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uin A Love Comedy RAW - Chapter (430)
EP.430 렌카 조교일지 5 #2
“나 물…”
“달려.”
“물…! 물 줘요…! 가지 마…!”
물통을 들고 멀어지는 날 기를 쓰며 쫓아오는 히요리를 보니 폭소가 터져 나오려고 한다.
지금 웃는다면 왜 자신을 놀리냐며 투정을 부릴 게 뻔하다.
안 그래도 땀을 주륵주륵 흘리고 있는데 혈압을 높이면 안 되지.
적당히 히요리와 술래잡기를 하던 나는 걸음을 느리게 했다.
이후 헉헉거리며 따라오는 히요리의 위에 물통을 들어올렸다.
“아 해.”
“아아앙…”
눈앞의 물통에게만 시선을 둔 채 입을 헤 벌리는 히요리.
체면 따윈 온데간데없어진 그녀의 입 안에 물을 쪼르르 흘러내리게 한 내가 당부했다.
“머금고 천천히 넘겨.”
꿀꺽.
내 말을 듣지도 않은 히요리의 목젖이 크게 꿀렁거렸다.
물을 한 방에 삼켜버린 것이다.
이럴 것 같긴 했는데… 그냥 한 모금 정도의 분량만 넣어줄 걸 그랬다.
“천천히 넘기라고 했는데 왜 청개구리 같은 짓을 해?”
“힘들어… 더 줘요…”
“조금씩 마실 거야?”
“네…!”
“앞으로 말도 잘 들을 거고?”
“네…!”
“약속한 대로 옷도 야하게 안 입을 거지?”
“네…!”
이거 왠지 꼴린다. 왠지 조교를 하는 것 같은 느낌.
마치 간식을 앞에 둔 강아지가 꼬리를 살랑살랑 움직이듯 헥헥거리는 히요리와 문답을 더 해볼까 고민하던 나는, 그녀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안 주면 죽을 것 같네. 체력이 이렇게 달려서야 밤엔 어떡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미유키와는 다르게 한 번 하면 그대로 뻗으려나?
그것도 보기에 나쁘지 않을 듯하다.
운동을 마친 나는 힘에 부쳐 어깨를 축 늘어뜨린 히요리와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녀를 노천탕이 있는 욕실로 보내고, 나는 작은 욕실에서 샤워를 마쳤다.
히요리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머리까지 말리고 TV를 보고 있을 때까지도 탕 안은 몹시 조용했으며, 샤워기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나 싶었던 나는 욕실 문 앞에서 히요리를 불러보았다.
“야.”
제법 큰 목소리였음에도 아무 대답이 없다.
설마 빈혈 증세라도 일으켜서 기절한 게 아닐까?
그런 불안감이 엄습한 나는 욕실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철컥.
문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반응은 전무했다.
진짜 정신을 잃었나?
걱정스러움이 덜컥 일어난 나는 문을 활짝 열고 노천탕 안을 살폈다.
김이 모락모락 일어나고 있는 탕 안에, 깡패마냥 양팔을 테두리 면에 넓게 벌린 채 몸을 지지고 있는 히요리가 보인다.
머리까지 젖힌 채로 눈을 감고 있는데, 움직임이 없는 것 같다.
라고 생각하던 찰나,
“응악.”
히요리가 입맛을 찹찹 다시며 자신의 코를 찡긋했다.
잠꼬대 비스무리한 행동이었다.
잠깐 잠든 것이었구나.
안도감이 차오른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다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히요리가 잠에서 깨어날 정도로 크게 문을 두드렸다.
쿵! 쿵!
그러자 안에서부터 물이 찰박이는 소리와 함께, 히요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예요…!?”
“대답 없길래 두드려봤어. 잤지?”
“넹… 빨리 씻고 나갈게요.”
“천천히 해.”
경계심 없기는… 내가 탕 안으로 한 발자국만 더 내딛었으면 알몸이 공개되었을 텐데, 어쩌려고 퍼질러 잤을까 싶다.
내가 극도로 사악한 놈은 아니라서 다행인 줄 알아라.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눈에 힘이 잔뜩 풀린 히요리가 밖으로 나왔다.
