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uin A Love Comedy RAW - Chapter (207)
Chapter 207 – 겨울방학
“뒤꿈치에 무게 싣고 엣지 들어. 벽에 등을 기댄다고 생각해봐.”
“기댈 게 없는데 뭐라는 거야?”
“중심을 살짝 뒤로 이동시키라는 뜻이야.”
“아이 씨… 넘어질 것 같잖아.”
“화내지 말고 해봐. 내가 도와줄게.”
사이드슬립이라는 기초 기술을 가르쳐주던 미유키가 내 앞으로 오더니 양손을 뻗었다. 잡으라는 뜻. 팔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중심을 잡아보려 노력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재빨리 그녀의 장갑 위에 내 손을 올려놓았다.
“여기서 천천히… 무릎 너무 굽히지 말고 뒤로… 옳지.”
미유키가 도와주니 대충 감이 잡힌다. 도움을 받으면서 나름 스무스하게 사이드슬립으로 내려가고 있는 나를 보며, 미유키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잘하고 있네. 이제 손 놔도 되지?”
“놓지 마.”
“무서워?”
“아니.”
“무서운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그럼 손 놓는다?”
“놓지 말라고 했다. 아직 배운지 10분도 안 됐는데 벌써 놓으면 나더러 죽으란 거냐?”
“잘하니까 놓는다고 한 거지 바보야. 왜 이렇게 삐딱해?”
“아무튼 놓지 마.”
미유키는 기초적인 기술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신기했는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은근히 기뻐하고 있는 듯한 건 착각인가?
“이대로 내려가 그럼?”
“어.”
“알았어. 겁은 많아가지고…”
그렇게 미유키의 손을 잡고 그녀와 함께 슬로프를 내려가는데, 중급자 코스에 있어야할 테츠야가 슬로프 아래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는 게 보였다.
신경이 쓰여서 왔나보지? 거리가 먼데다 고글까지 쓴 채라 놈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속이 타들어가고 있을 것만큼은 알겠다.
생각해보라. 자신이 탐탁찮게 생각하는 남자의 손을 붙잡고 정성을 다해 과외를 시켜주는 소꿉친구… 중간중간에 깔깔거리는 모습까지 더해지니 속이 안 뒤집어지고 배기겠는가?
근데 뭐 어쩔 건가? 지가 우유부단하게 굴다가 이렇게 된 건데, 자업자득이지.
물론 저놈은 자아성찰 같은 건 안 하고 그저 날 향한 시기심만 키우고 있을 거다. 테츠야는 그런 놈이니까.
“마츠다 군…! 몸에 힘 빼! 넘어질 것 같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중 들려오는 미유키의 다급한 목소리. 미유키의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본 나는, 재빨리 무릎을 굽혀 무게중심을 뒤로 두었다. 이후 엉덩이로 쓰러지면서 미유키를 잡아당겼다.
“마, 마츠…! 꺄악!”
답지 않게 높은 톤으로 비명을 터뜨리며 내 위에 쓰러진 미유키. 스키장에서 처음 보여주는 다급한 모습에 킥킥거린 나는, 두터운 장갑을 낀 손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냐?”
“…. 응. 마츠다 군은?”
“괜찮긴 한데 좀 무겁네.”
그 말에 입을 삐죽 내민 채로 일어나려던 미유키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돌연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딪쳤다. 그리고는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는지, 아무런 말없이 내 스키복 위에 얼굴을 묻었다.
누가 봐도 다정한 커플 같은 행동이다. 테츠야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봤을까? 아직 우두커니 서있다. 분명히 봤겠지.
거리 때문에 미유키가 정확히 뭘 했는지는 모를 수 있겠지만, 우리가 쓰러진 채로 일어나지 않는 걸 알고 짜증이 좀 날 거다. 만약 이것마저 못 봤다면 그냥 신이 테츠야의 눈치를 빼앗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제 슬슬 나와 미유키 사이에서 빠져라. 뭐라도 할 용기조차 없는 너는 패배자위만 하는 게 맞다. 그리 생각한 나는 미유키가 끙끙거리며 일어나자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도 일으켜줘.”
