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156)
156화 – 유 이사, 자네 제정신인가?
한 번 호구는 영원한 호구, 아니지, 아니지. 구관이 명관이라고 했다.
에코십에 관심 많다던 선주들도 안 되고, 러쉬쉬핑도 안 되고, 기댈 곳은 호구밖에 없다. 이게 내 결론이다.
우리 회사가 잘 나갈 수 있도록 호구 노릇을 제대로 해 준 마이 글로벌 프렌드에게 값비싼 국제전화를 걸었다.
“오! 마이 프렌드 비아! 잘 있었습니까?”
-오우! 미스터 유! 너무 오랜만입니다. 이거 많이 섭섭합니다.
“섭섭하다니요? 그거 제가 늘 하던 소리 아닙니까?”
-우리 얼굴 본 지가 반년이 다 돼 가는데, 어떻게 한 번을 안 올 수 있습니까? 고객 관리 안 합니까? 이제 볼 장 다 봤다 이겁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천하의 스파이더그룹이 고작 84척만 발주하고 땡이겠습니까? 아직 볼 장 많이 남았고, 아시다시피 저는 밤이고 낮이고 매일 같이 우리 비아 브라더 생각만 하고 삽니다.”
분위기 좋다. 모나코에서 우리 회사에 줄 돈 버느라 정신없는 스파이더그룹의 움베르토 비아 회장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했다.
처음 발주한 2척을 인도받아 열심히 마케팅에 열 올리고 있는 스파이더그룹이 내 아쉬움을 달래줄 것 같은 기대감을 심어준다.
이미 41억 달러에 달하는 84척이나 발주해 여력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스파이더그룹이라면 우리 회사가 처한 위기 아닌 위기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비빌 구석 같으니 마구 비벼보자.
-유일조선의 소식에 늘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LNG선 수주도 성공했더군요? LNG선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게 다 비아 브라더 덕분입니다.”
-제 덕분이라니요?
“스파이더그룹이 앞으로 가스운송 시장도 진출할 생각인 걸 알고 있습니다. 스파이더그룹에 검증된 LNG선과 LPG선을 공급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고 봐야죠.”
-하하. 늘 그렇지만, 이번에도 우리한테 돈 맡겨놓은 사람처럼 구는군요. 그나저나 우리가 가스 시장에 진출할 것은 어찌 알았습니까? 아! 아니다. 그걸 물어본 제 잘못입니다.
“그렇죠. 제가 스파이더그룹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알면서 그런 걸 물어봅니까?”
-하하하. 미스터 유와 대화하면 아이돌이 된 기분이라니까요.
이 정도로 서로 물고 빨았으니, 아쉬운 얘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머뭇거리게 된다. 그동안 개허풍 털어가며 당당하게 나왔는데, 우는 소리하려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계속 하나마나한 소리나 할 테냐! 지금 13척이 날아갔다고! 스트레스 때문에 변비에 시달리고 있다고!
장 건강을 위해 용기를 냈다. 해야 할 말은 해야지.
“우리 비아 브라더. 스파이더그룹은 순풍에 돛 단 듯 잘 나가고 있죠?”
-우리 회사 말입니까? 하하. 지금 아주 죽겠습니다.
“죽겠다니요? 그 잘 나가는 스파이더그룹이 왜 죽습니까?”
-유일조선에 줄 돈 마련하느라 죽겠다고요. 하하. 내년 5월부터 용골거치식 줄줄이 들어가지 않습니까? 선수금 안 늦게 전달하려면 부지런히 벌어야죠. 지금 폐지도 줍고 다닐 판입니다.
어라, 젠장할. 어째 대답이 불안한데…….
“폐지 주워 빌딩 세웠다는 사람 많더군요. 비아 브라더도 폐지 열심히 줍길 바라겠습니다.”
-하하. 그래야지요.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전화했습니까? 혹시 모나코 방문하려고 일정 조율할 생각입니까?
“아니, 뭐. 그건 아니고. 조만간에 한 번 가긴 할 겁니다.”
-언제든 환영입니다. 그래서 그게 아니고, 무슨 일?
“저, 혹시. 2012년 납기로 배 안 필요합니까?”
-2012년 납기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2011년 10월부터 2012년 3월까지 슬롯이 생겼는데, 선박 좋아하는 우리 비아 브라더가 혹시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2011년이면 내년 말입니까? 어휴, 너무 다급한 거 아닙니까? 근데 계약 취소라도 생겼습니까? 5개월 동안 슬롯이 빌 정도라면 꽤 많은 양일 것 같은데요.
이 예리한 놈. 대번에 알아차리는구나. 그렇다면 읍소전략으로 갈 수밖에 없군. 눈물 흘릴 준비하자고.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탠저린 펀드 몇 개가 청산되는 바람에 슬롯에 여유가 좀 생겼습니다. 뭐, 우리 역량이라면 금방 채울 수 있긴 한데, 그래도 스파이더그룹에 먼저 얘기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어서요.”
