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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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수성(守城)
172# 수성(守城)
숯검댕이가 된 오정환은 바짝 마른 입술을 비죽이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카카카….”
실로 어처구니없는 결과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늘을 뒤덮었던 강대한 육체는 수천 갈래로 찢어진 고깃조각이 되었고, 화수분처럼 샘솟던 막강한 권능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신의 힘을 휘두르던 그 자신은, 자력으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병신이 되어 이렇게 나자빠져 있다.
이런 건 계산에 없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여기 모여 있는 벌레들을 모조리 해치우고 신의 위용을 뽐냈어야 할 터다.
실제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건 계획대로였다. 물론 벌레들의 저항이 워낙 완강하기도 했고, 안개여왕 아가레스트, 신궁 클라리스 등 예상 밖의 전력들도 있었기에 생각보다 시간을 잡아먹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변수들이 전황을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다. 전력이 충원되지 않는 헌터들은 시간이 갈수록 지쳐갔고, 전멸은 시간문제였다.
그놈, 노구덕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니, 솔직히 그것도 이해되지 않는다.
애초에 회담에 참석한 모든 이들을 몰살시키려고 마음먹었던 만큼, 노구덕의 전투력은 이미 예상범주 내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었다.
레그나토르의 철혈 군주, 노구덕이 어지간한 실력자들을 훨씬 웃도는 강자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는 예전부터 칼립스 빅리그의 최상위 랭커로서 무명(武名)을 떨친 데다, 대 그림리퍼 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크로스게이트의 반란을 진압할 때에는 단신으로 수십의 헌터들을 쳐죽인 전적도 있었다.
트롤의 열 배를 상회하는 무지막지한 재생력에,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근력과 체력이 바탕이 된 단순무식한 전투스타일.
오정환은 노구덕의 전력을 십존이라 상정했다. 많이 쳐줘서 전성기의 늑대왕 가리발디 정도. 그것만 해도 상당히 후한 평가였다.
헌데… 막상 나타난 노구덕의 괴력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놈은 급소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찰흙인형 같았다. 아다만티움 가시에 의해 두개골이 꿰뚫리고, 심장이 터졌으며, 척추가 끊어지고도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괴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사람이 아니라 카름이라 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노구덕이란 괴물은 그게 가능했다.
눈알이 터지고 뇌가 손상되고도 움직인 건 약과다. 끊어진 척추는 돌덩이 같은 기립근으로 대체했고, 정지한 심장은 처음부터 방해 요소조차 되지 않았다. 애초에 놈에게 심장이란 기관이 과연 필요가 있기나 한 것인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죽자 사자 달려든 노구덕은 기어코 그의 뱃가죽을 뜯어냈고, 스스로 속살을 비집고 들어가 재생을 막았다. 물리력에 한정된 그의 공격력으로는 그 이상의 타격은 무리였겠지만, 그 뒤에는 아가레스트와 임유진이 있었다.
그리고… 쾅.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힌 동귀어진이었다. 그런 허접한 수에 당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제길…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광산에 농축된 카르마 에너지를 좀 더 끌어오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완벽한 각성을 이루었다면 고작 그 정도 수법에 당하지는 않았을 거란 후회가 들었지만, 이제 와서는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오정환.”
널브러진 오정환은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겨우 움직였다.
“콜트레인….”
“이 짐승 같은 놈. 어떻게 네놈과 잔을 나눈 형제들을 다 죽일 생각을 했단 말이냐? 네놈이 그러고도…!”
“크카카… 겨우 그런 말이나 하려고 온 건가? 됐으니 빨리 끝내기나 해라.”
“이놈!”
“그만하시오. 심정은 이해하지만, 우리에게 이 자를 처단할 권리는 없소.”
분노한 콜트레인의 어깨를 잡으며 제지한 이는 심준호였다.
“크으윽!”
격분을 씹어 삼키듯, 칼자루를 움켜쥔 손을 부르르 떤 콜트레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팔을 늘어뜨렸다. 분하고 원통했지만, 심준호의 말이 옳았다.
오정환은 그런 그를 자극하려는 듯 다분한 조롱조로 비아냥거렸다.
“뭐냐, 콜트레인. 죽일듯한 기세는 어디 간 거냐? 사내가 칼을 들었으면 무라도 베어야 하지 않겠나?”
“말로가 처참하군요. 오정환 맹주. 서부연맹의 수장이 어쭙잖은 도발까지 하면서 죽기를 바라고 있으니 말이에요.”
“으음… 아가레스트.”
