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73
◈ 나담 (6)
* * *
새하얀 구름의 바다에 묻힌 두 인영.
깡마른 노검객과 거구의 젊은 여인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허공답보로 구름을 디딘 채였다.
각각 한족과 요족이다.
요족 여인의 얼굴은 거칠었다. 오랜 싸움으로 헤진 병장기의 손잡이처럼. 하지만 그 회백색의 살갗만큼은 생기로 가득했다.
노검객과 달리 얼굴에 탄력이 있다. 자연스럽게 기량이 녹슬었다는 느낌도 전무했다.
늙은 검객이 입을 열었다.
“노곤하구만. 자네가 너무 젊어.”
너무 젊다.
연배에 비해 혈기왕성한 무인이라는 의미.
그녀의 한 손에 들린 언월도마저 그렇다. 기다란 자루가 온통 화려한 적색인데, 그 끝에는 유난히 커다란 준(鐏: 창끝에 끼우는 원추형의 쇠, 창고달)이 붙어서 햇빛을 산란시켰다.
힘을 중시하는 북방의 대장 양식과 명나라의 유려한 주조 형식이 뒤섞인 병장기.
실로 휘황찬란했다.
반면 노인의 검은 주인처럼 늙었다. 양식이라 할 만한 것도 없이 단출했고, 군데군데 녹이 슨 채 이가 빠져 있었다.
북방의 여인은 노검(老劍)과 노검객이 가련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애석하기 짝이 없다. 휘몰아치는 세월을 고스란히 얻어맞고만 있으니. 내가 살아온 시간이 너와 비슷할 것인데, 네 손아귀의 힘이 점차 빠지고 있음을 느낀다. 차라리 네놈이 요족이었다면, 내게 이보다 오랫동안 즐거움을 줬을 텐데…….”
“별게 다 애석하군. 험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얼굴에 주름도 생기고, 검병(劍柄:검 손잡이)에 얼룩이 지기도 하는 것이지.”
노인은 얼핏 보기에 여유로웠다.
하지만 그의 노쇠한 근육 줄기들과 오래된 경혈도 마찬가지인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한편, 그들의 주변을 가득하게 채운 풍경.
구름으로 이루어진 바다가 새털마냥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다. 온통 하얗고 날카로웠다. 눈부신 햇살만이 그 위에서 유유하게 찰랑거리는 광경.
거듭 일어났던 발경력의 영향이다.
그들의 싸움은 일천 합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새하얀 구름 아래에서 정연신이 문곡, 신투와 부딪치기 전에 충돌했으니까.
검성 현소백과 육원성군 염정.
온 천하를 통틀어도 이만한 싸움이 벌어지기란 쉽지 않은데, 그들에겐 아직도 여유가 있었다.
돌연히 동시에 사라지면서도 내공 호흡을 대화로 갈음할 만큼.
“네 꼴이 우습다.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가 나 하나를 잡아두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구나!”
“혀가 길구만.”
충돌까지 찰나였다.
쩌저저저정! 파아앙―!
상공에 태풍을 불러낸 듯한 파문이 터지고, 새털구름이 거대한 원형으로 밀려 나간다.
염정의 흘황십결(屹潢十結)과 검성의 독문검법인 무라검(武羅劍).
피차 양손이 흐릿해졌다.
연이어 휘두른 언월도와 검으로 햇살을 휘우뚱 일그러뜨린다. 순간적으로 두 날붙이가 끊임없이 부딪쳤음은 물론이다.
저마다 비어있는 손으로는 절세 장법을 시전, 반투명한 칼바람이 수십 가닥으로 뿜어져 나오면서 서로의 검로(劍路)를 교란시키고 호신강기에 불티를 일으켰다.
피차 실전 무공의 초월자들이다.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때마다 상공에서 커다란 충격파들이 꼬리를 물면서 터져 나왔다. 지진이 하늘을 타고 질주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늙은이, 너는 남제의 계략을 모른다! 야율이란 놈처럼 파격적인 이방인을 그저 방관하고만 있었을 것 같으냐?”
