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293)
293화 – 이건 출장이 아니야 (3)
신혼여행의 사실상 마지막 행선지인 덴마크에 도착했다.
바이킹의 나라! 인어공주의 나라! 그리고 머스트라인의 나라!
“오우! 마이 프렌드! 덴마크 방문을 환영합니다!”
머스트라인의 라스 울리히 사장이 크고 아름다운 차를 타고 공항까지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한테 그렇게 빨리고도 VIP대접해주는 곳은 머스트라인 밖에 없을 것이다. 미안할 정도로 많이 빨아먹긴 했지.
“신혼여행이긴 하지만, 유럽에 온 이상 울 사장님을 안 보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없는 시간 억지로 만들어서 찾아왔습니다.”
“하하. 잘 하셨습니다. 그나저나 좀 실망입니다.”
“왜 또 그러십니까?”
“인생 선배인 나도 이렇게 솔로로 지내고 있는데, 먼저 가 버리다니요!”
“울 사장님은 구속보다 자유를 선택한 겁니다.”
“하하. 그런 겁니까? 이런 얘기는 사모님 귀에 안 들어가게 하자구요. 하하.”
애석하지만, 이유선은 눈치가 장난 아니거든. 입 모양만으로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다 알고 있을 거야. 지금 나를 쳐다보는 저 눈빛을 봐……. 아무래도 괜한 소리를 한 것 같네.
다행히 이유선의 눈초리는 오래 가지 않았다. 조선업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니만큼 세계 1위 컨테이너선사인 머스트라인의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다는 건 흥미로운 기회일 테니까.
“머스트라인 본사 어때?”
“머스트라인 상징색이 예쁜 것 말고는 그냥 똑같이 일하는 곳이네. 근데 우리나라 해운사들은 죽네 마네 그러고 있는데, 머스트라인은 덴마크를 먹여살리고 있다잖아. 진짜 대단한 곳인 것 같아.”
“그 대단한 곳이 우리 회사 앞에서는 쪽을 못 쓴다 이거지. 후후.”
“그것도 오빠 덕이라고 얘기하려고?”
“어떻게 알았어?”
“쳇. 뭐만 하면 다 자기 덕이래. 구라도 정도껏 치세요.”
진짠데……. 머스트라인이 오로지 나 하나 믿고 우리 회사에 쏟아낸 발주가 150억 달러어치에 달한다. 우리 돈으로 16조가 넘는다.
머스트라인과 스파이더그룹의 폭풍 발주가 아니었다면, 우리 회사가 이렇게 급성장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내 두 번째 삶도 첫 번째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울리히 사장에게 너무 고맙다.
그 고마움을 담아 이번엔 뭐 또 뜯어먹을 게 없는지 살펴봐야겠다.
“울 사장요. 당분간 신조선 발주 안 한다는 계획은 변함이 없는 겁니까?”
“아이고, 미스터 유! 신혼여행 왔으면 허니문에 집중하세요. 뭐, 신혼여행 아니었다고 해도 대답이 달라지진 않겠지만요.”
“생사고락을 함께한 친구가 결혼했는데, 결혼선물 좀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하. 아쉽지만, 우리 머스트라인은 당분간 발주계획이 없습니다. 그 계획이 변할 리도 없고요. 머스트가스라면 모르겠지만…….”
“오호, 그렇군요. 머스트가스 사장이 요나스 비예어 맞죠? 지금 바로 인사하러 가야겠습니다.”
“어허. 지금 가면 나중에 후회할 텐데요.”
“역시 우리 울 사장! 결혼선물로 준비한 게 있다는 의미죠?”
“노 코멘트할랍니다. 일단 스카이라운지 가서 차 한잔하면서 담소나 나눕시다.”
나만 보면 늘 할 얘기가 많은 울리히 사장, 울리히 사장만 보면 늘 골수 몇 개 뽑아내고 싶은 나, 세계적인 회사에 와서 마냥 신난 이유선. 그렇게 셋은 티타임을 가지며 한-덴마크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논의했다.
대화의 서막은 할 말 많은 울리히 사장이 열었다.
“우리 머스트라인이 함부르크수드 인수하기로 한다는 뉴스 보셨습니까?”
“울 사장님, 제가 했던 얘기 기억 안 나십니까?”
“한 얘기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저는 앉으나 서나 머스트라인만 생각한다고 말이죠. 머스트라인 뉴스라면 당연히 알고 있죠.”
“저렇게 얘기하면서 뭘 또 뜯어갈 작정인지 겁이 날 지경입니다. 하하. 뭐가 됐건, 이제 치킨게임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미스터 유가 보기에 누가 승자가 되고, 누가 패자가 될 것 같습니까?”
내가 부추기고 머스트라인이 격발한 2차와 3차 치킨게임. 2차는 메가 컨테이너선이 없는 선사들의 선박 확보 경쟁이고, 이제 막 시작된 3차는 선사들 간의 M&A로 덩치 키우기 경쟁이다. 누군가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울리히 사장은 그 결과 말고는 관심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내가 신혼여행을 왔다는 사실은 애저녁에 잊어버렸다는 듯이.
