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99
◈ 별밤에 취하면
* * *
칼, 도끼, 언월도.
마경의 양민들이 곡괭이보다 가깝게 여기는 날붙이들이다.
남녘과 달리 ‘문’을 막으려 애쓰지 않기에, 간혹 하늘에서 날아드는 괴조들을 물리고자 가옥의 지붕마저 날카롭게 올린 것이 그들의 생활 양식이었다.
모든 전각들이 검(劍)과 같다.
그리고 마경에서 가장 많은 검을 지닌 곳은 도읍지인 흑도(黑都)였다.
북경 위쪽 만리장성의 거용관에서, 북동쪽으로 삼천 리가량 뻗어 나가면 거무스름한 빛깔로 모습을 드러내는 대도시.
아득한 거리만큼이나 이색적인 문물과 풍토로 가득했다.
하지만 지배자의 궁전만큼은 명나라의 건축 양식처럼 단아한 팔각형의 지붕으로 덮여 있었고, 그 안쪽을 빈틈없이 채운 어둠도 남녘처럼 새까맸다.
흑도고궁(黑都故宫).
북방제일인의 궁궐이었다.
“남제, 술식진의 구축이 끝났다.”
청나라의 황제가 될 존재의 거처를 아무렇지도 않게 범한 음성. 내공으로 탁하게 변조된 목소리인데, 몹시 자세히 들어야 여인의 음성임을 알아챌 만했다.
“이제야?”
남제의 반문에 어둠이 출렁였다.
그가 어디에 앉아있는지, 옥좌가 어디쯤에 위치한 것인지 보이지 않는 공간이다.
심연에 몸을 묻은 광경. 그저 무공을 연성 중이었던 것만으로도 대낮의 궁궐에 밤하늘을 불러온 것이다.
하지만 여인의 대답은 태평스러웠다.
“예상 못 한 일이 있었다.”
“그래, 지금 보니 알겠다. 서방제일인이 내상을 입었군.”
느릿하게 이야기한 남제는 곧장 짧은 물음을 덧붙였다.
“무슨 일이었나?”
“알 것 없다.”
“그래. 대법(大法)에 큰 영향이 없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얼마나 걸리는지만 이야기해라.”
“보름 두 번.”
명교주 소천무적이 무심하게 말을 잇는다.
“술식진이 자연지기를 충분히 끌어모으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너희 씨족의 싸움 신은 두 번 뜨고 진 만월 밑에서 나타날 거다.”
“진실이군. 잘되었다.”
잘됐다. 남제가 드물게 내뱉는 극찬이다. 장차 황위에 오를 존재로서 만사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까닭이었다.
“싸움 신이 재림하면 모든 일은 끝난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명 황실은 황권 강화에 매몰되어 무당 장문인을 구차하게 붙잡아둔 형편이며, 입황성주는 일 년 안에 발 달린 나무와 대리국 왕세자에게 살해당할 것이다.”
“관심 없으니 법보(法寶)나 잘 공급해라. 이만한 기운은 천하의 그 누구도 다뤄본 적이 없을 테니까.”
북방의 투신을 현현시키는 일.
천하목의 나뭇가지를 매개체로 삼아서 자신의 문파와 ‘문’을 오가는 남녘 강호인들과는 상황이 다르다.
입황성과 구파는 그렇게 명나라의 지원을 받지만, 소천무적은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서 투신을 불러내기 직전에 이르렀다.
마경이 얼마나 오랫동안 명나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던가. 보름 두 번이면 찰나와 다르지 않다.
그것이 나라 간의 일이었다.
남제가 물었다.
“나와 성혼동맹을 맺을 생각은 없나?”
“뭐?”
“자질은 물려받는 것. 내 후손은 명나라의 황족들보다 고강해야 한다.”
소천무적의 기척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다음 순간, 그녀가 자리를 비우길 기다린 것처럼 바깥에서 울린 음성이 있었다. 남제의 심복이었다.
“폐하.”
“말해라.”
“역루성의 성문이 열렸다는 보고입니다. 곧장 진격해 오는 중이라 합니다.”
“신검단?”
“그렇습니다.”
“섬예의 몸은 온전치 않다. 밤하늘의 검도 곧 죽는다. 수하들의 독단일 터.”
