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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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정리(整理)
188# 정리(整理)
“…전황은?”
-명하신대로 대치 국면을 이어가고 있어요. 도미니온 쪽도 적극적으로 달려들 생각은 없는 것 같고요.
화면에 떠 있는 소피아의 갸름한 얼굴이 꽤 지쳐 보인다. 백옥 같이 하얀 피부는 질식할 것처럼 파리하게 물들어 있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아마 칼립스 공방전 이후로 가장 고생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그녀일 것이다. 당시 게오베르그의 과도한 운용으로 탈진에 빠진 소피아는 제대로 된 휴식도 가지지 못하고 일선에 복귀했다. 상황이 그만큼 급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아, 현재 소피아는 홀로 칼립스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있었다.
서부연맹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운 데모나는 영력의 회복을 위해 긴 휴식기에 들어갔고, 임유진은 도미니온 원정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전방에 나가 있었다. 아가레스트는 강옥교와 여위량을 돕기 위해 북부로 지원을 나갔으며, 신소율 또한 모종의 임무를 맡아 은밀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대내외적인 일만으로도 몸이 모자랄 지경인데, 한창 예민한 시기인 아이들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몸조리에 들어간 안세희와 데모나, 맏언니인 임가희가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소피아가 짊어진 부담이 적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다행이군.”
-우후훗. 설령 도미니온이 공세를 펼친다 해도 유진이 언니가 뚫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이쪽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주인님께선 어떠신가요?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이래저래 지쳐 쓰러질 정도로 힘들 텐데도, 말갛게 피어난 그 미소엔 어려움을 호소하는 어떤 기미도 찾아볼 수 없다.
비단 소피아뿐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노구덕이 그녀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부분이기도 했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내일이야.”
-네에? 내일이라뇨?
버릇처럼 말꼬리를 늘이며 되묻는 소피아의 얼굴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귀엽다. 나이 서른셋, 벌써 삼십대 중반에 접어든 그녀였으나, 풀잎에 엉긴 이슬처럼 함초롬한 미모는 소냐의 또래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사실, 지금도 키만 따지면 소냐와 비슷하기도 했고….
노구덕은 살짝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소피아의 저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니 금세 아랫도리가 반응을 보인다. 당장이라도 화면 속으로 팔을 뻗어 그녀와 입을 맞추고, 달짝지근한 홍시처럼 농익은 육체를 맛보고 싶었다.
사실, 지금 그의 욕구불만은 위험수위에 다다른 상태다. 손댈 수 없는 두 여인과 함께했던 몇 달 간의 여정은 다른 의미로 고문의 연속이나 마찬가지였다. 몽정을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정 참지 못할 때면 기회를 틈타 스스로 욕구를 풀어야만 했다.
서부의 패자로 우뚝 선 레그나토르의 군주가 성욕을 풀길이 없어 남몰래 수음하는 신세라…. 스스로 생각해봐도 처량하기 짝이 없는 신세다.
-주인니임? 무슨 생각하세요?
“아, 미안하다.”
생리적인 욕구 때문에 번민했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던 노구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꿀떡보다 감미로운 마누라를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그림의 떡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내일이 중요한 고비가 될 것 같다.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해주마. 유진이나 다른 녀석들에겐 아직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노구덕은 자세한 설명을 미루었다. 아직 욘과의 일이 어떻게 풀릴지 모르는 마당에, 그녀들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 의중을 짐작한 소피아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괜한 부담은 가지지 마시고요.
“고맙구나.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 참, 소율이 쪽은 별 문제가 없고?”
-네. 저번에 말씀드렸던 대로예요. 서부에서 두 명을 이미 확보했고, 남부에서 자하드 님의 협조를 얻어 수색을 진행하고 있어요. 어제 종적을 발견했다는 연락이 왔으니,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전선에서 이탈한 신소율은 독자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대륙에 흩어진 신의 조각을 모으는 일이다. 신소율은 노구덕이 알려준 정보를 토대로, 레그나토르의 세력권인 서부와 남부를 돌며 발레기우스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신의 조각들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었다.
