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80
◈ 합일
오늘이었다. 정연신은 둥근 달을 기다렸다.
‘몸도 움직여 둬야겠지.’
정양은 충분히 했다. 몸 내부를 정련하는 운기요상을 마쳤다.
약조의 날이다. 전신 진기의 흐름을 근육의 움직임에 동화시킬 차례였다.
날이 밝는 순간 청명에게 지도 대련을 청했다.
벌써 몇 시진이 지났는지 몰랐다.
마광익 전각 뒤편을 환하게 채운 햇살이 명족 검객의 훤칠한 몸태를 감쌌다.
한적한 공터를 채운 존재감이 실로 대단했다.
청안마검 청명. 마광익에서 가장 고절한 검법을 구사하는 고수였다.
마광익주가 도법을 다루니, 검수로서는 청명이 마광익 최강을 다툰다 했다.
입황성을 통틀어 청색 제일을 논할 수 있다는 말까지 돌았다.
중견 고수를 포함해도 그랬다. 백기린마저 아래로 본다는 의미였다.
쩡!
내공량의 수준을 맞춰준 청명의 일도양단 검격을 받아냈다.
거센 바람이 귓전을 때렸다. 숫제 할퀴는 듯했다.
검법 발경의 경지가 어찌나 깊은지, 같은 내력을 운용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거센 검력이 검파까지 올라왔다.
진동만으로 제이격을 가하는 지경이었다.
낯선 힘이 아니었다. 익숙했다.
실상 정연신은 패배를 모르는 후기지수가 아니었다.
임무와 임무 사이, 본성에 들를 때마다 고강한 선배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마진, 청명, 백미려, 여타 나이 지긋한 청색 선배들까지.
무공 연성의 끝은 비무였다.
혼자 익힌 타격 공부는 의미가 없기에, 선배들이 베풀어준 연마를 마친 뒤에야 임무에 나섰다.
그렇게 실전에서 무학을 풀어내는 일에 익숙해져 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패하는 비무가 일상이었다는 의미다. 본성 마광익에서는 그랬다.
때문일까. 오늘 유독 해이해졌다.
‘작은 조각.’
이제 겨우 해가 지고 있는데도 멍했다. 중단전을 연 몸이었다.
대련쯤이야 하루종일 해도 지치지 않아야 했다.
한데 좀처럼 일상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혼백이 몸 위로 흐리게 올라온 느낌.
비무 하는 와중에 검파를 쥔 손의 진기가 느슨해질 정도였다. 형편없이 풀린 의념 탓이었다.
곧장 대가가 돌아왔다.
스아악!
찰나에 거센 날파람이 확 끼쳤다. 동시에 검신에서부터 충격이 일었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입황검이 튕겨 나갔다. 순간 제대로 놓지 않았으면 손아귀가 찢길 뻔했다.
“우리 섬예, 제정신이 아니네.”
청명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바늘구멍에 들어가려는 거 아니었어? 재빠르게 말이야.”
검을 들어 자신의 어깨 위에 턱 걸친다. 웃는 낯으로 하는 말이 더욱 따갑게 다가웠다.
노려보는 것보다 무서운 모습이었다.
“신검단주까지 삼 년쯤 잡아야지. 남은 해의 반 정도는 공을 세우는 데 써야 할 거고.”
“아······.”
드물게 멍한 감탄사를 발한 정연신이었다. 이럴 수밖에 없는 날이다.
허나 대련을 청한 입장에서 항변해선 안 될 일이었다.
청명이 어깨에 둔 검신을 툭툭 쳤다. 한쪽뿐인 눈에서 시린 청광이 번졌다.
“무엇보다, 자리를 빼앗는 형태가 될 거란 말이지. 현 신검단주께서는 아주 정정하시거든. 누구와 겨루든 지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아. 십삼천주건 구파 장문인이건. 우리 섬예는 그런 사람을 이겨야 해.”
“죄송합니다. 애써 봐주시는데.”
“이미 흑색부터 문제야. 내공 운용의 경지 자체가 달라져야 하는데, 이건 자질보다 깨달음의 영역이거든. 물론 무재가 있으면 좋기야 하지.”
“······.”
“삼화취정, 오기조원. 의념의 세상이 달라. 깨달음을 말했지? 이게 그리 과언이 아닌 게, 과장스럽게 탈각이라 부르는 노인네들도 있어. 정신머리를 단단히 안 챙기면 도달하기 힘들다고.”
늘 그렇듯 가벼운 어조였다.
내용은 달랐다. 심려가 깃들어 있다. 이 순간에는 정연신 자신보다도 구체적인 앞날을 그리는 것이다.
면목없는 일이었다. 헌원창과 함께 가장 친근해진 사람이기에 더욱 그랬다.