“추정컨대 북왕 격의 초월자가 둘, 흑색의 대전사가 못해도 열 명에, 정예 무공군세가 사백 이상… 실로 압도적입니다. 단일 세력으로는 대적이 불가능한….”
“아주 감정적인 행태다. 무슨 연유인지 알아봐라. 대응은 내가 한다.”
“예!”
수하의 기척이 사라졌다.
곧이어 남제의 음성이 머나먼 소리동굴로 진입한다. 휘풍령(暉風靈). 친투신파 북왕들의 전음공간.
―동무들에게 전한다. 만월이 두 번 부서지면 싸움 신의 재림이 있을 테니, 모두 거병하여 이곳으로 오라.
이제 밤처럼 새까만 내실에 남은 것은 남제의 웃음소리뿐이었다.
흑도고궁. 별무리가 없는 어둠.
―마지막 나담(НААДАМ: 축제)이다.
명령이나 다름없는 남제의 이야기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밤에 스몄고.
우우우우웅!
그 즉시 광활한 마경 각지에서 되돌아온 음성들로 인해 어둠이 넘실거렸다. 새 나라의 이름이 금(金)이든 대청(大淸)이든 중요하지 않은 북왕들의 전음이었다.
만인이 서로를 잡고 잡아먹히는.
흉년이란 지옥을 끝내기 위해.
청나라 건국에 참여할 모든 절대자가 반응했다.
* * *
스스로 빛을 품은 돌멩이들이 수십 알씩 데구르르 굴러다니는 곳. 아스라한 빛무리가 이곳저곳을 별처럼 밝히고 있었다.
천장에, 벽면에, 또 바닥에 꽂혀서 상하좌우를 구분하기 힘들도록.
어둑한 별세상.
동굴의 모든 통로가 어지간한 저잣거리만큼 넓다.
그 크기와 야명주라면 웬만큼 부유한 대문파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것들이지만, 명교라는 이름하에 불가능한 일은 대체로 존재하지 않았다.
천하공부출소림(天下工夫出少林), 만검고후남무당(萬劍顧後南武當) 등과 동격의 명성을 지니고도 세속에서 강함을 추구하는 곳이라서다.
마도제일 무맥. 혹세무민의 종교.
무(武)와 부귀영화를 함께 지닐 수밖에 없다.
이 순간 거대한 동굴로 몰려든 이백여 명교인들이 위압적이면서도 부유해 보이는 이유였다.
대다수가 부드러운 흑단(黑緞)이나 화려한 백색의 비단옷을 걸쳤다.
대흉년의 지하공동에 살고 있음에도 결 좋고 매끄러운 피부도 두드러졌다. 그들이 은은하게 발산시키고 있는 묵빛 아지랑이와 함께.
쾅!
“저건 뭐냐?!”
뒤늦게 무리로 뛰어든 작달막한 명교도가 한 곳을 가리킨다.
이 순간 장내의 명교인들이 마주하고 있는 것. 바로 넓디넓은 길이었던 곳을 장벽마냥 송두리째 막아버린 돌무더기였다.
수하들 중 하나가 대답했다.
“숭례삼중궁 광창(光槍)의 발경이 있었습니다. 북명보고로 향하다 말고 천장을 무너뜨리더니, 보시는 대로 방벽을 쌓았습니다.”
“황실삼대고수…? 어쩐지 벽이 두껍다 했다!”
열 살 어린아이만큼 작은 키에, 유난히 다부진 체구를 지닌 사내의 턱수염이 일그러진다.
한편 그의 굵직한 허리 양옆에는 큼지막한 손도끼 한 쌍이 매달려 있었다. 막 만들어진 것마냥 날카로운 은빛을 번들거리면서.
“융명존(戎明尊), 잘 왔다.”
명교도들의 선두에 있던 중년인이 키 작은 사내를 반긴다.
앞서 신검단주의 골통을 파먹겠다고 말했던 척화존으로, 명교의 세 전단을 이끄는 삼황명존 중 하나였다.
“우리가 출수하면 북명보고마저 무너뜨릴까 두렵던 참이다. 융명존, 네가 해야겠다.”
힘이 넘실거리는 목소리.
척화존은 원숭이처럼 긴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정연신 일행이 사라진 돌벽 너머를 물끄러미 응시하면서였다.
