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84)
헌터클럽 779화
‘끝났군.’
맞장구치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던 김정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눈썹의 요동은 명백히 못마땅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결말이.
그리고 이 결말을 만들어낸 자신 이.
노구덕과의 결투…… 따지자면 그의 판정승이다. 판정승이기는 한데, 더러운 뒷수작으로 승리를 챙긴 것 만 같아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결판이 난 승부에 이제 와서 따져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만약 마지막에 그가 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이길 수 있었을까?
그건 그때 가봐야 아는 거다. 다시 그 순간이 된다면,자신 또한 노구덕처럼 최후의 한 방 정도는 먹일 여력이 있었다.
……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김정인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의 투지가 노구덕에게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마지막 기력을 쥐어짠 노구덕이 그의 허리를 끊어놓으려고 했을 때, 뒤늦게 끼어든 이진주가 아니었다면 그는 즉사했을 것이다. 이후,노구덕은 이진주를 죽이고도 모자라 또 다시 그를 공격하려고 했다.
결국,욘이라는 제삼자의 개입이 없었으면 그는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도 그걸 알았기에 욘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면.
줄어드는 수명 따위 신경 쓰지 않고,노구덕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승부에 임했다면…… 그랬다면 한 점 부끄럼 없는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승리와 함께 숨이 멎는 한이 있더라도.
뒤늦은 가정을 해보지만, 다 끝난 지금에 와선 의미 없는 얘기였다.
‘돌이킬 수는 없다.’
그렇겠지. 김정인은 조용히 속으로 되뇌었다.
노구덕은 죽었다. 늘 그의 가슴 한 편을 거슬리게 했던 최대의 숙적은 수천 조각의 육편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피로 물든 바닥에 산재한 조각들 중,가장 큰 조각의 지름이 손가락 마디 하나를 넘지 못한다.
김정인이 얼마나 철저하게 노구덕의 존재를 말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재생하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지만……
욘의 말대로다. 천참만륙으로 조각 난 노구덕의 육신은 이미 생기를 잃어 작은 꾸물거림조차 없었다. 이전부터 재생력에 문제가 생긴 듯한 모습을 보였던 그였으니,이만큼이나 조각났다면 실상 죽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김정인은 또다시 검을 들었다.
‘또 손을 쓸 생각인가?’
“……확실히 끝을 내야 합니다.”
‘만류하고 싶군. 아직 네 몸은 안정되지 않았다. 저자처럼 내가 손을 볼 시간이 필요하다. 더는 무리다.’
“……”
‘이미 끝났다. 괜한 짓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김정인의 동공이 파르르 지진을 일으켰다.
‘거의’ 끝났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안다. 그러나 도무지 안심이 되질 않았다. 피범벅이 된 바닥을 갈아엎고 산산이 흩어놓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악몽처럼 되살아나는 괴물. 상대는 그런 남자였으니까.
결심을 굳힌 김정인이 서슬 퍼런 살기를 뿌리며 걸음을 내딛었을 때였다.
쩌저적–!
하얀 연기처럼 밀려온 냉기가 두꺼운 얼음장벽이 되어 김정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뜻밖의 사태에 놀란 나머지 잠시 주춤한 김정인은 이내 총 탄처럼 날아드는 무언가를 느끼고 급히 검을 휘둘렀다.
“웃!”
둘러쳐진 검막에 줄줄이 부딪치며 사방으로 비산하는 그것은 투명할 정도로 시린 얼음알갱이였다.
미약하게 저려오는 손목을 감싸쥔 김정인은 곧 투명한 얼음벽 너머에 서 자신을 노려보는 한 여인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지독한 아수라장을 헤쳐 온 것인지,곳곳에 자잘한 상처와 찌든 핏 자국이 가득한 추레한 행색이다. 그러나 그런 형편없는 몰골도,특유의 차디찬 백귀(百鬼) 같은 눈길과 전신에 서린 냉엄한 기도를 감출 순 없었다.