소년은 새삼스럽게 포권을 올렸다.
“조언 감사합니다. 늘 받기만 하는데.”
“과례는 됐고.”
청명이 검을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반월을 그린 검광과 동시에 이루어진 납검이 유려했다.
“이제 정해 두고 수학하는 게 좋겠지? 목표가 뚜렷한 마당이니까. 검법은 나, 기공(氣功)은 미려로 하자. 우리 대주야 워낙 바쁜 인사니 논외로 두고. 어? 뭐하러 또 손을 모아? 포권 그만해.”
“······오늘 백 선배를 못 뵌 듯한데.”
“미려? 요즘 바쁘더라고. 네 얘기 듣고 심공을 정리하고 있어. 출신만큼이나 특별한 내가기공을 연성했지. 진기 운용 따위의 요령을 따로 떼서 알려 줘야 해. 네가 남궁가에 다녀올 때쯤에는 다 돼 있겠지?”
“저는, 두 분의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백미려의 출신이란 말이 나오자 생각났다. 정연신은 청안마검과 일련검매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좁은 시야 탓이었다. 입문 때부터 앞만 보고 달려온 까닭에 자신의 사정만 봤다. 몹시 미안한 일이었다.
청명의 나이조차 모른다. 씨족에서 어떻게 지내다 나와 마광익에 들어온 걸까.
‘마광일조 모두가 예사롭지 않은데.’
헌원창이 무슨 일을 겪고 홀몸으로 입황성에 입문한 건지 몰랐다.
연마한 살검과 달리 귀하게 자란 느낌이 있었다. 뭇 대문파에 보이는 적의도 기이했다.
백미려도 그랬다. 엄청난 신공을 문득문득 보여주는 고수였다.
묵빛으로 유형화된 진기에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마광익주 마진을 고자로 만든 임무 중에 어린 백미려가 구출되어 왔다는 말만 들었다. 더는 알지 못했다.
“다음에. 은원이 엮여 있어서 지금 주절거리기는 싫네. 너 하나만 해도 골머리 아픈데.”
청명이 씩 웃었다.
“자연스럽게 알겠지. 네가 청색에서 흑색, 자색까지 거치다 보면 그럴 거야. 접하는 정보의 질이 달라지거든. 흑색부터는 아주 주도적인 자리라서.”
“······예.”
납득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가야 하는 까닭이었다.
시간이 됐다. 전각 위 용마루 한켠을 보고 알았다.
짙은 회색 지붕을 타고 하얀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만월이 자아내는 기운일까.
오늘따라 묘하게 아득히 느껴졌다.
청명의 얼굴이 정연신의 눈길을 따라 슬쩍 뒤돌았다.
“너, 슬슬 성주께 가야겠네. 무슨 일인지 나도 궁금해 미치겠어. 얼른 가.”
성주께서 부르신 일이니 용무를 캐물을 수도 없군, 답답하게. 그가 웃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다녀오겠습니다!”
정연신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은 부끄럽지도 않았다.
곧장 청명을 지나치며 발밑에 진기를 실었다. 천천히, 그러나 서서히 빠르게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종일토록 대련을 한 참이다. 목욕재계가 먼저였다.
“장 부인! 물을 받아주십시오!”
전각 마루의 문을 열고 들어서며 외쳤다. 시녀에게 부탁하는 말이었다.
명족의 오감은 극히 예리하다. 입황성주는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씨족 내에서도 완전히 다른 영역의 존재라 했다. 땀냄새를 풍길 수는 없다.
혹여 그녀의 마음이 바뀌어, 작은 조각이 더 작아져선 안 되는 것이다.
“섬예? 무슨 일이지?”
“소리친 게 정연신이라고?”
여러 마광익 선배들이 자신의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은 무시해도 좋았다. 곧장 방으로 들어온 정연신은 여분의 무복을 챙기며 욕실로 향했다.
* * *
대기에 스민 밤이 부드럽게 소년의 몸을 얼렀다. 어둡고 포근했다.
마침내.
월광이 차올랐다. 보름달에 어린 빛무리가 희끄무레했다. 만월이 흐리게 웃었다.
정연신은 본성 속에 있는 본성에 들어섰다.
순백 대리석으로 쌓아올린 입황성주의 내성이었다.
경계를 서고 있는 수문 무사들이 눈인사를 할 뿐, 누구도 막지 않았다.
시린 대리석을 밟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높은 계단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래도 마지막은 존재했다.
끄트머리에 오른 순간 거대한 석문이 저절로 열렸다.
늘 그랬듯 벽면 없는 맞은편이 활짝 뚫려 있었다.
유난히 밝은 듯한 월광의 희뿌연 빛무리를 고스란히 쏟아냈다.
