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174)
174화 – 대흥중공업 인수 작전(2)
마라톤 협상에서 커피나 녹차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뇨작용을 겪어보면 정신이 산만해져 집중을 할 수가 없어.
그러나 때론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부사장님, 저 잠시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아무래도 회장님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허허. 그러세요.”
대흥중공업 최진석 부사장은 지금 욕심에 사로잡혀 있다. 내가 호구 노릇하겠다는데 안 그럴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사장 승진을 앞두고 욕망을 불태우는 모습이 훤하다.
이럴 때 전화하는 척 빠져나오기만 해줘도 기대감에 부풀어 구름 위를 걷고 있을 것이다. 난 물이나 시원하게 버리고 오자고.
뒤처리까지 말끔히 끝내고 나서 다시 협상장으로 복귀했다. 이번엔 내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다. 말끔히 비워냈을 때의 쾌감이란!
“통화는 잘 끝내셨습니까?”
“아, 네. 어차피 나올 얘기는 다 나왔고……. 우리의 수정 제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통영SB 지분은 취득가로 매입하겠습니다. 더 싸게 팔면 더 좋구요.”
“거기에 1000억, 여기에 1000억. 이렇게 2000억을 맞추겠다?”
“처음 생각은 그랬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대흥 측에서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건 좀 안타깝구요. 회장님께서 대흥과 관계를 생각해서 푼돈에 연연하지 말라고 특별히 말씀하셨으니, 조금 더 쓰겠습니다.”
“2000억 플러스 알파가 최종 제안입니까?”
“부사장님께서 대흥중공업 지분인수에 2000억을 말씀하시니, 그 이상을 얘기해야 하는 것이 맞겠죠. 1500억 원까지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럼 총 2500억입니다. 그리고 우리 대주주인 이스턴캐피탈이 대흥중공업 지분확보에 관심이 많다는 것도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좋은 제안이 또 있을까? 대놓고 호구가 돼 주겠다는데 안 받을 수가 없지. 내가 대흥중공업을 먹을 것이란 말도 안 되는 야심이 있다는 건 생각조차 못 할 거야.
“허허. 누가 들어도 우리에게 좋은 조건을 대놓고 제안하는 이유가 뭡니까?”
“아휴. 누가 들으면 우리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줄 오해하겠습니다.”
“그렇게 오해하기 십상이죠.”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회장님께서 특별히 말씀하셨습니다. 저희 회장님께서 대흥중공업을 각별히 생각하는 건 알고 계시죠? 우리가 컨테이너선 몇 척 받자고 거액을 쓰는 것처럼 생각하시겠지만, 양 사의 우호관계가 더 돈독해질 것을 생각하면 윈-윈이라고 봅니다.”
“하하하. 그래서 또 원하는 것이 뭡니까? 솔직하게 얘기해 보시지요. 들어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들어드리리다.”
조건이 너무 후했나? 저 여우 같은 양반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버렸네. 그래도 대인배의 모습을 유지하는 걸 보니 반응이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말로 주고 되나 받는 척 연기하면 그만이겠지.
“저희가 잇속 차리겠다고 제안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통영SB 지분 매입은 영업본부에서 계속 얘기 나왔던 것이라 이참에 추진하자고 해서 말씀드린 것이고, 대흥중공업 지분 인수는 받은 만큼 돌려드리겠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알았으니까 얘기해 보세요.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 참. 저희의 진심을 이리 몰라주시네요. 뭐 억지로라도 만들어보자면, 컨테이너선 몇 척 더 주시면 좋구요. 아니면 저희가 대흥중공업 지분 싸게 인수할 수 있게 자사주라도 팔아주시면 좋고.”
최 부사장이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받은 만큼은 아니어도 섭섭해 하지 않을 정도로 내놔야 한다는 고민이 읽힌다. 큰형 행세는 다 해놓고 가만있자니 가오가 무척 상할 테지.
“흐음. CMM 컨테이너선 건은 합의한 대로 5대5, 그대로 가시죠.”
“대흥중공업이 섭섭해 할까봐 선물까지 준비한 저희가 바보라는 말씀이시죠?”
“허허허. 또 그러신다. 통영SB 지분 매입은 1000억 원에서 정리되도록 해 보겠습니다.”
“저희가 바보가 맞았네요. 에휴.”
“허허. 아직 말 안 끝났습니다. 끝까지 들어보시죠.”
두근두근.
“우리 지분 매입에 대해서는 회사 차원에서 딱히 도움 드릴 일이 없긴 합니다. 자사주를 매각해서는 안 될 일이니까요. 다만, 제가 개인적으로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도움이라니요?”