“서리여왕……
“한마디만 하겠다.”
다짜고짜 입을 연 하유라는 다른 말도 없이 간단히 말했다.
“물러나라.”
“……”
짧고 굵은 선포. 그러나 그 말에 실린 무게감을 느낀 김정인은 나직 이 침음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치 못한 하유라의 등장은 그의 심사를 엉망으로 헝클어뜨렸다.
저널을 잃었다고는 하나,그녀를 얕볼 수는 없다. 서리여왕 하유라는 김정인 자신의 왼팔을 앗아간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옅은 선홍빛을 띤 아발란체를 거머쥔 그녀는 예전보다 더욱 위세가 등등해 보였다.
허세일까? 아닐까? 물러날까? 강행 돌파할까?
그에겐 한 줌의 여력이 전부다. 이마저도 불안한 육체를 담보로 한 불안전한 힘이었다.
하유라는 그것을 모른다. 처음의 기습을 막아낸 것을 보고 그의 몸 상태를 대충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행색을 미루어 보건대,그녀 또한 여력이 많이 남지는 않았을 터.
이건 속내를 꽁꽁 감춰둔 두 사람 간의 눈치싸움이었다.
스르릉. 맑은 마찰음을 발한 아발란체가 결단을 촉구하듯 겨누어지자,김정인은 거듭된 갈등을 끝내고 결정을 내렸다.
물러나기로.
‘그에게 머물러 있던 시스템은 완전히 사라졌다. 안심해도 좋다. 그는 죽었다.’
욘의 자그마한 위로는 덤이었다. 미련을 떨치지 못한 듯,투명한 얼음벽 너머로 보이는 피웅덩이를 일별한 김정인은 작은 한숨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대회전(大會戰)이 끝났다.
마신의 영역이 되어 기기괴괴하게 변했던 시온도 제 모습을 찾았고, 하늘 전체에 드리웠던 칠흑의 어둠도 구름 너머의 바깥으로 물러갔다. 타는 듯 강렬한 노을빛으로 물든 고도(古都)는 스러져 간 수많은 목숨을 추도하는 것처럼 고즈넉한 선홍빛을 띠었다.
밖으로 탈출했던 동맹군이 다시 도시 내부로 진입한 것은 시온 전역을 물들였던 어둠이 사라졌을 때였다.
남은 정예를 모조리 이끌고 내성까지 진입한 동맹군은 그 근방에서 정 신을 잃고 쓰러진 아가레스트를 발견했다. 어디선가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인지,그녀는 군데군데 골절상을 입은 채였다. 특히 팔 쪽의 부상이 심했다.
동맹군 수뇌부는 그녀에게 자세한 전황을 듣고 싶어 했으나,기진맥진 한 아가레스트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신소율이 임시 지휘를 맡고 있는 레그나토르 쪽으로 이송되었다.
유일한 생존자에게서 아무런 정보도 얻어내지 못한 동맹군 수뇌부는 문제의 검은 첨탑을 앞두고 큰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발레기우스의 근거지라 추정되는 검은 첨탑.
다른 곳은 전부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지만,이곳만은 여전히 짙은 어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우뚝 솟은 첨탑 표면에 찌꺼기처럼 달라붙은 살가죽과 주변에 낀 자욱한 안개만 보더라도 아직까지 무언 가 사악한 것이 남아 있는 것처럼 꺼림칙한 분위기를 풍겼다.
발레기우스의 소멸이 확실시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병력을 투입하기엔 여러모로 걸리는게 많은 상황.
마침 그때,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아가레스트가 깨어났다.
정신을 차린 아가레스트는 발레기우스의 소멸을 확인시켜 주었다. 무신과 검신이 힙을 합쳐 발레기우스를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는게 그녀의 증언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그녀는 이 후의 양상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은 마지막 격돌 때 일어난 충격에 의해 밖으로 튕겨져 나갔으며,그 뒤의 일은 알 수 없다는 게 아가레스트의 말이었다.