오정환이 신음처럼 흘린 말을 들은 헌터들은 모두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안개여왕 아가레스트가 살아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녀가 레그나토르에 몸담고 있다는 것도 상당한 충격이었다.
“아, 아가레스트? 에덴 공방전에서 처형당한 그…?”
“안개여왕이 살아있었단 말인가?”
“어, 어쩐지….”
소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가 이번 전투에서 보여준 활약을 떠올린 사람들은 금세 수긍해버렸다. 위원회가 해체되고 그 이름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금, 아가레스트의 생존이 미치는 여파는 생각보다 미미했다.
그보다는 멀쩡한 사람이었던 오정환이 재앙급 카름으로 변신한 것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오정환 맹주, 당신… 흡혈왕 발레기우스와 무슨 관계죠?”
“…….”
슬쩍 아가레스트의 얼굴을 곁눈질한 오정환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반응을 예상한 아가레스트는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도미니온의 체스터도 당신과 동류인가요?”
그러자 잠자고 뒤에 서 있던 유메르바인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무슨 말을…!”
“억측은 삼가시오! 그런 말도 되지 않는…!”
허나 아가레스트는 불쾌감을 표출하는 도미니온의 헌터들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억측이 아니라 합리적인 의심이에요.”
“합리적인 의심이라니…”
“방금 통신망이 복구됐어요. 정보에 따르면 우리들이 여기 있는 동안, 서부연맹과 도미니온에서 동시에 국경을 넘어 레그나토르를 침공했다고 해요. 이건 미리 말을 맞춰놨다고 밖에 볼 수 없지 않나요? 유메르바인, 당신은 이걸 알고 있었나요?”
“저, 전쟁이 일어났다고요?”
주도권을 잡은 아가레스트는 아연실색한 유메르바인을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통신망이 끊기기 전, 우리는 당신들을 제압했다는 사실을 칼립스에 알렸어요. 당연히 칼립스에선 포로 협상을 시도했죠. 하지만 통신 채널은 모두 두절. 서부연맹도, 도미니온도 모두 협상을 일방적으로 거부했어요.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가요?”
도미니온의 헌터들의 낯빛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포로 협상조차 응하지 않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도미니온에서 자신들을 버렸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특히 도미니온의 개국공신이자 체스터의 최측근인 유메르바인의 얼굴은 안쓰러울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런… 믿을 수 없어요.”
“믿고 말고는 제 알 바 아니죠. 제가 묻고 싶은 건 이 전쟁이 원래부터 계획되어 있었냐는 거예요. 당신들, 알고 있었나요?”
“…….”
서부연맹과 도미니온의 헌터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합죽이가 되었다. 모두가 무겁게 입을 다문 가운데, 괴로워보이는 얼굴을 한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블루드라군 심준호였다.
“…우리의 본래 계획은 이 회담 자리에서 레그나토르를 합공하는 것이었소. 도미니온과 싸움이 붙으면, 적당한 시점에 레그나토르를 기습하는 것… 그게 전부요. 수뇌를 제거하면 자연히 레그나토르는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고. 당신이 말한 대규모 전쟁은… 예정에 없었소.”
“결국 당신들도 쓰다버리는 장기말에 지나지 않았군요.”
그녀의 신랄한 조소가 자존심을 깔아뭉갰지만, 심준호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애꿎은 주먹만 꾹 말아 쥘 뿐, 다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아… 체스터 전하께서 우릴 버렸다고?”
“단정할 순 없소. 아직 확인된 사실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크게 낙담한 헌터들과, 그런 이들을 위로하는 일부 헌터들을 바라보던 아가레스트는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정 못 믿겠다면 다른 소스를 드리도록 하죠. 이두식 헌터, 이리 데리고 오세요.”
“예.”
명령을 내리는 아가레스트와 그녀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이두식의 모습이 꽤나 자연스럽다.
이두식이 손에 붙들다시피 해서 데리고 온 이들은 후방에 숨어 있던 언론사 관계자들이었다. 특히 지금 불려온 이들 세 명은 서부에서 가장 공신력이 높은 언론사의 중진들이었다.
아가레스트의 차가운 시선을 받은 이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애초에 이들은 서부연맹과 도미니온의 사주를 받고 레그나토르를 모함하려 했던 이들이다. 떳떳이 낯짝을 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이니 따로 설명은 하지 않겠어요. 당신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겠죠?”
“예에…….”
그들은 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귤러를 뒤덮고 있던 장막이 사라지고 통신망이 복구된 덕분에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게 된 것이다.
“옆에서 들었으니 알 테죠? 제가 지금까지 했던 말에 틀린 점이 있나요?”
