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81
◈ 합일 (2)
‘머리를 길러 보는 게 좋겠다고······?’
천하목을 홀로 보위하는 절대자의 농이다.
우스갯소리를 하는 모습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지고한 자였다.
무슨 말이든 흘려 들어선 안 되었다. 정연신은 그래야 했다.
그는 헌원창을 구하러 다니던 때를 떠올렸다. 정보를 얻기 위해 지역 무림인들과 논검을 했다.
호의를 얻고자 입싸움에 져 가면서 접대를 깨달았다.
고수가 되면 머리를 기른다. 마음에 담아두었다.
‘그래도 본성 대주들이라면, 그 정도면 고수라 말씀해 주시지 않을까.’
흑색의 영역이란 곧 삼화취정과 오기조원의 운기 성취라 했다.
진기가 의념에 곧바로 반응하는 경지라 들었다. 이름높은 구파의 장로에 대적할 만한 세계다.
그쯤되면 근접 백타에서 긴 머리칼을 잡아채일 일은 없을 듯했다.
상승의 영역에 발을 디딘 연후에는 머리칼을 길러도 될 것이다.
아주 짧은 상념이었다. 다시금 녹빛 눈동자와 마주했는데, 입황성주가 입을 열었다.
“기색이 결연하구나. 실없는 말인 것을.”
그녀의 입가에 흐릿한 웃음이 맺혔다.
“천하 강호인이 죽음을 벗한다 해도, 섬예의 치열함이 모자라지는 않으리라. 보기에 나쁘지 않다.”
“······황송합니다.”
“고마울 일도, 송구할 일도 아니지.”
산들바람처럼 잔잔한 어조였다.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본성은 대가에 박하지 않다. 네 열망으로 말미암아 이룬 공적에 보상하고자 불렀으니,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하사하겠다.”
드디어.
마침내 성주에게 들은 이야기가 심동을 선사했다.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는데 잘 되지 않았다.
긴 날숨을 내쉬어도 심장이 들썩였다.
입황성주라면 모든 것을 인지하고 있을진대, 그녀는 자그마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시야의 모든 게 느려졌다. 하사한다는 말을 맺은 그녀의 입술이 다시 열린다.
“네 공훈이 몹시 크다. 두 가지를 말하리라.”
절세의 무위를 방증하는 미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작 너덧 살 많아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뇌리에 새길 듯 바라볼 뿐이었다.
“민생을 해치는 사교의 본단을 찾도록 한 공, 역도 무리를 멸하는 데 희생이 없도록 크게 일조한 공.”
“······.”
전자의 공로는 그저 칠사도가 정연신의 가치를 탐하여 생긴 사건이었다.
본단 사건의 발단이 그랬다. 허나 멋쩍지 않았다. 이 순간 다가올 보상이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까닭이었다.
“충분한 공적을 갖추었다 할 것이다. 네 자격을 시험할 만하다.”
말과 함께 다시금 손을 뻗는다.
무인답지 않게 새하얀 손바닥이 천천히 올라왔다. 몹시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입황성주의 뒤편에 자리한 달빛이 손으로 끌려와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실로 초월적인 광경을 일으킨다. 사람의 행사가 아니다. 정연신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이것이.”
화악.
집무실을 둘러싼 거대한 나무 줄기들이 미풍을 뿜었다. 몸을 간질이는 듯했다.
만월의 눈부신 숨결에 푸르러진 나뭇잎들이 그녀의 전신을 스친 순간이었다.
“천하목의 열매다. 작은 파편이니라.”
호수에 비친 달을 한 움큼 떼어 올린 듯한 무언가였다. 입황성주의 손 위에 빛줄기 한 조각이 움텄다. 월광을 빚어낸 듯 흐릿했다.
“······.”
정연신은 침묵했다. 벽면 없는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 한 줄기가 목을 희롱하고 지나갔다. 살면서 본 것들을 모두 아울러도 가장 기묘한 이적이었다.
우웅.
진동음마저 신령스럽다. 존귀한 이의 손바닥에 자리한 빛 조각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삶의 목표일진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내공 상승의 영약과 달랐다.
요동치는 기운 같은 게 없다. 영험한 느낌이 가득할 뿐이다.
“세간에 알려진 바를 안다.”
입황성주가 입술을 뗐다.
고개를 들자 산림의 무저갱 같은 시선과 마주쳤다. 정연신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모두 틀렸다. 이것은 강대한 힘을 선사하는 영약이 아니니라.”
“자격을 말씀하셨지요. 그럼 어떤······?”
“느껴야 알게 될지니.”
그녀의 손이 살짝 앞으로 다가왔다. 빛의 파편이 더욱 가까이에 놓였다.
