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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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다시 퀸즈가든으로
“…정한 오빠!”
그제야 제동이 풀린 신소율은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뛰쳐나가 이정한을 껴안…으려다가 갑자기 펼친 두 팔을 뒤로 감추고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왜 그러냐?”
“아, 아니에요. 헤헤.”
그러면서 힐끗, 노구덕의 눈치를 보는 그녀. 그래도 한 남자의 여자라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었다.
‘포옹 정도라면 괜찮은데. 동기이기도 하고.’
의외의 구석에서 관대한 면이 있는 노구덕이었다. 그때, 실렌이 팔뚝을 톡톡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오너, 저 분은 누구시죠?”
“저 분까지는 아니고, 그냥 드래프트 동기야. 이런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저 녀석 어느 클럽에 들어갔었더라?”
확실히 이정한과의 재회는 의외였다. 뚜렷이 기억나지는 않아도, 이정한이 중부 지구의 클럽에 들어가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2년차 헌터라면, 대부분 아직도 3군 예비대에서 견습을 하고 있을 시기. 구 아이리스 멤버들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성장한 것이지, 보통은 그게 정상이었다. 클럽이 고작 견습 헌터를 지구 이동시킬 리 없으니, 남은 가정은 둘. 이정한 본인이 제법 재력을 쌓았거나, 김정인과 마찬가지로 벌써 클럽의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
무심코 이런 저런 가정을 해 보던 노구덕은, 문득 새어나오는 고소를 삼켰다.
‘오랜만에 만난 동기를 앞에 두고 뭘 재고 있냐. 나도 참…….’
별별 일을 다 겪다보니 자신이 너무 계산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노구덕은 휘적휘적 걸어 나와 이정한에게 솥뚜껑 같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반갑다. 뭐하고 지냈냐?”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지.”
노구덕과 악수를 하는 이정한의 얼굴에서는 살짝 피곤한 기색이 묻어났다.
“정한 오빠, 서부지구 클럽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에… 이름이 뭐더라.”
“됐어. 별로 유명한 클럽도 아니고, 이제 그만뒀으니까. 지금은 프리헌터다.”
“아, 그래요?”
이정한은 별로 전 소속 클럽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은 듯, 답변을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 그건 그렇고, 네 소문은 들었다. 동기 중엔 가장 출세했더군. 아니, 그 김정인이 있으니 그건 아닌가?”
“뭐… 그렇죠.”
이번엔 노구덕과 신소율 쪽에서 반갑지 않은 화제가 나왔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서로 말수가 줄어들 수밖에. 노구덕은 이대로 가다간 분위기가 딱딱하게 경직될 것 같아, 다시 한 번 화제전환을 시도했다.
“…그나저나 여긴 웬일이냐? 장비 쇼핑?”
“겸사겸사. 장비도 필요하고, 부릴 노예도 필요하고.”
“흠…….”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프리헌터는 독자적으로 활동하기보다 소규모 파티(Party)를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그 편이 생존 면에서나, 임무 달성 면에서나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파티는 대부분 소수의 프리헌터와 다수의 전투노예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물론 의뢰수당의 독점을 위해서였다. 파티원이 노예라면 수당을 나눌 필요가 없으니까.
“우리도 마침 장비 거리로 가려던 참인데, 어떠냐? 동행하면서 수다나 좀 떨어볼까?”
“그러지.”
노구덕은 변함없이 혀가 짧은 놈이라 생각하며 혀를 찼다.
오랜만에 만난 이정한은 이전보다 더욱 과묵해져 있었다. 아마 그 또한 나름대로 풍파를 겪었던 것일 터. 드래프트 때 가입한 클럽마저 나왔다고 하니,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몰라도 상당한 굴곡을 경험했을 것이다.
“…혜미 언니가 죽었어요?”
“그래. 반년 전이던가… 탐사 복귀 도중 떠돌이 카름에게 당했다고 들었다.”
안혜미의 죽음을 전해들은 신소율은 우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안혜미. 역시 드래프트 동기로서, 시험 당시에는 전력에 큰 보탬이 되지는 않았던 여자였다. 이후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다크엘프 종족을 선택했고, 어느 클럽의 제의를 받아 떠났다… 노구덕에게는 이 정도로 기억되던 여자. 이제는 기억마저 희미해진 여자였지만, 그래도 동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모두 잘되기를 바랐는데… 아쉽구만. 다른 녀석들 소식은 들은 거 없어?”
