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90)
헌터클럽 785화
“아아아아아아악!”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 께,유리로 된 찻잔이 홱 허공을 날았다. 레이저 송구처럼 쭉쭉 뻗어나 간 유리잔은 이내 단단한 석벽에 머 리를 들이받으며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발작하듯 고함치며 유리잔을 내던 진 신소율은 거칠게 숨을 씨근덕거리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푸석 한 머리칼 사이로 엿보이는 그녀의 눈은 잔뜩 충혈되어 당장이라도 핏 물을 쏟아낼 듯했다.
한동안 그르륵 끓는 소리를 내며 두피를 박박 긁어대던 신소율은,갑자기 으헝! 하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았다. 잠시 후 머리를 박고 엎드린 그녀의 몸이 들썩 들썩 흔들리며 흐느껴 우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
실내에는 신소율 말고도 대여섯 명의 남녀가 더 있었다.
신소율의 바로 왼편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남자는 근위대장 이두식이고,그 맞은편에는 룬메이커 도일,다곤의 챔피언 글라우버 등, 블루드라군 심준호 등 레그나토르의 중진들이 자리했다.
지위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신소율에게 뒤지는 인물들이 아니었지만, 하나 같이 굳은 표정을 한 그들은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신경질을 부 리며 난리를 치는 신소율을 못 본 척했다.
신소율에게 꿀린다거나 위축된 것 이 아니라,그녀가 조울증에 걸린 것처럼 발광하는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개새끼들!”
죽은 듯이 테이블에 처박혀 있던 머리가 번쩍 쳐들렸다. 그렇잖아도 해쓱한 얼굴이 땀과 눈물로 홍건하 게 젖어 너저분해졌다.
이미 자기 꼬락서니를 돌아볼 정도의 여유도,이유도 잃어버렸다. 웬 종잇장 하나를 으스러뜨릴 듯이 쥔 그녀는 한 서린 안광을 번뜩이며 울분에 찬 으르렁거림을 토해냈다.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응? 도일 오빠,말해 봐요. 이거 모고르에서 온 거 맞지?”
“……맞다.”
침묵하던 도일의 턱끝이 살짝 흔들리자,또다시 테이블에서 쾅 내려찍 는 소리가 났다.
“와아,씨발……. 세상에 진짜 믿을 사람 하나 없네? 다른 개자식들은 몰라도 자하드,그 인간만은 도와줄 줄 알았는데. 아저씨가 죽자마자 이 렇게 뒤통수를 쳐? 갑자기 내부 상 태가 불안해져서 원병을 보내줄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하려면 좀 그럴듯 한 핑계를 대야지. 이게 대놓고 꺼 지라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아니,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냐고?”
“소율아……
“샌드웜 때문에 쑥대밭이 된 그 동 네를 재건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게 누군데! 태양왕인지 개뼉다귀인지를 잡아 죽이고 그놈을 위원직 시켜주고,족장 시켜준 게 누구냐고? 우리잖아! 아저씨가 그렇게 해줬잖아! 그럼 이제 갚아야 할 때 아냐? 그게 사람과 금수새끼의 차이라며! 내 가 잘못 알고 있었어?”
“일단 진정해라.”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여기 쌓인 쪼가리들 좀 봐. 응? 이걸 좀 보란 말야.”
신소율은 테이블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몇몇 서신들을 가리켰다. 남부 모고르를 포함하여 각지의 속주에서 보내진 서신이었다.
“죄다 거절이야. 응,모고르는 그래도 신사적이네. 다른 놈들은 이유도 없어. 그냥 꺼지래. 김정인 그 새끼가 오면 버선발로 뛰쳐나가 맞이하겠다는 거지. 불알 단 사내놈들이 나랑 안면 맞대고 얘기할 자신이 없으니까 이따위 종이쪼가리들을 보내 왔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진정해?”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잖냐.”
“오빠는 예상했었어? 히야,나는 몰랐네. 아주 처음 알았어. 우리나라에 이렇게 금수 새끼들이 많은 줄은 처음 알았다고.”
신소율의 쉰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한바탕 크게 한풀이를 하더니 기력이 딸리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애꿎은 책상을 노려보며 바득바득 이를 갈던 신소율은 별안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도 모자라 두 번,세 번…… 갑갑한 숨소리는 그 속이 진정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호흡곤란이 온 것처럼 연방 크게 숨을 내쉬던 신소율이 행위를 멈춘 것은 횟수가 열 번을 넘어섰을 때였다. 넓은 등받이에 쓰러지듯 몸을 기댄 그녀는 완전히 맥이 풀어져 녹초가 된 모습이었다.
