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135)
135화 – 약은 약장수에게
원치 않은 일로 시간을 허비했으니, 그 이상으로 일해서 만회해야 한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회사에 일은 끊이지 않았다. 큰일 치르고 좀 쉴라치면 또 일. 산 넘어 산.
이번엔 도시상선 손혁 회장이 예고했던 대로 캐나다 러쉬쉬핑과 뭔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손 회장으로부터 러쉬쉬핑이 우리에게 관심이 있다는 연락을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난 후, 결국 러쉬쉬핑에서 방문 의사가 있으니 협조해 달라는 이메일이 날아왔다.
당연히 봤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김태우 영업본부장을 찾아갔다.
“본부장님!”
“아이고, 놀래라. 또 무슨 일이야?”
“본부장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 자네 드디어 결혼을 하는 건가?”
이건 무슨 엄백호가 삼국통일하는 소리인가! 난데없는 반격에 당황해서 아무 말 못 하고 있으니, 김 본부장이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아무 말 없는 걸 보니까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 허허.”
“무슨 숭한 소문이 났길래 그러십니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허허. 하늘을 다시 봐야겠구만. 젊은 처자 4명이나 거느리고 통영 바닥 헤집고 다녔다고 소문이 자자하구만 말이야. 우리 유 이사, 아주 능력도 좋아. 뭐 몰몬교 신자라도 되는 건가?”
“몰몬교가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는 건 큰 오해입니다. 아니지, 아니지. 이런 얘기할 때가 아닌데…….”
이 통영! 이 쥐똥만 한 동네가 소문 한번 더럽게 빠르네. 아휴, 우리 영감들 귀에 들어갔으니 난 이제 얼마나 들들 볶일 것인가! 눈물이 앞을 가리네.
“뭐 얘기 들어보니까 자랑하려고 회사 작업복 입고 다녔다고 하더만. 아니, 누가 봐도 유 이사인 줄 알 텐데, 거기다 작업복까지 입고 다녔어? 역시 젊음이 좋긴 좋구만. 허허.”
“아니, 그건 옷이 없어서…….”
“허허. 시인하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넷 중에 하나를 골라야지. 넷 다 데리고 살 텐가?”
“물건도 아니고 뭘 고릅니까. 아니지, 이런 얘기할 때가 아닌데…….”
“살다 보니까 유 이사 당황하는 모습을 다 보네. 허허.”
내가 왜 그날 작업복을 입고 활보했을까, 아니, 그날 왜 나갔을까 등등 별의별 생각에 빠지느라 꿀을 잔뜩 먹은 신세가 됐다. 여길 찾아온 이유는 잊어버린 지 오래다.
“그건 그렇고, 뭐 일 있어서 찾아온 거 아닌가? 진짜로 연애하는 거 자랑하려고 온 건가?”
“아, 맞다. 그런데요, 저 연애하는 거 아닙니다.”
“허허. 그러면 그렇다고 믿어줘야지. 유 이사가 연애를 안 한다라……. 정 상무가 참 서운해 하겠어.”
“아, 진짜. 그 얘기는 그만하시고. 지금 러쉬쉬핑이 우리 회사를 방문한다는데 그깟 괴소문 따위가 중요하겠습니까!”
“그 메일 보고 온 거로구만?”
“우리 회사의 미래를 결정 짓는 중차대한 일이 생겼는데, 가만있으면 안 되죠.”
“러쉬쉬핑이 우리 LNG추진선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는 듣긴 했다만, 직접 찾아오겠다고 할 줄은 몰랐네.”
내 예상과 달리 김 본부장은 덤덤한 자세 그대로다. 이거 반격의 기회가 생겼어.
“우리 본부장님 너무 덤덤하신 것 아닙니까? 저는 캐파 꽉 찼는데 러쉬쉬핑이 발주하겠다고 하면 어쩌나 고민하고 있었는데요.”
“허허.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구만. 발주하면 좋은 일이지. 캐파가 꽉 찼다고 해도, 어떻게든 슬롯 만들어서 받아내야지.”
“그럼요! 우리의 역작인 LNG추진선을 세상에 알릴 좋은 기회이니 무조건 잡아야죠.”
“그건 그런데, 이거 전략적으로 잘 판단을 해야 해.”
“전략적으로요?”
“이제 이 년 뒤에 2만TEU급 컨테이너선이 나오잖아. 지금이야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 엄청난 용량과 성능을 가진 배가 나오면 게임방식이 완전 달라질 것이라고.”
“그건 그렇죠. 머스트의 2만TEU급이 위력을 발휘하면 할수록 우리를 찾는 손길이 많아지겠죠.”
“자네는 2만TEU급 컨테이너선이 떠오른다면, 그게 용량 때문일 것 같은가, 아니면 다른 요인 때문일 것 같은가?”