“안 돼. 경사진 곳이라 또 넘어질 수가 있으니까 스스로 일어나. 일어나는 법 배웠잖아.”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럼 그대로 앉아있어도 돼.”
붉게 상기된 뺨을 가리고 싶은 듯 고글을 쓰는 그녀. 살웃음을 지은 나는 더 이상 미유키를 놀리는 것을 그만두고 데크를 잡으며 슬로프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나는 낙엽타기 같은 기초만 배운 채로 초급 슬로프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미유키와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어 좋긴 했으나, 자존심이 조금은 상한다. 몸을 쓰는 건 뭐든 잘할 줄 알았는데 왠지 굴욕을 당한 기분이야.
**
다음날, 다른 호텔에서 묵은 뒤 단체관광을 하고 도쿄로 돌아가는 열차 안.
“마츠다 군, 마츠다 군은 방학 때 뭐해?”
어둑한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던 나는, 맞은편에 앉은 부반장의 물음에 귀를 쫑긋했다. 방학이라… 곧 렌카를 조교할 시간이 다가오는구나. 기대감으로 가슴이 마구 뛴다.
“글쎄.”
그러자 내 어깨에서 꾸벅꾸벅 졸려고 하던 미유키가 눈을 비비적거리더니 말했다.
“나랑 테츠야 군이랑 같이 공부하기로 했어.”
“아 진짜? 그럼 2학년 중간고사 때 기대해 봐도 되는 거야?”
그러고 보니 겨울방학 후 시험이 없는 무난하고 짧은 3학기를 끝내면 곧 2학년이 된다. 반은 현실 대다수의 일본 학교와는 다르게 1학년 때의 반을 그대로 가져가 올라갈 터.
어떻게 보면 지루하겠지만, 또 어떻게 보면 적응하기가 쉬워서 나름 나쁘진 않았다. 테츠야의 면상을 계속 보는 건 좆같지만 뭐… 그러려니 해야지. 적당히 놀려주다가 무시하면 그만이니까.
“이번 시험 결과부터 봐야겠지?”
“넌 학생회니까 언제 나오는지 알지? 우리한테만 살짝 알려주라.”
“방학 전에는 나올 거야.”
미유키와 부반장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테츠야가 앉은 곳을 살펴보았다. 퍼질러 자고 있구나. 오늘 아침부터 생긴 뚱한 표정이 자면서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저것도 능력이다.
톡.
대화를 끝내자마자 다시금 내 어깨에 수건을 올려놓고는, 자신의 머리를 기대고 기다랗게 하품을 하는 미유키. 그런 그녀를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은 부반장이 말했다.
“그냥 등받이를 당기면 되지 않아?”
“난 이게 편해.”
“보기 좋네? 어제 스키장에서도, 오늘 관광할 때도 꼭 붙어 다니더니.”
그 말에 힘없이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미유키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에 외투를 덮어준 나는, 여행을 올 때처럼 눈 꼴 시렵다는 듯 혀를 차는 부반장에게 히죽 웃어보이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
여러 일들이 지나갔던 여행이 끝났지만, 아카데미는 평소와 같았다. 예전처럼 수업을 했고, 예전처럼 부활동을 했다. 다만 학생들의 마음속이 내일부터 돌입할 겨울방학으로 가있는 데다 기말고사까지 끝난 시점이었기에, 교사들은 학생들을 많이 풀어주었다.
“후배님, 후배님.”
쉬엄쉬엄한 수업을 끝낸 뒤 부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내게 다가온 치나미의 부름. 그녀를 간만에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내가 방긋 웃었다.
“예, 스승님.”
“여행은 잘 다녀오셨나요?”
“그럼요. 참, 보내준 사진 잘 봤습니다.”
“앗, 어땠나요?”
“스승님도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 것 같아서 기뻤네요.”
관광지에서 밝게 웃는 치나미와 렌카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다만 저번에 사진을 보내달라고 말했을 때 치나미의 얼굴이 붉어졌던 터라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게 없어서 조금 아쉬웠다.