어쨌거나 정황상 발레기우스가 소 멸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판단한 수뇌부는 최고 정예들로 수색대를 꾸려 탑으로 들여보냈다.
이 인원에는 청룡왕 이정을 비롯하여 섬전창 여위량,무검 육지백,로열나이트 김상목, 그리고 전쟁 후반부에 경천동지할 실력을 내보인 소냐 등이 포함되었다.
남겨진 이들은 수색대가 희보(喜 報)를 가지고 되돌아오길 고대하며 초조한 기다림에 빠졌다.
“저…… 언니라고 불러도 되나요?”
들것에 누워 있던 아가레스트의 시선이 신소율의 얼굴로 향한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신소율은 창백한 얼굴에 멋쩍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안 되나요?”
“언니……. 좋네요. 저도 동생으로 생각할게요.”
그녀의 승낙이 떨어지자,조심스레 물어봤던 신소율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진다.
그 대화 이후,한동안 두 사람간에는 별다른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다. 아가레스트는 그녀대로 줄곧 침묵을 지켰고, 신소율은 그녀의 부러진 팔에 부목을 덧대고 붕대를 감는데 열중할 따름이었다.
아가레스트는 그런 신소율의 민낯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벌겋게 얼룩진 눈가가 개구리처럼 부어오른 그녀의 얼굴은 사무치는 슬픔을 억지로 꾹 눌러 참고 있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대놓고 엉엉 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필시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소리죽여 울음을 토한 것이리라.
비단 신소율뿐만이 아니다. 막사 밖에서 느껴지는 레그나토르 진영의 분위기는 닻을 내린 배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임유진의 전사.
마지막까지 퇴로를 지키다 결사대 와 함께 산화한 그녀의 죽음 때문이었다.
노구덕이 찬란하게 비차는 태양이 라면,임유진은 뒤에서 부드럽게 보듬어주는 달이었다. 그녀는 신소율에겐 없는 지도자로서의 역량과 소피아에게 부족한 인망이 있었으며, 데모나와는 정반대의 너그러움을 가진 여인이었다.
진실된 의미로 레그나토르의 안주인이라는 자리에 적합했던 여인.
그런 그녀의 죽음은 레그나토르의 주둔지 안팎의 공기를 깊게 침몰시 켰다.
‘그녀가 전사하다니……
자기도 모르게 진중의 슬픔에 전염 된 것일까. 아가레스트는 묘하게 복잡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같은 남자와 관계했다는 점을 제외 하면,임유진은 그녀와 별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이후로도 볼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 했다. 그녀는 이번 결전에서 목숨을 버릴 각오였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살아남았다. 그 남 자의 갑작스런 행동 때문이었다.
‘왜……’
왜 그는 자신을 내친 것일까?
스스로 자문을 해봤지만,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불현듯 퀸젤의 간곡한 목소리가 머 리를 울렸다.
‘그 사람은 네가 죽길 원치 않아.’ 가식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날 보낸 거야. 널 설득하라고. 어떻게든 여기 잡아두라고.’
그저 입에 발린 사탕발림인 줄 알았는데…….
‘거짓말쟁이는 나였어.’
복수라는 명목하에 주변을 전혀 살피지 않았던 자신이 바보였다. 사실은 그 사람과,소중한 아이들과 좀 더 다른 미래를 그릴 수 있었던 것 일지도 모른다.
아가레스트는 눈을 감았다. 까닭모를 물기로 뜨겁게 차오른 눈시울이 터져 아래로 흘러내렸다. 짙은 회한과 서러움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그녀의 격동을 느낀 신소율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급작스레 눈물을 보이는 아가레스트의 모습이 아무리 봐도 불길한 징조로만 보였다. 그녀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언니. 아저씨…… 살아있는 거 맞죠? 그렇다고 말해줘요. 네?”
“모르…… 겠어요……
눈가를 훔친 아가레스트는 간신히 쥐어짜낸 먹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은 그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노구덕의 생존? 현실적으로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검신이 노구덕을 죽이기 위 해 맹견처럼 달려드는 광경이었다.