마찬가지로 삼황명존의 일좌인 융명존은 오만상으로 척화존을 올려다봤다.
“북명보고? 이미 붕괴시켜 놓고 무슨 헛소리냐?”
“교주께서 모아오신 단약이 한 아름이지 않은가. 일이 일단락된 뒤에, 한 알이라도 온전하다면 반드시 찾아내는 것이 맞다.”
난쟁이와 원숭이.
명교주 소천무적이 융명존과 척화존을 부르는 말이었고, 두 명존은 그녀가 내려준 별칭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자신들의 존엄한 신분과 별개로.
“태사께선?”
융명존의 물음에 척화존이 위를 가리켰다.
“앞이 막히자마자 위층의 제단으로 올라가셨다. 이교도들을 확실하게 죽일 심산으로.”
“확실히 죽인다? 어떻게?”
“명마에게 일러 술식진을 잠시 정지시키고, 그 힘을 잠시 동안 당신께서 받아들이겠다고 하시더군. 우리가 실패할 때를 대비해서.”
“지반이 무너질 거다! 애시당초 이런 지하공동은 교주님의 술식진 덕에 제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진작에 붕괴되고도 남았어! 본래는 멀쩡히 존재할 수가 없단 말이다!”
“그걸 노리는 거다.”
“뭐?”
“적은 모두 절세고수다. 아무리 기진맥진한 상태라지만,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수법이 나오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긴 어렵지 않나? 이 지하공동의 일부를 무너뜨려서 셋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다면, 오히려 그쪽이 남는 장사 아닌가?”
어느새 척화존은 긴 팔을 좌우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명교의 호교신공으로 알려진 ‘요조 북명대나이(嶢祖 北冥大挪移)’의 기수식이었다.
무당파 태극무맥에 밀리지 않기로 유명한 이화접목의 신기.
“일단 간이나 보자. 네가 저 벽을 뚫으면, 나는 적들의 방비를 모두 무력화시키겠다. 한 수만 어떻게든 튕겨내면… 나머지는 차륜전으로 해결될 거다.”
“음.”
키 작은 사내, 융명존은 더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그의 양옆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두 자루 도끼가 스스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신공비기(神功祕技).
소우주 역천경(小宇宙 逆天經).
쐐애애애애액!
광풍이 봉황의 날갯짓마냥 발밑에서 홰를 친다. 야명주의 빛무리와 함께 흘러 다니던 흙먼지가 일제히 밀려났다.
만물의 빈틈을 악질적으로 파고드는 신공.
철족 강호인은 무공 파훼에 능하다. 결을 잘 살피기 때문이다.
태생부터 그런 자가 명교의 역천경을 익히고, 또 정기신 합일의 경지에 올랐다면 큰 무력대의 수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신검단주.”
난쟁이 명존이 뇌까렸다.
“본교에 맺힌 것이 많은 이름이지.”
* * *
바람 소리가 컸다.
어디서 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정연신의 등 뒤 명문혈인지, 몸 내부인지, 혹은 그의 의식에 불어닥친 광풍인지도 알기 힘들다. 어쩌면 그 모두일 수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우우웅―!
심장을 둘러싼 검은빛의 수레바퀴가 급속도로 완전해진다. 설령 정연신이라도 제대로 쓰려면 일 년을 빚었어야 할 광륜이.
상승(上昇). 말 그대로 상승이다.
원래 있던 두 겹의 광륜이 희미해졌다 해도, 검은빛으로 크기를 부풀린 광륜이 본래의 무위를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왜….’
순간 정연신의 눈매에 힘이 들어갔다.
왜 세 번째 광륜일까.
대자연의 바람처럼 순리대로 흐르는 진기의 입장에선, 본래 굵직했던 수레바퀴들을 회복시키는 편이 쉬웠을 텐데.
검은 광륜.
원래부터 모자랐던 것을 크게 키우는 쪽이 훨씬 어렵다.
본래 있었던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몸이고 기(氣)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연신에겐 오히려 터무니없이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기쁘지 않다. 웃을 수가 없다.
스윽.
어느새 그는 거짓말처럼 뒤돌아 검성을 안아 들고 있었다. 노검객이 쓰러지기 직전에 스스로 마혈을 풀어낸 것이다.
점혈은 정가동공의 대종사에게 큰 효용이 없었고, 또한 낭인 출신의 절세검객은 그 찰나만으로도 정연신에게 목표한 바를 모두 이뤘다.
