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93
◈ 즉살의 무공 (5)
정연신은 문득 입황성 천금무고에 비치하고 온 무공들을 떠올렸다. 정가동공을 제외하고 모두 증여했다.
그의 무학은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비급에서 멈춘 무공은 수명에 비한다면 하찮았다.
돌아올 공적이 어느 정도일까.
독문무공의 본성 증여는 공으로 환산한다. 가치 평가를 보편적인 전력 증강으로 셈한다 했다.
초고수들의 안목에만 기대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강호인의 가치관과 달랐다. 황실만의 기준이 있다고 했다.
‘멸마청강수는 입문자가 없었는데 높은 공적으로 돌아왔어. 법력 무공이 희귀한 덕이라 했지.’
불현듯 무공 증여의 공적을 떠올린 이유가 있다.
정연신은 눈을 치켜뜬 채 입을 다물었다.
“손을 달라고 했는데.”
남궁미가 눈앞에서 도발적인 미소를 짓고 있다.
젖은 머리칼을 하얀 목덜미까지 늘어뜨렸는데, 언제 여름비에 짜증을 냈냐는 듯 정연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뭔가를 눈치챈 걸까.’
정연신은 혈염교의 위장 신분을 떠올렸다. 들키면 곤란해진다.
문득 궁금해졌다. 남궁미의 머리 하나가 시화무극권 정도의 값어치는 될까. 팔가의 직계였다.
패검종의 팔흉나찰검 못지않을지도 몰랐다. 무위를 떠나서 가치가 그랬다.
남궁미가 웃음기를 띤 채 재차 입을 열었다.
“착각하지 마. 검법을 얼마나 연마했는지 궁금해서 그러니까.”
“적의 성취를 노골적으로 가늠하겠다고?”
“적? 네가 어떻게 적이 되겠니? 본가의 위명을 또 한 번 떨칠 거름이면 모를까.”
“수치를 모르는군. 네 상대는 백기린 소협이다.”
“본녀는 네가 궁금한데?”
얼굴까지 살짝 들이댄다. 몹시 요사스러웠다. 남궁미의 눈동자에 빛나는 안광이 칠사도를 떠올리게 했다. 꿍꿍이를 지녔다는 의미였다.
“…….”
정연신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디뎠다. 이제 남궁세가에 당도했다. 빌미를 줄 이유가 없었다.
“좋은 한 쌍이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소가주가 터무니없는 얘기를 했다. 누이동생과 소년을 보며 웃는 낯이 부드러웠다. 남궁미와 다른 느낌이었다.
정연신은 그들 남매와 말을 섞지 않기로 했다.
남궁화신과 묵묵히 발을 옮겼고, 이내 휘주에서 가장 큰 전각군과 마주하게 되었다.
양쪽으로 이어진 담벼락부터 성벽마냥 드넓다.
용봉지회에 향하며 한 번 본 적이 있지만, 역시 일개 가문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컸다.
사람들이 세가(世家)라고 일컫는 이유가 외양에서부터 드러났다.
南宮.
“남궁…….”
남궁화신이 대문의 현판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정연신은 자신의 동료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평소에 지니고 있던 굳건한 기상이 보이지 않았다.
정연신이 남궁미를 손쉽게 이긴 까닭은 정가동공과 빙결무공의 상성에 있었다.
남궁화신이 그녀를 이길 수 있을까. 술법의 충성 맹세와 지독한 냉기를 극복해야 할진대.
‘총관부에서는 전승을 말했지.’
입황성 원행단이 모든 상대를 참해야 의미 있는 임무라고 했다. 남궁 수뇌를 방계로 갈아치워야 한다고.
“출중한 이들을 본가에 모시게 되어 영광일세.”
문지기들에게 고개를 끄덕인 소가주가 웃으며 말했다.
정문을 향하는 손짓에 여유가 묻어나왔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정연신이 발을 내디뎠다.
마침내 남궁세가였다.
* * *
행낭을 풀고 목욕재계를 했다. 객방을 배정받은 정연신은 여벌의 입황성 무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어 남궁세가의 정찬에 초대받았다.
철면피를 연마하는 무공이 있는 걸까. 정연신은 정갈하게 꾸며진 실내에 앉으며 생각했다.
아주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걸친 사내들과 여인들, 소가주와 남궁미.
거대한 타원형의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소년의 옆에는 남궁화신이 자리했다.
몸을 아주 미세하게 떠는데, 이 자리의 열 명이 모두 눈치챌 듯했다. 언뜻 보기에도 고수 아닌 자가 없는 까닭이었다.
하나같이 소가주와 달랐다. 서출을 없는 자로 여기는 걸까.
남궁화신에게 관심 두는 이가 보이지 않았다. 직계들의 눈은 오롯이 정연신에게 집중되었다.
“그대가 섬예로군.”