“……미안해요. 오빠. 나, 갑자기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난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
“뭐,가끔은 되는대로 짜증도 부리 고 해야 직성이 풀리는 법이지.”
“그게 아니라요……. 휴,죄송합니 다. 여러분.”
부담을 덜어주려는 듯 가벼운 심준호의 말이었지만,받아들이는 당사자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얼른 의자에서 일어난 신소율은 벌겋게 풀어진 낯으로 허리를 숙였다.
한참 난리를 치더니 이제야 겨우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신소율을 본 사람 들은 그저 허허 웃기만 할 뿐이었다. 누구도 그녀를 책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들의 그녀의 입장이었다면,벌써 폭발해도 한참 전에 폭발했을 게 뻔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신소율은 정말로 용케 여기까지 버틴 것이었다.
그녀의 정신은 백천간두까지 몰려 있었다.
노구덕과 임유진을 잃은 그 전투에 서 누구보다 힘껏 몸 바쳐 싸웠던 그녀다. 그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 이 들이닥친 고난은 그녀로 하여금 어울리지도 바라지도 않는 감투를 쓰게 만들었다.
노구덕이 세운 레그나토르 왕조에 서 유일하게 제구실 가능한 어른이 그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사람이 없었다.
노구덕과 임유진은 죽었고,데모나 와 안세희는 혼수상태,아가레스트 는 실종,소피아는 배신…….
한승우와 함께 천만다행으로 살아 돌아온 임가희는 어딘가 나사가 빠져선 방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는 형편이고,소냐는 포로로 잡혔다.
자의 반,타의 반으로 국가 원수의 책임을 떠안게 된 신소율은 내우외환으로 기울어지는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매일 같이 동분서주했다.
뿐만 아니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데모나와 안세희의 상태를 살피는 한편,아이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간간이 얼굴을 비추며 챙겨주었다.
그녀가 하루에 소화하는 일과와 그로 인한 스트레스의 정도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허용하는 범위를 훌쩍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그런 나날을 두 달이 넘도록 지속 했으니…… 속된 말로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신소율이 겪은 정신 적,육체적 고통을 감안하면 이 정도 발작은 애교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 하루는 들어가서 푹 쉬도록 해라.”
“……부탁 좀 할게요.”
“염려 말고. 어서 들어가.”
안그래도 쓰러질 지경이었던 신소율은 이두식과 도일의 권유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궁지에 몰린 그녀의 정신은 더 이상 생각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비틀비틀 나선 신소율이 이두식의 도옴을 받아 집무실 밖으로 사라진 직후,글라우버의 무거운 목소리가 가 다시 좌중을 내리눌렀다.
“그럼 이제…… 검신을 어떻게 상 대해야할지 고민해 봐야겠구만.”
“ 음……..”
고민이라고 해봤자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다. 힘없이 머리를 맞댄 사 내들 사이를 한 바퀴 휘젓고 돈 바람은 이내 살짝 열린 문틈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새파란 풋내기들이 설칠 전장이 아니다.”
비산하는 불꽃과 화염이 어우러진 전장 속에서,호목을 부릅뜬 노장은 그렇게 말했다.
“왜죠? 저희도 싸울 수 있어요!”
“사령관은 나다. 애송이들아.”
목을 높여 항의하는 임가희와 한승우를 대하는 콜트레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이전까지 준엄하게 그들을 다루던 호랑이 사령관 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야 겨우 추상(秋霜)이 녹아 훈풍이 되었건만,그와 마주한 두 젊은이의 표정은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노장의 입가에 깃든 온기가 마치 다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의 단말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방은 포위되었고,아마 대부분은 죽거나 포로가 되겠지.”
“그러니까 더……!”
“아서라. 내 임무는 너희들을 하나 라도 더 이곳에서 탈출시키는 거다.”
“사령관님!”
“건방진 녀석들. 말대답하지 마라.
이런 전쟁에서 노장의 역할이란 바로 이런 거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늙은이의 역할을 빼앗지 마라.”
야멸차게 대꾸한 콜트레인은 뒤에 선 박승찬에게 눈길을 보냈다.
“부사령관,부탁하지.”
명예로운 죽음을 앞둔 전사에게 달 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박승찬은 간단히 군례로 마지막 예를 취했다.
“……건투를 빌겠습니다.”
“자네도. 짐덩이들을 맡겨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는 콜트레 인의 뒷모습. 그것이 기억에 각인된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후후. 검신이 오는군. 아니, 사신인가.”
아련히 울리는 너털웃음이 멀어지 면서,번쩍 눈이 뜨였다.
“헉!”
기겁하여 일어난 임가희는 정신 나 간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더 니,파리한 입술을 떨며 딱딱 이를 부딪쳤다.
