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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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녀의 산(Witch’s mountain)
“꺄아아악!”
“아아……. 케, 케샤가…….”
신소율의 비명과 윤희지의 공허한 울림이 뒤를 이었다. 짧은 순간에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김정인은 모래알처럼 흩뿌려진 붉은 육편들을 뒤로 한 채, 우묵한 눈으로 드리안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칼끝에서 기운을 방출해 케샤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드리안은 총구를 겨누듯이 수직으로 들어 올렸던 팔을 내리며, 보다 편안해진 얼굴로 자신이 토해낸 죽은피를 가리켰다.
“후욱! 이 검은 피가 보이나? 난 독에 중독된 상태야. 좀 전에 먹었던 육포에 극독이 들어있었지. 이 중에서 가장 큰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날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난 독에 중독된걸 알고 한참 전부터 배신자를 찾고 있었지.”
“케샤가 배신자라고요? 그럼 임혁진의 일은…….”
늙은 너구리, 드리안은 교활한 눈을 번뜩였다.
“말도 안 되는 모함이야. 그 말대로라면 굳이 이런 곳에서 날 기습할 이유가 없어. 이런 독을 사용할 정도면 도시 내에서도 얼마든지 암습이 가능하지 않나? 하지만 저 계집이 납치범들과 한패라면 말이 되지. 날 겨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전력을 줄이고, 분열을 조장한 거라면…….”
급조한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말이 술술 잘 풀려 나온다. 완전히 자신의 말에 심취한 드리안은 정말로 억울한 감정을 담아서 항변했다. 그의 말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기는 해도 큰 아귀는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케샤를 서두르듯 죽인 것에 대한 설명이 되지는 않았다.
김정인이나 다른 일행들은 여전히 의혹을 지우지 못했지만, 지금은 한가로이 드리안에게 따져 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제기랄! 그런 일은 일단 여기서 나가고 해결하시오!”
“여기부터 빠져 나가죠. 이 일은 그 후에. 희지 씨, 수고스럽겠지만 다시 한 번 더 마법을.”
“네. 이미 준비해 뒀어요. 근데 케샤 씨는 어떻게 하죠?”
피웅덩이 속에 파묻혀 있는 케샤의 시체를 일별한 김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네요. 두고 갑니다.”
“알았어요. 그럼……. 익스플로젼!”
콰아앙!
무른 뼛조각과 썩은 살점이 하늘 높이 튀어 오르며 두 번째 피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전방 쪽에서 숨통이 트이자, 멜릭은 거칠게 방패를 뽑아들며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길을 뚫는다! 내 뒤로 붙어! 늪에 빠지는 병신짓거리는 하지 말도록! 간다아아!”
“우오오오오오오!”
방패로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멜릭을 중심축으로 삼아 쐐기진형을 만든 자경단이 그대로 좀비무리를 관통했다. 윤희지의 마법으로 우왕좌왕하는 놈들은 이전까지의 끈덕지던 놈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쉽게 허물어졌다. 군집해 있지 않은 놈들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기세가 오른 자경단은 앞을 막는 좀비는 방패로 치워버리거나 도끼로 목을 날리며 전진했다.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크라울러는 무수한 군홧발에 짓밟혀 육포신세가 되었다.
김정인, 신소율을 비롯한 일행들은 길을 뚫는 자경단의 후위를 쫓아 움직였다.
-그르르륵!
후미를 향해 허우적거리며 손톱을 뻗던 좀비의 목이 단칼에 날아갔다. 그 절단면은 칼에 베였다기보단 육중한 둔기에 찢겨나간 것처럼 거칠었다. 김정인의 검에 실린 압력 탓이었다. 무형의 압력(壓力)을 검에 덧씌우는 것은, 드리안에게 배운 검술의 특징이었다.
그토록 많은 수를 처치했음에도 몰려드는 좀비의 수는 아직도 많았다. 불과 몇 분이 지나자 시원하게 뻥 뚫려 있던 퇴로가 다시 우글거리는 좀비떼로 들어차고 있었다.
“길이 막히고 있어요!”
“젠장!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한 번이면 되겠군.’
슬쩍 머리를 들어 우글거리는 좀비들 너머의 퇴로를 확인한 김정인은, 체내의 마력을 한가득 끌어 모으며 훌쩍 뛰어올랐다. 새처럼 날아오른 그의 몸이 자경단의 선두를 지나 그 앞의 좀비무리에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착지의 순간, 김정인은 그대로 칼끝을 지면에 내리찍었다.
“프레셔 버스트!”
이윽고 괴물들을 덮치는 끔찍할 정도의 압력!
콰아아앙!
그를 중심으로 반경 삼 미터 정도의 공간이 크게 뒤틀렸다. 아니, 공간이 뒤틀린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갇힌 좀비들이 짜부러지고, 뭉개지고, 터져나가는 통에 그리 보인 것이었다. 전 방위에서 압착(壓搾)시키는 마력의 압력은 놈들의 몸을 꾹꾹 쥐어짜다 못해 펑! 폭죽처럼 터뜨려 버렸다.
