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3)
3화 – 영업의 기본 (1)
이 냄새, 정말 오랜만이다.
이 중소스럽고 제조업스러운 냄새. 가만히 있어도 쇳가루와 용접 똥을 믹스한 칵테일 한 잔 마신 것 같은 기분이다. 으음 그래, 이게 통영의 참맛이야.
이 시기 유일조선은 겉과 속이 다른, 그렇지만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기업이었다.
외형은 창립 5년 만에 매출 1조 원 돌파라는 무지막지함을 선사했다. 그러나 빠른 성장만큼 내실이 다져지지 않았다.
편의점 가서 담배를 사도 신분증 검사 안 할 정도의 액면가이지만, 이제 막 변성기가 찾아왔다고 할까?
핵심 중의 핵심인 설계나 생산은 높은 급여를 제시하며 대기업 임원들을 스카우트한 덕에 흠잡을 데가 없었다. 역시나 문제는 대부분의 중소, 중견기업이 그렇듯, 페이퍼워크이다.
전생에 이 회사를 다니면서 아쉬웠던 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홍보나 대외협력은 당연히 엉망이었고, 시황 분석과 금융 쪽은…… 에휴, 생각을 말자.
솔직히 유일조선은 아주 괜찮은 회사였다. 신생인데도 배 잘 만든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단기간에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조선사가 된 것은 대단한 일이 분명하다.
그런데 결과는 공중분해. 금융위기 터지고 나서 무려 10년을 개고생한 결과가 그랬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죽이든가…….
금융위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냐면, 3년 동안 무려 2조 원이 넘는 적자가 났다. 4년차에는 매출을 뛰어넘는 손실을 기록하기도 했다. 겨우 막았다 싶으면 또 적자, 계속 적자.
허리띠 졸라매고 버티면 어찌어찌 극복할 수는 있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버티고, 밥이 없으면 나무껍질 뜯고 먹으면 되니까.
“이 팀장아! 우리 참치선망선 수주했어!”
“참치선망선? 그거 어선 아니야? 상선 만드는 곳에서 그건 쪽팔린 일인데…….”
“그래도 이게 나름 고부가가치선이야. 교체수요도 많아서 이번 건 잘 성사시키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거야. 우리 힘내자!”
“하긴 우리가 찬 물 더운 물 가릴 때가 아니니까. 그런데 은행에서 허락을 해 줄까?”
모든 노력이 다 허사였다. 그 순둥이 유연성이 처음으로 쌍욕을 퍼부을 정도로 은행 놈들이 사사건건 방해를 했다.
조선업은 금융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은행은 그냥 갑 오브 갑이자, 최고경영자야. 이 바닥 생리가 그래.
은행 놈들 때문에 천문학적인 적자가 났는데, 그걸 만회해 보려는 노력도 은행이 막아섰다. 개새끼들.
질투가 문제의 발단이었다.
유례없는 호황으로 해운ㆍ조선업이 떼돈을 벌기 시작하니, 배가 아팠던 모양이다. 얼마 안 되는 이자놀이로는 성에 안 찼던 것이겠지.
은행들은 미국 월가놀이에 빠져 파생상품을 끼워팔기 시작했다. 그 악명 높은 ‘키코’ 말이다.
“유 이사!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하아. 환율 떨어질 것만 걱정했지, 이렇게 폭등할 줄은…….”
“이건 환헤지 상품이 아니라, 졸라 위험한 파생상품이라고! 내가 이거 가입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아니, 대체 몇 개나 가입한 거야? 돌겠네, 진짜.”
“정수야. 이거 극복할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안 돼. 만기 3년짜리도 있잖아! 앞으로 계속 손실이 불어날 수밖에 없어. 아, 진짜 힘 빠진다.”
남해안 일대에 자리한 그 많은 조선소들이 키코 때문에 죄다 망해 버렸다. 그 중 단연 최고는 유일조선이었다. 무슨 시발, 금융 파생상품 때문에 2조원 손실이 나냐고!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키코는 그런 괴물이었다. 유일조선은 그 엄청난 손실을 감당하지 못 했다. 아니,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때를 생각하니 또 울분이 치밀어 오른다. 은행들이 상품 설명만 제대로 했어도! 가입 안 하면 앞으로 재미없을 것이라며 협박만 안 했어도!