그 모습을 본 내가 지나가듯 말했다.
“정 졸리면 조금 쉬었다 가든가.”
“무, 뭐래요…! 저 집에 갈 거예요.”
내가 저번에 했던, 자고 가라는 말을 신경 쓰나보다.
바짝 쫄아버린 히요리를 향해 피식하자,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하였는지 발끈한 그녀가 말을 이었다.
“방금 뭔데요?”
“뭐가?”
“그 미소 뭐냐구요.”
“귀여워서.”
“무, 뭣…!?”
한쪽 팔을 가슴께까지 들어올리고 한발을 뒤쪽으로 옮기며 놀라는 그녀.
방금 리액션이 참 치나미 같다고 생각한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방 구석을 가리켰다.
“머리 말려. 집 가게. 옷은 네가 입고 온 거 입어. 어차피 차에 태우고 갈 거니까.”
“…. 싫은데요? 이거 입고 돌아갈래요.”
“그럼 그러든가. 근데 저번에 빨고 준다던 바지는 어디 갔냐?”
“모아서 줄게요.”
안 그래도 미유키의 집에 옷가지를 넣어놨는데, 이러다 내가 입을 옷이 전부 없어지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오랜만에 쇼핑이라도 해야 하나? 내일 렌카와 만나며 생각해봐야겠다.
**
블라우스 같은 하얀 민소매 와이셔츠, 그리고 밑단이 살랑거리는 검은 슬랙스와 굽이 높은 샌들.
어른스러움이 물씬 묻어나오는 코디를 한 렌카와 만난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요, 부장.”
“인사 공손하게 해.”
“예. 안녕하세요, 부장.”
렌카의 눈썹이 꿈틀했다.
평소였다면 공손하게 한 건데 왜 딴지를 거느냐고 말했을 내가 순순히 말을 바꾼다?
렌카의 입장에서 이것보다 이상한 일은 없을 것이었다.
“뭐하는 거야?”
“뭐가요?”
“왜… 아니다.”
왜 갑자기 말을 잘 듣고 난리냐.
이런 말을 하고 싶지만 직접 입 밖으로 꺼내긴 애매해서 입을 다문 것 같다.
사회통념상 말을 잘 들으면 좋은 거니까.
이걸 얘기하면 내가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볼까봐, 놀림을 당하기 싫어서 그냥 침묵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솔직하게 터놓고 말을 해야 관계발전도 있는 법인데…
내게 당한 것이 하도 많아서 경계를 하고 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미안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직장인처럼 입고 나온 렌카와는 달리, 나는 캐주얼한 복장을 입고 있었다.
약간 여자 교수와 남자 학생이 은밀한 데이트를 하는 느낌이라 왠지 꼴린다고 생각하며, 내가 물었다.
“오는데 뭐 문제는 없었죠?”
“어.”
“그럼 들어갈까요?”
“그래.”
스윽.
무감정한 투로 대답을 하는 렌카의 등허리에 팔을 두르려고 하자, 그녀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날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뿐, 딱히 반발은 하지 않고 내 품으로 당겨오려는 팔을 버티기만 했다.
티를 내지 않고 끙끙거리며 허리에 힘을 주는 그녀를 내려다본 내가 말했다.
“그렇게 싫어요?”
“뭐가?”
“배에 힘 엄청 들어갔잖아요.”
“…. 시끄러워.”
픽 하는 웃음을 터뜨린 나는 손을 떼어내면서 렌카보다 한걸음 앞서 매장으로 들어갔다.
이후 입구서부터 쫙 늘어선 진열대 안의 피규어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궁금한 거 없어?”
렌카는 내가 씹덕 이야기를 하는 걸 싫어한다.
그럼에도 제가 먼저 나서서 설명을 해주려고 한다?
렌카도 느끼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내 주변에 흐르는 수상한 기류를 말이다.
그녀가 안달이 나게 될 때가 내 예상보다 빨라질 듯하다.
속으로 낄낄 쪼갠 나는 투명한 유리벽 안에 있는 로봇 피규어를 가리켰다.
“저건 뭔가요?”
“두 달 전에 새로 나온 메카물 주인공.”
