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writer! RAW novel - Chapter 85
나는 작가다 085화
85화
투고, 소개, 컨텍 등을 위한 원고가 서른 작품이 넘어갔다.
내가 이탈리아를 오가는 사이 일들 한 번 오지게도 했다.
날 잡고 서른 개가 넘는 원고를 싹 훑어봤다.
개중에 꼽은 건 네 작품이었다.
엘라임의 딸.
물의 정령왕인 엘라임과 그가 사랑하는 인간 사이 자식을 갖고 싶어 했다. 그걸 위해 엘라임이 자신의 기운을 떼어내 아내와 자신을 닮은 새로운 정령으로 창조시키고, 영혼을 불어넣는 의식으로 대한민국 고등학생이 환생한다는 내용.
드래곤을 주인공으로 했던 소설 중 유명한 작품인 카린 이야기의 양진아 작가가 쓴 원고였다.
푸른숲 출판사에서 이진우가 담당하던 작가였는데, 그가 신작을 받아서 우리 출판사와 계약하도록 이야기를 해보며 받아온 원고였다.
흔히 물의 정령왕 하면 나중에 많은 독자들이 가야 출판사에서 환희 작가가 냈던 정령왕 엘라이네만 생각했지만, 물의 정령왕 하면 당연히 이게 처음이지 않았을까 싶던 작품이다.
“이 작가님이라면 여성 특유의 문체를 진민화 작가보단 좀 가벼우면서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써서 괜찮았지.”
만약 데려올 수 있다면 데려오고 싶었다.
두 번째 작품은 살수.
이는 성용 형님이 담당하던 운봉 작가의 신작이었다.
정말 쉬지 않고 진행되는 추적과 암살, 그런 잔혹하고도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유쾌한 위트가 있는 작품.
운봉하면 무협 독자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인생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듣기로 푸른숲과의 계약서가 남아 있긴 하지만, 아직 원고는 자신만 보여줬기에 성용 형님이 운봉 작가와 이야기해서 계약금만 털어줄 수 있으면 우리 쪽과 계약하고 싶단다.
“그러고 보니 회귀하기 전 꽤나 구설수에 오르셨지.”
불법 다운로더들에게 합의금을 받아내는데, 색출하는 과정에 대해서 꽤 호불호가 갈렸다.
‘당연히 자기 작품 불법으로 다운받는 애들을 잡기 위해서 작가가 나선 게 무슨 잘못이냐?’와 ‘이런 식의 함정 수사는 옳지 않다’라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난 전자에 한 표를 들었다.
솔직히 불법 다운로드를 하지 않으면 걸릴 일도 없었을 거다.
종이책을 대여점에서 빌려서 보든, 나중에 유료 연재 시장이 열려서 편당 100원을 내서 보건.
진정한 독자들은 작가가 작품을 쓰느라 한 고생에 대해 금전적인 대가를 치르고 봤다.
한데 불법 다운로드를 하는 독자들이라니.
심지어 우리나라 저작권의 인식이 얼마나 구리면 인터넷에선 오히려 돈 내고 보는 독자들을 바보로 취급하는 이상한 인간들도 많았다.
당연히 독서의 재미를 얻기 위한 대가로 지불하는 독자들의 피와 살과 같은 금액을.
거기에 대해서 떠올린 난 법무법인 광해가 생각났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회사 저작권 관리를 맡긴다고 말해야 하는데.”
운봉 작가 같은 구설수가 나오지 않도록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법무법인에게 저작권 관리를 맡길 생각이었다.
당연히 불법 다운로드를 근절하기 위한 관리도 마찬가지였다.
대형 로펌에서 전문적으로 처리해 준다면 작가들이 구설수에 오를 이유도 없거니와 더욱 타이트하게 근절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정한 두 번째 작가는 운봉이었다.
세 번째로 꼽은 원고는 ‘서리늑대들’.
동태 출판사라는 곳에서 블랙문을 연재한 이후 잠잠하더니 페이퍼 출판사에서 출간한 유승현 작가의 서리늑대들은 흔히 먼치킨이라 불리는 다른 소설들처럼 엄청나게 강해서 다 때려 부수던 것과 다르게 캐릭터들의 생동감과 위트로 꽤나 팬덤을 두텁게 형성한 작품이었다.
이후 그 팬덤은 10년이 넘어도 유지됐는데, 때마침 그 유승현 작가의 원고가 들어온 것이다.
