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un away from an SSS-class obsessed man RAW novel - chapter 73
그때 밖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권지우의 것이었다. 그 소리 탓인지 김세한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몽롱한 기운이 가득한 숨이 크게 뱉어지고 건조해 보이는 입이 열렸다.
“손님 왔나 보다……. 약속대로 가 볼게.”
아직 잠기운이 남은 눈은 조금 붉었고, 풀리지 않은 피로가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옮아 버린 나른한 기운에 뒤늦게 잊고 있던 잡힌 손을 빼내었지만, 김세한의 시선은 이미 떨어진 내 손에 닿아 있었다.
“아.”
김세한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작은 탄성을 뱉고는 다시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미안……. 잠결에 잡았나 보네.”
잠이 덜 깬 듯한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고, 눈꺼풀도 아직 무거운 듯 보였지만 그는 곧바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목이 뻐근한 듯 이리저리 매만지던 김세한이 눈을 내리깐 채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음을 흘렸다.
“역시 오길 잘했네. 잘 잤어.”
“…….”
“그나저나 잠들면 가 버릴 줄 알았는데, 계속 같이 있어 준 거야? 그런 거면 좀 감동인데.”
“…….”
“아니면 아까 그 손, 내가 못 가게 잡은 건가…….”
대답을 바라는 말은 아닌 듯, 혼잣말 같은 크기의 목소리였다. 신발을 신고 몸을 일으키는 그를 따라 나도 엉덩이를 뗐다. 옷매무새를 점검하던 김세한이 벗어 놓았던 재킷을 걸치곤 언제 어디서 꺼냈을지 모를 흰 봉투를 건넸다.
“자, 오늘 치료비.”
아니나 다를까, 봉투 안에는 노란색 지폐들이 그득 들어 있었다.
“어때? 나 꽤 쓸 만한 손님이지. 원하면 더 줄 수 있어. 이 정도면 여기 병원 VVIP는 할 수 있지 않겠어?”
구겨진 내 표정을 알 리 없는 김세한은 조금 거들먹거리듯 말했다. 봉투를 다시 가져가라는 뜻으로 내밀자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밀어냈다.
“좀 받지? 안 받으면 당신이 나한테 아무런 대가도 없이 몇 시간 정도는 써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릴 거 같은데. 당신, 나한테 그 정도로 마음 안 열었잖아.”
“…….”
“아니면 그쪽, 대가 없는 친절을 아무한테나 베풀 만큼 착한 사람이야?”
어딘가 비꼬는 듯한 말투에 순순히 봉투를 챙기자 그제야 놈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였다. 드륵-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뭐야. 손님 있…… 어?”
안으로 들어서려던 권지우가 김세한을 보고 멈추어 섰다. 그나마 그녀가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콜록, 콜록-”
권지우의 기침 소리가 방 안을 울리고, 김세한은 그제야 상황이 이해된 듯 나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아. 이 기침 소리, 손님 게 아니었구나. 좀 더 잤어도 됐는데 아쉽네.”
억지로 기침을 삼키는 듯 막힌 소리를 내던 권지우가 성큼성큼 병실로 들어와 나와 김세한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나를 자신의 뒤로 감췄다.
“김세한, 당신 뭐야. 왜 또 왔어?”
“흐음…… 왜 또 왔냐고 묻는 걸 보니까, 저번 주에도 여기 있었나 보네. 여기 원래 둘이 운영해?”
“콜록- 쓸데없는 거 묻지 말고! 왜 또 왔냐고!”
권지우는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소리치듯 물었고, 김세한은 그녀의 목소리에 묻은 적대감을 읽은 것인지 살짝 뒤로 물러서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 경계를 풀어도 된다는 의미의 모션인 듯했다.
“병원에 아파서 오지, 다른 이유가 있겠어? 그보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소리를 질러. 나도 여기 손님인데, 조금 상처받으려고 하잖아.”