이건 또 무슨 선문답인가 싶다. 조선업계의 음유시인과 대화 한번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해.
“1만3000TEU급 이상은 경제성이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 지론이었는데, 머스트와 우리가 그걸 깼죠. 그런 점에서 보자면 경제성을 확보한 큰 적재용량이 주효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 우리가 연비를 대폭 개선한 설계를 내놓았으니까 2만TEU급도 가능해졌다는 것이지. 친환경이니 저탄소 배출이니 이런 건 뭐 의미가 없다 이거야.”
“네, 그렇죠. 설계로는 3만TEU급도 가능하지만, 경제성을 따지자면 현재까지는 2만TEU급이 최선입니다. 다른 컨테이너선사들도 지금이야 눈치를 보고 있지만, 우리의 작품이 나오면 메가 컨테이너선 발주에 뛰어들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지, 그렇지. 자, 여기서 생각해 보자고. 우리가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말이야.”
LNG추진선 얘기하자는데,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오늘 뭔가 계속 말리는 기분이네. 그래도 일단 고개 끄덕이며 경청하자고.
“자네 표정이 영 뜨뜻미지근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네, 좀…….”
“자, 봐봐. 우리가 기껏 힘들게 2만TEU급을 런칭했고, 2년 뒤에 첫 호선을 인도할 예정이란 말이야.”
“네, 그렇죠.”
“그런데 거기서 LNG추진 컨테이너선을 꺼내들면 영업전략 잡기가 힘들어진다는 거지. 다들 2만TEU급이나 그 이상을 바라볼 텐데, LNG추진선? 그것도 가격까지 비싼 걸 팔겠다고 나서는 것이 괜찮은 전략이냐 이거지.”
후후.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네. 미래를 알고 있는 나와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김 본부장의 차이랄까? 이거 또 붙잡고 한참을 가르쳐야겠구만.
“그러니까 본부장님 말씀은 메가 컨테이너선이 자리 잡는 것이 우선이다, 이 말씀이죠?”
“그렇지. LNG추진선? 뭐 컨테이너선뿐만이 아니겠지만, 보급이 된다면 주력은 컨테이너선이 되지 않겠어?”
“아무래도 컨테이너선일 때 효과가 클 테니까요.”
“그래서 문제라는 것이지. 자 봐봐. 가격도 30% 정도 더 비싸, LNG탱크 설치하느라 적재용량도 5000TEU 정도 잡아먹어. 어떤 선주가 발주를 하겠느냐 말이지. 벌크선이나 탱커는 상관없는데, 컨테이너선은 컨테이너를 그만큼 못 실으니 손해가 커.”
“본부장님 지적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도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래? 허허. 유 이사가 또 무슨 예언을 할지 한 번 들어봅시다.”
예언은 예언이지만, 그게 사실이 된다는 것도 알아줬으면 좋겠네.
LNG추진선, 그거 비싸다. 추진시스템도 비싸고, 연료통도 비싸고, 작업도 빡세서 비싸다.
그냥 비싸기만 하느냐? 이름이 LNG추진선이지만, 사실은 LNG와 벙커씨유를 함께 쓰는 이중연료 추진선이다. 연료 탱크가 2개나 들어가야 하니 공간도 많이 차지한다.
여러모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그런데도 내가 왜 목숨을 거느냐? 앞으론 그 선박 아니면 답이 없으니까.
환경이 돈이 된다고 소리치고 다닌 이유가 다 있다 이거지.
“본부장님은 IMO의 환경규제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거?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지. 뭐 말로야 강하게 규제한다고 하는데, 말처럼 쉬운 일인가? IMO가 마폴 VI로 환경규제 들어간다고 예고하긴 했는데,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야.”
“NOx 규제는 내년부터, SOx 규제는 내후년부터 티어2가 적용되는데요?”
“핵심은 티어3이지. NOx야 저감장치나 SCR 달면 뭐 어찌어찌 해결되지만, 진짜 빡센 건 SOx 규제잖아?”
“네, 맞습니다. 티어2야 황 함유량 3.5% 아래로 낮추는 것이라 큰 문제가 없지만, 2015년부터는 진짜 빡세게 규제 들어갑니다.”
“2015년? 2020년 아니고?”
“2015년부터 ECA지역 규제 들어가잖아요. 0.1% 이하로 낮추는 거 말이에요.”
“그거야 뭐 큰 의미가 있겠나. ECA지역이라고 해 봐야 작은 배들만 다니는 곳인데 뭐. 어차피 우리 주력은 대형선 아닌가?”
“그럼 2020년 SOx 규제 티어3 발효는요? 모든 해상에서 황 함유량 0.5%로 낮춰야 합니다.”