아마 내버려 둔다면 페이퍼 출판사에서 출간한 다음 승승장구할 작가.
눈앞에 있는데 놓치면 호구지.
세 번째 계약 작품으로 따로 빼뒀다.
그리고 마지막 강백 작가의 ‘천사도’.
악마를 사랑한 천사가 천사의 길을 포기한 채 인간계로 도망쳐서 시작하는 소설.
사실 이건 그리 유명하지 않았다.
강백 작가의 이름값을 제대로 알리기 시작한 작품은 ‘올라운더’라는 게임판타지였으니까.
모든 스킬을 마스터해서 홀로 모든 포지션을 집어삼키는 먼치킨 게임판타지인 올라운더.
이후 ‘아일랜드 온라인’과 ‘너의 머리 위로 보여’라는 소설로 유명세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 외에 19금 소설도 집필했다.
천사도 자체는 그리 잘나가지 않았지만, 미래를 보고 결정한 마지막 작가 ‘강백’.
그렇게 네 명의 작가를 계약하라고 성용 형님에게 넘겼다.
한마디와 함께.
“작가님들이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금전적인 지원도 아끼지 말아주세요.”
집필 환경이 여유로워야 작품이 잘 나오는 법이니까.
이후 난 ‘대표’ 작가로서 업무를 마치고, 이제 대표 ‘작가’로서의 업무를 시작했다.
집필을.
* * *
2002년 5월.
월드컵 개최일인 말일이 걸린 달.
아직까지도 자국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개최국이란 이유로 정부만 이리저리 뭔가 바쁘게 움직일 뿐.
대다수 인식이 그랬다.
‘그래도 개최국인데 본선 정돈 진출하면 안 되나.’
개최국이란 이유로 대한민국과 일본이 참가 자격을 둔 대회 없이 자동으로 예선 참여 국가로 정해져 있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예선을 뛰게 됐으니 본선 꼴찌라도 좋으니 좀 진출했으면 은연중 바랐다.
반면 장르 독자들은 반응이 달랐다.
다들 내 작품인 판타지스타와 소실을 받아들이면서.
-와, 진짜 월드컵이 이렇게 되면…….
-이준경 작가님이 쓴 판타지스타처럼 되면 소원이 없겠다.
-제발, 소설만큼만 해라. 안지훈!
-작가님을 믿는 만큼 안지훈 선수도 믿어봅시다!
-작가님도 양심이 있어서 차마 4강에서 끝냈네.
-그러게. 이왕 가는 거 우승까지 시켜주시지.
-양심 문제야, 양심!
이게 대다수 판타지스타를 읽는 독자들이 월드컵을 앞둔 반응.
이후 내 소식에 대한 반응은 이랬다.
-와, 미쳤다. 이탈리아 진출한 판타지 소설이 있었나?
-아니, 축구 소설이지. 이게 무슨 판타지야?
-근데 안지훈이 해내는 성적 보면 판타지 맞음.
-맞아, 저게 어떻게 현실로 가능해?
-어쨌거나 우리 작가님 이탈리아에서도 대박 나시면 좋겠다.
-현재 이탈리아 유학 중인 학생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지금 이준경 작가님 작품인 판타지스타 엄청 반응이 뜨거워요.
반응이 뜨겁다.
맞다.
저번 달에 칠리아노 출판사에서 판타지스타가 출간된 이후 현재 30만 부까지 증쇄한 상황이었다.
사장 말로는 이미 흐름을 탔으니 100만 부도 노릴 만한다고 했다.
“마법학교 같은 거 써보고 싶었는데, 그 성적을 축구 소설로 찍을지도 모른다니. 참나.”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는 칠리아노 출판사 사장.
이왕이면 처녀작인 황제 로키 같은 걸로 찍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는데, 내 작품 중 역대급 기록을 축구 소설이 찍게 생겼다.
“100만 부만 찍으면 성용 형님은 내 작품 다른 것들도 번역해서 전 세계로 뿌리자고 하는데, 이건 잘될는지 모르겠구만.”
만약 판타지스타가 이탈리아에서 100만 부가 넘고, 계속해서 증쇄를 하며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충분히 다른 작품들도 그 네임 밸류에 탑승해 팔 수 있으리라 여겼다.
어디까지나 판타지스타가 베스트셀러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판타지스타 게시판과 사이월드 홈피에 적힌 댓글들을 확인하던 중 전화가 왔다.
또로롱.
누군지 확인했더니 이경수 팀장이다.
“예, 팀장님.”