그래놓고 은행 놈들은 빚을 갚을 수 있는 활동마저 막아섰다. 채권단 회의에서 그 놈들이 한 얘기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거, 우리도 손해가 커요. 채권 다 회수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으니, 일부라도 회수할 수 있게 당장 청산절차 밟읍시다.
-수주 재개하면 뭐합니까? 그거 만들수록 손해 아니에요? 지금도 빚이 산더미인데, 빚을 더 늘리자고? 제정신입니까?
-차라리 자산가치 더 떨어지기 전에 청산해서 한 푼이라도 더 건지는 게 낫죠. 직원들 희망 고문시킬 필요도 없고. 안 그래요?
손해가 크기는, 호랑말코 같은 놈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으면, 회사 회생에 쥐똥만한 도움이라도 줬어야 하는 것 아니야?
채권 그거 다 키코 때문에 생긴 것이잖아! 어찌됐건 빚이니까 배 만들어서 갚겠다고 하잖아! 근데 왜 그것도 못 하게 하냐고!
에잇, 돈에 환장한 놈들한테 양심 찾는 내가 잘못이지. 그래, 개새끼들아. 내가 잘못했다. 내가 아주 큰 잘못했다고!
전생에 나를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게 만들었던 그 키코사태가 내년부터 시작된다.
내년에 가입한 키코 상품이 내후년 환율 급등에 미쳐 날뛰는, 그야말로 대환장 파티가 펼쳐질 것이야. 리틀보이 한 방으로도 부족해서 팻맨까지 기꺼이 맞아버리는……. 어휴, 끔찍해.
내년에 파는 키코 상품들은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한다. 은행 지점장 불알을 터트리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면 발바닥을 핥는 한이 있더라도 쳐다보지 말자.
이것도 나만의 미션으로 하나 만들자고. 키코 가입을 막아라! 혼자 하는 미션놀이도 나쁘지 않아. 뭐가 됐건, 이제부터 할 일이 참 많겠어.
나는 비장한 각오로 사무동에 입성했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그야말로 대자연의 힘이 그대로 느껴지는 단열 제로 사무실. 이 회사 처음 들어왔을 때 느낌이 확 살아난다. 쌈마이한 이 느낌 괜찮아.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에 몰린다.
“안녕하세요. 경영지원실장 유연성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웅성웅성.
경영지원실장.
아버지가 드라마에서 얼마나 큰 감명을 받았는지, 있지도 않은 경영지원실을 만들어 나를 실장으로 앉혔다. 생산을 제외한 전 부서를 관할하는 역할이란다. 딱히 할 일이 없다는 소리겠지.
사회 경험이라곤 1도 없는 20대 병아리에게 입사하자마자 실장 자리라. 무슨 당나라 기업이냐고 하겠지만, 우리나라는 그래도 된다. 왜냐? 우리나라니까.
대리로 자기소개를 했다가, 밥 먹으면서 부장이 되고, 퇴근할 때 상무가 된다. 일하러 갔다기보다 물려받을 재산 실사하러 갔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그냥 실장이 됐다.
그러고 보면 이번 삶의 목표가 생각만큼 헬은 아닌 것 같다. 수많은 난관과 고난과 시련이 있겠지만, 일단 밭 자체는 나쁘지 않으니까 말이다.
자, 이제 실장의 하루를 시작해 볼까? 오너 2세라면 응당 실장부터 시작이지.
첫날은 아주 바쁘게 흘러갔다. 사무실 쭈욱 돌아다니며 인사만 했는데도 오전이 다 지나가 버렸다.
함께 지지고 볶으며 일했던 사람들이지만, 처음 본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다. 저들은 당연히 나를 처음 봤을 테고.
하하호호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도 난 부지런히 살릴 놈, 죽일 놈을 매의 눈으로 구분했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는 날이 와도 결국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이 사람답지 않다면 죽여야지.
알고 보면 착한 사람이라더니, 회사가 위기에 처하니 본색이 드러나더라. 악성종양 같은 놈들, 내가 다 기억하고 있다.
배가 난파하기도 전에 똥 싸고 도망친 쥐새끼들이 저기 있었네? 채찍이 어디 있더라.
아이쿠, 저분은 우리 배가 난파 중인데도 다라이로 물 퍼내며 고생한 분 아닌가! 요즘 당근이 제철이라는데 한 입하시죠.
룰루랄라 살생부를 쓰며 다음 장소로 발길을 돌렸는데, 가슴팍에서 쓰린 기운이 확 밀려왔다.