-허허. 미스터 유가 이리 아쉬운 소리를 다 할 때가 있습니까? 여기가 금성인가 싶습니다.
“그건 무슨 4차원 컨셉의 아이돌 같은 소리입니까?”
-금성은 자전 방향이 우리랑 반대라서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
개새끼. 그만 후벼 파라. 꼭 눈물 짜길 바라는 것 같잖아.
“그만 놀리고, 대답을 해 주시죠. 그래서 배가 필요합니까, 안 필요합니까?”
-유일조선이 건조하는 배라면 언제든 대환영이죠!
“그래요? 그래서요!”
-언제든 오케이긴 한데…….
“아 쫌! 뜸들이지 말고 바로 얘기합시다.”
-하하. 아시다시피 우리가 저번에 좀 무리하지 않았습니까? 허세 부린다고 84척이나 발주하느라고 좀 쪼들립니다.
“84척 건조자금은 다 확보한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죠. 근데 그 코리아 수출입은행, 이것들이 우리 재무상태를 계속 점검하고 있어요.
“재무상태를 점검한다구요?”
-네, 자기들이 원하는 상태가 유지돼야 대출을 주겠다고 하니, 우리야 뭐 별수 있겠습니까? 당분간은 엎드려 지내야죠. 요즘은 변기물도 모아서 내릴 정도로 근검절약하며 산답니다. 하하.
“우리 비아 브라더 좀 쑤셔서 어떻게 합니까? 뭐가 됐건, 비아 브라더가 우리 회사를 생각해주는 마음을 잘 알아들었습니다. 우리도 뭐, 자체 자금으로 선박 건조해서 나중에 팔면 그만인데, 스파이더그룹이 계속 생각나서 연락 드렸습니다.”
-하하. 미스터 유는 배에 칼이 들어와도 갑빠로 버티는 스타일이 맞군요. 제가 도움이 안 돼서 유감입니다. 넉넉잡고 2년만 기다려 보세요. 그때쯤이면 다시 활개를 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활개 치기 전에 비아 브라더와 대포 한잔 해야겠습니다. 여행하기 좋은 날씨 되면 한 번 찾아뵙죠.”
-다시 얘기하지만, 언제든 환영입니다. 참! 탠저린 펀드 청산해서 계약취소 됐다는 건 비밀로 해 두겠습니다. 그런 얘기는 퍼져봐야 좋을 것이 없죠.
배려 고맙다. 근데 왜 이리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거냐.
마지막 보루가 무너졌다는 느낌. 그거 참 의욕을 떨어트린다. 닭갈비 냄비에 눌어붙은 볶음밥이 된 기분이랄까. 치즈 늘어나는 이 기분, 참 흐물흐물하네.
갑자기 등이 간지럽다. 머리카락이라도 들어간 것인지 원. 아 나, 효자손도 안 보여! 이 극한의 상황. 어정쩡한 자세로 책상 모서리를 비비며 헤쳐 나가는데…….
머리가 번쩍했다. 효자손 없다고 등 못 긁겠어?
비아 회장한테 허세 부린다고 아무 말이나 지껄였던 것이 내 뇌리를 다시 강타했다. 자체 자금으로 선박 건조해서 나중에 팔면 그만이라는 말.
그래! 이참에 도박 한번 거하게 해 보자. 어차피, 미친놈 취급 받은 지 오래다. 한 번 더 미친다고 달라질 것 없다.
등을 마저 긁고 나서 생각을 정리했다.
현생에서 유연성으로 산 지 4년이 다 돼 간다. 당연히 전생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수밖에 없다. 현생에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월의 야속함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난 기억해 내야 한다. 미친 짓을 하려면 기억해야 해. 그게 내 밑천이고, 난 그걸로 도박을 할 테니까.
도박 전에 판이 제대로 설 것인지 확인해야겠어. 도박판의 시작은 생산기술본부이다.
“전무님!”
정한호 전무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 사람이 설계와 생산으로 날 뒷받침해줘야 하거든.
정 전무방에는 때마침 생산본부장인 박근홍 상무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 오늘 셋이서 이 방을 너구리굴로 만들어보자고.
“유 이사, 어서 와. 목소리 높이면서 온 걸 보니까 일이 잘 해결됐나 봐?”
“해결됐으면 좋겠네요. 발주 가뭄이 여전한데, 급하게 13척을 채울 선주를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더라구요. 김태우 본부장님도 사방팔방 뛰어다니는데, 뭐 답이 없습니다.”
“허, 참. 그나마 설계 중에 나가리됐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갑갑한 일이구만.”
정 전무, 박 상무도 한껏 풀이 죽은 표정이다.
