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survive restructuring RAW novel - Chapter 314
외전 4. 미팅(1)
대체로 즐거웠던 출장이 끝났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복귀한 사무실.
[지은 씨는 이만 퇴근하세요. 남은 건 제가 정리하고 들어가겠습니다.]그리 말하고 들어가려는 찰나, 아직 취기가 남았는지 볼이 빨개진 지은 씨가 옷자락을 잡았다.
[하나만요.] [말씀하세요.] [그…… 예전에 영업국 OJT에서, 그림 그려 주신 여성분은 누구셨어요?]그림이라면…… 아아.
천공의 탑에서 만난 ‘준비된 신부’를 말하는 건가.
[VIP 고객님입니다. 왜, 전에 저 누명 쓰고 체포됐을 때 증언해 주신 귀신분이요.] [아! 그 영쉬남 영상 만들어 주신 분!]지은 씨가 생각났다는 듯 박수를 짝 쳤다.
덕분에 떠오른 아이디어.
[안 그래도 한 번 찾아뵈어야겠네요.] [네? 왜, 왜요?] [우리 회사랑 거래를 끊겠다는 VIP가 있는데, 알고 보니 그분이랑 아는 사이시라더군요.] [아…….]욕쟁이와 휘하의 과장들은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한 모양이지만, 포기할 때 포기하더라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하니까.
[이건 비즈니스……!]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눈을 꼭 감고 중얼거리는 지은 씨에게 말했다.
* * *
[미라 언니요? 당연히 알죠. 막역한 사이랍니다.]이탈 위험이라며 욕쟁이 휘하 과장들이 길길이 날뛰었던 VIP 고객, 미라(謎羅).
귀신들 사이에선 유명 인사란다.
특히 처녀 귀신들의 인플루언서 같은 느낌이라, 다른 고객들이 뒤따라 이탈하는 걸 막으려면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그래서 왔다.
고오오오오오—
천공의 탑 깊숙한 야산.
무려 지옥과 연결되어 있다는 귀곡산장으로.
“여, 여, 여길 들어가야 된다고……?”
뒤따라오던 욕쟁이가 염소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니? 넌 이게 무섭냐?”
센 척하긴.
다리까지 벌벌 떨고 있는 주제에.
‘그래도 나름 노력은 했네.’
처음 보는 정장 차림.
늘 쓰던 야구모자 대신 포마드로 말끔하게 올린 헤어스타일.
슬리퍼 질질 끌고 다니던 백수 양아치는 온데간데없었다.
제 모습이 스스로도 어색한지 연신 넥타이를 만지작거리긴 했지만.
[너무 긴장할 것 없습니다. 준비 많이 했으니까.]심호흡을 해 대는 욕쟁이를 다독이며,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욕만 하지 말죠.]“그래. 뭐 어렵나? 내가 뭐 욕 안 붙이면 말 한마디 못 하는 병신도 아니고.”
“…….”
그때, 산 중턱에서부터 번져 오는 귀기.
스슷-
짙은 안개 속에서 하얀 치맛자락이 바닥을 스치며 다가온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새까만 머리칼.
내린 직후의 눈을 빚어 만든 것처럼 잡티 하나 없는 흰 피부와 또렷하되 진하지 않은 이목구비가 조화롭다.
[이걸 저분에게.]숨 쉴 때마다 격이 오른 신체조차 손발이 차가워지게 만드는 한기를 폴폴 내뿜으며 등장한, 오늘의 동행.
준비된 신부가 눈깔사탕처럼 생긴 젤리 하나를 건넸다.
▣ 어설픈 귀안(1회용)
– 귀곡산장의 귀기를 모아 만든 임시 귀안(鬼眼).
섭취 시 잠시나마 이면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단, 흡수 속도 및 시력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으니 주의.
– 지속 시간 : 48시간
그래서 그걸 욕쟁이더러 먹으라 했더니.
“끄악!”
입속에 넣자마자 괴성을 지르며 엉덩방아부터 찧었다.
“귀, 귀, 귀……!”
[진정하세요. 오늘 우릴 안내해 주실 분입니다.]“끅!”
