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uin A Love Comedy RAW - Chapter (355)
EP.355 약소한 선물
줄기차게 내리던 비는 우리가 룸 시간을 3시간동안 연장하고 나서야 그쳤다.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이 가득했다.
언제든 다시 쏟아질 수 있는 상황 같았다.
이대로 가다간 이 복합 카페에서만 시간을 보내게 될 듯했기에, 나는 입을 헤 벌린 채 누워 자고 있는 히요리의 바보털을 건드리며 그녀를 깨우려고 했다.
툭, 툭.
“야. 일어나.”
“…..”
미동도 없는 그녀.
담요까지 걷어찬 상태로 아주 편안하게 자고 있다.
남자가 옆에 있음에도 저토록 곯아떨어진 모습을 보니, 그녀와의 첫 관계는 다른 히로인들만큼 부끄부끄한 분위기가 흐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냅다 키스를 갈기고 싶어지지만 참자.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나는 어떡하면 히요리가 바로 일어날까 고민해보다가,
콕.
손가락으로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살짝 찔러보았다.
“흐어…?”
그러자 히요리에게서 반응이 왔다.
부스스한 눈을 뜨며 날 올려다본 그녀가 눈가를 비비적거리더니 상체를 일으킨 것이다.
얼빵한 탄성을 터뜨리곤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에 꽂혔다.
“…..”
“…..”
그렇게 나와 짧은 눈싸움을 하던 그녀의 눈이 게슴츠레 뜨였다.
동시에 입이 천천히 벌어지면서 헤엑… 헥 하는 소리를 내는데, 재채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이대로 가다간 내 얼굴에 비말이 잔뜩 묻을 것 같았기에, 나는 냅다 담요를 집어 히요리의 머리에 던졌다.
덮어씌워진 담요 안에서 헥헥거리며 시동을 걸던 그녀는, 재채기가 쏙 들어갔는지 담요를 내려놓고 입맛을 찹찹 다셨다.
그리고는 내 눈치 따윈 보지도 않고 기지개를 켰다.
주먹을 꼬옥 쥔 채 팔을 사선으로 쭈욱 드는 히요리의 매끈한 겨드랑이가 보인다.
여기서 몸까지 부르르 떠니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느낌.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짧은 시간에 온갖 기행을 벌인 히요리가 여전히 비몽사몽한 얼굴로 달 쳐다보았다.
“지금 몇 시에요…?”
“밥 시간 됐어.”
“그래요…? 배 안 고픈데… 비는 그쳤어요?”
“어.”
“그럼 나가야 돼요?”
“여기 있고 싶은가보네?”
“졸려요… 나가기 귀찮아…”
“오늘 하루는 아예 여기서 다 해결할까 그럼?”
“아니요… 네…”
“아니라고? 그렇다고?”
“잘 모르겠엉…”
그리 말하고는 자신의 상체를 앞으로 숙이는 히요리.
스트레칭을 하려는 듯 팔까지 쭈우욱 뻗는데, 유연성이 대단하다.
그 상태로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매트에 피아노를 치듯 두드린 그녀는, 날 장난스럽게 한 차례 팍 쏘아보고는 뒤로 벌러덩 누웠다.
그리고는 담요를 덮더니 새우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선배. 저 추워요.”
“에어컨 꺼달라고?”
“응.”
여기가 아주 제 집인 줄 아는구나.
에어컨을 끈 나는 좁은 룸 안에서 이리저리 뒹굴거리기 시작한 그녀를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재밌냐?”
“아뇨.”
“근데 왜 그러고 있는데?”
“선배 못 눕게 방해하려구용.”
유치하기까지 하다.
오늘 히요리의 다양한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히요리의 몸이 가는 경로에 한쪽 다리를 우뚝 세웠다.
이후 다리에 등을 부딪치고 멈춘 그녀를 발등으로 밀면서 자리를 잡았다.
한 뼘 정도의 공간만 남아있는 가까운 거리만 두고 나란히 누우니 왠지 기분이 묘하다.
간질간질하면서도 말랑한 느낌.
