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155)
155화 – 채워야 한다
독일 탠저린 펀드의 파산으로 계약 물량 중 13척이 사라지게 생겼다는 화끈한 소식을 접했다.
흐름과 분위기. 이성의 영역이 아니지만, 이 바닥에서는 그런 샤머니즘적 인식도 꽤 중요하게 작용한다.
‘유일조선이 이번에 계약취소 당했데. 물량이 꽤 많다던데?’
‘아, 그래? 그럼 거기다 발주했다가 나중에 큰일날 수도 있겠네?’
‘그래서 이 바닥은 안전빵이 최고라니까. 빅3만한 곳이 없어.’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시추에이션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 전에 빨리 수습해야 한다.
일단 아버지에게 보고를 올려야지. 아버지 표정도 초여름 따사로운 날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허, 이거 참. 바람 잘 날이 없구나.”
“김태우 본부장님께서 어떻게든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영업망 총가동하겠다고 했으니,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려보시죠.”
“리먼인지 리만인지 그거 망하기 전이라면 이런 걱정도 안 해. 지금 있는 발주도 없애는 판에 새 주인 찾기가 어디 쉬운 일이냐? 우리야 머스트랑 스파이더 걔네들이 대량으로 일거리를 줬으니 한숨 돌린 거야. 걔네들 아니었으면 우리도 지금 손가락 빨고 있을 상황이라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2012년 일정으로 배가 필요한 선주들은 어딘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허허, 거참 큰일이네. 뭐 이 바닥이 그래. 매번 일이 꽉꽉 차리라 기대하는 건 사치라 이 말이지. 그래도 우리 사정은 그게 아니라고. 2014년까지 일감 꽉 찬 걸로 자금 운용계획 세워놓고 있는데, 중간에 13척이 빠져 봐. 어떻게 되겠어?”
돈 문제로 골머리 앓을 어머니가 떠올랐다.
조선사의 자금관리, 그거 보통 일이 아니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경우도 많고, 은행 앞에서 돈 빌려달라며 단식투쟁도 해야 한다. 장부상으로는 흑자이지만, 수중에 돈이 없을 수도 있고, 뭐 별의별 일이 다 생긴다.
그런데 13척 건조로 들어올 돈이 사라진다? 흰머리 늘어날 어머니께 염색약 필히 사드려야겠다.
돈이야 넘쳐나는 내 돈으로 메워놓으면 그만이긴 하다. 그래도 치트키도 한두 번이어야지. 회사가 밑 빠진 독이 되면 그깟 치트키가 다 무슨 소용이랴.
“죄송합니다. 계약관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매일같이 점검하고 체크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고. 그래서 13척 다 해서 얼마짜리야?”
“VLCC 4척, 케이프사이즈 3척, 6800TEU급 컨테이너선 4척, 아프라막스 2척으로 총 13억2300만 달러입니다. 금융위기 직전에 수주한 것들이라 선가가 아주 좋습니다. 그래서 더 속이 쓰리네요.”
“계약금으로 20% 받았으니까, 2억6500만 불 정도는 챙기긴 했구나. 뭐 그래도 챙긴 게 있으니 대타만 잘 찾으면 뭐 일도 아니긴 하겠어.”
“그게…….”
“응? 왜? 그쪽 잘못으로 계약 파기하면 우리가 선수금 다 먹는 거 아니야?”
“본부장님 말씀으로는 탠저린 펀드 측에서 선수금 반환이 가능하다는 계약조항이 있다고 주장한다네요.”
“허허. 독일놈 새끼들. 죽어도 곱게 죽지 않겠다 이 말이지? 그래서 뭐 소송이라도 걸겠다 이거야?”
“최악의 상황으로는 그렇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선수금 반환을 놓고 소송해 봐야 우리한테 좋은 일이 없으니, 서로 합의해서 적당히 돌려주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우리 같은 회사가 선주랑 소송 붙었다는 소문나서 좋을 게 없긴 하지. 이거 참. 골치 아프게 생겼구나.”
“이런 위기가 언젠가는 닥칠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예상하면 뭐 해? 우리가 뭐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말이지. 아무래도 나도 연락 한 번 쫘악 돌려야겠구나. 필요하면 읍소라도 해야지. 이거 까딱 잘못했다가는 몇 달 놀게 생겼어.”
“그 골프 친구분들께 꼭 연락 돌리세요. 그렇게 받아먹어놓고 이제 와서 모른 체하면 양심이 없는 겁니다.”
“허허. 거 참.”
내기골프로 아버지 돈을 그리 따갔으니 이젠 은혜 갚은 호랑이가 되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일은 그리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김태우 본부장이 침울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유 이사. 우리한테 발주 준 탠저린 펀드들 말이야. 결국 청산 결정됐네. 하아.”
“결국 예상대로 흘러갔네요. 선수금은 어떻게 처리됩니까?”