“계략? 굳이 알아야 하는가?”
“뭐라!”
“나도, 내 왕도 검(劍)으로 온전한 무인일세. 계략이라니. 요족답지 않네.”
낭인 출신의 무인에겐 도발과 촌철살인이 일상일 수밖에 없다. 염정의 미간이 흉악하게 찌푸려졌다.
“아직도 대전사 행세를 하는 것이냐!”
동시에 그녀는 언월도를 크게 한 바퀴 돌렸고, 그것만으로도 희끗한 충격파를 줄지어 뱉어낸 칼날이 낡은 검과 부딪쳤다.
쩌저저저저정!
그대로 언월도의 도신(刀身)이 이빨 빠진 검의 몸뚱이를 긁어대며 치솟았다.
상대의 병장기를 끊어쳐 올리는 흘왕십결의 전위 초식. 다시금 그들을 저며 오던 구름이 흰 파도마냥 아래위로 흩어졌다.
하지만 칼은 동강 나지 않았다.
화악!
허공으로 솟아오른 광풍이 그넷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빛살마냥 공중제비를 돈 검성. 상대의 도격 경파를 제멋대로 운용하는 기교다.
다음 순간 그의 깡마른 다리는 염정의 턱을 혜성처럼 올려 차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호숫가마냥 희끗한 파문이 일어난 것은 물론, 각법의 궤적을 따라 새하얀 구름 줄기들이 연기처럼 빨려 들어왔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흡인력(吸引力). 대기가 한차례 완전히 비어버린 것이었다.
염정은 완전히 뒤집어져 흰자위를 드러낸 눈으로 미친 듯이 웃었다.
“나를 오래 잡아두진 못할 것이다! 네가 칼질 외엔 아무런 공부(工夫)도 없는 놈이라서다!”
그녀의 품 안에서 회백색 환약 한 알이 저절로 튀어 오르며 입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우드득 씹히자마자 더욱 짙은 생기를 띠는 염정의 얼굴 가죽.
사람의 선천진기를 뽑아서 굳힌 환단(丹丸)이다. 시체로 탑을 쌓아둔 북방이기에 가능한 공부. 몽요지체의 여왕, 천하 신투가 알려준 비전이었다.
북방 강호인들.
요족이라면 태생적으로 동공을 대성한 격인데, 심지어 절세고수라면 십전(十全)의 초월자일 수밖에 없다.
검(劍)만 아는 검성과는 달랐다.
그가 조용히 물었다.
“듣자 하니 천하 남제야말로 진정한 북방제일인이라던데, 자네는 그 남제의 계략이란 것을 정확히 알고 있나?”
“네가 나를 떠보는구나.”
염정은 희게 까뒤집어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림없다. 우리 땅은 네놈들의 명나라와 달리 잃을 것이 없어서, 온갖 일을 몸소 시험해 본다. 당연히 문(門)을 다루는 기법도 너희보다 훨씬 발달했다. 너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남제가 서방제일인과 협력하여 이 땅, 바로 야율의 땅에서 싸움 신의 재림을 도모하고 있음을…!”
“잘 들었네.”
검성은 칼을 훅 털어내며 길게 호흡했다.
“본래 염천혈(廉天穴)을 제대로 한 번 얻어맞으면 머리가 혼미해져서, 짧게나마 순순히 속내를 터놓기 마련일세. 절세고수라도 예외는 없네.”
그는 굳이 천단광갑에 검격을 낭비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한 번씩 몸 내부에 큰 충격을 때려 박아 두는 편이 나았던 탓이다.
육원성군 염정의 내공방벽은 그 주인처럼 음흉하고 호전적이었다. 검성이 느낀 바가 그랬다.
상대의 발경력을 티 내지 않고 축적시켰다가 불시에 훅 터뜨리곤 했기에.
노인은 앞서 두어 번쯤 죽을 뻔했다.
하지만 태연스러웠다.
육원성군 염정은 극도로 ‘노련한 위험’이지만, 무림맹주 현소백은 이미 실제로 한 번 죽은 적이 있었으니까. 다름 아닌 삼봉진인을 목표로 삼았던 미치광이 암천제에게.