이 질문에 잘 대답하면 달콤한 콩고물이 떨어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 결과를 알지 못한다. 내 신통력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니까. 그냥 듣기 좋은 말이나 해주자.
“승자야 당연히 머스트라인이 되겠죠.”
“하하. 너무 당연한 대답이군요. 그럼 누가 패자가 될 것 같습니까? 이 치킨게임은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게임입니다.”
“글쎄요. 어려운 방정식을 내놓고 답을 내놓으라 하니 쉽게 답이 나올 것 같지 않군요.”
“이거 왜 이러십니까? 천하의 미스터 유가 그걸 모르면 누가 알겠습니까?”
“뭐, 굳이 답을 내보자면 1 국가 1 선사 체제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니까 한 나라에 복수의 컨테이너선사가 있으면 살아남기 어렵지 않을까…….”
“그럼 범위를 좁혀보죠. 미스터 유 말대로 복수 선사가 있는 나라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독일입니다. 이 중에서 누가 먼저 백기를 들 것 같습니까?”
“중국이야 말도 안 되는 보조금 뿌리는 곳이니 논외로 치고, 일본은 저들끼리 어떻게든 먹고 사는 곳이니까 또 빼고. 그럼 대만과 독일이 가장 취약한 곳이겠군요.”
“한국은요?”
“거긴 제가 있으니까 빼야죠. 전 제 밥상이 상하는 걸 원치 않거든요.”
“하하. 좋습니다. 그럼 컨테이너선사 3곳이 있는 대만과 2곳이 있는 독일. 하나만 고르라면?”
이 집요한 새끼. 신혼여행 왔다니깐, 스무고개를 하고 있네.
전생에선 우리나라가 백기를 들었다. 국제해운이 망하면서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경쟁이 머스트라인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이번 생에선 내가 국제해운을 살렸다. 그건 달라졌지만, 누구 하나 죽어야 한다는 머스트라인의 야심은 그대로다. 그렇게 해서 경쟁을 완화시키겠다는 전략 앞에서는 꼭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
그걸 나 보고 맞추라고? 에라, 모르겠다.
문득, 일본 출장 직전에 김태우 본부장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하팍로이드가 메가 컨테이너선 발주하려고 하는데, 느낌이 안 좋아서 입찰 안 들어가겠다는 말. 생각났으니 바로 지르자고.
“가장 취약한 곳은 대만 선사들이겠지만, 중국계 특유의 마인드, 섬나라라는 대만의 특성, 중국에 밀리지 않겠다는 자존심 대결 등을 고려하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겁니다.”
“오호라. 그럼 한 곳으로 좁혀지는군요?”
“네, 제가 봤을 땐 패자는 독일. 세계 6위인 하팍로이드가 될 것입니다.”
“하하하.”
“맘에 드는 답변입니까?”
“제 생각과 똑같으니 어찌 맘에 들지 않겠습니까!”
세계 6위가 망한다면 파급력이 엄청날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세계 8위 국제해운이 망하나 6위인 하팍로이드가 망하나 그게 그거겠지.
“하팍로이드가 정말 망할 것 같습니까?”
아 나, 아직도 스무고개가 안 끝났네. 오냐, 원하는 대답 다 해주고 몇 곱절로 뽑아내리라.
“재정상태가 가장 안 좋은 곳이니까요. 하팍로이드에서 메가 컨테이너선 발주하겠다고 우리와 사전 미팅을 몇 번 했는데, 대화가 쉽지 않았습니다.”
“거긴 돈이 없습니다. 독일 정부에서도 더 이상의 구제금융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죠. 그런데도 메가 컨테이너선 발주하겠다고 허세 부리고 있는 것이죠.”
“네. 그쪽 말로는 함부르크수드랑 중위선 선사들과 합병하면 괜찮아진다고 하지만, 우리가 담보 없는 말 몇 마디로 메가 컨테이너선 건조에 들어갈 수 없죠. 아니나 다를까 함부르크수드는 머스트라인으로 넘어가게 됐고…….”
“잘 하셨습니다. 하팍로이드가 메가 컨테이너선 발주한다고 해도 절대 받으면 안 됩니다. 그건 똥 중의 똥입니다.”
“하팍로이드 망하라고 제를 지내는 것 같군요. 뭐, 울 사장님의 간절한 바람이니 따라줘야죠. 하팍로이드가 우리와 협상하자고 해도 거부하겠습니다.”
“하하. 역시 미스터 유는 효자손 같은 사람입니다. 그대 덕분에 우리가 승자가 된다면 과실을 확실하게 나눠드리겠습니다.”
“지금 나눠줄 것은 없습니까? 대체 결혼선물은 언제 주려고 그럽니까?”
“맘에 드는 답변을 들었으니, 준비한 선물을 드려야죠. 자, 기대하시라.”
저번처럼 장난감 주면 진짜 가만 안 있을 거다.