정연신은 자신을 부른 자를 바라봤다.
고풍스러운 쪽빛 장포 자락이 어울리는 중년인이었다. 남궁세가 그 자체라고 일컬어지는 자.
외모의 윤곽이 뚜렷했다. 소가주와 남궁미, 남궁화신의 얼굴이 모두 그 안에 있었다.
정연신은 문득 남궁가주의 허리춤을 봤다. 푸르스름한 칼자루가 걸려 있었다.
검파에 음각된 글귀가 호롱불에 은은히 드러났다.
능운지지 남장태고(凌雲之志 南牆太高).
―세속을 넘어서는 뜻이 있다 한들 남쪽 담장을 넘지 못한다.
검에 얽힌 일화 탓에 의역으로 유명했다. 달리 남장검(南牆劍)이라 불리는 남궁가의 상징이다.
철족이 만든 무상의 명검이라 했다. 남궁세가의 주인을 감싸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정연신의 시선을 느낀 걸까. 남궁가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천산에서 발호한 명교의 난을 아는가? 본가의 전대 태상가주께서 명교 삼존(三尊)을 격살하시었지. 황제께 하사받은 가보인데, 꺼낼 일이 많지 않았다. 하여 그대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신검단주와 무위를 견줄 일이 달리 또 있을까.”
“가주의 공치사를 감당하기 힘듭니다. 사죄와 감사는 이미 소가주에게 들었으니.”
정연신은 담담히 대꾸했다. 청야곡 사건을 사과하지 않는 남궁가주의 언행을 꼬집은 것이다.
이어 곧바로 느꼈다. 옆에 있던 남궁화신의 호흡이 한 번 거칠어졌다. 이제는 안쓰러웠다.
“남장검을 보고도 그리 말할 수 있다는 게 놀랍구나.”
가주의 왼편에 자리한 여인이 입술을 뗐다. 이 자리에서 가장 화려하게 치장한 고수였다.
“천하 남직례를 지키는 담벼락이 내 부군과 아이들이다. 입황성이 민생을 논한다? 진정 그러하다면 생사결의 비무첩 따위를 보내서는 안 되었지. 네 그릇이 좁은 탓에 벌어진 일이다. 천하를 넓게 보지 못할지언정 어찌 감히 사죄를 입에 담느냐?”
남궁가주의 대부인이다. 뻔뻔스러운 게 남궁미 이상이었다.
“창령화주의 성품이 외탁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정연신은 담담하게 얘기했다. 네 딸 남궁미가 널 닮았다는 말이었다.
대부인의 미간이 모였다. 귀부인으로서 겪어 본 적 없는 무례일 것이다. 즉시 주변 대여섯 명의 몸에서 기파가 번졌다.
정연신은 참지 않고 일어섰다.
어차피 이들은 지금 자신과 남궁화신을 어찌하지 못한다. 행적을 드러내면서 왔다. 강호의 시선이 모인 사건이었다.
남궁세가에 들어올 때 등 뒤로 느낀 기척들이 다양했다.
구파일방의 개방, 박쥐 같은 하오문, 사파십삼천의 여령…… 한둘이 아닐 것이다.
“지난번에는 아군이었던 저를 토사구팽했지요. 지금은 무방비로 안방에 걸어들어온 적인데, 안면몰수하여 죽이지 않고 참아내는 귀가의 인내심이 경이롭습니다. 용케 본성을 드러내지 않는군요. 이 비무에 집중된 천하 세인들의 시선 탓일는지.”
“소가주. 저 아이를 곱게 귀천시키지 말게.”
남궁세가의 대부인이 냉엄하게 말했다. 소가주가 질색했다. 내내 불편한 기색으로 듣고 있던 참이었다.
“이제 소자의 일입니다! 뭇 어른들께서는 제발……!”
그때였다. 드높은 천장 바깥에서 강렬한 진동이 터졌다. 탁자를 비롯한 가재도구들마저 격렬하게 떨렸다.
[돼먹지 않은 종자여! 지금 무어라 지껄였는가―!]늙수그레한 음성이 무지막지한 지진처럼 팔방을 강타했다. 엄청난 진기가 실렸다.
육합전성(六合傳聲). 목소리 일갈이 천지사방을 채운다는 초상승의 절기였다.
우지끈하고 천장이 부서진 순간이었다.
콰아앙!
그대로 자줏빛 신형이 탁자 한복판에 내리꽂혔다. 흡사 낙뢰 같았다.
풍채 좋은 몸에서 휘몰아치는 기파가 좌중의 숨결까지 틀어막을 듯했다.
안개처럼 흐린 분진이 뒤늦게 일어났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한 노인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해 보라.”
육합전성을 발했던 목소리가 노기를 띤 채 울렸다.
칼날처럼 뚜렷한 눈매, 커다란 체구.