이걸 언제 겪어봤더라? 아마 미유키와 있을 때였던 것 같다.
“선배 몸이 너무 두꺼워서 자리가 꽉 찼잖아요.”
반면 히요리는 나와 비슷한 기분 같은 건 전혀 들지 않았는지, 속사포처럼 입을 놀리며 내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허리를 만져서 입을 다물게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해본 내가 말했다.
“시끄럽고, 네 옆에 있는 만화책이나 갖고 와봐.”
“제가 보던 거요?”
“아니.”
“몇 권?”
“2권.”
“같이 봐도 돼요?”
“2권부터라서 이해 안 될 텐데?”
“선배가 설명해주면 되잖아요.”
“그래라.”
스윽.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히요리가 자신의 머리를 내 머리에 냅다 들이밀었다.
서로의 머리카락 감촉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
그에 순간적으로 숨을 훅 삼킨 나는, 빠르게 마음을 다스리고 만화책을 폈다.
내용은 당연히 들어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면 히요리의 오똑한 콧대와 내 입술이 닿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집중을 전혀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화책을 우리 사이에 들어올린 터라 어깨까지 맞부딪치는 건 덤.
이대로 몸을 돌려 히요리를 끌어안고 싶다는 욕심이 마구마구 샘솟는다.
“이 사람은 누구에요?”
그런 와중에 자신의 검지로 만화 캐릭터를 가리키는 히요리의 질문에 살짝 곤란하긴 했지만, 1권을 나름 집중해서 읽었기에 설명하는데 딱히 큰 문제는 없었다.
“주인공 조력자야.”
“조력자가 뭔데요?”
“…. 진심으로 묻는 거냐?”
“농담이에요.”
“조력자가 무슨 뜻인데?”
“왜 테스트를 해요? 도와주는 사람이잖아요. 제가 그것도 모를 것 같아요?”
“몰라서 묻는 줄 알았지.”
“누가 봐도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어감 파악 같은 걸 했었어야죠.”
“어감이 일정했었어.”
“아닌데?”
“아닌 게 아니라 맞아.”
“제 목소리는 제가 더 잘 아는데요?”
“말대꾸하지 마라. 내가 맞다면 맞는 거야.”
“으… 꼰대.”
“진짜 꼰대가 뭔지 보여줘?”
“잘못했엉. 근데 저 배고파요.”
자신의 배를 만지작거리는 히요리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은 나는 그녀를 살짝 돌아보았다.
“배 안 고프다며.”
“고파졌어요.”
“메뉴판 줘봐 그럼.”
“여기서 먹게요?”
“어.”
“알았어요.”
TV 거치대 위에 있는 기다란 메뉴판을 가져오려던 히요리가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손이 안 닿아요.”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헛웃음을 친 나는, 까부는 히요리를 교육해주기도 할 겸 그녀의 허리 옆에 손을 짚었다.
이후 그녀의 가슴 위로 내 상체를 들이밀고, 손을 쭉 뻗어 메뉴판을 집었다.
내가 그러는 사이, 중력으로 인해 내려간 티셔츠가 히요리의 얼굴과 가슴을 살포시, 스르륵 스쳤다.
시도 때도 없이 나불거리던 그녀의 입은 꾸욱 닫힌 채였다.
메뉴판을 보고 있는 내 눈치를 흘끔흘끔 보는데, 방금 내 행동에 나름의 야릇한 기분을 느낀 모양이었다.
얼굴을 비롯한 피부는 빨개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뭐 먹을래?”
그런 히요리에게 먹을 음식을 묻자, 약간 맹한 상태였던 그녀가 정신을 차리더니 되물었다.
“넹…?”
“뭐 먹을 거냐고.”
“…. 메뉴를 보여줘야 알죠…!”
다시 원래의 까불까불한 자신으로 돌아온 히요리.
피식한 내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그녀가 상체를 일으키더니 나와 약간의 거리를 두며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내놔요…!”
그리고는 귀여운 투정을 부리며 내 손에 있는 메뉴판을 빼앗아갔다.
오늘 하루는 굉장히 즐거우리라는 예감이 든다.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히요리와 먹을 메뉴를 골랐다.