파리하게 질려서는, 준비된 신부를 가리키며 입에 든 젤리까지 토해 낼 지경이라 겨우 달랬다.
그렇게 겨우 숨을 고르더니, 입에 있던 젤리를 마저 삼킨 욕쟁이.
“무, 무섭냐? 난 하나도 안 무서운데!”
[……무섭진 않고, 무겁네요. 놔주시죠.]“…….”
내 바지가 찢어져라 붙들면서 할 말은 아니잖아.
[휴.]그 모습을 보더니 준비된 신부가 청초한 얼굴로 말했다.
[앗, 죄송해요. 사내라는 자가 너무 심약해서 그만.]“시, 심약?”
[괜찮아요. 당신처럼 약하디약한 분들을 많이 뵈었답니다.]“……?!”
청초한 얼굴…… 치고는 욕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
[그래도 감사드립니다. 바쁘실 텐데 귀안도 주시고, 동행까지 해 주시니.] [아녜요. 즉위 축하 인사도 드릴 겸, 안 그래도 한번 찾아뵈어야겠다 싶었어요. 미라 언니야 원래 매일 보는 사이구요.] [지금 찾아뵐 분이 이곳에선 꽤 유명 인사라던데, 맞습니까?] [맞아요. 그, 뭐라더라, 전에 은호 씨 회사에서 홍보대사 활동도 했을걸요?]그렇다.
오늘의 귀신 미라는 회사와 인연이 꽤 깊었다.
영업국의 VIP 고객이자, 홍보국의 홍보대사로 역임된 적도 있을 정도로.
‘근데 이탈하겠다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었단 거지.’
다신 우리와 거래하지 않을 생각인 거다.
상품이나 응대의 불만 외에 이유가 있었나 싶어, 산을 오르며 슬쩍 물었다.
[두 분께서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십니까?] [이 동네 처녀 귀신들은 다 절친해요. 정보 공유가 필수적이라.] [정보 공유…… 말입니까?]동네 처녀 귀신들이 공유해야 할 정보가 뭐가 있나 싶어 되물었는데.
[흠흠, 너무 자세한 건 묻지 말아 주시어요.] [……예?]왜 수줍어하는 건데?
왜 혈색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로 볼을 붉히는 거냐고?
[아 참, 미리 아셔야 할 것이 있답니다.] [뭡니까?] [그, 저희 언니가 좀…… 불같으셔요.]“딸꾹!”
불같은 귀신.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같이 역설적인, 심지어 절대 평화로울 수 없는 그 말에 욕쟁이가 딸꾹질을 시작하고 잠시 후.
깡- 와장창!
만났다.
‘!!’
[감히 내 영역을 건드려?!] [이런, 꼬리 휘두르는 거 말곤 할 줄도 없는 여우 계집이 어디서 행패일까?] [행패? 진짜 행패가 뭔지 보여 줄게!] [보여 주렴! 가죽을 다 벗겨서 모피코트를 만들어 버릴 테니!]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와 피 터지는 싸움 중인 그녀.
불같은 귀신을.
[캬악!]스스스스슷-!
엄청난 귀기의 폭발.
서리처럼 서늘한 불꽃과 칼날처럼 솟아 강기까지 두른 열 개의 손톱이 만나 폭발한다.
휘날리는 폭풍과 여기저기 비산하는 강기의 파편들로 산세가 흔들린다.
귀곡산장이 베이고 긁힌다.
[아, 그쪽으로 앉으세요.] [예? 하지만 방금…….] [늘 있는 일이랍니다.]그러나 준비된 신부는 태연했다.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이.
“X발, 이거 괜찮은 거야?”
……그러게.
쉽지 않겠는데?
* * *
[어머! 그쪽이 새 회장님?]싸움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준비된 신부가 내준 생강차를 채 다 마시기도 전에.
[우리 막내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데이트를 아주 찐하게 했다며?] [어, 언니! 오해하시겠어요!]준비된 신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신부가 긴 생머리에 청순가련한, 어찌 보면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분위기라면 VIP는 정반대.
반짝-
귀걸이, 목걸이, 반지 할 것 없이 장식되어 있는 화려한 보석들.