해골처럼 퀭한 눈으로 떨고 있는 임가희의 몰골은 뼈에 살가죽만 간 신히 걸쳐 놓은 듯 야윈 채였다. 나 무 작대기처럼 말라버린 그녀의 얼굴은 이전의 발랄함이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임가희.”
멍청히 어둠을 응시하던 눈에 그제야 초점이 돌아왔다.
생기를 잃은 그녀의 손등을 부드러이 감싸 쥐는 굳은 손길.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그녀의 야윈 몸뚱이를 가만히 안아주는 체온은 한승우의 것이었다.
“스,승우 오빠……
비몽사몽이었던 임가희는 바로 옆에 한승우가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었다. 겨우 그의 존재를 알아차 린 그녀는 소리 내어 흐느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단지 사랑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 다. 수라장을 같이 헤쳐 나온 한승우는 그녀가 겪고 있는 지옥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이기도했다.
“그때,그때가…… 자꾸 자꾸만 떠 올라……. 흑……
“알아. 네 잘못이 아냐. 맘껏 울도 록 해.”
“흐아아아앙……………………………………………………………………………………………………………………………………………………………………………………………………………………………………………. 엄마”. 아-빠…….”
아이처럼 끅끅대며 목 놓아 우는 소녀의 모습은 비 맞은 새처럼 처량 했다. 그녀를 힘껏 감싼 한승우는 안타까운 손길로 연인의 머리를 어루만질 수밖에 없었다.
대전사 콜트레인이 전사하고,그를 대신해 패잔병들을 이끌던 박승찬도 그 뒤를 따랐다. 모두 악귀처럼 집요하게 병대의 뒤를 쫓아온 검신의 짓이었다.
일검에 박승찬의 목을 밴 검신은 흡사 추격전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포위망을 바짝 조이지도,느 슨하게 풀지도 않은 상태를 유지하며 만 하루 동안 가혹한 줄다리기를 벌였다.
물론,그 포위망 안에서 우왕좌왕 하는 사냥감 입장에서는 일분일초가 피가 마르는 고통이었다.
박승찬의 목이 베어지고,깃대에 걸어놓은 그 수급에 격분하여 노성을 터뜨린 황석문의 목이 떨어졌다. 검신의 최우선 타깃이었던 소피아는 콜트레인이 전사한 직후에 곧바로 사로잡혔으며,님로드는 혼전 와중에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임가희와 박승우가 살아나온 지옥은 그런 곳이었다. 그것도 그나마 두 사람이 일반 병졸로 종군했었던 덕분에 리베르타 지휘관들의 눈에 띄지 않은 덕분이 컸다.
하지만.
구사일생 끝에 겨우 살아 돌아온 임가희를 기다리고 있는 건 부친과 모친의 사망소식이었다.
이쯤 되면 망가지는 게 당연하다. 밤마다 악몽을 꾸며 비명을 지르는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임가희를 괴롭히는 심적 고통은 그 만큼이나 컸다.
한승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임가희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악몽은 나날이 그녀의 기력을 빨아먹고 있는데, 자신은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 외엔 별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승우 오빠, 부탁 하나만 할 게.”
“부탁?”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어 울던 임가희의 고개가 서서히 들어 올려진다. 시선을 내려 그녀와 눈을 맞춘 한승우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삼켰다.
이전까지의 무력한 탁기를 씻어내고,오싹할 정도로 새파란 독기를 내뿜는 그녀의 눈. 살의로 요동치는 임가희의 눈은 그의 가슴조차 졸일 만큼 무시무시했다.
“내 무장을 가져다 줘.”
그 말을 들은 한승우는 내막을 알아차렸다.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모 르겠지만,임가희는 곧 검신의 친정 군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들은게 틀림 없었다.
“너…… 싸울 생각이냐? 그 몸으로?”
“몸 만드는 데는 하루이틀이면 충분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그럼? 또 도망치라고? 그때처럼? 더 도망칠 데가 있기는 해?”
망국의 왕족이 온 대륙의 눈을 피 해 도망칠 만한 곳이라. 생각해보니 선뜻 떠오르는 장소는 없었다. 잠시 말을 멈춘 한승우는 기다랗게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애들은 어쩌고?”
“애들은 피신시켜야지. 하지만 난…… 난 싸울 거야.”
“그럼 나도 싸운다.”
이번엔 임가희의 말이 없어졌다. 굳은 얼굴로 답하는 한승우의 얼굴에 멍한 눈길을 던진 그녀는,한참 뒤에야 간신히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고마워.”
이어지는 깊은 포옹.
젊은 연인의 모습을 줄곧 말없이 지켜보던 잔바람은 또다시 창가를 통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