“허허. 2020년이면 10년이나 남았어. 그거 0.5% 이하로 맞추려면 기존 선박들 다 없애거나 개조해야 한다는 건데, 그게 과연 실현될까? BWTS협약 봐봐. 2004년에 만들어졌는데, 아직도 발효가 안 되고 있잖아.”
“전 무조건 된다고 봅니다. NOx, SOx 티어3는 물론이고, BWTS협약도 5년 내로 발효 조건 충족할 겁니다.”
“허허. 그렇게 예언을 하시겠다? 딴 건 모르겠고, SOx 티어3를 맞추려면 LNG추진선이 제일 좋은 해법인 것은 분명해. 그런데 말이야. 지금 금융위기로 다들 죽어가는 마당에 환경규제까지 된다? 그걸 해운 쪽에서 받아들일까?”
“원래 규제는 어려울 때 먹히기 쉬운 법입니다. 잘 나갈 때 규제 들어가면 반발이 더 심하죠. 이렇게 어려울 때는 규제를 사업 기회로 생각하는 해운사가 나오는 법이고, 그걸로 마케팅 성공하면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이지 않겠습니까?”
“뭐 좋아. 그렇다고 치자고. 자네가 뭐 보통 용한 점쟁이가 아니니까. 허허. 그런데 배들이 대형화로 나간다고 해놓고, LNG추진선이 먹히겠느냐 이거지. LNG선이야 어차피 기화되는 가스를 연료로 하니까 상관없지만, 컨테이너선은 적재용량 감소를 해결 못 하면……, 쉽지 않아.”
LNG추진선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는 김 본부장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내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리 연구소에 선물을 갖다 바치는 것 말이다.
내일의 체력을 오늘로 끌어다 준다는 마법의 에너지 드링크. 우리 연구원들 그거 부지런히 마시면서 기술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이 말이야.
“우리 연구원들이 월급 받아서 고스톱이나 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적재용량 감소를 500TEU 정도로 줄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 것이구요.”
“500TEU도 꽤 크긴 하지만, 그 정도로만 좁혀도 할만하지. 그래서 자네 말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
“전 늘 토끼 두 마리씩 잡는 걸 좋아했습니다. 한 마리로는 성에 차지 않더라구요.”
“허허허.”
2010년을 사는 사람들은 10년 뒤에 IMO의 환경규제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그거 정말 강력했다. 해양플랜트 건드렸다가 뒈질 뻔했던 빅3가 환경규제 덕에 되살아났을 정도로 말이다.
환경규제에 대응하려면 LNG나 LPG로 선박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선박을 제대로 만들 수 있는 곳은 빅3뿐이었다. 중국도 가능했지만, 든든한 차이나 리스크 덕에 제날짜에 만들어내질 못했다.
세계 3위 컨테이너선사가 LNG추진선으로 기선을 제압하겠다며 용감하게 중국에 LNG추진 컨테이너선을 대거 발주했다. 그 결과는? 예정보다 무려 2년이나 지나서야 겨우 인수했다. 유럽에서 날고 긴다는 엔지니어들이 다 달라붙었어도 중국의 기술력을 어찌하지 못했다.
당연히 주문은 빅3에 몰렸고, 나는 그걸 보면서 우리 회사가 살아남았다면 얼마나 좋았을지를 생각은커녕……. 빚더미 속에서 삶의 의욕조차 포기하고 있었지 뭐.
전생은 전생일 뿐. 이번 생은 잘 하자고.
“그래서 해운사들도 본부장님처럼 시기상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저처럼 당장 적용 가능한 솔루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메가 컨테이너선은 그것대로, LNG선도 그것대로 팔고 다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네 말처럼 되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언제 제 말처럼 안 된 적이 있었습니까? 저 이래 봬도 통영의 거북도사로 불립니다.”
“허허. 그렇지, 그렇지.”
“러쉬쉬핑이……. 뭐 당장 발주하겠다고 하진 않겠지만, 본부장님께서 약을 든든히 잘 쳐주셔야 한다는 것이죠.”
“허허. 약은 약장수가 팔아야지. 이제 막 발주된 메가 컨테이너선이랑 LNG추진선을 동시에 팔아보란 소리 아닌가? 이거 약 잘못 팔았다가 식약청 끌려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제가 옆에서 춤추는 원숭이 노릇할 테니까 본부장님께서 약장수 역할 잘 좀 해 주시죠.”
“허허. 그래, 뭐든 해 보자고. 안 그래도 방문일정 조율하자고 했는데, 답 메일 보내줘야겠구만.”
그렇게 러쉬쉬핑의 방문이 확정됐다.
그 사람들 오기 전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볶을 사람 볶아놔야겠구만. 우리 정 전무, 내가 요즘 안 볶아서 많이 섭섭해할지도 몰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내가 연애를 하느니 어쩌니 하는 괴소문 퍼트리고 다니기 전에 단도리 좀 쳐놔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