“작가님, 축하드립니다.”
“예?”
전화하기 무섭게 갑작스러운 축하.
갑자기 웬 축하냐는 듯이 반응하자 이경수가 말했다.
“판타지스타요. 이탈리아에서 출간하셔서 성공적인 가도를 달리고 계시더라고요.”
“하하, 감사합니다. 근데 그거 축하하려고 전화하셨을 리는 없고…….”
“용사무적 결과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그래, 그럼 그렇지.
전화한 이유가 다 있었다.
용사무적의 결과.
전에 증쇄 이야기를 한 번 했는데, 그게 어디까지 늘어났는지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오, 증쇄했단 소식까진 들었는데 지금 몇 부까지 팔렸나요?”
“현재 13,000부까지 팔렸습니다.”
“증쇄 많이 했네요. 그럼 인센티브는 15%겠네요.”
6천 부를 넘기고서부터 천 부당 1%의 인센티브.
그게 13,000부이다 보니 7%가 이제는 15%가 됐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연락을 드렸습니다.”
증쇄 인센티브 때문에 전화를 했다.
어디서 많이 본 패턴.
푸른숲 때와 같았다.
뻔히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면서도 난 일단 모르쇠로 일관했다.
“뭐죠?”
“전 정말 우리나라를 대표한 라이트노벨이 이리 성공적인 것에 대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본론만요.”
“사실 13,000부 이후로 2천 부 주문이 더 들어왔습니다.”
추가 주문이 더 있었다.
그것도 무려 2천 부나.
“즉, 15,000부에 17%네요.”
“예, 근데 왠지 더 팔릴 것 같습니다.”
15,000부를 찍고도 더 팔릴 지도 모른다.
이 정도 들었으니 적당히 아는 척해 줄까 싶었다.
“본론은 계약 내용 변경이겠군요.”
“죄송하지만 맞습니다.”
“이경수 팀장님 생각이신가요?”
“아닙니다. 전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우리 LT노벨의 이름값을 올릴 투자로 생각하면 절대 손해 보는 게 아니니 그대로 진행하자고 말씀은 드렸습니다만…….”
오히려 자신은 이게 대한민국 라이트노벨의 위상을 떨칠 기회이니 손해를 보더라도 좀 더 투자하자고 말했단다.
사실 내 생각도 이경수와 같았다.
차라리 손해를 좀 보더라도 용사무적 1권을 바짝 팔아먹은 다음에 2권부턴 조금 양해라도 구하는 쪽이 낫지 않나 싶었다.
그럼 LT노벨의 네임밸류도 올라갈 테니, 다른 작품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테니까.
하지만 이경수가 말하길 윗분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윗분들이 손해를 감수하기 싫으신가 보군요.”
“맞습니다. 앞서 복간한 작품들이나 새로 일본에서 가져온 작품 모두 만 부를 넘기지 못했으니까요. 괜히 용사무적에 투자해도 다른 작품들이 망하면 어쩌나 싶더군요.”
“그래도 그 작품들도 증쇄하지 않았나요?”
“하긴 했는데, 용사무적에 비하면 미비한 결과라 별로 내켜하지 않더군요.”
어차피 다원 출판사는 굳이 라이트노벨에 목매지 않아도 만화책으로 꽤 큰 수익을 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난 그만 본론으로 돌아갔다.
“어쨌거나 둘 중 하나겠네요. 더 이상 증쇄를 안 하거나 아니면 제가 변경할 조건을 받아들이던가요?”
“혹시 변경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가 될지 모르겠지만, 썩 내키진 않네요.”
“역시…….”
자신 역시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걸 예상했다는 이경수의 반응.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찌 될지 물었다.
“그럼 이제 13,000부로 그치는 건가요?”
“제 권한 밖이라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이경수 팀장님께선 권한만 쥐어지면 한국에서 라이트노벨 장르가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게 하시겠군요.”
“하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전 윗분들의 선택을 바꿀 만한 힘없는 일개 팀장인 걸요.”
자신은 윗분들의 선택을 바꿀 힘이 없는 일개 팀장이라……, 왠지 모르게 그 말을 하는 이경수의 목소리에서 다소 회의감 같은 게 느껴졌다.
자기가 소속된 출판사에서 회의감을 느끼는 능력 있는 직원.
이런 직원을 알아봐 주지 못하는 출판사가 애석했다.
그 애석함에 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경수 팀장님께서 저희 회사로 와서 용사무적 2권을 책임져 주시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