“여긴 당신 같은 사람 위해서 만든 데 아니야. 아프면 아고라 대학 병원을 가든, 당신이 고용한 힐러한테 가든 하라고. 괜히 애 딸린 유부녀 찾아와서 찝쩍대지 말고.”
애 딸린 유부녀. 언젠가 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세한이 나를 그렇게 알고 있다고 했었는데, 거기서 따온 호칭인 것 같았다. 언제 들어도 낯선 칭호에 그 단어가 뇌에 흡수되지 못하고 귀 언저리를 맴돌았지만, 김세한은 다른 단어가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찝쩍대?”
“그래. 이 해바라기도 당신이 준 거지? 그렇게 좋게 보이지는 않는데. 얘 남편이 보면 딱 오해하기 좋은 상황이거든, 지금.”
여기서 남편이라면 이재현을 뜻하는 게 분명했다. 김세한은 무언가 짜증 난다는 듯 휙휙 눈을 돌리다 혀를 차며 권지우를 노려보았다.
“나도 임자 있어.”
“……뭐?”
보이는 건 그녀의 뒤통수뿐이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당황해 구겨졌을 얼굴이 훤히 그려졌다. 김세한은 여전히 불쾌하다는 듯 권지우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 있다고. 그니까 걱정 마. 그 사람 이외의 여자한텐 성적으로 관심 없으니까. 그쪽 말대로 찝쩍…… 대는 것처럼 보여도 ‘그런’ 의미는 없다고.”
그의 시선이 권지우 너머의 내게로 향했다가 권지우에게로 되돌아갔다. 그러곤 작게 말을 이었다.
“뭐. 좋은 사람이라곤 생각하지만.”
권지우는 기가 찬다는 듯 작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얘 남편이 우리 리더인데, 또라이인 데다가 질투가 아주 많은 놈이거든. 특히 딴 놈이랑 있는 꼴을 못 봐. 이 장면도 그놈이 목격하면 또 식탁 위 분위기 안 좋아질 거 같은데 빨리 좀 돌아가 줄래요? 손님.”
비꼬는 게 뻔한 말투에도 김세한의 눈은 느긋하게 허공을 응시하다 돌아왔다.
“아. 애 아빠라는 사람?”
김세한도 ‘자신에게 몬스터를 날린 건방진 남자’가 꽤 기억에 남은 모양인지 누군지 알겠다는 듯 되물어 왔다. 다행히 권지우는 ‘애’라는 말에는 집중하지 않은 듯 계속 김세한을 향해 삐딱한 말을 보냈다.
“그래. 안 그래도 얘 데리러 온다는데 괜히 마주치지 말고 협조 좀 하지?”
“그렇다면 뭐.”
김세한은 순순히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권지우가 들어와 이미 열린 병실 문을 통해 유유히 빠져나가며 나를 돌아보았다.
“또 봐.”
뭐라고 대꾸할 겨를도 없이 은근한 미소 띤 얼굴이 닫힌 문 너머로 사라졌다. 탁- 문 너머로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흐릿해지고, 딸랑- 벨 소리가 들려와 그가 떠났음을 알렸을 때쯤, 허, 하고 외마디를 뱉은 권지우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마지막에 저놈, 뭐라고 한 거야? 또 보자는 건 또 오겠다는 거 아냐?”
“……그럴지도.”
“미친 새끼 아니야. 지금 내 말 콧구멍으로 들었나! 콜록콜록! 아씨…… 골 울려.”
내 손엔 그가 남기고 간 돈 봉투와 해바라기가 들려 있었다. 권지우에게 돈 봉투를 건네자 바로 열어 볼 거란 추측과는 달리 이미 내용물은 알고 있다는 듯 꾹 움켜쥐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주 돈을 물 쓰듯 쓰네. 이거면 다 용서되는 줄 아나. 콜록- 아파서 왔다고 하던데, 쟤 또 어디 다친 거야?”
“아…… 살려 줘서 고맙다고 감사 인사하러 온 거 같아.”