선물을 주겠다는 울리히 사장이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가서 뭔가 들고 와야 하는 거 아닌가?
“울 사장님, 선물 준다면서요.”
“자, 선물 나갑니다. 덴마크를 대표하는 기업 하면 어디가 떠오릅니까?”
“아 나, 진짜. 또 질문입니까?”
“일단 얘기해 보세요.”
“머스트라인이죠.”
“땡. 머스트그룹입니다. 우리 머스트라인도 거기 소속된 계열사일 뿐이죠.”
“그래서요?”
“머스트그룹은 해운, 에너지, 항만, 물류, 금융까지 안 하는 것이 없습니다.”
“회사 소개야 지겨울 정도로 들었습니다. 본론 들어가시죠.”
“우리 프렌드에게 줄 선물이 뭐가 있을지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저는 언제까지 참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하. 자, 선물을 공개하겠습니다. 머스트그룹의 금융계열사들이 대흥중공업 지분을 조금 가지고 있습니다. 하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콩닥거리고 흥분되죠?”
아,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신병교육대에서 일주일 넘게 응아를 못하다가 군대리아를 먹고 구렁이를 뽑아낸 기분이랄까?
울리히 사장 말에 나보다 더 격한 열기를 내뿜는 이는 당연히 이유선이었다. 지겹고 지루한 질의응답 시간을 버티다 대흥중공업 지분 얘기를 들었으니 흥분을 억누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침착해야 한다. 흥분하면 삼류다. 테이블 밑으로 이유선의 허벅지를 지그시 누르며 자제시킨 후 입을 열었다.
“대흥중공업 지분이 있다는 게 어떤 의도로 하신 말씀입니까?”
“에이, 프로끼리 왜 이럽니까? 나는 미스터 유의 눈빛만 봐도 뭘 바라는지 훤히 알고 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게 뭔데요?”
“대흥중공업 인수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게 그렇게 티 났습니까?”
“하하. 나는 앉으나 서나 미스터 유 생각뿐입니다. 대흥중공업 지분 탐나지 않습니까? 2.3% 정도 되는데 말이죠.”
2.3%나 가지고 있어? 이 사랑스러운 녀석. 이제부터 유일조선과 머스트라인은 혈맹을 넘어 한 몸이 됐음을 선언하는 바이다. 그러니 그거 내놔.
“이게 결혼선물입니다. 앞으로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십쇼. 바로 위임장 써서 보내드리겠습니다. 내가 그룹 내에서 그 정도 파워가 있습니다. 하하.”
“앞으로 머스트라인이 발주하는 선박은 무조건 세계 최고로 만들겠습니다.”
“곧 죽어도 싸게 주겠다는 말은 안 하는군요.”
“그건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하하. 뭐, 앞으로도 우리 머스트라인과 유일조선, 그리고 그대와 나의 우정이 오래오래 변치 않았으면 합니다.”
“악수 한번 진하게 하죠.”
“품절남 된 기념으로 포옹이나 하죠.”
인어공주 상 안 봐도 좋다. 바이킹박물관 안 가도 좋다. 아주 괜찮은 신혼여행이었다. 마이 피앙세도 동의하지?
“그러니까 그 사장 말이 2.3% 지분을 우리 쪽에 붙여준다는 거지?”
“그렇지, 그렇지. 그거 엄청난 거야.”
“나도 알지. 근데 그 사장은 오빠한테 왜 그리 호의적이야? 머스트라인한테서 받은 발주만 150억 달러가 넘는다면서?”
“글쎄다. 내 인간 됨됨이에 반했나?”
나도 궁금하긴 하다. 울리히 사장은 부사장 시절부터 내게 호의적이었다. 뭐, 사람이 사람 좋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나도 그 양반한테 할 만큼 했으니, 윈-윈이지.
***
우리의 신혼여행은 영국으로 넘어가 히스로공항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 여사님, 신혼여행 어땠어?”
“색다르고 좋았어. 근데 다음에도 이렇게 하라면 안 한다고 할 것 같아.”
“신혼여행에 다음이 어디 있어! 한 번뿐인 경험이니 색다르게 준비해 봤어. 이런 내 노력을 알아봐 줬으면 좋겠네.”
“그래, 준비하느라 고생했어. 참고로 난 덴마크가 제일 좋았어.”
“나도.”
그렇게 열흘간의 유럽 일주를 끝내고 일상으로 복귀했다.
회사는 아무 이상 없이 잘 돌아갔고, 내 책상에는 일이 잔뜩 쌓여있었다. 이 형용 모순된 현상에 일상 복귀가 수월할 수 있었다. 이놈의 잡무 인생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이런저런 소소한 일들 사이에서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며 달력에 새겨진 2014가 2015로 바뀌었음을 알렸다.
정말 다사다난했던 2014년이었다. 2015년은 안 그럴 것 같냐고? 내가 봤을 때, 2015년은 아주 다이나믹할 것 같아.
내가 이 세상에서 두 번째 삶을 영위한 지 10년째 되는 해다. 10년 차 기념식 한번 성대하게 열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