“노곤하군.”
그는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동시에 잠시 떠올렸다. 무료함과 자존심에 취해, 자신이 정연신의 유모라고 스스로 주장했던 또 한 명의 미치광이를.
심무련의 영천검귀.
‘그 친구도 다 죽어갔었는데, 지금은 어찌 되어 있을지.’
곧이어 검성은 상념을 접었다.
화악!
염정에게 짓밟힌 구름이 새된 소리와 함께 지상으로 빗물을 뱉어낸다.
그녀는 만전이었다.
“…….”
어느새 새까만 눈동자를 되돌린 모습.
천단광갑이 새로운 얼개를 짜 올리며 파지직 마찰음을 냈고, 흘황십결 특유의 짙은 기세가 흰 안개와 함께 이지러졌다.
스윽.
거구의 여인이 자기 몸보다 훨씬 거대한 언월도를 등 뒤로 비껴 든다.
몹시 차분했다. 언제 대노했냐는 듯이.
“너는 여기서 죽어야겠다. 지금 보니 야율보다 위험하구나.”
그녀의 말에 검성이 웃었다.
“야율이 누구인 줄 알고 그리 말하는가?”
부드럽다 못해 촉촉한 습기가 그들의 몸에 맺힌다. 허여멀건 구름이 땅처럼 평평하게 깔리는 와중이었다.
‘음?’
일순간 고개를 슬쩍 든 노검객의 눈에 세 가지가 비쳤다.
몽환적으로 펼쳐진 구름의 연못, 조금쯤 빛바랜 자색 장포, 그 사이에서 새하얀 몸을 반짝이고 있는 신검(神劍) 한 자루.
마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종복들 같았다. 검성은 못 본 척 고개를 내렸다. 염정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지 않도록.
하지만 그가 눈길을 돌린 방향도 문제였다.
똑같이 시선을 겹친 염정의 입매가 살짝 올라간 것이다.
곧이어 그녀는 느릿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도발에 능한 쪽은 검성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염려스러운가? 보아하니 전장이 많기는 많다. 문곡과 저 일곱, 문곡군과 빙제의 첩, 내 군세와 치극군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놈들도 있고, 게다가 저쪽은 역루성의 군세로군. 호천성주 마마광멸도에게 쫓기는 게… 남방 무림인들인가?”
행색이 제법 귀해 보이는군. 너와 안면이 있을 수도 있겠다.
염정이 그렇게 말을 맺은 직후.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두 사람은 동시에 낙하했다. 정확히는 염정의 움직임에 검성이 반응한 것이었다.
정확히 반 하고도 반 수.
한발 늦었다.
후우우우우욱!
순백의 햇살이 거센 바람에 섞이면서 요란스럽게 사방팔방을 훑어 올린다. 강풍 소리가 어지럽게 휘몰아쳤다.
그들의 신형이 사선으로 떨어지는 곳에 여덟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의 거인과 일곱의 흑포인. 즉, 투신의 책사와 신검단 산하의 대주들이었다.
거문(巨門), 녹존(祿存), 문곡(文曲), 염정(廉貞), 무곡(武曲), 파군(破軍).
가장 으뜸인 탐랑(貪狼)을 제외한 북두의 여섯 성군. 문곡이라면 그중 셋째다.
광활하기가 명나라보다 더할지도 모른다는 북방 전역에서 세 번째.
그쯤 되면 스스로 초월한 자다. 의지를 지닌 채 움직이는 화산 폭발이라고 해도 무방한 존재.
합공으로나마 그를 감당해내는 이들의 기량이라면, 염정의 입장에선 미리 싹을 잘라두어야 할 위협일 것이다.
으하하하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와 함께 터지는 음성. 육원성군 염정의 외침이다.
“늙은 칼잡이가 잘도 따라붙는구나! 내가 제대로 고른 것이렷다?”
여전히 한어(漢語)였기에 더욱 소름 끼치는 울림.
타고난 성품일까.
그녀에겐 뒤가 없었다.
우우우우우우웅!