벌써 두 명의 신의 조각을 확보했고, 한 명의 신병을 확보하기 직전이라는 보고가 있은 뒤, 마지막으로 임신한 안세희와 아이들의 안부를 전해들은 노구덕은 소피아와의 통신을 종료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벌써 왔나? 들어와라. …응?”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선 작은 그림자를 일별한 노구덕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본래 보기로 한 얼굴이 아니었던 탓이다.
넌지시 방에 들어선 그림자의 정체는 소냐였다.
“대부님.”
지금쯤 자고 있어야 할 늦은 밤, 가느다란 몸의 선이 은은하게 내비치는 얇은 옷을 입고 나타난 소냐의 자태는 신비롭기 짝이 없었다.
밤의 요정이라 해야 할까.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희미하게 비치는 달빛을 받아 은하수처럼 반짝거린다. 나이답게 여물지 않은 육체의 선은 지면에 닿기 전의 눈송이 같았다. 하얗고 깨끗하게 정돈된 얼음의 결정체. 보기엔 완벽하지만 만지면 부서질 듯 위태로운 느낌이 꼭 닮았다.
소냐의 물기 젖은 루비색 동공과 눈을 마주친 노구덕은 한순간 심장이 멎기라도 한 것처럼 앞이 아찔해졌다.
언제까지나 소녀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서 성숙한 ‘여자’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렇잖아도 달아올라 있던 수컷의 본능이 물씬 풍기는 암내를 쫓아 대가리를 뻣뻣이 쳐든 것이다.
‘작정하고 들어왔구나!’
소냐의 의도는 뻔했다. 저번에 있었던 일로 마음을 돌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정말로 위험하다. 허벅지를 세게 꼬집은 노구덕은 엄하게 그녀를 꾸짖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소냐는 대꾸하지 않았다. 살짝 시선을 아래로 늘어뜨린 그녀는 말할 겨를도 없이 다가와 노구덕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날아갈 듯 가벼운 몸을 받아든 노구덕은 자기도 모르게 헉! 소리를 냈다.
물기에 젖어 반들거리는 머리카락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별안간, 진한 술냄새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에요.”
말투가 평소와 다르다. 그의 가슴팍에 볼을 기댄 소냐의 음성은 울먹이듯이 잠겨 있었다.
“욘은 대부님과 제가 결합하기를 원해요.”
소냐는 임박한 데드라인을 들먹였다. 그녀는 그와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넋두리하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대부님을 사랑해요.”
“이모도, 데모나 님도, 처음부터 좋은 관계는 아니었죠. 세희 언니도 그래요. 제가 그분들과 다른 게 있나요?”
“왜 절 차별하시는 건가요? 이유가 뭔가요? 절 안으시면 모든 걸 가질 수 있어요. 탐나지 않으시나요? 제 모든 것과 욘의 총애, 그리고 수호자의…….”
“그만.”
취한 것처럼 두서없이 이어지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리고, 침울하게 파묻혀 있던 머리가 스르르 위를 향했다.
소냐는 울고 있었다. 두 개의 맑은 물줄기가 가로지른 그녀의 얼굴은, 열두 시가 지나기 전의 신데렐라처럼 절박한 감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마치, 땅에 닿아 녹아 없어지기 직전의 눈꽃처럼.
헌데,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는 노구덕의 눈빛은 개울물처럼 담박했다.
“취하지 않았구나.”
잔뜩 흐려진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미세한 변화였지만 노구덕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욘… 그가 네게도 접근했었어. 그렇지?”
눈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점점 아래로 퍼져나간다. 노구덕은 심하게 떨고 있는 소냐의 등을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이런 짓까지 하기엔, 넌 너무 어리잖니.”
어리다. 일순, 소냐의 얼굴에 서운한 빛이 감돌았다. 결국 노구덕은 그녀를 아직도 어리게만 보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하지만 대부님의 몸은….”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안다. 하지만 욘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입장은 아니야. 당장 급한 쪽은 나다만, 이것 때문에 한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놀아날 테지. 그래선 결국 언젠가 또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고 말거다. 난 그러기 싫구나.”