**
밥을 먹은 히요리의 심심하다는 말에 밖으로 나온 나는, 히요리와 사이좋게 우산을 쓴 채 가랑비가 내리는 거리를 거닐었다.
그러다 한 상가 1층 유리에 과일 캐릭터 스티커가 붙어있는 팬시샵이 하나 보이자 그곳으로 눈길을 주었다.
“아기자기한 취향이에요?”
놀릴 거리를 찾았다는 듯 음흉한 미소를 지은 히요리의 말.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은 내가 대답했다.
“아니야.”
“근데 왜 눈을 떼지 못해요?”
“찾고 있는 게 있어서.”
“어떤 거?”
“일단 들어가자.”
“어떤 거냐고요…! 알려줘요…!”
생떼 비슷한 것을 쓰기 시작한 히요리를 달고 샵 안으로 들어간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키링 코너였다.
과일 캐릭터 스티커가 붙어있었으니, 다양한 종류의 과일 키링을 팔 거라는 예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코너에 원하는 키링을 파는 걸 확인한 나는, 그것들을 둘러보다가 동그란 레몬 조각이 하나 달려있는 키링을 골랐다.
그리고는 여러 물건을 구경하고 있는 히요리 몰래 계산을 마치고,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살 거 있어?”
“아뇨? 구경만 하고 있었어요. 선배는 원하는 거 골랐어요?”
“어. 나가자.”
“뭐 샀는데요? 아 같이 좀 가요…!”
히요리와 밖으로 나온 나는, 계속 투덜거리고 있는 그녀에게 투명한 포장지에 감싸여있는 키링을 내밀었다.
그러자 무심코 그것을 받아든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예요? 레몬 키링이네?”
“너 써라.”
“쓰라구요? 저한테 주는 거예요?”
“맞아.”
설마 내가 이런 선물을 줄 줄은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히요리가, 우산 아래에서 키링을 낱낱이 살펴보더니 말했다.
“왜 하필 레몬이에요?”
“어울리는 것 같아서.”
“…. 그래요?”
기분이 좋은 듯 배시시 웃는 그녀.
고마운 기색이 깃든 눈빛에 멋쩍은 척 뺨을 긁은 내가 대답했다.
“감사인사 안 하냐?”
“지금 하려고 했는데용?”
“해 그럼.”
“고마워요. 소중히 간직할게요.”
네 모든 것들을 레몬으로 덧씌워주겠다.
라는 말을 속으로 삼킨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냐.”
“이거 가방에 달까요? 휴대폰에 달까요?”
“네 마음대로 해.”
“어디 달았으면 좋겠어요?”
“마음대로 하라니까?”
“선배 마음은 어떠냐고 묻는 거잖아요.”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 아니야.”
“츤데레에요?”
“시끄러. 커피나 먹으러 가자.”
“선배 알바했던 곳?”
“거긴 너무 멀어. 네가 아는 곳으로 안내해.”
“음…”
주변을 살펴본 히요리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맞은편 인도를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면 당근 케이크 맛있는 카페 있어요.”
“가자 그럼.”
히요리와 함께 신호등으로 가면서, 나는 키링을 샀던 샵 이름을 머릿속에 기억해놓았다.
나중에 따로 와서 미유키, 렌카, 그리고 치나미의 것도 사기 위해서였다.
아니지, 치나미의 것은 모모님 굿즈 샵에서 하나 고르도록 하자.
물론 이미 갖고 있겠지만, 내가 준 키링이라면 무척 기뻐하며 휴대폰이나 열쇠에 달리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선배, 어때용?”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자신의 알록달록한 휴대폰 케이스에 키링을 걸어놓은 히요리가 어서 칭찬을 해달라는 듯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달랑거리고 있는 레몬 조각.
그것을 본 내가 담백한 감상을 전했다.
“어울리네.”
그러자 헤실거린 히요리가 자신의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일부러 키링이 밖으로 빠져나오게끔 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기껍다.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히요리와 함께 빗물이 스며들어 물기로 반짝이는 횡단보도를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