검은 핏물 위에 홀로 오롯이 서 있는 김정인은 압도(壓倒). 그 자체였다.
어지간한 일로는 평정심을 잃지 않은 멜릭도 이번만큼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세상에, 저 자가 고작 두 달도 안 된 헌터라고? 내가 아는 헌터들은 죄다 쓰레기였군.”
“이제 알았죠? 저게 우리 리더라고요!”
신소율의 잘난 척을 귓등으로 흘려 넘긴 멜릭은 자경단원들을 독려하며 재차 돌파를 감행했다.
“자! 가잣!”
“오오오오옷!”
사기충천하여 함성을 내지른 자경단원들이 김정인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멜릭은 김정인을 지나가며 가볍게 목례했다. 김정인 또한 눈짓으로 인사를 받으며, 뿌듯한 얼굴로 엄지를 치켜세우며 달려오는 일행과 합류했다.
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서나래는 따라오라는 손짓과 함께 점점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조금 이상한 낌새가 보이긴 했지만, 저만치에 보이는 그녀의 뒤태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발적으로 씰룩이는 엉덩이를 보는 순간 자그마한 의심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미오리를 쫓는 새끼들처럼 서나래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흐흐흐! 저년도 우리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는 거지. 지금 일을 벌이기 적당한 자리를 찾고 있는 거야. 행여나 사람들에게 들키면 그만한 망신살이 없으니까.”
조나단은 서나래의 행동을 멋대로 납득하고는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곧 치를 거사에 가슴은 개선장군처럼 부풀었고 코에서는 절로 흥얼거림이 새어나왔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는 노구덕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침을 줄줄 흘리며 그녀의 뒤를 따르길 이십여 분, 맹목적으로 움직이던 두 사람은 결국 걸음을 멈췄다. 더 이상은 감질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봐!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적당히 해!”
참다못한 조나단이 꽥 소리를 질렀다. 옆의 노구덕도 짜증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조나단이 불평하자 서나래도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멈추었다. 암녹색 배경을 두고 늘씬한 몸매가 등대처럼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 요요한 아름다움에 취한 두 남자가 넋을 놓았을 때, 그녀의 몸이 천천히 돌아갔다.
마침내 전면(全面)의 미모를 감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두 마리 늑대의 설렘 가득한 환호에 보답하듯 옆얼굴이 얼핏 보일 정도로 돌아선 서나래는 마지막 순간 급격히 몸을 틀어 그들을 똑바로 마주봤다.
“……!”
망연자실한 두 사내를 향해 서나래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꺼어어어……!
움푹 들어가 뭉개진 두 눈에서 진물이 흘러내렸다. 좀 전까지 박속처럼 하얗던 몸은 급속도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땡볕아래 노출된 하얀 아이스크림처럼. 검게 녹아내리는 몸으로 꺽꺽대며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한 괴물이었다.
세상에, 절세의 미녀가 걸어 다니는 아이스크림이 되어 다가오고 있다니. 구름 속을 노니는 듯 꿈같은 기대를 품고 있던 두 사람에게, 돌변한 그녀의 모습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짱돌로 뒤통수를 정통으로 후려 맞아도 이 정도로 충격을 받진 않았을 것이다.
잠깐의 패닉, 나오는 것은 욕지거리였다.
“이런 씨팔! 내 팔자가 그러면 그렇지!”
“제기랄! 저게 뭐야!”
괴물은 금방 본색을 드러냈다.
-키에에엑!
괴물의 입 부위로 추정되는 곳에서 짓물러가던 피부를 뚫고 기다란 촉수가 뻗어 나왔다. 개구리 혀를 연상케 하는 촉수는 해방감을 만끽하듯 공중에서 몇 번 방향을 꺾더니 이내 재빠르게 날아와 조나단의 발목을 휘감았다.
“어, 어?”
“조나단!”
촉수가 잡아당기는 힘이 예상외로 강했는지, 조나단은 어떻게 대응할 새도 없이 그대로 뒤로 자빠져서 괴물 쪽으로 질질 끌려갔다. 도중에 손을 휘저으며 돌부리든 풀뿌리든 잡을 수 있는 건 뭐든지 잡아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기겁한 노구덕은 허겁지겁 달려가서 조나단의 발목을 휘감은 촉수를 향해 힘껏 칼을 내리쳤다. 그러나 옅은 상처만 났을 뿐 촉수를 잘라낼 순 없었다. 그때 조나단이 다급하게 외쳤다.
“내 도끼! 여기 내 도끼를 써! 빨리이!”
조나단이 던진 도끼를 받아 든 노구덕은 다시 달려가서 촉수를 내려찍었다.
“됐다!”
확실히 뭔가 찍히는 손맛이 있었다. 도끼를 들어 촉수를 내려다보니 촉수의 절반 이상이 잘려나가 있었다. 반색한 노구덕은 다시 한 번 무자비한 도끼질을 감행했다. 그러자 퍽! 하는 소리가 들리며 두꺼운 촉수가 완전히 떨어져나갔다.