정연신은 시선을 올렸다. 집무실을 뚫고 굵게 뻗어나온 나무 줄기 위였다.
그곳에.
입황성주가 있었다.
가지 하나에 올라선 채 달빛을 맞으며 선 뒷모습이었다.
윤기를 품은 풀잎색 머리칼이 길게 흔들렸다.
한점의 기파조차 느껴지지 않는데, 그녀만 홀로 선명했다. 기이할 정도였다.
존재감이 실로 뚜렷하게 다가왔다. 이 순간에만 유독 그랬다.
“조각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궁금했으리라.”
그녀는 곧장 돌아보지 않았다. 먼 정경을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부드러운 달무리 아래, 궁장 같은 녹색 옷자락을 두른 입황성주의 음성만 들려왔다.
온 세상의 달빛이 그녀에게 몰려드는 듯했다.
정연신은 불현듯 깨달았다.
저건 운기였다. 진기의 운용이었다. 믿기 힘들지만 그랬다.
어느새 찬연해진 만월이 광채의 안개로 숨쉬는데, 달이 토해낸 흐린 빛줄기가 팔방으로 굴절되어 그녀에게 모여들고 있었다.
‘기본공마저 이적의 영역에 이른 거야.’
직관에 이른 통찰이었다. 짐작조차 못 할 경지에 정연신이 전율할 때였다.
“천하목의 열매. 네가 짐작한 바가 맞노니.”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달을 등졌는데도 빛이 아롱진 눈동자부터 보였다. 진녹색 시선이 아득했다.
혼백마저 자연스럽게 내리누르는 듯한 느낌.
혈염교주조차 준 적 없는 감각을 그녀와 마주할 때마다 겪는다.
“이리 오라.”
“성주를 뵙습니다.”
뒤늦게 예를 취하고 걸음을 옮겼다. 까끌한 나무를 밟으며 올라선 자리의 맞은편에 입황성주가 있었다.
정연신은 허리를 올곧게 펴고 그녀와 마주섰다.
“더 가까이.”
“예.”
묵묵히 명을 따랐다. 이제는 한 걸음이 채 되지 않는 거리였다.
절대자의 투명할 만치 하얀 얼굴이 시야를 채웠다.
정연신이 몸을 숙이며 부복하려 한 순간이었다.
“사교의 본단 이후로 처음이로구나. 먼저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입황성주가 입술을 뗐다.
엉거주춤 일어선 소년이 그녀를 응시했다.
“경청하겠습니다.”
“사교의 교주가 돌아올 수 있느니라.”
“······!”
“괴력난신이다. 핏물 한 점으로 제 모습을 찾더구나. 몇 번이고 숨을 끊었거늘.”
정연신은 혈염교주를 떠올렸다. 인세를 벗어난 듯한 느낌은 그에게도 있었다.
입황성주의 격에 미치지 못할 뿐, 혈공의 정점에서 초월적인 재생 공능을 부리던 자였다.
그때였다.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걸까. 입황성주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완전히 멸하지 못하였다. 너를 살피고자 발길을 돌려야 했지.”
“송구합니다.”
황급히 고개를 숙여야 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혈염교 육사도를 상대하려 한 순간이 떠올랐다.
혈염교주와 함께 사라졌던 입황성주가 적을 처단하고 돌아온 줄 알았다.
아니란 말이었다.
‘나 때문에?’
섬예란 후기지수 하나를 몸성히 살리고자 십삼천주 한 명을 놓아줬다.
도무지 수지가 맞지 않았다. 누구라도 믿기 힘들 일이었다.
“송구하다니.”
영롱한 음성이 울렸다.
“나의 선택이다. 너는 그저 대적을 경계하여 성취에 힘쓰도록 하라.”
“······.”
“그보다.”
말이 잠시 멈추었다. 그녀의 존재감 탓에 내려오는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머리를 숙이고 있던 정연신은 곧장 고개를 들었다.
정양하는 동안 길어진 머리칼 몇 줄기가 성주의 손등에 얹어져 있었던 것이다.
“춘풍에 떨어진 천하목의 잎새를 내 어릴 적 친우로 삼았지. 지금은 부스러져 없으나.”
입황성주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네 머릿결이 그와 비슷하구나.”
“예?”
“고수가 되면 길러 보는 것도 좋겠다.”
“아······.”
얼떨결에 그러겠노라고 대답하자, 그녀의 입술이 작고 미려한 곡선을 그렸다.
‘성주께는 청색조차 고수가 아니구나.’
허나 실로 당연하여 문제로 삼을 일도 아니었다. 정연신은 생각했다.
성주의 농을 처음 듣는다. 사람이긴 했구나 싶었다. 조금 더 큰 조각을 바라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