어느새 해바라기는 아까보다 조금 시들어 고개를 떨궜고, 생생한 색감도 바래 있었다. 나는 그녀를 지나 진료실로 자리를 옮겨 쓰지 않는 긴 물 잔에 물을 채워 넣었고, 포장을 벗긴 해바라기를 담가 놓았다. 삐딱이 진료실 문 앞에 기댄 권지우는 그런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그놈이 준 거 소중히 하지 말지? 보기 좀 그렇다.”
“뭘. 그냥 보면 좋은 게 꽃 아니야? 그냥 살려 준 게 고마워서 준 감사 선물 정도야. 나한테도 그 정도의 의미고……. 아, 그보다 아까 머리 잘 썼더라.”
“뭐가?”
권지우는 여전히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되물었다.
“유부녀라고 한 거. 김세한이랑 같이 있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괜찮았던 거 같아.”
“갑자기 너랑 이성재 닭살 떨던 게 생각나서 말한 건데 뭐. 사실이기도 하잖아.”
“뭐가? 나 아직 결혼 안 했는데.”
“아니. 그거 말고 그 나머지 말은 다 사실이라고. 내가 봤을 때 이성재는 너랑 김세한이 같이 있는 꼴 보면 질투가 아니라 분노할 수도 있어. 그놈 특유의 사람 쥐어짜는 형태로 툴툴댈걸.”
일리 있는 말이었다. 감자를 사러 갔던 나를 데리러 왔던 그날에도 대놓고 질투 나고 불안하다고 말했었으니까.
힐끔힐끔 나를 살피던 권지우는 머리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너희 셋 감정 문제 다 떠나서, 김세한이랑 이 이상 가까워지면 위험한 건 말 안 해도 알지? 제대로 거리 둬. 네가 페르라는 걸 들키면 사실상 우리도 위험…….”
“응, 알아.”
“안다니 다행이네.”
“오늘 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권지우가 세차게 고개를 저어 왔다.
“당연히 말 안 해. 이성재 때문에 피 마르기 싫어. 너희 싸우면 같이 일하는 우리 등 터져 나가니까 부탁 좀 하자.”
“응. 알겠어.”
나를 빤히 바라보던 권지우는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넌지시 물었다.
“김세한한테 미련 남았어?”
“……걱정 마. 만약 남아 있다고 해도 길은 정해져 있고, 번복될 일 없어.”
나와 그의 관계에 마음은 아무런 힘이 없다. 김세한을 떠나 거리를 두고 나서는 더더욱이 체감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맞닿을 수 없는 평행선이었다. 우리 둘에게 차이가 있다면, 나는 그 사실을 알지만, 김세한은 모른다는 것뿐이다. 정해진 진리는 아무도 거스를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이재현의 손을 잡은 데에 후회가 없다. 감정적인 모든 걸 떠나 이 길이 맞는다는 확신이 있다.
권지우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대답 말고, 네 감정이 궁금해서 한 질문이었어.”
“얼마 전에도 너한테 그런 질문 받은 적 있는 거 같은데……. 계속 묻는다는 건 내가 애매하게 굴고 있다는 건가?”
내 말에 그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돌려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네.”
입 안이 쓰디쓴 초콜릿을 머금은 듯 텁텁해졌다. 김세한이 억지를 부린다 한들 최선을 다해 밀어냈다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저번이야 주인공의 목숨을 살렸을 뿐이라고 한다면 오늘은 정말…… 내가 거절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날 바라보는 눈과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내 내게 애원하는 듯 보여서 매몰차게 굴 수 없었다. 평생 옆에 있어 줄 수도 없으면서, 괴로워 보이는 놈이 안쓰러워 오늘만큼은 손을 뻗어 재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음엔…… 다음번엔 이런 일 없도록 할게.”
해바라기의 꽃말은 기다림. 마음에 품었던 사람을 완전히 잊는 데에는 나도, 김세한도 시간이 더 필요했다.
“완전히 지워 볼게.”