“제가 소액주주 몇 분을 소개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지분 1% 가까이씩 들고 계신 분들이니 소액주주라고 하기도 뭐하군요. 아무튼 서로 얘기만 잘 하면 할인된 가격에 인수가 가능할 겁니다.”
“오호. 혹시 차명주주들입니까?”
“허허. 그 정도로 하시죠. 어떻습니까? 그렇게 지분 2.99%로 맞춰서 인수하시는 것이 좋겠군요.”
상법상 여러 권리가 부여되는 지분 3%는 넘지 말라는 소리구만. 끝까지 잇속을 차리려고 하네. 어차피 대흥중공업이 우리 에코십 디자인 쓰는 대가로 지불하는 돈을 쓰는 것이니까 뭐든 좋다.
“제가 무척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뭐 그렇게 하시죠.”
“허허. 손해라니요. 우리가 유일조선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줄지 생각해 보세요. 유일조선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참! 생각난 김에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 2개까지 들어드리죠. 하하.”
“그럴 줄 알고 2개가 생각났습니다.”
얻어낼 건 최대한 얻어내야지. 마른 수건이라고 방심하지 말라. 쥐어짜다보면 물 한 방울 나오는 법이다.
“제가 본의 아니게 회사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요. 부사장님께서 그 회사 좀 키워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 그래요? 무슨 회사이길래 그러십니까?”
“테크트리라고 BWTS 제작하는 조그마한 구멍가게입니다. 연말에 부산에 공장 하나 가동 들어가는데, 대흥중공업에서 써 주시면 어떨까 싶어서요. 공장을 무리하게 지어서 좀 걱정이 많습니다.”
“테크트리가 이사님 회사였습니까? 허허. BWTS 최초로 승인 받은 회사 아닙니까? 참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뭐 뒷걸음질에 얻어 걸린 거죠.”
최 부사장은 이제 편안하게 소파에 등을 기댄 자세를 취했다. 큰 덩어리는 얼추 합의를 봤으니, 코딱지 몇 개 건네주면 되겠다는 저 여유로운 자세.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을 확인해야겠다.
“그런데 말이죠. 우리도 BWTS 자체 개발하고 있는 건 알고 계시죠?”
“그래서 제가 부탁드리는 겁니다. 요즘 대기업이 빵집도 하고, 심지어 떡볶이 장사까지 한다고 말이 많지 않습니까? BWTS 같은 잔챙이들은 중소기업들이 하게 놔둬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지금 개발 중인 걸 포기하라는 건 무리한 부탁이 아닐까 싶은데요.”
“방법이야 찾기 나름 아닙니까? 대흥에서 개발 중인 BWTS를 테크트리에 넘겨 버리시죠. 테크트리라면 제값을 치를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3000억 가까운 거액의 선물을-”
“하하. 알겠습니다. 귀에 딱지가 앉겠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내 첫 투자라서 애착이 가는 테크트리. 부산에 580억을 들여 연간 1000대 생산이 가능한 공장을 세웠다.
테크트리 안흥찬 사장은 그걸 어떻게 감당하느냐고 불안에 떨었지만, 걱정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세계 1위 조선사라는 대흥중공업이 있는데!
처음엔 안 사장의 불안이 맞는 것처럼 흘러갔다.
해외 조선사들은 테크트리의 BWTS를 받아들이는데 주저함이 없었지만, 우리나라 조선사들이 문제였다. 그 몇 푼 된다고 기어코 자기들이 자체 개발해서 쓰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대기업들이 중소기업 생각하는 마음씀씀이가 이렇다.
이참에 대흥중공업부터 내 고객으로 만들어 놔야지. 1년에 150척가량 건조가 가능한 공룡만 잡으면 영업 걱정은 없을 것이다.
“검토도 좋지만, 확답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답을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로 넘어가 주시죠. 허허.”
“그럼 저는 확답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죠?”
“허허. 그렇게 하시죠. 두 번째 부탁은 뭡니까?”
“이스턴캐피탈에서도 대흥중공업 주식을 사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었는데, 그건 어떻게 할까요?”
“제가 뭐라고 할 권리가 있습니까? 우리가 시장에 내놓은 주식이야 서로 알아서 거래하는 것이죠.”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도 후속작업 진행할 실무팀 보내겠습니다.”
동상이몽을 하는 나와 최 부사장이 악수를 나눴다.
지금의 악수를 5년 뒤에도 꼭 기억하라고. 지금의 이 결정이 그때 태풍으로 몰아칠 테니까.
***
이젠 아버지에게 내 계획을 소상히 얘기할 때가 됐다. 언제까지 나 혼자 꿍꿍이속을 하면서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허허허. 우리 아들이 호구노릇을 제대로 하고 왔구나. 장하다, 장해.”
아버지의 칭찬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 또한 이겨내리라.