그 보석들에 결코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존재감을 뽐내는 커다란 이목구비.
분명 하얀 옷이긴 하지만 소복도, 원피스도 아닌 몸에 딱 달라붙는 드레스 또한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머 어머, 진짜 귀기가 장난 아니네.]이렇게 화려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화려한 귀신이 다가와 내 얼굴을 쓸었다.
[근데 이렇게 잘생겼다곤 말 안 했는데…….]긴 손톱에 찔릴 것 같기도.
찐득한 눈길에 잡아먹힐 것 같기도 해서, 서둘러 몸을 빼내며 말했다.
[하하…… 고객님 영업 담당자가 바뀌어서 인사도 드릴 겸 왔습니다.] [응? 담당 영업사원이 바꿨어? 그런 말 없던데?] [아, 네. 여기, VIP영업처장이 직접 담당해 주기로 했습니다.] [처장급이 날 맡는다구?] [그만큼 귀하신 분이니까요.]욕쟁이를 살피는 VIP의 눈에 잠시 이채가 돌았다.
[자세한 내용은 저희 처장님께서 설명해 주실 겁니다.]“아, 예! 여기, 준비해 온 제안서를 보시면…….”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저희 회사에서 준비 중인 신규 콘텐츠 카탈로그와…….”
“우주 체험이라거나,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시도를…….”
[앗, 손톱 깨졌네.]VIP는 욕쟁이의 제안서보다 새로 한 제 손톱에 더 관심이 많았다.
“또, VIP분들을 위해 이런 행사를…….”
[근데 좀 덥지 않아? 너무 껴입고 있는 거 아냐?]“예, 예? 아, 딱히 덥진 않은데…….”
[쯧.]“……?!”
다리도 꼬고, 팔짱도 꼰 채로 손톱을 까딱거리는 모양새가 영 관심이 안 가는 모습이었다.
“저, 저기, 여길 봐주시면…….”
[우리 회장님, 끝나고 뭐 해? 여기 뒷산에 끝내주는 우물 클럽이 하나 있는데.]급기야 욕쟁이에겐 흥미가 떨어진 듯, 가만있던 내게 은근슬쩍 귀기를 흘리는 VIP.
[우물…… 클럽이요?] [응응. 깊어서 음향도 빵빵하고, 완전 깜깜해서 누구 하나 잡아먹어도 티도 안…… 어머, 이건 말하지 말걸.] […….]이거, 아니다.
이래서야 답도 없다.
애초에 듣지도 않는데 뭘 설득하고 붙잡는단 말인가.
‘최대한 욕쟁이에게 맡길 생각이었다만…….’
이 정도 비상 상황은 혼자선 무리일 터.
짧은 심호흡 끝에 입을 열었다.
[고객님께선 저희 회사가 그동안 독점 공급해 드린 콘텐츠에 질리신 거죠? 그래서 타사로 넘어가시려는 거고요.] [뭐, 그렇지.]VIP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내가 말하니 들어 주기야 하겠지만, 관심 없는 티가 팍팍 났다.
[과도한 조건을 요구하신 것도, 그 정도 조건이면 타사 콘텐츠도 같이 소비하실 수 있기 때문이어서고 말입니다.] [흐응- 그런데?]즉, 눈앞의 VIP는 우리가 왕창 할인을 해 주든 말든, 무조건 타사로 넘어가게 돼 있단 소리다.
우리와 동시 계약을 맺는 한이 있어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그렇다면 답은 없다.
지금 구도에서는.
그러니 구도를 바꾼다.
[대신, 다른 가치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가치?]우리 상품에 흥미를 잃었다면, 다른 거로라도 붙잡아 둔다.
보다 양질의 상품을 개발할 때까지 시간을 번다.
[고객님들을 위한 특별 부가 서비스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뭐, 반응형 콘텐츠 같은 거 내놓으려고? 웬만한 건 다 해 봤다니까?]아니. 그런 거 말고.
더 차별화된 고객 만족 서비스가 떠올랐거든.
VIP가 진짜 원하는 것.
제일 관심 있는 것.
즉…….
[미팅 어떠십니까? 괜찮은 남자들 많은데.]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