검성 현소백, 천하 유일의 무림맹주는 그럴 수 있는 인물이었다.
우웅!
이 순간 신검단주의 심장을 거뭇하게 감싼 광륜. 그 속에선 지극히 자그마한 검들이 별무리처럼 흐르고 있었다. 진기의 알갱이가 커서 그렇게 느껴졌다.
정연신이 스스로 쌓은 것이 아니라, 타인의 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격체전력이 성공했음을 뜻했다. 말이 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완성도로.
“왜….”
정연신은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쾅!
환익육보(奐翼六步).
본래 시간을 되감은 듯한 후퇴 보법이지만, 정연신은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 세월이 뒤로 돌아가는 일도 없었다.
그는 죽은 신투가 아니다. 그녀의 공월무는 그녀만의 것이었다. 정연신이 고금을 통틀어 압도적인 무재(武才)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는 양민 하나의 삶조차 온전히 살피기 힘든 하루살이였다.
쾅! 쾅!
정연신은 마침내 제 나이대의 소년처럼 발을 굴렀다. 강호로 나와서 맞닥뜨린 세상이 너무 컸으니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니까.
“왜…!”
후우우우욱!
다시 들어 올린 발바닥으로 거뭇한 나선을 그리면서 몰려드는 바람.
제자리 진각에 천마비고의 모든 무학이 섞여든다. 직전까지 정연신의 무의식을 부유하고 있던 마공의 정수들이었다.
그 발구름은 신검단주의 삶을 통틀어 가장 패도적인 지금과 몹시 어울렸고.
콰앙―!
내려찍자마자 인근의 장대한 석벽을 송두리째 깨부수는 충격파로 화했다.
“이 무슨…!”
기겁한 어웅공이 천장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호신강기로도 감당하기 힘든 압력이 사방으로 밀려들었던 까닭이다.
환익칠보(奐翼七步).
이 순간 만들어졌다. 몰아치는 보법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산산조각 난 암석의 파편과 함께 광풍이 불어닥친다. 마침 정연신 일행에게 접근하고 있던 난쟁이의 입이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군림보…?”
쩌저저정!
거짓말처럼 난쟁이의 두 손에 잡힌 손도끼들이 어지럽게 회전했다.
어스름한 동굴 속에서 굉음과 함께 바위 파편들을 튕겨내는 모습. 경황 중에도 조각상을 깎아내는 것마냥 유려한 병기술이다. 도끼질의 궤적들이 아름답게 이지러졌다.
그 광경을 어웅공의 등에서 박쥐처럼 내려다본 주광신개가 외쳤다.
“삼황명존 중 융명존일세! 소우주 역천경을 익힌 자로, 같은 초식을 두 번 이상 펼쳐선 안 되는…!”
환익팔보(奐翼八步).
퍼어어어억―!
땅을 내리찍었는데 살갗을 후려갈기는 소리가 났다. 포위망을 이루고 있던 삼백여 명의 명교도가 허공으로 떠오른다.
모조리 무형의 발길질에 턱을 얻어맞은 것처럼 고개가 홱 들린 채였다.
“……!”
그 속엔 난쟁이와 원숭이도 존재했지만, 그들이 삼화취정의 영역에서 반격초를 맺기도 전에 또 한 번 굉음이 터졌다.
콰가가가각!
정연신의 발길질이 바닥을 훑은 것이다. 땅에 떨어져 있던 검성의 대침들이 그 궤적을 따라 올라가더니 거뭇한 빗줄기로 화했다.
만천화우(滿天花雨).
앞으로 쏟아지는 비였다.
퍼버버버버벅!
전방에서 핏빛의 꽃들이 만발한다. 수백 겹의 가죽이 뚫리고, 터지고, 또 찢어발겨지는 소리와 함께였다.
잠깐 떠올랐던 이들의 몸은 핏물 속에서 이리저리 튕겨 나갔다. 전원이 넝마가 되어 동굴 바닥에 몸을 누이기까지 눈 한 번 깜박할 새였다.
동굴의 습기가 훅 짙어졌다. 찰나지간 만천화우가 명교도들의 호신강기를 마찰시켰던 탓이다.
“…….”
눅눅한 공기로 적막이 섞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