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199)
199화 – 나도 한 번 미쳐보자
서울 출장을 마치고 통영으로 복귀했다. 무슨 선물 보따리를 들고 왔는지, 우리 아재들이 미어캣에 빙의돼 동구 밖에서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 서울 갔다왔으니, 옜다, 비단구두.
미어캣 중 대장 미어캣을 찾아갔다. 나도 엄연한 월급쟁이이니, 출장 후 보고는 필수지.
“회장님, 출장 잘 다녀왔습니다.”
“그래, 손 회장님은 별일 없으시다디?”
“저 보고 독한 놈이라고 학을 떼시더군요.”
“허허. 손 회장님이 연세가 있으셔도 여전히 총기가 있으시구만. 사람 볼 줄 알아.”
아버지의 지극한 자식사랑 멘트를 듣고 나서야, 내가 서 있는 이곳이 통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도시상선 형편도 안 좋은데, 너무 우리 잇속만 챙긴 거 아니냐?”
“그래서 약소하게 받아왔습니다.”
“약소? LNG선 2척 파는 걸로 10억 불짜리 수주를 받아온 것이 약소해? 허허. 이제 1, 2억은 돈도 아닌 모양이다야.”
“도시상선이 형편이 안 좋다고, 필요 없는 배를 발주하면서까지 LNG선 살 곳은 아닙니다. 어차피 발주할 선박이고, 우리가 까리하게 건조해주면 서로 좋은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리고, 뭐?”
“손 회장님이 내기골프로 아버지한테 뜯어간 돈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약과가 아닐까 싶네요.”
“크흠. 누누이 얘기하지만, 내가 회장님 심기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억지로 져준 거다. 알고 있지?”
골프의 신과 대결해도 억지로 져줄 정도인 골프 황제이시니 어련하시겠어.
도시상선한테서 약소하게 뜯어낸 결과보고와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프로젝트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5년 뒤에 있을 국제해운 파산을 막아낼 장기 프로젝트 말이다.
“시간이 좀 남아서 정원희와 차 한 잔 마시고 왔습니다. 술도 살짝.”
“정원희? 국제그룹 정 회장 아들 말이냐?”
“네, 맞습니다. 국제해운이 계속 휘청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위기 극복 잘 하라고 조언 좀 해 주고 왔죠.”
“이젠 남의 집 숟가락 개수까지 세고 다니는 거냐? 일 많다고 그리 징징거리는 놈이 무슨 오지랖이야?”
“오지랖은요. 국제해운이 살아나야 우리한테 배도 척척 발주하지 않겠습니까? 고객관리는 미리미리 해둬야죠.”
“국제해운이 어떤 회산데, 고뿔 좀 걸렸다고 중환자실 들어가겠어? 뭐,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망한다면 대흥상선이겠지.”
아버지 역시 국제해운이 망할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바닥 사람 아무나 데려다 놓고, 국제해운과 대흥상선 중 하나를 살려야 하는데 어딜 택할 것이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국제해운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5년 뒤에 놀랍게도 정부는 국제해운을 망하게 놔두고 대흥상선을 지원하겠다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진짜 말 그대로,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회장님도 정부가 대흥상선이 아니라 국제해운을 지원할 것이라고 보시는군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물론, 둘 다 살리면 좋겠지만, 굳이 선택하라면 당연히 국제해운이지. 거기가 보통 회사야? 세계 7위야, 7위. 대흥상선이 17위, 18위에서 왔다갔다할 때 국제해운은 계속 상위권에서 놀고 있다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원양 컨테이너선사 두 곳 모두 계속되는 적자에 신음하고 있다. 금융위기 직전에 비싼 가격에 선박들을 장기로 빌리는 오판으로 숨만 쉬어도 돈이 빠져나가는 위기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 돈을 못 벌면 망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컨테이너선 시장은 인프라 구축에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함부로 망하게 둘 수 없다. 특히나 섬나라나 마찬가지이고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는 더더욱.
다른 나라의 컨테이너선사들은 금융위기가 터지자마자 바로 정부에 백기투항하는 대가로 목돈 지원받아 회복했지만, 두 회사는 경영권을 넘길 수 없으니 대출만 해 달라고 땡깡 부리는 중이기도 하다. 그놈의 경영권이 뭐라고, 거 참.
