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270)
270화 – 국제해운 살리기(3)
나는 또 서울 간다.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서울이 통영 근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순양중공업 인수가 마무리되면 그때부터는 헬기를 이용해야지. 아, 설렌다.
이번 서울행은 국제그룹 정원희 전무에게 비싼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다. 순양전자 박윤식 부사장도 함께하기로 했으니, 세상에서 제일 비싼 걸로 얻어먹을 테다.
캐비어와 트러플 범벅인 한우 안심 스테이크를 자르니 육즙이 줄줄 흐르는 광경을 떠올리며 흘러나오는 침을 주체하고 있자니, 거구의 사나이가 등장했다. 그리스에서 열심히 식비를 축내고 있는 우리 김진수 부장과 씨름 한판 붙이면 참 좋겠다 싶은 정원희 전무이다.
“어, 연성아. 일찍 왔네?”
“시골 깡촌에서 약속 시간 맞추려면 일찍 오는 수밖에 없더군요.”
“하하. 올라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거마비라도 두둑이 챙겨줘야겠어.”
“오늘 진짜 비싼 걸로 얻어먹을 겁니다.”
“입이 쩍 벌어지게 대접할 테니 긴장해라. 하하.”
죽어라 영업하고, 아끼고 아껴도 이자 갚기도 버거운 수준으로 전락한 국제해운을 살리겠다고 차로 6시간 걸리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니 제대로 대접하라고. 말 나온 김에 생색을 더 내야겠다.
“형님, 우리 회사가 순양중공업 인수하는 건 아시죠?”
“아, 그래. 그거 축하한다고 전화할랬다가 깜빡했다. 오늘 이 자리를 축하연으로 하면 되겠네.”
“제가 협상 과정에서 엄청 강조했던 게 뭔지 모르시죠?”
“무슨 생색을 내려고 그러는 거야?”
“순양 측에서 제시한 조건 다 받아들일 테니까, 대신 국제해운 정상화에 협조해 달라고 귀에 인이 박이도록 얘기했다 아닙니까.”
“진짜?”
아니, 구라야. 그래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자고.
“그래서 이 자리도 마련된 겁니다. 그러니 이제 2만TEU급 컨테이너선 용선계약 체결합시다. 빨리 결정해줘야 우리도 제날짜에 인도하죠.”
“하하. 나도 발주 좀 했으면 좋겠다. 얼라이언스 가입 확정되면 바로 연락할게.”
“머스트라인이랑 협상이 잘 안 됩니까?”
“뭐……. 몇 번 만났다고 바로 결론이 나올 일은 아니니까.”
“머스트라인 그놈들이 뻣뻣하게 나옵니까? 제가 또 가서 한 소리 해줄까요?”
“아니야. 네가 고생해서 협상장까지 차려줬는데, 우리가 알아서 해야지. 곧 결과가 나올 테니까, 기다려 봐. 그것만 결론 나면 바로 용선계약 체결하자고.”
머스트라인 얼라이언스에 국제해운이 가입하는 문제. 협상이 지지부진인 모양이다. 내가 판을 깔아줬는데도 합의 도출 못 하고 빌빌인 걸 보면, 난 지금까지 사업을 참 쉽게 했구나 싶다.
이번 일도 그렇다. 국제해운이 빡세게 협상해서 머스트라인 얼라이언스 가입을 확정 짓는 순간, 49억 달러짜리 수주가 터진다. 국제해운이 메가 컨테이너선 20척을 용선하기로 했으니 말이다.
마진 10%로 잡으면 5,500억 원! 아휴, 생각만으로도 배부르네. 국제해운과 머스트라인의 협상이 부디 잘 마무리되길 바라며, 소화제로 뭐가 좋을지 고민하자고.
그러는 찰나에 박 부사장도 모습을 드러냈다.
“원희 너 오랜만이다. 어째 점점 풍채가 좋아진다? 하하.”
