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Survive as a Scrapped Extr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68
엘리샤는 말없이 벽에 기대어서 온갖 인간군상이 모인 연회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사실, 맞아요. 나. 정의 바보.”
“….”
“능력에 비해 열정만 앞섰죠. 그래서 누군가를 크게 오해도 했어요. 폐를 끼쳐도 참 많이도 끼쳤죠.”
“….”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서 장난기 없는 얼굴로 나를 마주했다.
“바로 당신에게요. 마틴 경.”
“….”
엘리샤가 날 오해해서 한 말과 행동들. 사실 꼽자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혹시…, 기억나요? 옛날에 말이에요. 당신이 막 복학했을 때. 부정행위 문제로 소집됐던 징계위원회.”
엘리샤가 조심스럽게 던진 문장이 내 흐릿해졌던 기억을 선명하게 그리기 시작했다.
빙의 초기 때의 이야기다. 나는 폐급 엑스트라 빌런인 마틴이지만, 뒤늦게라도 바뀌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주인공에게 다가가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하필 아카데미 측에서 시험 성적을 조건으로 협박해왔고, 단번에 수석 자리를 꿰찼었지.
“네. 기억이 나는 것도 같군요.”
“그날, 마틴 경이 수석을 하고… 나도 참 생각이 많았어요.”
폐급이던 마틴이 수석. 4대 공작가에 줄을 대던 교감은 그걸 빌미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며 징계위원회를 소집했다.
도중에 난입한 핵티아와 헤일리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여기 있는 대신….
‘종말의 마틴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를 왜 꺼낸단 말인가.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도출되는 결론은 ‘핵티아 선생님이 부정행위를 알아차리지 못하셨을 리가 없다’였어요.”
“….”
“그럼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 부당함을 방관했던 건…. 마틴 경을 의심하고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방관. 맞다. 주인공 일행은 그때 내 위기를 방관했다. 그러나 지금 내 말은 방관 행위가 나빴다는 게 아니다.
나도 바보가 아닌데, 어찌 모르랴.
그때의 징계위원회가 주인공 일행이 아니라…, 교감과 그들의 윗선, 즉 공작들에 의해 벌어졌음을.
안 봐도 프로하딘과 빌헬름이겠지.
“저번에도 말했지만 늘 미안….”
나는 엘리샤의 말을 툭.
“거기까지.”
끊어버렸다. 놀란 듯 엘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조금 크게 뜨였다.
“이제, 됐습니다.”
“어…, 네?”
“사과, 안 해도 됩니다.”
“….”
무슨 의미인지 몰라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는 엘리샤. 한숨을 쉬며, 나답지 않게 말해주기로 했다.
“한때 내 죄질이 무거웠던 건 사실입니다. 때문에 귀족계에서 매장당하는 극형까지 받았습니다. 그러고도… 아카데미로 복학했죠. 오해? 할만했습니다. 엘리샤 경, 당신의 행동은 마땅했습니다. 내가 또 무슨 악행을 저지를 줄 알고 가만히 둔답니까? 그건 머리가 꽃밭인 바보들이나 하는 행동이죠. 물론, 당신의 행동이 무조건 옳았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충분히 그럴만했다고 말하는 겁니다.”
“….”
“네, 엘리샤 경.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엘리샤가 내게 물질적 보상을 준 적은 없다. 말로만 하는 용서를 받아준다고 멍청하다며 욕을 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러니 앞으로는 미안하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내가 그들을 소설 속 캐릭터로만 여기고 행동했던 것도 사실이다.
소통하려 하지 않았고. 얼굴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었다.
엘리샤의 행동이 무조건 정당하다고 할 수 없었듯, 엘리샤의 오해와 과한 행동들에 대한 원인이 내게 아예 없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인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하자.
“어, 우와, 아!”
엘리샤는 답지 않게 어버버거리더니.
“그, 그럼!”
생전 처음 보는 밝은 미소를 화해의 선물로 보여주었다.
“우리! 친구인 거죠?!”
‘이, 이 여자가… 이런 낯간지러운 소리나 하다니.’ 하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고역이군.’
친구. 친구라….
시선을 슬쩍 피하며 멋쩍게 대답했다.
“…예. 그런 걸로 치죠. 친구.”
사실, 말은 하지만 진심으로 친구냐고 생각하냐면.
‘아니.’
친구라 할만한 대단한 이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이 세계가 ‘소설’이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니….’
거절할 이유도 없기는 마찬가지니까.