끼기기기긱긱—!
촉수가 절단 당한 고통 때문인지 한바탕 긴 괴성을 터뜨린 괴물은 숨을 들이 마시듯 촉수를 회수한 뒤 전속력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놈이 달리기 시작하자 녹아내리던 살점들이 사방으로 튕겨나가며 허연 뼈가 군데군데 드러났다. 특히 녹아내린 머리카락 뭉텅이를 어깨며 가슴에 주렁주렁 달고 오는 모습은 실로 기괴했다.
그 공포스러운 광경을 견디다 못한 노구덕은 창백한 얼굴로 비명을 질러댔다.
“으으으아악! 괴물이야!”
다리를 툭툭 털어 촉수를 떼어 낸 조나단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 나이도 많은 양반이 떽떽거리지 좀 마쇼. 그럼 저게 괴물이지 사람인가? 이상하게 혓바닥이 긴 놈이긴 해도 좀비랑 별 다를 것도 없어 보이는데 뭘. 느려터진 것도 그렇고…….”
놈의 촉수를 절단 낸 자신의 도끼를 과시하듯 뱅뱅 돌린 조나단은 한껏 여유를 부리며 성큼성큼 접근하는 괴물의 앞에 버티고 섰다. 좀비라면 지겨울 정도로 처리한 경험이 있는 그였다. 느릿느릿한 녀석이 사정거리에 닿는 순간 그대로 머리통을 날려버릴 요량이었다.
5미터, 4미터, 3미터……. 거리를 재는 조나단의 눈이 번뜩였다. 곧이어 우렁찬 기합과 함께 풀스윙한 도끼가 괴물의 목 언저리로 쇄도했다.
“뒈져라!”
투콱!
통렬한 타격이었다. 머리로 추측되는 덩어리가 단숨에 절단되어 공중으로 비산했다. 어깨 윗부분이 잘려나간 괴물이 움직임을 멈췄다.
치명타를 성공시킨 조나단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 표정에서 억울함, 두려움, 허탈감 등의 감정들이 범벅이 된 채 소용돌이쳤다. 그는 고개를 툭 떨구듯이 아래로 숙였다. 괴물의 배를 뚫고 튀어나온 촉수가 복부를 관통한 채 탐욕스럽게 꿈틀거렸다. 팔뚝만한 촉수가 요동칠 때마다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내장이 통째로 헤집어지는 듯했다.
머리가 잘렸지만, 놈은 살아있었다.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끄으으으……. 이런… 씨… 팔…….”
“어, 어… 조나단!”
괴물을 처치한 줄 알고 기뻐하던 노구덕은 조나단의 얼굴과 괴물을 번갈아 쳐다보고 나서야 뒤늦게 상황파악을 했다. 해쓱하게 질린 노구덕의 눈알이 좌우로 움직였다. 조나단의 발치에 떨어뜨린 도끼가 눈에 들어왔다. 용케 도끼자루를 집어든 노구덕은 필사적으로 놈의 촉수에 도끼질을 해댔다.
“조나단! 좀만 버텨!”
-끼아아아아–!
촉수의 위험을 감지한 것일까. 멈춘 듯 보였던 괴물이 다시 움직였다. 괴물은 팔을 휘둘러 노구덕을 후려쳤다. 근육이 전혀 없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무지막지한 힘이 실린 공격이었다. 도끼질에 매진하느라 미처 주변을 살피지 못한 노구덕은 옆구리를 강타당해 벌렁 나동그라졌다.
“허윽…! 꺽!”
갈비뼈가 부러지기라도 했는지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방해물을 떨쳐낸 괴물은 이미 죽어서 축 늘어진 조나단을 내팽개치고 노구덕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대로 가다간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일어선 노구덕은 그대로 괴물의 반대방향으로 내달렸다. 쓴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왔지만 이를 악물고 다시 삼켰다. 뒤에서 괴물이 기성을 토해내며 뒤쫓아 오는 게 느껴졌다.
“으아아아아아아—!”
노구덕은 정말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도망쳤다. 무작정 뛰었다간 늪에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지금은 온힘을 다해 괴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다리는 놈의 촉수를 떨쳐낼 정도로 빠르지 못했다. 어느새 노구덕을 따라잡은 촉수는 그의 발목을 올가미처럼 휘감았다. 그대로 앞으로 나자빠진 노구덕의 귀로 철벅이는 놈의 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철버덕. 철버덕.
“아, 안 돼……!”
진득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노구덕의 절망도 커져갔다. 어떻게든 발을 빼보려고 몸부림쳤지만 놈의 촉수는 올무처럼 집요하게 발목을 감고 놔주지 않았다. 이윽고 놈의 끔찍한 형상이 목전에 다다랐다. 촉수가 튀어나온 놈의 복부는 쩍 벌어진 채 열렸다 닫히길 반복하고 있어 마치 입처럼 보였다. 마침내 놈의 팔이 쳐들려졌다. 둔기에 가까운 저 팔이 내리꽂힌다면 그의 머리통은 두부처럼 박살날 게 분명했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한 노구덕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