“형님은 나이를 거꾸로 드시는 것 같습니다. 저 같은 노안은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하하.”
남자들의 품앗이란. 아무리 봐도 저 둘은 안 친한 것이 분명하다.
살살 녹는 안심이 카스피해를 방황하는 철갑상어를 만나 낳은 암퇘지가 떡갈나무 숲속을 파헤치는 기가 막힌 맛이 위장을 어느 정도 달래고 나자, 본격적인 대화의 장이 열렸다.
아쉬운 사람이 먼저 마이크를 잡는 법. 정 전무가 먼저 운을 띄웠다.
“형님, 국제해운이 우리 그룹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아, 그래. 축하해줘야 할 일이야? 아니면 위로를 해줘야 할 일이야?”
“당연히 위로죠. 국제해운 넘겨받고 나서 실사를 했는데, 이야, 아주 가관입디다. 그 우량한 회사가 어쩌다 그렇게까지 망가졌는지 원.”
“멋모르는 사람들은 임원들이 가져가는 돈이 너무 많다고 난린데, 그게 아니야. 그만큼 경영진들이 중요하니까 많이 주는 거야. 그저 돈 많이 가져간다고 뭐라 할 것이 아니라니까.”
“맞습니다. 그렇게나 많이 챙겨갔으면 회사를 똑바로 끌고 갔어야죠. 에휴, 안 그래도 노안인데, 국제해운 정상화한다고 신경 썼더니 폭삭 늙어버린 것 같습니다. 하하.”
“고생이 많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해운사가 어쩌다가 그리됐는지 원……. 그래서 정상화 방안은 가닥을 잡아가고?”
“뭐, 계열사 전부 다 동원해야 할 판입니다. 국제해운의 부채비율이 너무 높거든요. 하루하루가 피가 말릴 지경입니다. 그리고 돈 되는 건 다 팔아야죠.”
“돈 되는 건 다 판다?”
“우량사업부 분사시키고, 항만 터미널 지분 팔고……. 아! 다른 회사 지분들도 죄다 팔아야죠. 당장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다른 회사들 지분 가지고 있어 봐야 뭐 하겠습니까? 하하.”
정원희 저놈도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다. 자연스럽게 다른 회사 지분 얘기를 꺼내며 박 부사장 관심을 살살 긁어냈다. 박 부사장 귀 쫑긋해진 것 보라지.
“그래도 팔 만한 것들이 꽤 있나 보네? 하긴, 뭐……. 국제해운이 그리 잘나갔었으니 이것저것 많이 사놨겠지. 아쉬울 땐 그게 효자 노릇을 한단 말이지. 하하.”
“맞아요. 예전에 IMF 때 회사 넘어간다고 서로 지분 사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말로는 그때 정말 쥐어짜서 돈 마련하고 그랬다고 하던데, 형님 말씀대로 그게 지금 도움이 되고 있죠.”
“그러고 보니까 국제그룹에 우리 회사 지분들도 조금 있지 않나?”
“아, 맞습니다. 순양상사 지분이 제일 많이 있죠.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아무튼 이것저것 조금씩 가지고 있습니다. 말 나온 김에 그거 형님한테 넘길까요?”
“하하. 고작 이 고깃덩어리로 그리 큰 걸 바라는 거냐?”
“하하.”
고기 먹는 데 집중하느라 가만있었더니 안 되겠다. 서로 변죽만 울리며 시간 보내는 대화는 질색이다. 서로 원하는 거 딱 내놓고 계산기 두들겨서 결론 낼 생각을 해야지 말이야. 스테이크를 다 먹었다고 이러는 건 아니다.
“형님들, 이거 뭐 소개팅도 아니고 뭘 그리 탐색전만 벌이십니까?”
“탐색전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여우 행세를 하고픈 두 재벌놈들의 반응을 보라. 빼다 박은 듯한 저 어색한 연기톤. 재벌들 후계자 수업에서 공통과목으로 배웠을 것이 분명하다.