불청객인 김세한이 몰고 왔던 비는 어느새 그치었고, 나는 조금 생생해진 노란 꽃잎을 멍하니 매만졌다. 무언가 하려던 말을 삼킨 듯한 권지우의 한숨 소리가 고요한 진료실을 울렸다.
-다음 권에 계속-
9. 불청객(2)
권지우는 약속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듯했다. 김세한이 내 병원으로 왔다는 다소 큰일은 두 번 다 비밀이 되어 버렸다. 애써 더 미안한 일만 만들지 않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내 노력이 무색하게 김세한은 해바라기가 다 시들기도 전에 다시 날 찾아왔다.
잠깐 비가 그쳤던 3일의 시간이 지나, 먹구름 낀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딸랑,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종소리에 가면을 쓰고 읽던 책을 덮었다.
“안녕.”
드륵- 노크도 없이 진료실 문을 연 김세한이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몇 번이나 철렁한 가슴은 이제 지친 듯 그의 등장에도 이전만큼 뛰어 오지 않았다. ‘또 봐.’라는 예고를 하고 갔던 터라 언젠가 또 올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그 간격이 너무 짧았다. 나는 꾹 한숨을 삼키며 시계를 돌아보았다. 저녁 여섯 시. 저번과 비슷한 시간대였다.
“또 온다고 했잖아. 꽤 피곤한데, 오늘도 치료 좀 해 줘.”
“…….”
“여기 어쩐지 낯익네. 처음 왔을 땐, 나 여기서 치료한 거지?”
느긋하게 진료실로 들어온 그가 주변을 살피듯 두리번거리기 시작했고, 곧 책장 앞에 멈춰 섰다. 워낙 별거 없는 진료실이어서 그런지 책장이 가장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별 흥미 없는 눈을 하고 책들을 훑어 내리던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렸다.
“죄다…… 소설책이네.”
쿵-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3년간 원하는 소설을 구해다 줬던 김세한이 내 취향을 모를 리 없었다. 역시 내 흔적이 묻어 있는 이곳은 위험했다. 요란스레 일어난 나를 보는 김세한의 눈에는 당황스러움이 담겼다.
“보면 안 되는 거였어? 무슨 책이 이렇게 많나 싶어서.”
“……후.”
“당신 지금 한숨 쉬었지? 화났나 보네. 안 건들게.”
김세한은 책장에서 두어 발 물러나 항복한다는 듯 양손을 올려 보였다. 대답 없는 내 반응을 기다리듯 눈치를 살피던 그가 이번엔 책상 끝에 놓인 해바라기를 보며 미소 지었다.
“잘 관리해 줬구나. 아직 살아 있네.”
무언가를 들킨 듯한 느낌에 김세한을 일단 여기서 나가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침없이 다가가 옷깃을 잡아끌자, 저번과 똑같이 고분고분 따라왔다. 진료실을 벗어나자마자 나는 놈의 옷깃을 놓아주며 병원 정문 쪽을 가리켰다. 나가 달라는 말이었다. 내 뜻을 단번에 알아들은 듯한 김세한은 눈썹을 늘어뜨리다 이내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싫어.”
“…….”
“당신한테 피해 안 주려고 사람 없을 때 온 거야. 내가 비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을 거 같아?”
그제야 저번과 비슷한 날씨, 비슷한 시간에 찾아온 게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팔짱을 끼었고, 놈은 내 방어적인 자세에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 사람 살리는 사람이잖아. 그럼 나도 살려. 저번에 당신 동료 말이 신경 쓰이나 본데, 나 지금 환자로 온 거야. 나도 당신 고객이라고. 날 치료할 수 있는 게 당신뿐인데 진짜 이럴 거야?”
“…….”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해?”
한껏 처진 어깨와 달리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원망이 담겨 있었다. 억울하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이번엔 나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팀원들에게 김세한의 방문을 숨기고 싶다는 건 뭐가 됐든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이었으니까. 작가로서 주인공에게 해 줄 건 다 해 주었다. 한 번 살려 주었고, 한 번 휩쓸려 줬다. 이 이상으로 베푸는 건 더 둘러댈 핑계도 없이 감정의 문제였다. 나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3일간 혹여 김세한이 다시 찾아왔을 때 어떻게 대할지 상상하며 다짐했다. 여기서 확실히 선을 긋고 내치겠다고. 서로의 은인으로 잠시 닿았던 우리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다.