“…없습니다.”
서부연맹과 도미니온의 헌터들이 다시 한 번 술렁인다. 힐끔 그쪽을 바라본 아가레스트는 이내 미약한 기세를 발하며 언론인들을 압박했다.
“좋아요. 그럼 이제 정산을 할 차례군요.”
“정산이라…니요?”
“당신들은 우리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요. 그러니 응당 은혜를 갚아야지요?”
“어, 어떻게 말입니까?”
“당신 같은 족속들의 습관은 잘 알고 있죠.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 모두 제대로 녹화했겠죠? 다른 건 필요 없어요. 그냥 그대로 내보내면 돼요. 바로 이 자리에서 말이죠.”
사내들이 낯짝이 썩은 돼지 간처럼 문드러졌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도미니온과 서부연맹에 있는 본사가 어떻게 될지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건 단순한 특종이 아니다. 이후 대륙적으로 휘몰아칠 엄청난 파장을 생각한다면, 쉽게 풀 수 없는 영상이었다.
“하지만…….”
“진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게 참된 언론인의 자세 아닌가요? 설마, 싫다는 건가요?”
“아, 아닙니다!”
잔잔하던 기세가 사납게 돌변하자, 사내들은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부하겠는가. 본사가 걱정되긴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건 당장 자신들의 목숨이었다.
상대는 그 오라클의 총수였던 안개여왕 아가레스트다. 한갓 말솜씨로 어찌 회유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원하는 대답을 얻어낸 아가레스트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착한 분들이네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어요. 그럼 이제….”
그녀가 미뤄두었던 오정환의 심문을 위해 몸을 돌리려는 찰나, 갑자기 앞쪽에서 시끌시끌한 웅성거림이 일었다. 레그나토르의 헌터들이 모여 있는 방향이었다.
“오오오! 깨어나셨다!”
“의장님! 정신이 드십니까?”
“여보!”
“아저씨!”
들려오는 말소리만 들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 같다. 암담한 얼굴로 망연자실하고 있던 서부연맹과 도미니온의 헌터들은 뛸 듯이 기뻐하는 레그나토르의 진영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부러움과 놀라움이 반반으로 뒤섞인 눈길들이었다.
“허. 영락없이 죽을 줄 알았는데….”
“그 폭발에서 살아남다니…….”
“형님께서 깨어나신 모양입니다.”
“그런 것 같네요. 어차피 죽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요. 그럴 사람이 아니거든요.”
무덤덤하게 대꾸한 아가레스트는 잠시 말을 끊고 의미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서두르도록 하죠. 아직 할 일은 많아요.”
가장 큰 위기를 넘기긴 했지만,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게 시간 싸움이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어제는 미리 저번화 코멘 드렸던대로 일이 너무 바빠서.. 새벽화 업로드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는데요!
선작이 14000 고지를 넘겼습니다! 와아아아~~~
자축합니다. 77페스 끝나고 6천에서 시작해서 해발고도 14000을 넘겼네요. 1년 3개월 만의 쾌거입니다..
이제 다시 15000 & 700화를 향해 긴 여정을 떠나야겠지요. 솔직히 700화는 문제가 안 되는데, 15000은 많이 힘들것 같습니다. ㅎㅎ
그리고 로그라이크 관련해서 말인데요!
생각보다 정성들여 추천해주신 분들이 많아서 놀랐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쪽지도 모두 받아 보았습니다! 제 생각보다도 주옥 같은 게임들이 정말 많더군요. 특히 몇몇 게임은 날을 새서라도 한번 해보고 싶네요. 그런데 그러면 연재에 지장이 많이 갈 테니.. 틈틈히 즐겨보려고 합니다.
우선은 한글화되어 있는 게임 위주로.. Tome? 이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이 게임과 던전크롤을 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정도 감이 잡히면 추천해주신 게임들 위주로 가 보려고 해요. 다키스트 던전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갑자기 로그라이크 장르에 흥미가 생긴건 차기작을 이쪽 방향으로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차기작 설정들이랑 로그라이크 분야 게임들의 방향성이 대강 맞아 떨어지더라고요. 아직 걸음마수준이니 뭐라고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요. 차기작은 마이너한 헌터클럽과는 다르게 좀 메이저(?)한 취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 게임들을 해보면서 영감을 구체화시키려고 합니다. 경험이 중요하니까요.
하여튼, 그런 이유로 추천을 부탁드렸던 것인데.. 정성어린 추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일이 바쁜 금요일이라.. 12시 연재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에피소드 끝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최대한 노력할 생각입니다.
항상 즐거운 하루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