“그런데 말이다. 둘 다 작년에 흑자로 돌아서지 않았냐? 위기에서 말끔하게 벗어났다고 그러던데, 넌 생뚱맞게 망하니 마니 그러고 있어?”
“위기 극복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다른 선사들은 컨테이너선 대형화하겠다고 그 난리입니다. 올해 머스트라인을 시작으로 내년부터 메가 컨테이너선 쭉쭉 나오는데, 국제나 대흥이나 엄두도 못 내고 있지 않습니까? 진짜 위기는 지금부터입니다.”
“그래서 네 말은 둘 다 신조선 발주해야 하는데, 실적 개선에만 급급해서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
“맞습니다. 제가 그래서 정원희 찾아가서 국제해운 접수하고 초대형, 메가 컨테이너선 쭉쭉 발주하라고 조언해 주고 왔죠.”
“그래서 정원희가 최 회장 몰아내고 국제해운 차지하면 우리한테 발주하겠다고 해?”
“첫술에 배부를 수 있겠습니까? 계속 친분 유지해 가면서 달달한 소리 좀 해주고 그래야죠.”
“허허.”
“미래를 내다보는 제 혜안에 또 감탄하신 겁니까?”
“네 할 일이나 잘 해, 인석아. 멀쩡한 회사들 망하니 마니 헛소리하면서 애먼 짓하고 다니지 말고.”
“또 그러십니다. 제가 예언 하나 할까요?”
“아이고, 또 무슨 무서운 소리를 하려고 그러냐?”
“WBT그룹도 내년부터 휘청거릴 것이고, 국제해운이랑 대흥상선도 길어야 3년 내로 죽게 생겼으니 살려달라고 울부짖을 겁니다.”
“이젠 WBT그룹도 무너진다는 소리까지? 허허. 그래, 계속 얘기해 봐.”
“경영인이라면 항상 중장기를 예측하며 그에 맞는 계획들을 세워놔야 합니다. 제가 위기를 기회로, 기회를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꼼꼼하게 체크하고 계획을 세워놓겠습니다. 이리 든든한 아들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결론은 네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구만? 하긴 뭐. 내가 잔소리한다고 들을 놈도 아니고……. 행여나 뻘짓거리 한다 싶을 때는 손모가지를 잘라버릴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해둬. 알겠어?”
“우리 회장님의 든든한 뒷받침이 있으니 이리 마음이 평온할 수 없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낼 손님 맞을 준비나 잘 해. 거긴 돈 많은 곳이니까 최대한 뜯어내라고.”
“예썰!”
내일 귀한 손님들이 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신다. 기쁘다, 머스트라인 오셨네.
***
“마이 베스트 프렌드! 미스터 울리히!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머스트라인의 라스 울리히 사장이 몸소 우리 회사를 방문했다.
세계 1위 컨테이너선사의 사장이 온다는 것, 그거 보통 일이 아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냥 놀러왔다는 것이다. 친구인 나를 만나겠다고. 내가 키워놓은 위상이 이 정도이다.
“하하. 미스터 유! 오랜만입니다. 우리가 멀리 떨어져서 자주 못 보지만, 이제 세상은 스마트폰 시대 아닙니까? 고화질 영상통화도 가능하니 자주 좀 보자구요.”
“자주 보면 식상해집니다.”
“하하. 그 말도 맞습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악수 한 번 진하게 합시다.”
이 자식은 나만 만나면 이리 눈빛이 부담스러워지는지 모르겠네.
진득한 악수를 시작으로 일행 소개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오늘 방문한 귀빈은 머스트라인의 라스 울리히 사장이 아니라, 머스트가스의 요나스 비예어 사장이다.
누가 들어도 덴마크스러운 이름을 가진 이 사람은 우리의 LNG선을 사겠다는 굳은 의지를 드러내며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머스트가스가 그동안 유일조선을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언제 협력할 기회가 생길지 기대해 왔는데, 그 기회가 오늘 생긴 것 같군요.”
“LNG선이든 LPG선이든 맡겨만 주시면 예쁘게 뽑아드리겠습니다.”
“급할 것 없으니 신조선 발주는 찬찬히 논의해 보도록 하죠.”
이 새끼 봐라? 곶감 빼먹듯 LNG선만 날름 사고 땡치겠다고?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은 있지. 나한테 처당하기 전까지는.
이 유럽 얍삽이들이 그럴 것 같아서 라스 울리히 사장도 같이 오라고 했지. 머스트가스가 호구 잡힐 기미가 안 보인다? 그럼 머스트라인 들들 볶아서 뭐라도 뽑아내야지.