“…제가 대부님을 배신한다면요? 제가 대부님을 대신해 욘의 사도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욘이 그런 제안을 한 거니?”
때로는 침묵이 무엇보다 확실한 대답이 된다. 말없는 소냐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노구덕은 그녀의 말랑말랑한 볼살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살짝 멍해진 눈빛이 그의 얼굴을 향한다.
“사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이상… 하다고요?”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반쪽짜리인 나보다는 소냐 네가 사도에 적합하니까. 최근에 김정인 그놈이 혼자서 솔라리스를 박살냈다는 말을 듣고 부쩍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김정인만 해도 그 정도인데, 그놈도 이길 수 없다는 발레기우스는 얼마나 강한 걸까. 욘은 내게 사람이 많다고 했지만, 그런 놈을 상대하는데 과연 세력이 의미가 있는 걸까? 만약 내가 욘이었다면 차라리 널 적임자로 삼았을 거다. 난 네 재능이 결코 김정인에게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아마… 욘도 나와 다르지 않았을 거다.”
욘이 힘이 남아 돌아서 그를 지구로 돌려보냈던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욘은 왜 굳이 번거로운 작업을 하며 그를 구슬렸던 걸까.
노구덕의 짐작에, 그는 처음부터 욘이 선택한 최선이 아니었다.
본래 욘이 바랐던 사도는 그가 아닌 소냐였을 거다.
행운이란 재능은 긍정적인 상호작용으로 좋은 시너지를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그 소유주들이 반목하는 경우엔 상충하여 예상치 못한 돌발 사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노구덕의 짐작이지만, 그와 김정인의 경우를 보면 상당히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게다가 소냐는 노구덕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 그런 변수가 싫었던 욘은 노구덕을 아예 지구로 돌려보내고, 그 사이에 소냐를 설득하려고 했다.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른다. 허나 사전접촉이 있었던 것만은 거의 틀림없었다. 소냐가 처음 욘을 대면했을 때나, 지금까지 보였던 행동들로 미루어 굳어진 심증이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욘은 제한된 힘을 긁어모아 노구덕을 다시 이 세계로 불러들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소냐가 욘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
물론 이 모든 게 그의 망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얼추 이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을 거란 데엔, 그 나름의 확신이 있었다.
“너는 그런 아이가 아니야.”
“자신하는 근거는… 있으십니까?”
어느새 그녀의 말투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별빛처럼 고요한 눈을 마주한 노구덕은 고민 없이 머리를 주억였다.
“근거는 없다. 어쩌면 내가 틀렸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냥 내 눈을 믿고 싶구나.”
“…알겠습니다.”
소냐는 조용히 일어섰다. 노구덕의 본심을 확인한 이상, 더 이상의 부언은 시간낭비일 뿐이다.
“늦은 밤에 실례했습니다. 대부님, 편히 주무십시오.”
“그래, 내일 보자꾸나. 그리고… 얘야.”
먼젓번 비틀거리던 것과 다르게, 이번에는 절도 있는 걸음으로 문가를 향해 나아가던 소냐의 발이 멈추었다.
“나도 널 사랑한단다.”
“…….”
몸을 돌려, 흐릿하게 웃고 있는 노구덕에게 꾸벅 머리를 숙여 보인 소냐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탁.
까칠까칠한 나무 문짝 위로, 비스듬히 몸을 기댄 소냐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젠 됐습니다.”
“…끝은 아닙니다. 조금, 시간이 지난다면….”
“…아니요. 시간은 충분합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일까. 작게 속삭이듯 혼잣말을 이어나가던 소냐는 느릿하게 몸을 문에서 떼어냈다.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요.”
목적 없는 독백을 끝낸 소냐의 눈시울에 시린 달그림자가 차오른 찰나, 외로운 문가에 머물러 있던 그녀의 그림자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일요일 하루 쉬고 돌아왔습니다. 한주가 시작했으니 다시 열심히 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밤에 한편 더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