순백의 수염이 명치까지 내려왔는데, 이름난 붓처럼 품격이 있었다.
근육으로 올올이 짜인 몸에 걸친 자줏빛 장포에는 목깃이 달렸다. 노인의 성정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외조부님.’
정연신은 다소 멍하게 마연적을 바라봤다. 소년뿐만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고수들이 저마다 아연실색한 가운데, 남궁가주의 오른편에 앉아있던 노인이 침음했다.
“신검단주…….”
“남궁 장로원주. 아직 먼 과거에 갇혀 사는가. 본좌의 입신검(入神劍)을 후대에 넘긴 지가 언제인데.”
입황마가주 마연적이 매몰차게 말했다.
그가 다시 남궁 대부인을 바라봤다. 아무런 명분도 갖지 못한 자가 외손자를 핍박했다.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마연적의 주름진 얼굴에서 다시금 격노가 드러났다.
“천하에 배은망덕한 것들이 감히 내 손주의 죽음을 논했는가! 성주께서는 남궁 잡종가의 멸문을 명하시지 않았거늘!”
“지어미가 실언하였습니다. 마가주께서는 노기를 가라앉히시지요.”
남궁가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너울지는 공력의 파동 속에서 홀로 평온해 보였다.
그를 잠시 노려본 마연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노기를 눌러 내린 듯했다.
언제라도 불타오를 듯한 안광만이 무색으로 이글거렸다.
“비무 시일은 칠석(七夕)이다. 겸허히 준비하라.”
“그러지요.”
남궁가주가 대답했다.
그제야 마연적이 몸을 돌렸다. 정연신과 마주친 눈매가 순간 떨렸다.
외손자의 눈치를 보는 것마냥 고개를 슬쩍 비튼다. 삽시간에 태세가 바뀌었다.
“처음부터 동행하지 못해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성주께 임무를 받으셨다 들었는데.”
“이르게 완수한 참이었다. 휘주에 들어설 때쯤에 널 보았는데, 제법 강력한 혈귀가 지척에서 네 등을 노리고 있더구나.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혈귀라면……?”
“사교의 사도로 보였지.”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은 마연적이 말을 이었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본성의 원로원주가 뒤쫓고 있으니. 칠칠치 않은 늙은이라 해도 무력은 확실한 바, 곧 그 요녀의 머리를 가져올 게다.”
“원로원주께서…….”
“거처를 옮기자꾸나. 이런 구정물 속에서 어찌 편히 운기조식을 할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정연신은 마연적을 뒤따랐다. 남궁화신이 묵묵히 소년의 곁에 섰다. 뒤를 한 번 흘끗 돌아봤을 뿐이었다.
* * *
휘주에서 가장 큰 객잔에 새로이 짐을 풀었다. 침상과 식수를 비롯한 모든 것이 최고급이었다.
정연신은 시간과 의식에 몸을 맡겼다.
그 와중에 남궁미로부터 ‘연승식’ 제안이 왔다.
연소자부터 시작하여, 이긴 자가 비무를 이어나가도록 하는 게 어떻겠냐는 물음이었다.
남궁화신과 정연신을 벤 뒤에 항복할 심산으로 보였다.
“별 하찮은 것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구나. 남궁 것들도 어지간하다. 이따위 오만을 눈감아주다니.”
서찰을 훑어보던 마연적이 혀를 찼다. 정연신은 남궁화신을 보았다.
“저는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남궁 소협은 어떠신지요?”
수용한다면 백기린의 활약은 없다. 정연신이 소가주에게 패사한 뒤에야 차례가 올 것이다.
소년은 차라리 그랬으면 했다. 앞서 남궁 남매와 동행한바, 남궁화신의 정신이 문제라는 걸 알았다.
검야, 남궁세가 살수집단의 수장으로 길러졌다. 직계를 해할 수 없다는 금제가 술법적인 영역에서 의념을 파고든 상태라고 했다.
백기린의 극적인 승리는 헛된 기대였다. 현실적으로 그랬다.
‘영웅담에서나 들을 법해.’
정연신은 생각했다.
“…….”
입황성에 폐를 끼칠 텐가. 스스로 모친의 복수를 이루고자 발버둥 칠 텐가.
남궁화신은 숙고 끝에 연승식을 받아들이겠노라 말했다. 그가 과거를 극복할 기회는 달리 올 터였다.
그날 정연신은 한참 동안 동료의 곁에 묵묵히 있어 주었다.
날이 흘렀다. 무공을 다듬다 보니 벌써 칠석이었다. 그동안 쉴 새 없이 움직인 까닭일까.
고요하게 무공을 궁구하기 시작했을 따름인데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커다란 발상의 전환이 일었다.
‘시화무극수(時華無極手) 제사초…… 실전에서 완성할 수 있겠어.’
입황과 남궁의 생사결 비무 당일.