상견례와 야드 투어로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나서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협상 창구는 두 곳으로 나뉘어졌다. 공식 협상은 김태우 본부장이 머스트가스 인사들과 진행하기로 했고, 난 머스트라인 울리히 사장과 비공식 협상에 들어갔다.
***
머스트가스의 요나스 비예어 사장은 단호했다.
“유일조선이 LNG선 매각을 통해 여러 이득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고작 LNG선만 매각하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물론, 사장님께서도 우리가 그럴 것임을 잘 알고 있으니, 대화가 어렵지 않을 것 같군요.”
“하나를 알았으니, 둘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유일조선이 LNG선을 무기로 이익을 얻고자 하는 마음처럼, 우리 머스트그룹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아둔해서 그런데, 이해하기 편하게 말씀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도 무기가 있다는 뜻이지요. 머스트라인이 유일조선에 발주한 선박이 100억 달러 어치가 넘습니다. 그 정도로 유일조선에 애정을 보였는데, 계열사인 우리 머스트가스가 혜택을 입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김태우 본부장은 살짝 당황했다. 비예어 사장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초대형 발주를 안긴 머스트그룹 앞에서 고작 LNG선 2척으로 알랑거리는 것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당황한 나머지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유연성 상무가 주도했던 러쉬쉬핑, 도시상선과 협상에서는 LNG선으로 온갖 생색을 다 내면서 두둑하게 뽑아냈다. 반면에 자신이 주도하는 이 협상에서 그만큼 못 뽑아내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을 것이다.
망신당하지 않기 위해, 회사에 큰 선물을 안기기 위해, 저 자식의 단호함을 녹여 구워삶아야 한다고 굳게 결심했다. 30년 영업 짬밥을 아랫구멍으로 먹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의지.
김 본부장은 노하우를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노하우랄 것도 없다. 그저 대화를 이어가면서 약점이 발견되면 후벼판다. 그렇게 상대방 멘탈이 흔들리면 다독이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그래서 이번 방문의 목적은 내년 초에 나올 우리 LNG선 인수뿐입니까?”
“엄밀히 말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겸사겸사 추가 발주를 했으면 좋겠지만, 당분간은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군요.”
“상황을 지켜볼 이유가 있습니까? 금융위기 이후 모처럼 시장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이건 긍정적인 신호라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LNG수입대국 일본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일시적인지, 상승 사이클인지는 좀 더 살펴봐야 합니다. 확실하다는 판단이 선다면 그때는 반드시 유일조선에 신조선을 발주하도록 하지요.”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겠다구요? 허허.”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지요.”
김 본부장은 약점을 발견했다. 후벼파자.
“사장님께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가스운반선 시장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전망이 필요할 것 같군요.”
“굼벵이 앞에서 주름이라도 잡겠다는 소리입니까?”
“상황을 지켜볼 정도로 가스운반선 시장이 예측불가능한 상황이 아닙니다. 답이 나와 있는데도 신중만을 외치니 안타까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일본 때문에 LNG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긴 했지만, 그럴수록 반동을 신경 써야죠.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수요만 증가하고 공급이 그걸 뒷받침하지 못했을 때의 가정이겠죠.”
“해상 가스전 개발이 꿈틀거리고 있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글쎄요. 그건 10년 뒤에나 나올 공급이 아닙니까?”
옳지. 걸렸다.
김 본부장은 유 상무가 귀에 딱지 앉을 정도로 얘기한 미국의 셰일혁명을 꺼낼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사실 그조차도 그걸 믿지 않았다. 미국이 세계 최대 산유국이 돼 전 세계로 석유와 가스를 수출할 것이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순도 99.9%짜리 영업쟁이였다. 납득이 안 가는 얘기도 그럴싸하게 포장해 설득의 도구로 활용하는 영업쟁이. 그렇게 팔아먹은 배만 30년 동안 수백 척이었다.
“허허허.”
“아니, 갑자기 왜 웃으십니까?”
그는 그저 웃었다. 유 상무의 미친 소리에 기대야 한다는 현실에 웃음이 나왔고, 그 소리가 잘 먹혀들어갈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또 웃음이 나왔다.
뭐든 일단 팔고 보자. 김 본부장은 물 한 모금을 마시고나서 턱관절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