친구라고 하기에는 이상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에도 어중간한. 그런 위치가 아닐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상황을 넘기려고 내뱉은 의미 없는 말에 엘리샤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양손을 제 심장 위에 올려놓고는 ‘후우’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정말.”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의 반응 같았다.
“…그게 그렇게 다행입니까?”
“당연하죠!”
그러고는 내 뒤의 메리와 보르드를 불렀다.
“얘들아! 나 마틴이랑 화해했어!”
“경이라고 붙여….”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보르드와 메리가 고개를 홱 돌려서 나와 엘리샤를 보았다.
“우와! 정말?!”
“저, 정말요?!”
그러고는 셋이 모여서 좋네, 잘했니, 다행이다 등 쿵짝이 맞는 덕담을 나누는 게 아닌가.
“….”
내 옆으로는 라일락이 살포시 다가와 섰다.
“주인님께서 좋은 친구분들을 사귀고 계신 것 같아서 기뻐요.”
“어, 어….”
차마 한때는 원수였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저기, 마틴 경.”
“마, 마틴 경….”
이윽고 보르드와 메리가 다가왔다. 그러고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며 대뜸 고백해오는 게 아닌가.
“사실, 나도 사과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저, 저도… 오해했던 게….”
공기가 후덥지근하다. 다시 그 어색한 상황을 겪으라고?
서둘러서 손사래를 쳤다.
“그만, 그만하세요. 됐습니다. 다 용서할 테니. …용서할 것도 없지만요.”
나와 자주 대립한 건 길버트와 엘리샤였지, 보르드와 메리는 아니었다.
“와! 그럼 우리도 친구다!”
“마, 마틴 경이라면 좋아요…!”
엘리샤, 보르드, 메리가 우리는 친구, 우리는 친구 노래를 불렀다.
‘죽고 싶다.’
눈동자를 굴려보니 라일락이 나와 저 셋을 번갈아 보며 손뼉을 짝짝짝 치고 있었다.
‘죽여줘!’
너무 부끄러웠다….
테라스로 도망쳐버릴까 싶던 순간, 연회장 중앙에서 단호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만.”
나뿐만 아니라 엘리샤, 보르드, 메리는 물론이고 연회장의 전부가 중앙을 돌아보았다. 심지어는 최상석의 황제와 카쟉스, 아델라까지.
이 자리의 모두가 신경 쓸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이의 음성이었다.
‘저긴 분명….’
엘프 여왕이 있던 장소니까.
연회장 정중앙에 자라난 나무줄기가 엮여 만들어진 의자 위에 앉은 엘프 여왕의 고귀한 자태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더러움이라고는 하나도 묻지 않은 듯 자연의 순수함을 닮은 그녀가, 조용히 화를 내고 있었다. 여왕의 주위를 지키는 엘프 근위대도 살벌한 기세를 뿜고 있었다.
“더 이상의 분쟁은 용납하지 않겠다.”
원인이야 뻔했다. 엘프 여왕의 주위로 잘 나간다는 상인들이 두 남자를 앞세워 대치하고 있었으니.
“제국의 두 대귀족이여. 알아들었는가?”
엘프 여왕의 경고에 대답한 자는.
“…예.”
쉽게 풀리지 않는 일에 인상을 쓴 비구름 데미니얀의 공작, 프로하딘.
“알겠습니다.”
그리고 대륙 상권을 움켜쥔 채 정계의 노괴와 승부를 보려는 엘리도르 후작, 아놀드였다.
‘나도 소식은 들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치열하군.’
정치와 상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모를 수가 없으리라. 안개섬과의 외교를 어느 상단에서 전담할지에 따라서 대륙의 경제 판도가 뒤바뀌게 될 테니까.
나도 성자에게 볼일이 있어서 아놀드를 찾아갈 때마다 안개섬 외교권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었다.
제법 격렬한 두 대귀족의 전담권 쟁탈전에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데미니얀과 엘리도르가 이번에 제대로 붙겠군.”
“하지만 이렇게까지 과열될 줄이야.”
이렇게 대놓고 경쟁할 줄은 몰랐으니까. 데미니얀과 엘리도르의 대결은 이토록 이례적인 일이었다.
“4대 공작가와 엘리도르 후작가의 대립은 예전부터 유명했던 일이지만, 유독 심하군.”
“생각해보게. 정계의 괴물인 프로하딘 공작이 안개섬과의 외교마저 독점하게 되면 얼마나 대단한 권세를 지닐지 말이야. 데미니얀 공작가에서는 마법 물품을 엘리도르 상단에서 공급받고 있지. 그게 유일한 약점이란 말이야. 그런데 대륙의 것과는 질적으로 비교할 수도 없는 안개섬의 마법 물품들을 독점하게 되면…. 엘리도르 후작가의 정계 진출은 끝장이야.”