“안혜미는 바로 옆도시에 있었으니까… 다른 놈들은 몰라. 아저씨나 김정인처럼 신문에 나기라도 하면 모를까.”
“그래? 그렇군…….”
“이 세계에서는 흔한 일이야.”
노구덕은 ‘스카우터의 눈’으로 이정한의 정보를 살폈다. 별 이유랄 것도 없는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이정한은 드래프트를 통과할 때도 상당한 실력자였다. 2년이 지난 지금, 얼마나 발전했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별 생각 없이 이정한의 정보를 열람한 노구덕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저널 번호(Journal Number) : K903-32003] [이름(Name) : 이정한] [종족&인종(Tribe&Race) : 인간(Human)] [클래스(Class) : 도살자(Butcher)] [재능(Talent) : Lv3 무투(C), Lv3 부술(C), Lv3 마법(UC), Lv1 주술(R), Lv3 금속(R), Lv2 바람(R), Lv1 피(R)] [특성(Characteristics) : 숙련병, 나무꾼, 투척의 대가, 광신자]‘…뭐야, 이놈?’
다른 건 다 제쳐두고, 도살자란 섬뜩한 클래스 명이 눈에 확 띄었다. 그리고 높은 레벨은 없지만 무려 7개에 달하는 다양한 재능, 네 개의 특성. 저 재능들을 골고루 개발했다면, 그의 전투력은 일개 프리헌터 수준이 아닐 터. 대체 그간 어떤 삶을 살아왔던 것일까.
‘광신자라니… 이 녀석, 어디 사이비 종교에라도 빠진 거 아냐?’
호기심이 치솟은 노구덕은 그의 특성을 좀 더 세세히 열람하려고 했지만, 마침 일행이 장비 거리에 도착했기에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소위 ‘장비 거리’라 불리는 퀸즈가든의 장비 코너는 부츠 전문점, 망토 전문점, 갑옷 전문점 등 각종 세부 장비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과, 브랜드별 매장이 통째로 입주해 있는 대형 매장이 커다란 대로를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들어서 있었다.
이런 곳이 처음인 실렌은 그 어느 때보다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잔뜩 흥분한 채 콧김을 내뿜었다.
“우와아아! 소피아 씨, 뭐부터 사는 게 좋을까요? 갑옷? 부츠? 벨트?”
“글쎄요… 일단 동행인 분 의견을 묻는 게 먼저 아닐까요.”
“정한 오빠, 뭐 먼저 볼래요?”
“난 아무거나 상관없어.”
“그럼 옷부터 봐요!”
“그럴까? 가자!”
어느새 죽이 척척 맞는 두 여인이었다. 자연스레 둘에 이끌린 모양새가 된 일행은 종종걸음으로 앞장서는 두 사람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신소율과 실렌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거리 초입에서부터 거대하고 화려한 간판으로 눈에 띄던 장비점이었다. 매장 이름은 ‘팜므파탈’. 바로 데모나와 나타샤가 전속 모델로 있는 여성전용 장비업체였다.
아니나 다를까,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요염한 포즈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타샤의 전신 포스터였다. 그녀가 홍보하고 있는 제품은 암살자용 전신 타이즈. 포스터 한구석에는 타이즈의 방수기능과 방호능력에 대해 이런저런 홍보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노구덕과 이두식 등은 그런 글자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밀착된 타이즈의 곡선이 적나라하게 그려내는 야성적인 몸매를 힐끗거리며 감상하기 바빴다.
신소율과 실렌에게 들킬세라, 열심히 곁눈질을 하던 노구덕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두식의 어깨를 툭 치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두식아, 너 좋겠다? 여자 친구 몸매가 대단한데?”
“감사… 아, 아니……. 그래도 형수님께는…….”
형수님이라 하면 당연히 임유진을 말하는 것이리라. 노구덕은 내심 그에 동의하면서도, 얼른 말을 바꾸는 이두식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솔직히 말해라. 나타샤 씨랑 어디까지 갔어?”
“그게…….”
귀까지 붉히며 말끝을 흐리는 이두식을 본 노구덕은 더 말할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했네, 했어.’