설령 날 미워하고 원망하더라도 이 이상은 허락할 수 없다.
다시 한번 병원 문 쪽을 가리키자, 잔뜩 힘이 들어갔던 김세한의 눈꺼풀이 느슨해졌다. 더 화내지 않는 건가. 포기한 건가. 예상한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불길한 기운이 감돌 때쯤이었다.
“아니면…… 이대로 내가 쓰러져서 죽기 직전인 상태가 되어야…… 날 살리려고 달려오려나?”
지금까지와 결이 다른 나지막한 목소리가 서늘한 복도를 울렸다. 순간 김세한의 눈에 예전과 같은 광기가 비쳤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보란 듯 앞으로 뻗어진 손에 작은 빛과 함께 익숙한 검이 들렸다. 그 저의를 파악할 새도 없이 그가 나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보였다.
“상처가 필요하면 내고…….”
귀가 시릴 만큼 날 선 소리가 났다. 모든 게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챙- 그의 손에서 떨어진 검이 병원 바닥과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내다 빛이 되어 사라졌을 때, 후드득- 떨어지는 검붉은 액체가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비릿한 냄새가 폐부를 가득 메우고, 내 손까지 튄 무언가가 미적지근한 온기를 남기며 주룩 흘러내렸지만, 도저히 사고가 감각을 뒤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붉게 물든 바닥에 나는 뒤늦게 그 근원지를 찾아 시선을 올렸다. 그의 새하얀 셔츠가 온통 붉었고, 옆구리에선 붉다 못해 검게 보이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세한은 스스로 옆구리를 베어 냈다. 피가 쏟아져 내리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집요하게 내게 닿아 있었다.
‘이…… 미친 새끼가.’
진하다 못해 역하게 풍겨 오는 피 냄새에 작게 입술이 떨려 왔고.
“아. 아파.”
그는 마치 나에게 들으라는 듯 우는소리를 내었다. 순식간에 숨이 가빠 왔고, 손끝이 서늘해졌으며, 동시에 참을 수 없을 만큼 무서워졌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놈의 손목을 잡아끌어 진료실로 밀어 넣었다. 내게 떠밀려 진료실 침대에 눕혀진 김세한은 눈을 감은 채 웃고 있었다.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는 피에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두렵고, 당황스러웠고, 미웠다. 상처에 손을 올리곤 치료를 하는 내내 시야가 뿌옜고, 턱이 덜덜 떨려 왔다.
“당신…… 울어?”
“흐으…….”
김세한이 다치는 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상처 내는 놈이 원망스러워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불안정한 숨소리와 떨리는 몸을 눈치챈 듯한 김세한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건조한 입술을 열었다.
“미안해. 착한 사람 이용해서.”
“…….”
“근데…… 난 정말 간절했거든. 당신이 날 그대로 돌려보냈으면 또 몇 날 며칠이 지옥일 게 뻔해서. 그것보단 차라리 좀 아픈 게 나아.”
김세한의 사과에도 울어서 거칠어진 숨은 진정될 줄을 몰랐다. 치료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떨어지던 눈물도 멈추었다. 잠이 든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고요히 눈을 감고 있던 김세한이 재킷의 안주머니를 뒤적이다 작은 수첩과 볼펜을 꺼내 내밀었다. 모두 새것인지 은은한 광이 돌았다.
“당신이랑 대화하고 싶어서 가져왔어. 글은 쓸 수 있잖아.”
“…….”
김세한 앞에서 글을 적어 본 적은 없었다. 따라서 글씨체를 알아볼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순순히 그가 내민 수첩과 볼펜을 받아 들어 지금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치료 끝났으니까 나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