“원희 형. 형님은 순양 계열사 지분 팔지 말고 계속 쥐고 계세요.”
“뭐? 왜?”
“여기 윤식 형님이 국제해운 정상화에 도움을 줄 겁니다. 그렇죠, 형님?”
대답해라, 박윤식.
“흐음. 뭐……. 우리나라의 대동맥 역할을 하는 국제해운이 힘들다는데, 어떤 방식으로든 도와주는 것이 맞겠지.”
잘했어, 박윤식. 정원희 넌, 얼굴에 화색을 띄워라.
“아이고, 형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연성아. 그 주식을 왜 팔지 말라는 것이냐?”
“그냥 제 추측인데, 윤식 형님이 머지않아 그걸 필요로 하지 않을까 싶네요. 형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대답해라, 박윤식.
“하하.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잖아. 이 경영이라는 것도 생물과 같아서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것이야.”
“앞날을 모르니, 보험으로 놔두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이시죠?”
“사실 우리 회사 지분 들고 있는데, 회사 힘들다고 이상한 곳에 넘기면 우리만 피곤해지는 일이기도 하고. 뭐 그 정도로 해. 깊이 들어가면 머리만 복잡해져. 참, 이런 얘기들은 이 자리에서만 나누는 걸로 하자고.”
내가 판을 깔아줬으니까 이제 둘이서 알아서 잘해보라고. 난 메가 컨테이너선 발주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 홍시까지 말끔히 먹어치우는 동안 두 재벌 형아들은 말문을 좀 닫았으면 싶을 정도로 대화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홍시 안 먹을 거면 나한테 줬으면 좋겠는데…….
그동안 서로 본심을 밝히지 않아서 변죽만 울렸겠지만, 판이 깔린 지금엔 눈치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정원희는 순양그룹의 지원을 받아 국제해운을 살리고 싶고, 박윤식은 자신의 승계 프로젝트에서 국제그룹이 백기사 역할을 해주길 바라고.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돈 들어갈 일도 아니니 대화가 많아질 수밖에.
난 디저트나 먹고 있자고.
“그래서 형님이 산업은행에 전화 한 통 넣어주시겠다?”
“국제그룹이 계열사 동원해서 지원하고, 자산 팔고, 그 난리를 쳐도 국제해운이 회생하긴 쉽지 않아. 결국 목숨줄은 산업은행한테 달렸다고 보는데? 산업은행이 국제해운 지원하겠다는 말만 하면 될 일이 아니야?”
“역시 형님이십니다. 정확히 보고 계시네요. 근데 산업은행 놈들이 무슨 약을 처먹었는지 꿈쩍도 안 합니다. 진짜 미쳐버릴 지경이에요.”
“그래서 내가 전화 한 통 해주겠다고. 왜? 못 미더워?”
“아니요, 아니요. 너무 감사해서 그렇죠.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형님께 더 잘할 걸 하는 아쉬움도 있고…….”
“넌 앞으로 잘해야지. 사실 연성이 이놈 때문이야. 국제해운 살려야 한다고 그 난리이니, 내가 뭐라도 해줘야 하지 않겠어? 큰돈 들여서 순양중공업 사준 놈이 그리 애원하는데, 전화 한 통 하는 것 정도야 뭐……. 하하.”
“하하. 그러고 보니까 유일조선이 순양중공업 인수할 돈을 제가 보태준 꼴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가 국제해운 안정되면 유일조선에 컨테이너선 발주하기로 했거든요. 연성이 이놈이 어찌나 죽는소리를 하던지 원.”
“하하. 재주는 너랑 내가 부리고 돈은 이 녀석이 챙겨가는 꼴이네.”
아이스홍시 때문에 입이 얼어붙었어도 말은 똑바로 하랬다. 저런 모함을 듣는데 가만있을 수가 없네.
“그 반대죠. 제가 재주 다 부리고 재미는 형님들이 보는 거 아닙니까?”