“못 믿으시겠지만, 이건 대흥에서 호구노릇을 하는 겁니다.”
“아이쿠. 이제는 방구까지 끼는 구나. 그게 말이냐, 방구냐?”
“아버지. 딱 5분만 아무 말하지 마시고, 제 원대한 포부와 계획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언제는 허락 맡고 얘기했냐? 어디 한 번 얘기해 봐.”
마른 침을 삼키고는 내 10년 프로젝트를 꺼내기 시작했다.
“제 꿈은 우리 회사를 1등 조선사 자리에 앉히는 겁니다. 그 얘기를 했을 때 다들 비웃었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버지도 마냥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말하지 말라면서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 하는 거냐?”
“네.”
“허허. 고놈 참. 1위까지는 모르겠고……. 또 모르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래서?”
“맞습니다. 1등 그거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흥중공업이란 골리앗이 있기 때문이죠. 대흥중공업을 이겨야 우리가 1등이 될 수 있습니다. 대흥을 이기려면 대흥으로 쳐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대흥중공업 지분을 야금야금 확보해서 먹어버리겠다?”
“그렇습니다! 제 웅대한 포부를 이리 알아주시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응? 아버지는 왜 재떨이를 손에 쥐는 것이지? 유혈사태는 막아야 한다!
“아버지! 아, 쫌. 제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세요. 21세기에 재떨이 던지기가 웬 말입니까!”
“대체 너의 허튼 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 것이냐? 5분이라고? 이젠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할지 훤하구나.”
이젠 독심술까지 익힌 아버지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배우고 익히며 성장하는 모습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내 계획을 하루 빨리 이뤄내 아버지에게 선물로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허튼 소리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우리 회사 들어오고 나서 해왔던 일들을 생각해 보세요. 마냥 허튼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고, 또 뛰어다녔습니다. 그렇게 성과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것까지 뭐라고 하는 건 아니다. 너 고생한 건 누구보다 잘 알아. 그런데도 내가 맨날 큰소리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으음. 자만하지 말라?”
“그래, 그거야. 운 좋게 성과 냈다고 기고만장하면 어떻게 되겠어? 운이 좋아? 종국엔 운이 없게 되는 거야. 그래서 뭐? 대흥중공업을 먹겠다고? 아무리 운빨이 좋아도 현실을 냉철히 바라봐야 하는 거란 말이다.”
“당장 대흥중공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상에 올라가려면 계단을 밟아야죠. 이번엔 화내지 마시고 끝까지 들어주세요.”
우리 회사의 성장. 3~4년이면 한계에 다다를 것이다. 우리 역량이 아닌 캐파 말이다. 딱 그 시점에 빅3의 최대 위기인 해양플랜트 폭탄이 터진다. 저마다 경쟁이라도 하듯 조 단위 적자를 발표하며 나 죽네를 연발할 것이다.
여론이 어찌 돌아갈까? 심각한 위기에 빠진 우진조선이나 순양중공업을 살리기 위해서 유일조선이 인수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것이다. 안 나와? 그럼 나오게 만들어야지.
“그래서 순양중공업을 인수할 겁니다. 순양중공업도 살리고, 우리의 캐파 부족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기회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얘기하느냐고 하시겠지만, 제가 공부한 결과는 그렇다고 얘기합니다.”
“무슨 공부 말이냐?”
“해양플랜트에 대해서 다각도로 분석해 봤는데, 아무리 봐도 그건 독약입니다. 지금 빅3가 해양플랜트로 금융위기 이겨내고 있다고 그러죠? 두고 보세요. 머지않아 피를 토할 겁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부지런히 성장하면 됩니다.”
“허허허. 소설을 써도 그럴싸하게 써야지.”
“미래의 일이라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믿어주세요. 1등을 하든 못하든, 빅3를 인수하든 못하든, 뭐가 됐건 회사를 부지런히 키우겠다는 것 아닙니까? 제가 허튼 소리를 한다고 해도 회사에 피해가는 일이 없으니, 한 번 지켜봐 주시죠.”
“3000억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피해가 없어?”
“아, 그렇군요……. 아! 그건 투자입니다, 투자! 여차하면 주식 팔면 그만입니다. 자, 그럼 회사에 피해가는 일 없는 것 맞죠?”
“허허허.”
“아버지. 인간적으로 열심히 해 보라거나 힘내라는 소리 정도는 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 열심히 해 봐라. 허튼 소리라도 기분은 좋구나. 대흥중공업을 먹는다라……. 허허. 하하하.”
아버지가 기분 좋다라. 그럼 말 다 했지.
아버지요, 5년 뒤에, 아니 좀 쫄리니까 6년 뒤로 하자. 아무튼 그때, 지금보다 더 크게 웃게 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