이다.
본래 무당산은 고적했지만, 지난 사흘 동안은 그렇지 않았다.
무당산은 분명히 천하에서 손꼽히는 영산(靈山)이다.
하지만 스스로 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광활한 산세에 막대한 반동을 일으킨 원인들이 존재했다.
“장문진인의 행방은?”
“불명입니다.”
“섬예 정 공도 마찬가지인가?”
“예, 이따금 어검비행의 궤적은 멀리서 관측되곤 합니다만… 불가의 법력이 현문안법(玄門眼法)의 시야를 흐트러뜨린다고 합니다.”
“현안궁(玄眼宮) 제자들의 노고가 크군.”
무당산에서 가장 높은 천주봉(天柱峰).
개중 삼청(三淸)이란 현판을 달고 궁궐마냥 거대하게 지어진 도관.
새하얀 구름 속에 잠긴 이들의 대화는 고즈넉했다. 저마다 바위 곳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모습도 그랬다.
한둘이 아니다.
삼봉진인 덕에 무당파란 이름으로 모였지만, 본래 무당산의 도관들은 그 위치나 무맥 따위가 제각각이었다.
지금도 각각의 도관이 궁(宮)이란 이름으로 무당의 대소사를 논한다.
그중 장봉 주세화는 만고궁(滿稿宮)의 주인.
사문에서 가장 어린 궁주지만, 그럼에도 수뇌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있었다. 당연히 발언권도 존재했다.
“이럴 시간에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당장 삼청관은 무사하지만, 장문인의 검격이 언제 이곳 천주봉까지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운무 속에서 늙수레한 음성이 울린다.
현공진인과 배분이 같은 노도사. 정기신 중 노쇠한 정(精)과 왕성한 기(氣)의 균형이 어긋남으로써 삼화취정이 깨진 지 오래임에도, 그의 목소리는 뚜렷하게 이어졌다.
“본파의 장문진인과 입황성의 자색… 칠성검진이 아니면 힘으로 다스릴 수 없는 자들인데, 무당의 일곱 기둥을 그와 같은 광인들에게 이동시키는 일은…….”
그때 무당파 차기 장문인, 옥암진인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무당산 아래의 양민들을 괴력난신들의 먹이로 내어주는 것과 다를 바 없지요. 이틀 뒤면 다시 문을 막으러 흩어져야 할 판국에.”
“큰일에 다소간의 희생은 불가피한…….”
“운현 주세화. 너는 군주가 아니라 무당의 도사다. 황족의 눈으로 양민들을 살피려거든 만고궁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
주세화의 입술이 다물어진다.
삼청관의 구름을 채운 무당 고수들의 이야기가 다시금 이어졌다.
“자색의 인사가 본산에서 명을 달리하는 일은 없겠지요?”
“신위가 경이롭습니다. 속가 제자들이 전해 온 풍문 중에 헛된 것이 없는 듯하니, 분명 괜찮을 겁니다. 장문진인과 손을 나누다가도 도주할 기량은 있겠지요. 심지어 신검단주 대리라고 하니….”
“현려(玄慮)… 아니, 고검 사숙은 어찌합니까? 섬예 도우에게 들려 있었다는 보자기 말입니다.”
“그 상자를 속히 가져오기 위해서라도, 본파가 집중하던 것을 마무리해야지요. 장문인께서 입마를 회복하시면 만사가 제자리를 찾을 겁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주세화는 한쪽에서 불안한 음성이 울린 이유를 이해했다.
정연신의 방문을 청하기 전에.
당금의 무당파가 문을 막아내는 동시에 힘쓰고 있었던 일.
‘마인(魔人).’
본래 현공진인의 제자로 무당 도관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인물인데, 어느 날 홀연히 산을 내려갔다.
그리고 십수 년에 걸쳐 신투(神偸)란 자에게 온갖 공부를 배운 뒤 올라왔다고 했다. 잠행과 은신, 음공을 비롯한 온갖 잡기들을 무당 심법에 녹여낸 채.
삼봉 무맥의 태극은 만물을 포용한다.
무당은 그자를 파문하지 않았다. 잠깐 길을 잃었던 도우(道友)로 다시금 받아들였다.
현공진인은 그때부터 이상해졌다.
헛것을 봤고, 기이한 검로에 집착했다. 무당산의 모든 궁(宮)을 아우르는 집무들마저 내팽개치고 폐관에 들었다.
그 연유를 파헤치는 일에 현안궁과 만고궁, 검엽궁(劍葉宮)의 도사들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끝내 ‘마인’이 연성했다는 신투의 내공에서 원인을 밝혔다. 북방 강호 특유의 어지러운 진기 구조가 그자의 잡기 전반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현공진인을 위해 금을 타던 음공.
제 스승에게 찻물을 진상하던 다도법까지.
사마외도의 기운은 없었다.
게다가 현공진인은 제자 앞에선 초월적인 절세고수가 아니었다. 그저 모든 의심을 덮어두는 노인에 불과했다.
마인은 진상이 밝혀지자마자 도주했지만, 광대한 산자락을 아주 떠나지는 않았다.
현공진인의 폐관을 유지시키는 것이 일생의 목표인 듯한 움직임이었다.
이따금 퉁소 따위에 실린 음공 기파로 옛 스승의 입마를 심화시키는 것만 봐도 그랬다.
‘즉, 상대는, 삼화취정의 내공 수발력을 지닌….’
무당 장문인과 신투의 공동전인.
심지어 소국의 국력이 동원되어야 구할 수 있을 법한 법보들을 장신구처럼 두르고 다닌다.
현안궁은 그 대다수가 은신의 공능을 지녔으리라고 추측했다.
이것이야말로 무당파의 어처구니없는 치부다. 어느 곳에도 드러낼 수 없는.
게다가 어렵게 청한 자색의 인사는…….
‘그쪽은 기대를 접어야겠지.’
주세화가 내심 고개를 저을 때였다.
불현듯 삼청궁에서.
“산사태가 멎었습니다! 아무래도 싸움이 끝난 듯합니다!”
“웬 삿갓을 쓴 외팔의 검객이… 본산을 오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만, 제자들 중 누구도 접근하기 어렵다는 전음입니다.”
두 가지의 보고가 연이어 울렸다.
몹시 급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