볼수록 신비로웠다. 이 세상의 물건 같지 않을 정도였다.
“먹어 보라.”
입황성주의 말에 무심코 손을 들어올린 순간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몸에서 떨어지면 공능을 잃지. 네 입을 가져와야 한다.”
기진이보(奇珎異寳)란 말이 있다.
진귀하고 기이한 보배란 의미였다. 이무기, 영물, 요물, 사람의 형태를 띤 산삼까지.
이적을 발한다는 천하의 여러 신검을 비롯해 중원에 유명한 영약들의 생태가 그랬다.
상식적인 이치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 강호의 상층부에 즐비하다 했다.
‘몸에서 떨어지면 공능을 잃는다?’
입황성주는 마치 자신이 천하목인 것처럼 말했다.
머릿속에서 무수한 의문이 피어올랐다. 영적인 무언가로 맺어져 있는 걸까.
천하목의 수호자란 말은 그런 의미를 아우르는 건가.
허나 감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주제넘는 언행을 내보이기 두려웠다.
지금 정연신의 위치가 그렇다. 성주에게 고수라 불리지 못했다. 하사하는 대로 받아야 할 처지였다.
‘청명 선배가 말했지. 위계가 오를수록 접하는 정보가 달라진다고.’
우선 흑색을 기약하기로 했다. 아직은 그걸로 족할 일이었다.
‘그래도.’
그렇다 해도 눈앞에 있는 천하목의 조각은 합당한 보상이다. 응당 취해야 한다.
정연신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을 향해 고개를 약간 내렸다.
동시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랫입술이 먼저, 그리고 콧등의 끝이 그녀의 손에 살짝 닿은 순간이었다.
“어?”
정연신이 의문 섞인 신음을 발했다. 입황성주가 손을 거둔 탓이었다.
“모양새가 좋지 않구나.”
담담한 어조였다. 동시에 열매의 파편이 그녀의 손끝까지 내려와 맺혔다.
스윽.
그대로 손을 뻗어 온다.
흐린 빛이 서서히 정연신의 시야를 채웠다. 입으로 향하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곧바로 머리였다. 상단전으로 곧장 이어지는 통로가 벌써부터 반응하는 듯했다.
그녀의 기다란 손가락이 정연신의 미간에 닿았다.
그때였다.
“허억!”
심공 호흡이 곧바로 끊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에 의식이 날아갔다.
심연의 늪에 파묻히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끝도 없이 고양되는 감각이 모든 의념을 감싸고 치솟았다.
화아악─!
힘의 상승이 아니다. 어떤 경험이었다.
범접하지 못할 존재의 뇌리에 들어온 듯했다. 감각의 해일이 일어났다. 실로 급격하게 움텄다.
살갗을 스치는 공기의 구성마저 낱낱이 느끼면서 대자연의 기운을 가져온다.
상상한 적도 없을 만큼 예민해졌다. 곧바로 미쳐서 죽을 듯한 인지력이었다.
불현듯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자각했다. 흐르는 달빛이 보였다.
이 순간.
정연신은 입황성주로 화해 있었다. 시각과 대기를 함께 느꼈다.
그녀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응시했다. 새까만 동체에 비친 성주의 이목구비가 신비로웠다.
천하의 이적을 통틀어도 이런 경우가 또 있을까.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그 찰나가 억겁 같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숨결이 선명했는데, 아직 날숨 한 번도 끝나지 않았다.
귓전을 훑은 바람이 채 멀어지기도 전이었다. 그러한데 견디기 힘들었다. 점차 본신의 상단전이 억지로 버틸 듯이 타오르려 했다.
“되었다.”
입황성주가 읊조리듯 말한 순간, 숨막히도록 길게 늘어진 시간이 삽시간에 흐름을 되찾았다.
화악!
정연신은 자신으로 돌아왔다. 몸이 휘청였다. 초상승의 영역마저 넘어선 듯한 감각을 겪은 탓인 듯했다.
그대로 균형을 잃어버릴 찰나에,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어깨를 감듯이 쥐었다.
입황성주였다.
“지금은 안 되겠다. 이르구나.”
그녀가 말했다. 정연신은 고개만 들어올려 시선을 맞췄다.
“이르다고 하심은······?”
“네 경지가 얕아 열매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수련에 매진하거라.”
“방금, 대체, 무슨 효용이었지요?”
“천하목의 영성(靈性)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시험했다. 네 의념의 그릇이 견고해지면, 씨족의 나무가 시들지 않는 한 백회혈로 우화등선하는 일은 없으리라. 영생을 살겠지.”