정연신은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내려다보던 금강경의 서책을 문득 덮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란 글귀가 함께 접혔다.
“오늘이군! 참으로 설레네그려.”
“자네는 어디에 걸었나?”
“아무래도 남직례에서는 남궁세가 아니겠나. 천하에서 소가주를 이길 후기지수를 손에 꼽기도 힘들 터이고.”
“의미 없네. 입황성 신검단주를 어찌 보는 겐가?”
“허면 남궁가주는 어떻고?”
소가주가 흉작을 말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휘주는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경천동지의 비무를 보고자 온 강호에서 몰려온 이들 덕이었다. 무인, 상인, 민초, 왕족을 가리지 않고 모여들었다고 했다.
커다란 도시의 소란이 극에 달한 날이다.
금전을 건 도박도 성행한다고 들었다. 거리에 광기가 들끓는 듯했다.
“정 소협.”
남궁화신이 딱딱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정연신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미는 문제가 아냐.’
소년은 소가주를 떠올렸다. 생각할 때마다 머릿속이 흥분으로 백열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어느새 무인으로서 지니게 된 호승심, 절세신공 제왕검형에 대한 흥미…….
이제 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객잔을 나선 순간 펼쳐진 도심의 풍경도, 그를 흘끗 본 초면의 신검단주도, 신검단 산하 십칠대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신검대까지도.
어느새.
그는 칠사도에게 사로잡혔던 청야곡 한복판에 서 있었다. 넋을 놓고 움직인 탓이었다.
―――!
드넓은 협곡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창령화주! 한 번만 이쪽을 봐주시오! 그대를 연모하오!”
“입황성의 섬예! 우리 아가씨의 솜털 하나 건들지 말지어다!”
“섬예 정 소협! 강호의 정의를 바로 세워주시오!”
결전을 치르는 군대마냥 모여서 천둥처럼 떠들어댔다. 중원 천하의 온 강호가 이 자리에 모인 듯한 진풍경이었다.
“네가 누군지 알고 싶었는데, 시체의 몸속이나 관조해야겠다.”
남궁미가 얄미운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비무가 시작된 참인 듯했다. 앞뒤 좌우를 남궁세가와 신검대 무인들이 둘러쌌다.
“너와 화신. 정이 들래야 들 수가 없었단다.”
남궁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보검이 휘황하게 빛났다. 서리서리 뻗쳐 오른 힘이 냉기를 품고 훅 다가왔다.
우웅!
정연신은 정가동공을 극성으로 일으켰다. 상급 영단을 섭취한 이후, 칠사도를 상대할 때 외에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눈앞의 적을 혈염교 칠사도로 상정했다. 그리해야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대성(大成) 경지의 동공이 일어났다. 체내의 기경팔맥과 십이경맥을 장중한 불꽃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사박.
남궁미가 현묘한 보법을 밟았다. 사뿐거리며 다가오는데 다음 방위를 알기 힘들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사서삼경의 주역(周易)을 공부하여 팔괘(八卦)에 밝다고 했다. 보신경에 진법의 이치를 담았다고.
순간, 정연신은 환익이보의 한 걸음을 내디뎠다. 입황성주의 기세를 헤치고 뇌선보주를 취하러 갈 때처럼.
저벅.
발끝에서 일어난 바람이 모든 기파를 밀어냈다. 눈을 현혹하는 모든 것을 일보로 풀어헤쳤다.
우아하게 흔들리던 남궁미의 몸이 장막 걷히듯 뚜렷하게 멈추었다.
“아……?”
그녀에게도 상단전의 예지가 닿은 걸까. 고운 얼굴에 극심한 두려움이 어렸다.
용모를 몰라볼 정도였다. 일전에 보인 미완성의 장법이 오히려 방심을 심어준 걸까. 얕봐도 너무 얕봤다.
‘이제 일행이 아닌데도.’
키이잉!
정연신의 오른손에 빛살이 담겼다. 혜성처럼 뽑은 검을 그대로 올려쳤다.
푹 하고 들어간 입황검의 칼날에 남궁세가 비전의 호신기(護身氣)가 처참히 찢겼다.
광화검류의 궤적은 거침없이 뻗어 나갔다. 순식간에 흰빛이 남궁미의 목에서 이지러졌다.
손잡이에 느낌이 왔다. 머리를 완전히 잘라냈다.
화아아아악!
검극에서 맺힌 경력이 강풍을 일으켰다. 입황검이 달무리 같은 검로를 그리며 되돌아온다.
널브러지는 남궁미의 몸을 그대로 스치며 정연신의 검집에 다시 꽂혔다.
일검이었다.
“나는 관심 없다. 네가 누구든.”
소년은 시체에 대고 담담히 뇌까렸다.
광활한 청야곡이 꺼진 불씨처럼 고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