“그쪽에서 그 문제로 협의를 해보자는데, 말이 협의지, 선수금 돌려달라는 의미 아니겠나? 뭐, 최대한 막아봐야지.”
“행여나 서로 감정 상해서 소송으로 가지 않도록 해 주세요.”
“소송 가면 우리한테 좋을 게 없어. 대화로 끝내야지. 그건 그렇고, 취소된 물량들 대체할 것도 서둘러 알아보겠네. 하아, 이거 참. 잘 나가다가 왜 이러는지 몰라.”
침울한 표정이 김 본부장만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표정도 밝지 않았다.
“허허, 이놈 새끼들. 내 돈 따먹을 땐 그리 좋아하더니, 도와달라는 말에 그리 정색을 하데?”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신조선 발주할 타이밍도 아니고 여력도 없겠죠.”
“아니, 그걸 누가 몰라! 그래도 말이라도 곱게 해야지! 아쉬울 때만 형님 찾더니……. 에잇.”
아버지는 일이 잘 안 풀린 걸 나한테 분풀이를 했다. 그래, 뭐 하나뿐인 자식이 다 받아들여야지.
그나저나 13척, 그걸 어디서 메운담? 아후, 짜증나. 오늘 저녁은 매운 닭발이다.
***
채워야 한다. 일감을 채워야 해.
스케줄에 맞춰서 일을 척척 해 가야 하는데, 중간에 스케줄이 덤벙 비어버렸다? 매출은 뚝뚝 떨어지고, 직원들은 강제휴가 들어가는 거지.
그러니까 채워야 한다고.
그런데 여건이 너무 안 좋다. 납품 예정일은 내년 말부터 내후년 봄까지.
아직 한참이 남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 바닥에서는 매우 촉박한 일정이다. 시황도 안 좋아서 급하게 배가 필요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아, 진짜 짜증나네. 스트레스 풀겠다고 요 며칠 매운맛을 찾았다가, 진짜 불맛을 봤다. 어찌나 화끈거리던지……. 입으로 먹고, 변기에 화풀이를 하는 꼴이랄까. 진짜 힘들었다.
계획했던 것들이 딱딱 맞아 떨어져야 유일조선 세계 1위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솔직히 순탄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내가 회귀 할아비를 했다 쳐도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겠는가.
당연히 넘어지고 쓰러지고 고꾸라지는 순간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근데 막상 그런 일이 닥치니까 부글부글하네.
탠저린 펀드 파산으로 사라진 13척. 그거 어떻게 채우나. 연간 건조물량의 15~20%에 달하는 물량인데…….
매운맛으로 고생하고 나서 먹는 걸 조심했더니, 또다시 변비가 찾아왔다. 그 정도로 골머리를 앓았다. 그럼에도 딱히 마땅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떠오르는 생각은 캐나다 러쉬쉬핑 찾아가서 빈 슬롯 생겼으니까 LNG추진 컨테이너선 발주해 달라고 사정하는 것뿐.
김태우 영업본부장도 딱히 다르지 않았다.
“본부장님, 어떻게 해결 실마리를 찾으셨습니까?”
“아휴, 거 참. 아니, 내가 말이야. 우리 에코십에 관심 가졌던 업체들한테 싹 연락을 돌렸는데…….”
“반응이 별론가요?”
“에휴. 그 전까지는 슬롯 생기면 바로 연락 달라고 그 성화더니, 상황이 이러니까 안면몰수하더라니까. 그렇다고 내가 뭐라 할 수도 없고……. 아, 이거 쉽지 않네.”
“파산하는 탠저린 펀드들이 많아져서 걔네들이 보유한 선박들이 중고시장에 똥값으로 풀릴 거 아닙니까? 시황도 안 좋은데, 당연히 중고선으로 생각하겠죠. 역대 최저로 떨어진 뱃값을 생각하면 제아무리 에코십이라도 쉽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이 참 매정해. 뭐 말로는 다음에 꼭 발주하겠다고 하는데, 말로야 무슨 소리를 못 하겠나.”
“혹시 러쉬쉬핑도 연락해 보셨습니까? 전에 왔을 때 피더 컨테이너선 얘기했었는데,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받으면 낫지 않을까 싶은데요.”
“러쉬쉬핑이라……. 거기도 이메일 보내놓긴 했는데…….”
“그래서요? 뭐라고 답변이 왔습니까?”
“아직. 우리가 뭐, 돈 맡겨놓은 것마냥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으니, 답변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그럼 아직 희망이 있는 거네요?”
“허허. 뭐 일단 기다려보자고. 이거 참, 13척이 한 번에 빠져버렸으니, 골치 아프네, 쩝.”
“그래도 건조 중에 취소된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야죠. 블록 다 만들어놓고, 진수까지 해 놨는데 취소됐으면……, 아휴, 끔찍합니다.”
“그건 그렇지만…….”