이놈의 믹스커피. 부서 방문 때마다 제공된 믹스커피를 연거푸 마셨더니 속이 적잖이 쓰려온다. 회사 돈 벌면 커피머신 몇 개 들여놔야겠다. 아후, 속 쓰려.
쓰린 속을 부여잡으며 회장실을 찾아갔다. 그래도 회장실은 좋은 차가 나올 것이란 기대감을 가지며.
“어, 그래, 아들. 인사할 곳은 다 했어?”
“아직 못 찾아간 부서가 많습니다. 우리 회사가 이렇게 큰 곳인 줄 몰랐습니다.”
“허허. 조선소라고 하니까 돛단배나 만드는 곳인 줄 알았더냐?”
아버지는 입으로 타박 섞은 말을 내뱉었지만, 얼굴로는 웃고 있었다. 자신이 세운 회사가 이렇게 컸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을 테지.
아버지요. 제가 지금보다 몇 배 더 키울 테니까 팍팍 좀 밀어주시죠. 일단 지금 이 시간에 꼭 해야 할 말부터 하고.
“시간 됐으니 식사부터 하러 가시죠.”
“그렇지. 밥은 먹어야지.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니냐. 허허. 너도 낼부터는 여기서 삼시 세끼 다 해결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해. 알겠어?”
멀쩡한 집 놔두고 회사에서 세끼를 다 해결해야 한다니!
이 바닥 생리가 그렇다.
아침 6시 반에 새벽밥 지어먹고 국민체조 거하게 한 다음에 죽어라 일하고. 점심 먹고 나면 컨테이너 박스로 들어가 꿀잠 잤다가 또 죽어라 일하고. 저녁 양껏 먹고는 또 죽어라 일하고.
조선소에서 일하면 억대 연봉도 우습다고 하지만, 그게 다 시간과 체력을 땀으로 바꿔 얻어낸 결과일 뿐이다. 돈 잘 번다고 이 동네 찾아왔다가 하루 만에 도망간 사람들 부지기수다. 베링해 대게잡이보단 낫겠지만, 이 바닥 일도 근성 없이는 버티기 힘든 곳이다.
그 고생을 하며 이 업종을 세계 1위로 끌어올렸는데, 3D업종이니 사양산업이니 하면서 죽여 버린 그놈들 가만 안 둘 테다. 돈과 권력 가진 놈들 말이다.
“밥 먹으러 가자고 해놓고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 거냐?”
“아, 네. 가시죠.”
회사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가니 이건 꼭 말해야겠다. 잡아 족칠 놈, 주리를 틀 놈, 죽일 놈 뭐 많지만, 내 원통함 달래는 것이 먼저 아니겠는가!
“회장님. 회사 식당이면 회사에서 직접 운영을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뭐라고?”
“이걸 외주로 돌릴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어차피 회삿돈으로 운영하는데, 회사가 재미를 봐야지, 함바집 사장이 재미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 유연성 실장의 취임 일성인가? 허허허.”
아버지, 저 진지합니다. 궁서체로 말하고 있어요. 내가 함바집 맡았다가 빚더미에 나앉았다구요.
“아들아. 이게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러는 것 아니겠냐. 이 회사가 내 회사지만, 모른 척, 눈감아줄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야.”
“어른들의 사정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사장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너트 하나까지 신경 쓰고 다니면 직원들이 숨을 못 쉬어.”
아웃소싱을 늘리는 이유는 뻔하다. 이해관계가 아름답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퇴직 임원들한테 하청 하나씩 맡기면서 관리도 하고, 뒷돈도 짭쪼름하게 만들고.
전생에 유연성이 나한테 함바집 운영 맡으라는 제안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 좀 챙겨주겠다는 목적이 제일 컸지만, 뒷방 노인네들한테 돈 그만 뜯기고 회사 운영 투명하게 해 보겠다는 의지의 일환이기도 했다. 결과는 처참했지만…….
그러니까 아버지의 말은 우리 회사가 자리 잡는데 고생한 전직 임원들이 적당히 빨아먹는 건 내버려 두라는 것이구만?
난 그렇게 못 하지! 2년 뒤부터 회사가 말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빈대와 거머리까지 사랑해 줄 순 없다고.
초반엔 숨죽이고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칼춤 출 때는 춰줘야 관객들이 환호하는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