영성을 이야기한다. 천하목의 신령한 기질을 공유하여 명줄을 잡아둔다는 의미인 듯했다.
이 역시 상리를 벗어난 일이었다.
정연신은 이해한 바가 맞는지 물었다.
“네 해석이 옳다.”
입황성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매가 그 매개라는 말이었다.
‘무슨······.’
강호에서 손에 꼽힌다는 신비를 온몸으로 겪었다. 입문하기 전에는 전설로 구전되는 만병통치약을 생각했다.
반만 맞았다. 정연신은 허탈감을 느끼며 또 한 번 여쭈었다.
“신검단주의 위계에 올라······ 합당한 공적으로 온전한 열매를 하사받는다. 그리하여 자색 무복에 이르는 경지로 천하목의 영성을 감당하라는, 그런 말씀인지요.”
“그 역시 맞노라.”
“···하면, 방금 이 불초 제자가 지녔던 감각은······?”
성주의 눈으로 보고 느낀 듯한 세상을 물었다. 그녀의 입매가 작게 올라갔다.
“필연이었고.”
스윽.
어깨의 보드라운 손길이 정연신을 살며시 밀어낸다.
“선물이었다.”
“아.”
그는 나무 줄기에서 내려섰다. 어느새 모든 감각이 되돌아왔다.
허나 앞서 겪은 절세의 세계가 기억에 뚜렷이 남았다.
그래서 시험이고, 그렇기에 선물이다.
그녀가 말한 필연은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허나 언제고 자신을 크게 이끌어줄 경험이었다.
어쩌면 당장 닥친 임무에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심법 창안에 영감이 일고 있었다. 아주 강렬했다.
“건승하라. 남직례에 이를 때까지.”
그녀가 말했다.
정연신이 남궁세가를 징치하는 비무에 선발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모양이었다.
성내 대소사를 총관부에서 처리한다 했는데, 그녀가 관심을 기울이는 일도 있는 듯했다.
‘축객령이구나.’
건승이란 안부를 입에 담았다. 이만 나가도 좋다는 말이었다.
“성주께서도 평안하시길.”
정연신은 담담히 예를 취했다.
사락.
옷자락이 부드럽게 쓸리는 소리가 새삼 선명하게 다가왔다.
성주는 몸을 뒤로 살짝 기울였다. 나무 둥치에 살며시 기대어 눕는다.
천천히 눈을 감는 그녀의 모습을 본 정연신이 몸을 돌렸다.
집무실을 나선 순간, 앞서 저절로 열렸던 석문이 스스로 닫혔다.
입황성주가 발한 허공섭물의 묘리일 것이다. 이제는 익숙했다.
정연신은 그대로 계단을 내려왔다. 올라올 때와 달리 몹시 짧게 느껴졌다.
‘열매가 그런 거였구나.’
마음이 묘했다. 상상하지 못한 일을 경험한 탓일까.
강호의 불가해 중 하나를 온전히 실감했다. 누가 겪든 똑같은 기분을 느끼리라 생각했다.
영생이란 말까지 들었다. 지금의 자신과는 동떨어진 얘기였다. 정반대편에 있었다.
‘열매를 받는다 해도.’
그 공능을 담기엔 경지가 모자라다는 걸 알았다.
임무의 경험이 무공 상승을 자아내고 공적을 키운다. 결국 기본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의미였다.
저벅.
입황성주의 내성 바깥으로 나온 소년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환하게 내려앉는 달빛에 그의 그림자가 점차로 길어졌다. 깊은 밤이 저물고 있었다.
* * *
다음 날, 마광익 대연무장.
총관부를 통해 공문이 내려왔다. 다음 임무를 기재한 서찰이었다.
연무장 한가운데 앉은 정연신은 임무 배당의 전서를 펼쳤다.
선배들이 원을 그린 채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한데 모여 내려다보는 모습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비무 대표단에 섬예의 이름이 들어갔군. 정말로 적혀 있어.”
“실로 명예로운 일이지. 나 역시 십 년만 젊었으면······.”
정연신보다 고절한 안법을 지닌 일부 선배들이 먼저 훑은 듯했다.
소년은 서두에 ‘출정 명단’이라 적힌 서찰을 읽어내려 갔다. 잡다한 서두를 건너뛰었다. 곧장 명단부터 확인했다.
[생사결로써 아래 다섯을 참한다.]남궁가 창령화주.
남궁가 소가주.
남궁가 창궁검천단주.
남궁가 장로원주.
남궁가주.
[이하의 본성 무인은 마땅히 대비할지어다.]순천익 백기린.
마광익 섬예.
본성 원로원주.
입황마가주.
신검단주.
‘신검단주?’
정연신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