“무후후… 따뜻미지근한 오키나와가 마음에 들었어요. 렌카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해서 나중에 따로 같이 가기로 했답니다.”
그럼 거기에 나도 껴야겠군. 여행의 여운에 취했는지 눈빛이 몽롱해진 치나미를 잠깐 내려다본 내가 물었다.
“스승님은 방학 때 뭘 할 건가요?”
그에 고개를 마구 털어내며 정신을 차린 치나미가 대답했다.
“원래는 집에서 빈둥거릴 예정이었는데, 부모님과 함께 시골에 가기로 했어요.”
“그래요? 언제 돌아오는데요?”
“언제까지 묵을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꽤나 오래 있을 것 같아요. 한 열흘…? 길면 보름? 다음 동계대회 전까지는 돌아올 생각이에요.”
치나미는 최소 이틀마다 한 번씩 보면서 힐링을 해줘야하는데… 이러면 조금 곤란하다. 영상통화가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치나미의 말랑말랑하고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만지고 싶단 말이야.
집으로 초대하려고도 했건만… 그래도 가족 일이라는데 어쩔 수 없지. 치나미가 시골에서 돌아올 때를 기약해야겠다.
“그렇군요. 가서 자주 전화해요.”
“넷, 그럴게요.”
“이제 일할까요?”
“엇, 저는 감독님과 3학기 때 사용할 비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하니, 후배님께서는 먼저 일을 하고 계세요.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마시고 요령을 조금 피우시면서요.”
팔을 쭈우욱 뻗어 내 어깨를 토닥거린 치나미가 감독실에 노크를 하더니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평소처럼 뚱한 표정을 지은 렌카가 내게 다가오자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안녕하세요, 부장. 스승님이랑 잘 놀다 왔어요?”
“응. 네가 없어서 굉장히 좋았던 것 같아.”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기는.
“저도 부장이 없어서 좋았습니다.”
“그렇다니까 다행이네. 일일알바 안 까먹었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흘 뒤 여덟 시까지 삼촌네 집으로 가면 되잖아요.”
“맞아.”
“그때 제 차로 같이 갈까요?”
“아니. 제안은 고맙지만 정중하게 거절할게.”
“알겠습니다. 여섯 시 반까지 집 앞으로 갈 테니까 나와요.”
“거절한다니까?”
“알았어요. 그럼 같이 가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렌카의 눈이 질끈 감겼다 뜨였다. 내 막무가내 식 화법에 뒷목이 당기는 모양이었다. 리액션이 찰져서 좋긴 하지만 이쯤 됐으면 적응을 할 만도 한데 저러는 모습이 웃기다.
“진짜로 올 거야?”
“믿기 싫으면 먼저 가도 돼요.”
“…. 그럼 내가 집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잘 아시네요.”
“하… 알았어. 같이 가.”
“그래요. 대중교통으로는 2시간 이상 걸리는데 시간도 아끼고 얼마나 좋아요.”
“그렇다고 치자.”
“삼촌네 가게 도와주고 바로 알바 시작할 거예요?”
“…. 시작은 할 건데, 바로는 아니야.”
“왜요?”
“일이 있어서.”
렌카가 말한 일이라는 건 코미케를 말함이었다. 그날 자신이 좋아하는 굿즈를 무더기로 구입하겠지? 날 마주치면 어떤 표정이 튀어나올지, 그리고 어떤 핑계를 댈지 정말 궁금해진다.
“이제 일해.”
“할 일이 별로 없는데 좀 쉬면서 할게요.”
“뭐라는 거야… 엄청 많거든? 저기 수건 무더기로 쌓여있는 거 안 보여?”
절도 있게 부실 한켠을 가리키는 렌카. 약간 잔소리를 하는 와이프 같은 느낌이다. 못 이기는 척 한숨을 푸욱 내쉰 나는, 방학 때 렌카가 보여줄 다양한 반응을 상상해보며 수건을 접기 시작했다.
봄방학이 없는 건 아쉽지만, 대신 겨울방학이 기니까 괜찮다. 렌카와 톡톡 튀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걸로 만족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