호시탐탐 이두식을 노리더니, 나타샤가 결국엔 잡아먹는데(?) 성공한 모양이다. 어쨌든 나타샤나 이두식이나 교단의 세례를 받은 이들. 노구덕은 복잡미묘한 얼굴로 이두식의 어깨를 두드렸다. 축하해야 할 일은 분명하지만, 앞으로 꽉 잡혀 살 이두식의 앞날을 생각하면…… 그저 힘내라고 할 수밖에.
“아저씨! 데모나 언니 것도 있어요!”
“오오, 그래? 어디 좀 보자!”
이두식에 대한 걱정도 잠시, 데모나의 포스터가 있다는 말에 노구덕의 머리가 번개처럼 돌아갔다. 데모나가 모델 활동을 하고 있는 건 알았지만, 정작 그 결과물은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데모나가 일부러 그런 걸 보여줄 위인도 아니고. 그 고슴도치 같은 데모나가 일을 할 때엔 어떤 얼굴과 몸짓을 하고 있을까? 솔직히 누구라도 궁금할 것이다.
“여기, 여기요! 보면 놀랄걸요?”
“호오오……!”
“와, 이게 그 여자라고?”
신소율이 가져온 자그마한 광고지를 본 노구덕과 실렌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감탄을 연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광고지에 찍힌 데모나의 모습은 평소의 칙칙한 그녀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이거 뽀샵은 아니겠지?”
“에이, 이 세계에 뽀샵이 어딨어요?”
하긴 그건 그렇다. 노구덕은 고개를 끄덕이며 광고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신소율이 가져온 것은 여성용 후드 광고지였는데, 거기에는 붉은색 후드를 반쯤 벗은 데모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흑백의 대비가 뚜렷한 삼백안은 우수를 머금은 듯 신비로웠고, 먹물처럼 까만 머릿결과 창백한 피부는 선연한 붉은색 후드와 퇴폐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헐벗은 창녀보다 퇴폐적이고, 단지 눈빛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안고 싶은 욕망이 치솟게 만드는 여인. 남성의 본능을 물씬 자극하는 마성의 여자가 포스터에 나타난 그녀, 데모나였다.
‘얘가 이렇게 예뻤나? 하긴, 평소엔 입만 열면 독설에, 검은 포대기를 칭칭 감고 있으니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노구덕은 짧은 감상평을 남겼다.
“심장에 좋지 않은 광고구만.”
“…아저씨? 지금 뭐라고 했어요?”
“아무 말도 안했다.”
“설마, 데모나 언니한테 뿅 간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냐. 그런 타입은 질색이다.”
잠깐 흔들린 건 사실이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어떤 불쌍한 놈이 될지는 몰라도, 그 데모나를 데려간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평생 실험체 취급이나 받으며 바가지를 긁히다가, 참지 못하고 들고 일어나면 그녀가 소환한 죽창에 찔려 생을 마감하겠지. 그리고 그 시체는 데모나의 해부학 실험용으로 자동 기증되는 거다. 적어도 노구덕은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정말 비참한 삶이군. 쯧.’
그러나 저 얼굴을 보면, 그 모든 걸 감수하고서라도, 한번 쯤 안아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불나방을 끌어들여 끝내는 태워 죽이고야 마는 화톳불이랄까. 아니면 죽을 걸 알면서도 마시게 되는 달콤한 독약일까. 여인에 대한 평가치고는 너무 무서운 비유였지만, 그간 경험한 걸 상기하면 달리 다른 평가를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실컷 아이쇼핑을 한 일행은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고 매장을 나섰다. 노구덕이 보기에는 괜찮은 물품들도 있었지만, 두 여인은 짜기라도 한 듯 도리질을 치며 그를 질질 끌고 나갔다. 일단은 이 주변 일대를 다 둘러봐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어느 가게에 뭐가 있는지를 알아야 조금이라도 바가지를 덜 쓴다면서.
형형하게 빛나는 실렌과 신소율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노구덕은 돌이킬 수 없는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최후의 결전을 앞에 둔 전사와도 같은 눈빛. 그녀들은 이미 이 퀸즈가든을 전부 돌아보려는 독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어이쿠, 오늘 어쩌면 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르겠구나…….’
아찔해진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터덜터덜 힘없이 거리를 걷고 있는데, 정면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난 것이 느껴졌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오늘자 리리플은 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ㅠ 그래도 리플은 모두 챙겨보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