한 귀족 무리의 토론이 귓가에 들어온다. 지극히 옳은 말이었다.
“또 반대 관점에서도 봐보게. 만약 대륙 상권의 정점에 서 있다는 아놀드 후작이 안개섬 독점까지 따낸다면? 정녕 돈으로 권력을 내리누르게 될지도 모른단 말이네. 아무리 4대 공작가라지만, 그들도 대륙에 흐르는 돈으로 먹고사는 대륙민이니까. 이번 안개섬 외교권은 어쩌면… 엘리도르 후작가가 ‘공작위’에 오를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거지. 이런데 어떻게 안 치열하겠나?”
“허어…, 이거… 보통 일이 아니었군.”
모든 명사의 시선이 연회장 정중앙으로 향했다. 핑크빛 야망의 아놀드 후작과 회색 계략의 프로하딘 공작이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국의 정치 향방이 여기서 분기점을 타고 있었다.
“…아놀드 후작. 자네, 경우가 없군. 이쯤 되면 자네 야망을 모를 사람이 없을 테니 이제 물러나게.”
철옹성 같이 굳건한 권력을 유지해온 귀족계의 정점, 데미니얀 공작가가 무릎을 꿇던가.
“글쎄요. 대륙 상권이 관련된 문제에서 어찌 엘리도르가 빠지겠습니까.”
아놀드 후작이 아득바득 쌓아 올린 황금산이 무너지던가.
“어디, 끝까지 해보자 이건가?”
“대륙 끝에서 끝까지라도 가보시죠.”
엘프 여왕의 경고에도 두 대귀족은 싸움을 멈추지 못했고.
“불쾌하군.”
엘프 여왕이 드물게 감정을 토로했다. 연회장의 공기가 얼어붙은 건 순식간이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대륙을 지켜온 세계수의 대리자가 바로 엘프 여왕이다. 그녀를 향한 모욕은 곧 세계수를 향한 모욕과도 같으니.
“생명의 어머니께서는 이 같은 아집과 다툼을 보려고 날 보내신 게 아니다.”
즐거운 건국제 연회에 갑자기 일이 터져버렸으니, 현장의 최고권자가 나서는 건 당연했다.
황금 옥좌에 앉아 있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엘프 여왕과 눈을 마주쳤다.
“엘프 여왕이여. 결코 불쾌하게 할 의도는 없었음을 이해해주기 바라네.”
“이해하지. 그러나 황제여, 양해와 이해가 언제부터 시간을 거슬렀는가? 내가 느낀 실망감까지 되돌릴 순 없다.”
인간 황제가 옥좌에서 일어났으니, 엘프 여왕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같은 예우로 대했다.
“세계수님께서는 대륙의 평화와 안녕을 바라셨고 지금도 그 생각을 사시사철 푸른 잎사귀처럼 변심치 않으셨는데, 어째서 인간들은 생명의 어머니께서 자비로움으로 내려주시는 은혜를 두고 이권 다툼을 벌인단 말인가? 그것도 내 앞에서.”
평화롭고 즐거워야 할 건국제가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너희 인간들이 세운 화폐와 계급에 대하여 아는 만큼, 인간의 생리 또한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지. 하지만 내 앞에서 이렇게 선보여야 했나?”
“여왕이여, 사과하겠다. 이토록 기쁜 날, 존귀하신 분의 뜻으로 함께해주었는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서 부끄럽기 짝이 없군. 과인이 사과할 테니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게.”
망설임 없이 진심으로 사과하겠다고 선언한 황제의 모습은 신선했다. 뭇 귀족들 앞에서는 태양처럼 군림하던 그가, 이토록 저자세로 나오다니.
“프로하딘 공작과 아놀드 후작도 엘프 여왕께 진심으로 사죄하라. 정치와 상업과 후계 경쟁을 모두 떠나서 이는 인류와 세계수님 간의 우애를 깨는 반인류적인 행위이다.”
“알겠습니다.”
프로하딘과 아놀드가 순순히 황제의 명에 굴종하며 엘프 여왕에게도 거듭 고개를 숙였다.
“데미니얀의 프로하딘이 엘프 여왕께 사죄드립니다. 고매하신 심성을 흐트러뜨려 거슬리게 한 부분들에 대해 관대히 용서해주십시오.”
사과는 했으나, 프로하딘은 한 가지 의문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