아직 이빨이 살아있던 검신에 비 해,노구덕은 기력이 전부 쇠잔한 상태였다. 전력으로 임했어도 승부를 점칠 수 없는 상대인데,그런 상태라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그런데도 섣불리 단언할 수 없는 것은 그 남자가 노구덕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니까…… 혹시, 만에 하나라도.
몇 번이나 불사신처럼 역경을 헤쳐 온 남자다. 자연히 그런 기대를 할 수밖에 없다.
그때였다.
“대장님! 수색대가 지금 막 첨탑 밖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급작스럽게 들려온 고함이 막사안을 뒤흔들었다. 헐레벌떡이는 목소리는 신소율이 첨탑 주변의 동정을 살피라 내보냈던 부관이었다.
울먹이던 두 여인의 눈이 짧게 마주쳤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막사 밖으로 나가니,맞은편 막사에서 전신을 거의 붕대로 감다시피 한 남자가 수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오는게 보였다.
“두식 오빠!”
“소식은 들었다. 가자.”
말려도 듣지 않을 기세다. 빠르게 체념한 신소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행인원을 편성했다.
이미 주둔지 밖 첨탑 부근에는 수하들을 대동한 각 세력의 지휘관들 이 너도나도 몰려나와 있었다.
기수를 앞세워 양 떼처럼 운집한 그들 사이를 비집고 나온 신소율은 빠르게 눈을 굴리며 두리번거리다, 첨탑 입구 쪽에서 서서히 가까워지는 무리의 모습을 발견했다. 얼핏 소냐의 하얀 얼굴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한참 전에 들어간 수색대가 틀 림 없었다.
“소냐! 어떻게 됐어? 아저…… 씨…… 는……
높은 고음으로 시작됐던 물음이 급격히 사그라든 저음으로 끝맺었다. 물음표조차 내뱉지 못한 신소율은 말을 할 줄 모르는 아기처럼 입을 벙긋거리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일그러진 소냐의 안색은 어둑어둑하게 진 땅거미와 같은 색이었다. 가라앉기 직전의 배처럼 위태로운 표정의 그녀는, 별다른 말도 하지 않은 채 도망치듯 신소율을 지나쳐 버렸다.
얼어버린 신소율은 당황한 무리 속으로 사라지는 소냐를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옆에 선 이두식의 얼굴이 딱딱한 납빛으로 변하는 것도, 아가레스트의 다물린 입술에서 무서운 잇소리가 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은 오직 하나,로열나이트 김상목에게 의지하여 힘겹게 걸어오는 한 사내였다.
“저,정인 오빠?”
분가루를 뿌린 듯 새하얗게 변한 머리색은 둘째 치고,만지면 무너질 듯 푸석한 피부가 마치 딴 사람을 보는 듯하다.
첩탑에서 나타난 김정인은 그 힘겨 운 발걸음만큼이나 쇠약해져 있었다.
외형이 중요한 게 아니다. 신소율 의 관심사는 검신의 비참한 모습이 아니라,그가 ‘홀로’ 나타났다는데 쏠려 있었으니까.
“왜..오빠 혼자야?”
“신소율 대장,검신께선 우선 안정누군가 옆에서 잡아채며 만류했지만,신소율은 그것을 격하게 뿌리쳤다.
“왜 혼자냐고! 아,아저씨는……? 아저씨는 어디 갔어?”
인파가 터놓은 길을 향해 말없이 걸어가던 김정인은 그제야 힐끔 눈을 돌려 신소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각질인지 뭔지 모를 부스러기 가득한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죽었다.”
“뭐,뭐?”
“살아남은 건,나뿐이다.”
벌벌 떨리는 눈동자 속에 간신히 맺혀 있던 빛이 사라졌다. 무심히 답한 김정인이 잠시 정지한 발을 다시 뗐을 때,정신을 잃어버린 신소율은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