시원찮은 대답. 나도, 본부장도 알고 있다. 갑자기 빠진 자리에 새로운 계약을 채워 넣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란 것을.
하나에 몇백억, 몇천억 하는 배를 짓는 일은 이리 긴장의 연속이다.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이랄까? 다 완공해서 넘기고 무사히 잔금 받을 때까지 안심할 수 없는 이 노가다판. 이러니 변비환자가 속출할 수밖에 없지.
마지막 희망인 러쉬쉬핑의 답변을 기다리는 그 며칠이 얼마나 억천만겁 같던지 원.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전화를 걸었다. 총력전을 벌여도 모자랄 판이니, 전화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
“오우, 미스터 퍼트! 잘 지내셨습니까?”
-미스터 유. 반갑습니다. 요즘 유일조선에서 무슨 일이라도 났습니까?
“무슨 일이라뇨? 우리 회사야 잘 나가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는데요.”
-흐음. 하루가 멀다하고 연락이 자주 와서 말입니다. 어제도 미스터 킴이 한참을 얘기하더군요.
러쉬쉬핑의 신조선사업본부 닐 퍼트 이사의 목소리엔 살짝 짜증이 묻어나왔다. 우리 회사 영업쟁이들이 어지간히 괴롭혔나 보다. 미안하지만, 나도 좀 괴롭혀야겠어.
“핫핫. 우리 회사가 모처럼 빈 슬롯이 나와서 그랬나 봅니다. 그런 기회가 흔치 않거든요. 우리 영업본부가 앉으나 서나 러쉬쉬핑만 생각하니까, 이 좋은 기회를 안겨주고 싶어서 자꾸 연락을 드린 것이 아닐까 싶네요.”
-우리가 LNG추진선에 관심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발주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도 했구요.
“오호! 그러면 이번 기회에 발주 한 번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년 말에 새 선박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렇게 빨리 선박을 인도 받는다? 솔직히 그건 말도 안 되죠.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하하.”
-뭐 무슨 얘기인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도 계획이 있습니다. 좋은 기회라고 해서 계획을 수정할 정도로 우리가 그렇게 급한 상황이 아닙니다.
“아, 물론 그렇겠죠. 전에 우리 회사 방문했을 때도 얘기했지만, 발주와 건조가 아다리가 딱 맞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2014년까지 일감이 꽉 차서 수주를 못할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흔치 않은 기회로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이 기회를 그냥 차버리겠습니까?”
-하하. 미스터 유의 말만 들으면 당장이라도 발주하고 싶군요. 그러나 우리 러쉬쉬핑은 그렇게 즉흥적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
-뭐, 미스터 유가 직접 전화한 김에 선물 하나 드려야겠군요.
“선물이요? 아이고, 얼마나 많이 발주하려고 그러십니까!”
-우리가 LNG추진 컨테이너선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고 했지요? 아마 2015년 초 납기로 발주가 이뤄질 겁니다. 당연히 유일조선을 선택해야겠죠. 하하.
“2015년이요? 그럼 3년 뒤에나 발주하겠다는 말입니까?”
-뭐 조금 당겨질 수 있긴 한데, 일단 계획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유일조선이 2014년까지 주문이 꽉 찼다는 것 때문에 그런 결론이 난 것이 아닐까 싶은데……. 뭐, 조금 당겨보도록 해 보죠.
“이왕 당기는 거 바짝 당겨서 내년 말부터 받는 걸로 할 생각은 없습니까?”
-하하. 아시다시피 작년에 대흥중공업에 대규모로 발주를 단행했습니다. 우리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해요.
러쉬쉬핑도 별 볼 일 없구만. 선물은 고마운데, 당장 필요한 건 3년 뒤에나 줄 선물이 아니라, 지금 바로 발주하는 것이라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과한 웃음소리를 들려주면서 전화를 끊었지만, 속이 적잖이 쓰려왔다.
시간이 얼마 없어서 더 그렇다. 설계 다시 뽑고, 기자재 주문하고, 블록 만들고, 조립하고 등등. 그 긴 여정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새 주인을 찾아야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김 본부장을 찾아갔지만, 얼굴만 봐도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본부장님, 역시나입니까?”
“러쉬쉬핑 그것들이 이젠 짜증을 내더라니까. 혹시 자네도 전화했었나?”
“네, 저도…….”
“아니, 급하면 여기저기 동시다발적으로 전화 좀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전화 많이 한다고 짜증 내는 건 또 처음이네.”
“진정하고 빨리 대타를 찾아야죠.”
“연락 돌릴 곳은 다 돌렸단 말이지. 허허. 이거 참.”
“스파이더그룹에도 직접 연락하셨습니까?”
“거기가 여력이 있겠나? 우리한테 발주한 것만 84척이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다. 아직 한 장의 카드가 남아 있다. 스파이더가 출동하면 어떨까? 스! 파! 이!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