“연성이 이 자식 또 생색내기 들어갔네. 그래 어디 한번 생색내 봐.”
귀 열어라, 박윤식.
“국제해운이 우리 회사에 컨테이너선 발주하기로 한 건 맞는데, 그거 우리 돈으로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회사랑 우리 대주주랑 선주사 차려서 발주해서 건조하면 국제해운이 그걸 용선하기로 했거든요.”
“뭐야. 진짜 생색은 원희 이 녀석이 냈네? 하하.”
“거기다 우리가 무려 2조 가까운 돈을 들여서 순양중공업도 인수하기로 했고. 돈은 제가 다 쓰고, 형님들은 신나게 재미만 보는 것이죠. 이런 호구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호구? 하하. 그래. 호구 맞네.”
박윤식의 대답이 어째 웃으라고 하는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나를 진짜 호구로 보고 있는 건가.
뭐 알아서 생각하라고. 난 비싼 스테이크 얻어먹었으니까 만족한다.
***
얼마 지나지 않아서 3자 만찬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제해운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국제그룹에 국제해운 정상화 방안을 마련하라는 경고장을 보냈다. 경고장이라기보다 명분을 만들어달라는 애원서 같은 느낌이었다.
국제그룹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총 1조5,000억 규모의 자구방안을 마련했고, 회장의 사재출연까지도 약속했다. 국제해운 정상화를 위해 건드려선 안 될 오너 재산까지 내놓을 수 있다는 발표는 명분이 생겼으니 은행 금고를 열라는 신호였다.
짜인 각본처럼 산업은행은 총 3조 원 규모의 자금지원안을 발표했다.
“오빠! 뉴스 봤어?”
산업은행이 국제해운을 살려주겠다는 뉴스가 나오기 무섭게 이유선이 흥분도 최강의 모습으로 내 방에 등장했다.
“산업은행 뉴스?”
“어! 완전 대박 아니야? 국제해운에 자금지원 어렵다고 그렇게 뻗대더니, 어떻게 단번에 태도를 바꿔?”
“박윤식 그 사람 파워가 보통이 아닌 거지. 박윤식을 움직이게 만든 내가 더 대단한 것이기도 하고.”
“우리 상무님, 또 시작이십니다.”
어찌 된 것이 우리 회사에는 나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는지 원. 조선소 바닥에 수맥이 흐르나…….
“산업은행이 국제해운 지원하기로 했으니까, 이제 메가 컨테이너선 발주 확정됐다고 봐야겠지?”
“그랬으면 좋겠지만, 산업은행 이것들이 꼴에 자존심 지킨다고 이런저런 조건을 달았잖아.”
“얼라이언스 가입을 확정해야 한다는 거? 그것도 다 끝난 일 아니야? 오빠가 덴마크까지 가서 머스트라인 설득하고 왔다고 했잖아.”
“판을 깔아주긴 했는데, 국제해운이 머스트라인 얼라이언스 가입한다는 결론 나올 때까지 방심은 금물이야.”
“에이. 당연히 가입 확정되겠지! 이제 우리는 50억 달러짜리 계약서 쓸 일만 남았네? 축하해!”
“50억은 아니고, 49억. 그리고 국제해운이 10년짜리 할부로 사는 거라 대박이라고 하긴 좀 그래.”
“꼭 이럴 땐 표정 관리하더라? 좋을 땐 좋은 내색 좀 하세요.”
그러게. 표정 관리하기 너무 힘들어.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단전에서부터 엔도르핀이 주체 못할 정도로 뿜어져 나올 지경이다. 국제해운이 2만2,000TEU급 LNG추진 컨테이너선 20척을 확보하겠다는 발표가 조만간 나올 것이고, 그걸 우리 회사가 건조할 것이니까.
49억 달러. 오늘 구내식당에 제육볶음이 나와도 안 먹을 자신 있다. 그만큼 배가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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