생산기술본부가 일정에 따라 설계와 기자재 준비를 맞춰서 넘기면, 생산본부는 그걸 받아서 죽어라 배 지어서 내보낸다. 그럼 다시 생산기술본부가 제대로 건조했는지 시험과 시운전을 진행해 고객에서 인도한다.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하는 부서들인 것이다. 형님 역할인 생산기술본부장이 풀이 죽으면, 동생인 생산본부장도 풀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전무님이야 다른 건 준비하면 되지만, 우리는 그냥 놀아야 해요. 하청 애들 다 내보내야겠네. 그거 얼마나 껄끄러운 일인지 잘 아시죠?”
“아이, 알지. 그래도 어쩌겠나, 회사에 일이 없다는데. 뭐, 잔업도 줄이고 야드 정비도 하면서 그렇게 보내야지.”
“이게 괜한 소문나면 골치 아파진다니까요. 뭐 계약취소가 일상다반사라고 해도, 야드에서는 일 하나 사라지면 사기가 뚝뚝 떨어집니다.”
“내가 그 일을 30년을 했는데, 당연히 잘 알지. 그래도 다른 조선소처럼 일 없어서 문 닫니 마니 그런 상황은 아니니까 그걸 위안 삼아야지.”
“에휴.”
두 본부장의 우울한 대화를 듣고 있자니, 나까지 우울해지는 기분이다. 선박 13척의 건조계약이 취소됐고, 새 주인 찾기도 무위로 돌아간 상황에서 나올 대화로는 아주 제격이다. 고위층도 이러니 직원들 사기는 얼마나 떨어지겠나.
이제부터 이 상황을 타개해 보겠어.
“전무님!”
“바로 앞에 있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부르고 그래? 뭐 좋은 수라도 있어?”
“이번에 취소된 물량 중에 인도시기가 가장 빠른 것이 내년 10월인데, 지금 새로 수주하면 일정 맞출 수 있나요?”
“또 무슨 꿍꿍이인 줄 모르겠지만, 내년 10월이면 타이트하긴 해도 맞추기는 어렵진 않지. 근데 여기서 한두 달 지연되면 그건 장담 못 해.”
“그 말인즉, 지금 수주영업해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릴 테니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수주해도 납기 맞추기가 어렵다는 뜻이죠?”
“뭐, 그렇지. 13척이 내년 3월까지 나가는 스케줄이라 빠듯하긴 하지. 또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래? 어째 불안하면서도 기대가 되는 건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네. 허허.”
밥을 지을 땐 뜸들이는 것이 중요하지. 뜸 좀 들이자고.
“만약에 말이죠. 13척을 LNG선 표준선형으로 대체한다면 몇 대가 나올까요?”
“으응? LNG선?”
“네. 17만4000cbm급이 제일 선호하는 선형이니까 그걸로 대체한다고 했을 때요.”
정 전무가 박 상무와 눈을 맞추더니, 둘 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영문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그걸 알면 도박이라고 할 수 없거든. 내가 진짜 미치광이 노릇 제대로 해 보겠어.
“글쎄. 뭐 따져봐야겠지만, 그걸 LNG선으로 대체한다고 하면, 으음……. 박 상무, 그 몇 대나 될 것 같아?”
“17만4000짜리면……. 8~9척 정도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아니다. LNG선은 짓는데 시간이 걸리니까 내년 말은 어려울 것이고……. 그럼 한 7척 정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유 이사, 들었지? 이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시원하게 얘기해 봐.”
LNG선 7척. 럭키세븐이라 도박하기 딱 좋군. 자, 이제 패를 돌려보겠습니다.
“제가 LNG선을 얘기한 이유가 그나마 시황이 괜찮은 선종이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LNG선을 받아오겠다는 소리야? 난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적어도 내후년에는 LNG선 시황이 크게 개선될 것으로 보고, 우리가 자체적으로 LNG선을 건조해 버리는 건 어떨까요?”
“응?”
“자가발주하겠다구요. 설계야 도시상선 LNG선 걸로 활용하면 되니까 생산 쪽에서 건조만 해 주시면 될 것 같은데요.”
정 전무가 박 상무와 다시 눈을 마주치더니, 이번엔 화통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유 이사 이 녀석이 드디어 미쳐버렸다는 듯이.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가족오락관이라도 하는 것처럼 셋이 동시에 웃었다. 웃음 뒤에 어떤 말이 나올지 잘 알고 있다.
“유 이사, 자네 제정신인가?”
“아주 멀쩡합니다.”
“그래? 그런데 그런 소리를 해? 자가발주를 하자고? 그것도 LNG선을? 허허.”
그러고 보니까 살짝 나사가 풀린 것도 같네요. 먹고살려면 나사가 풀리기도 해야 하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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