지상을 겨눈 언월도에서 희끄무레한 파동이 번져 나온다.
영성(靈性).
말 그대로 영묘한 성질.
소위 절세고수란 자들의 움직임으로 가속된 정기신(精氣神)은, 일평생의 삶을 한 수에 풀어내곤 했다. 압도적으로 짙은 의념과 함께였다.
발동된다.
[흘주대개벽(屹柱大開闢).]육원성군 염정의 공월무.
그녀의 언월도에서 반구형의 구체가 투명하게 일어나더니, 삽시간에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염정과 검성은 물론 지상의 싸움터까지 집어삼킬 기세였다. 당연히 그곳엔 일곱 대주들과 문곡이 있었다.
“……!”
검성의 눈이 커졌다.
한때 무림맹주였던 노인은 열일곱 흑검(黑劍)의 용모파기를 모두 알고 있었다.
후우욱!
그의 감각도(感覺途)에 의해 한없이 끌어당겨지면서 멈추는 시간.
단 하나의 광경이 온전히 노검객의 눈에 새겨졌다.
당장 무극전주가 문곡에게 팔다리를 하나씩 잡힌 채 쥐어뜯기기 시작했는데, 신법 풍신(風身)으로 높이 치솟은 천림대주가 문곡의 눈동자에 정권을 때려 박은 뒤 눈알을 꺼냈다.
한편 문곡에게 발목이 짓밟힌 율령대주가 역수로 쥔 검을 거대한 장딴지에 꽂아버렸고.
문곡의 어깻죽지와 목을 밧줄로 휘감아버린 천룡대주의 입에선 핏물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홀로 육원성군의 힘을 잠시나마 봉쇄한 탓임이 분명했다.
동시에 여의천주 북궁아는 문곡의 등허리 위에서 환익보(奐翼步)로 진각을 밟았는데, 천단광갑의 검푸른 불길이 좌우로 갈라지며 쿠릉― 하고 천둥소리를 냈다.
완전히 찢겨나간 그녀의 바짓단에선 핏물과 수분이 연기로 화하여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곡의 발길질을 양손으로 막아낸 멸섬대주의 흑포 조각들이 그 틈에 섞여 날아갔다.
문곡의 구황마력보(九潢魔力步)에서 비롯된 각법이 신황의 두 팔을 탈골시키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간신히 서 있는 형편인데, 어찌 보면 죽은 것 같기도 했다.
광예결 특유의 희끄무레한 빛무리가 없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확신했을 터였다.
쿠우우우우웅―
그들 모두를 향해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염정의 언월도가 발경력으로 빚어낸 반구인데, 어떤 공능을 지니고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 기예였다.
검성은 지체 없이 자신의 구명절초를 일으켰다. 낡은 검에서 미미한 검명이 새어 나왔다.
공월무.
[통천(通天).]검성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검이 쇳소리로 뇌까린 듯한 의념. 하지만 그의 일검(一劍)이 완전히 현현하기 전에, 문곡이 지상에서 나지막하게 웃고 있었다.
[맹자독고(孟子篤固).]공월무, 공월무, 또 공월무.
내공 호흡이 완벽한 절세고수뿐이다. 간합을 실전적으로 헤아리는 데 통달한 이들. 당연히 저마다 시전한 공월무도 하나같이 성공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 속에 입황성 원평일검장이 존재했다.
제각각 대항하기 힘든 압력에 희끗해지는 모습으로.
그때였다.
후우우우우우욱!
돌연히 그 중심을 찢어발기며 허공에서 질주해 온 깃대가 문곡의 등판에 콰직― 꽂히며 튀어나왔다. 단번에 관통상이었다.
[묵야(默夜).]시리도록 음산한 목소리가 ‘신검단 신검대(神劍團 神劍隊)’라고 쓰인 깃발과 함께 펄럭인다.
마지막 공월무. 광야일멸의 확고한 오른팔.
신검단의 남제였다.
“……!”
도합 다섯 개의 영역이 찰나에 안개처럼 몸집을 부풀리더니, 이내 하나의 공간으로 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