“메카물도 즐겨 보는 줄은 몰랐네요.”
“원래는 잘 안 보는데, 메카물 신작은 드물어서 조금 챙겨봤어.”
“재미있었어요?”
“뭐… 그럭저럭.”
“그렇구나. 나도 한 번 봐야겠네요. 뭐 살 거 없어요?”
“난 없어.”
“추천해줄만한 건요?”
“…. 첩자가족 피규어 산다고 하지 않았어?”
“인기 많아서 다 팔릴 거라고 했잖아요.”
“그건 새 거고, 예전 피규어는 몇 개 있을 거야. 이쪽으로 와.”
망설임도 없이 코너를 찾아 걸음을 옮기는 렌카.
그런 렌카의 뒤를 따라가니, 과연 그녀의 말마따나 품절 스티커가 붙어있지 않은 첩자가족 피규어가 몇 개 보였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가 그녀가 돌아볼 때쯤 표정을 굳힌 나는, 귀여운 2등신 피규어를 훑어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귀엽네요. 이거 세 개 사야겠다.”
“포장지 뜯기 전에 도색 먼저 확인하는 건 알지?”
“아뇨. 몰라요. 그렇게 해야 돼요?”
“어. 개봉하면 교환 힘들어. 근데 뭐… 2등신 피규어는 대부분 잘 나오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알겠어요.”
그렇게 직원에게 말해 피규어를 산 나는, 도색을 대충 확인해보고 쇼핑백에 물건을 집어넣었다.
이후 렌카와 함께 가게를 나왔다.
“밥은 안 먹어도 되지?”
자신의 민소매 와이셔츠 카라를 쓰다듬은 렌카의 말.
목소리에 높낮이가 없는 것이, 데이트가 아니라 의무적인 직장 일을 처리한 것 같았다.
하지만 말투와는 달리, 그녀의 마음속은 약간 불안할 것이었다.
“예, 뭐… 안 먹어도 됩니다. 바빠요?”
“아니.”
“그럼 영화 한 편 볼래요?”
“좋아.”
이것 보라.
예전 같았으면 내키지 않는 척 일단 한 번 튕겼을 텐데, 지금은 흔쾌히 그러라 하고 있잖은가.
‘그렇게 해’, ‘마음대로 해’ 같은 말도 쓰지 않고 좋다는 대답까지 하면서 말이다.
렌카와 함께 차에 탄 나는 쇼핑백을 뒷좌석에 놓아두고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는 렌카가 안전벨트를 다 매자, 내비게이션을 찍으며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스승님이랑 셋이서 같이 호텔도 가야 하는데.”
“뭐래…! 안 가. 치나미는 허락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달라. 네 음흉한 욕구를 채워주지는 않을 거야.”
“그래요… 아쉽네요.”
“아쉽다니? 애초에 그게 당연한 거야.”
“그런 의미로 아쉽다고 한 말은 아닌데요.”
“그럼 뭔데?”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포기하겠다는 뜻이었어요. 그래서 아쉽다고 한 거예요.”
“그래…?”
“예. 호텔 얘긴 오늘부로 끝낼게요.”
“…. 진짜야?”
렌카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기에, 난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미심쩍은 기색이 담겨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니까요. 가는 동안 영화 볼 거 고르고 있어봐요.”
“무슨 장르로?”
“부장이 보고 싶은 걸로요.”
“난 딱히 없는데… 일단 뭐 상영하는지 봐볼게. 근처에 있는 영화관으로 갈 거지?”
“예.”
“알았어. 내가 알아서 예매한다 그럼?”
“그렇게 해요.”
“…. 이상한 놈이네 정말.”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저리 중얼거리는 그녀.
오늘따라 개구쟁이스러운 면모가 거의 없는 내게 위화감을 느끼고,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게 웃기면서도 귀엽다.
영화관 안에서는 아까처럼 등허리를 만지지도 않을 거다.
스킨십은 최대한 자제하면서 반응을 봐야지.
그런 다짐을 하며, 나는 룸미러를 통해 휴대폰으로 영화를 검색하기 시작한 그녀를 슬쩍 쳐다보고는 차를 출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