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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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식의 모습이 사라지자 윤수로는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불현듯 서러운 감정이 밀려왔다. 엄밀히 말해 이번 탄핵 기각 결정은 헌법재판관으로서 헌법과 법률에 어긋나는 정치적 판단이었으니까.
탄핵 기각 논리를 구성하는데 오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월권이었던 것이다. 그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어쩔 수가 없었어…….’
그는 김범석이라고 한, 자신을 유지웅의 오른팔로 소개한 담성그룹 임원을 만난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김호 대통령은 청와대로 복귀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나라의 진정한 헌법 정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범석의 주장은 빈틈 없는 설득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야 분노한 김호 대통령이 재계를 향해 칼날을 휘두르고 많은 유혈이 흐르게 됩니다. 이 나라를 좀 먹는 가장 큰 부정들이 서로 편을 가른 채 싸우게 됩니다. 그 싸움이야말로 이 나라 헌법과 정의의 진정한 발전을 앞당기게 될 겁니다.
윤수로는 처음에 그 말을 듣고 혼자 웃었다. 아마 다른 재판관들도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헌법재판관이라 해서 모두가 깨끗한 것은 아니다.
당장 자신이 아는 몇 명만 해도 법관으로서의 양심보다는 권력과 재물을 더욱 탐하는 인물들이었다.
적어도 지금 설명한 것으로는 그런 부정한 재판관들을 포섭할 수 없다.
―만약 탄핵 인용 결정이 나온다면, 인용에 찬성한 분들은 앞으로 지구에서 보내게 되는 삶이 매우 고달파질 겁니다. 본인뿐만 아니라 6촌 이내의 모든 혈족이 똑같이 고달픈 삶을 누리게 될 겁니다. 적어도 제니스 컴퍼니는 그렇게 만들 힘이 있습니다.
그 말에 누구보다 흠칫한 것은, 바로 법관으로서의 정신을 오래 전에 잊어버린 몇 명이었다.
―그리고 탄핵을 기각하면 김호 대통령과 재벌들이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게 될 테고, 제니스 컴퍼니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나라의 부정부패를 뿌리 뽑을 겁니다. 공정하고 올바른 헌법 정신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도울 겁니다. 우리 역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
―잊지 마십시오. 기각에 반대한 분들은 6촌 이내의 혈족 모두가 차라리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고달픈 삶을 누리게 될 겁니다.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진정으로 이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는 재판관들은, 제니스 컴퍼니가 탄핵 기각으로 인해 이 나라를 어떻게, 얼마만큼 바꿀 수 있는지를 주목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자기 이익을 우선하는 재판관이라면, 기각에 반대했을 경우 어떤 보복이 돌아올지를 주목할 것이다.
그것이 만장일치 기각 의견이 나온 이유였다.
재계는 김호 대통령이 어떻게 나올지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그들은 마냥 숨을 죽이고 있지만은 않았다. 물밑에서 필사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인맥을 끌어들이며, 김호의 정치적 보복에 대응할 방법을 모색했다.
뿐만 아니라 제니스 컴퍼니에도 접촉을 시도했다.
재계는 탄핵이 기각된 게 제니스 컴퍼니에서 손을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채찍과 당근을 썼는지는 몰라도 헌법재판관 9인 전원을 포섭한 게 틀림없었다.
“넷은 돈이나 협박으로 끌어들일 수 있어. 하지만 남은 다섯은 그걸로는 안 될 텐데.”
이권에 예민한 네 재판관에 비해서 부러지지 않는 마음을 가진 다섯은, 웬만한 돈이나 협박으로는 끌어들이기 불가능하다.
대체 제니스 컴퍼니는 어떻게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을까?
“김호가 분명 엄청난 보복을 해올 거다. 아마 제니스 컴퍼니의 눈치도 보지 않고 움직이겠지. 아니, 자기를 풀어준 제니스 컴퍼니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마구 날뛸 게 틀림없어.”
김호가 재계를 족치면, 주인 잃은 기업들을 쇼핑카트에 주워 담듯이 유지웅이 나설 거라는 것이 재계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청와대의 반응은 고요했다.
마치 탄핵 자체가 없었던 일처럼, 김호는 어느 때와 다름없이 일상적인 국정회의를 열고, 정부를 운영했다.
바짝 긴장해 있던 재계가 슬슬 의아함을 품기 시작할 무렵, 마침내 일이 터졌다.
―속보, 데스케이 그룹 홍수원 부사장, 정부기밀누설 혐의로 체포! 해외 브로커와 접촉한 정황 포착해.
―속보! KTS 이진영 부회장, 정부산 위성 해외 매각 거래에서 거액의 리베이트 받은 혐의로 긴급 체포!
재계 유력 인사들이 하나둘씩 슬슬 체포되기 시작했다.
기업가들은 드디어 정치적 보복이 오는가 하고 바짝 긴장한 채 법정 공방을 준비했다.
이럴 때를 위해 그간 회사에서 벌여온 각종 부정특혜 등에 관한 방어 자료를 충분히 준비하고, 변호팀도 꾸려놓았다.
그러나 김호가 준비한 진짜 카드는 그들의 예상을 월등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검거한 기업가들을 수사한 결과, 국내 전략적 보호 기술들을 조직적으로 해외에 넘기고 이익을 챙긴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이는 일부 기업가나 경영가, 연구원 한둘의 일탈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군납 비리로 체포되어 조사 중인 장성들도 얽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호 대통령의 강경한 발표에 재계는 풀숲을 건드린 뱀처럼 크게 놀랐다.
일이 지나치게 커지고 있는 거 같은데?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정부는 조직적으로 국가 기밀을 팔아넘긴 모종의 카르텔이 형성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담성그룹의 군납비리 연루는 그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은 법망을 피해 악의적으로 오랫동안 이 나라의 근간을 팔아넘겨 왔습니다.”
발표문을 읽어내려가는 김호 대통령의 목소리에는 힘이 가득 넘치고 있었다.
“이들의 손길은 정부 도처는 물론이고 국회 내부까지 뻗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김호는 탄핵 통과 및 헌재의 기각 결정 역시 거리낌없이 언급했다.
“대통령 탄핵 소추안은 헌재에서 만장일치로 기각되었습니다. 이는 애초에 탄핵이 될 만한 사유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허술한 탄핵안이 만장일치에 가까운 열렬한 지지 속에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것에서, 그들 조직의 영향력이 국회까지 완전히 장악했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피할 수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대통령의 발표를 보고 있던 국회의원, 그리고 기업가들은 졸도할 듯이 놀랐다.
지금 청와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루비콘을 건너고 있었다.
“이들 카르텔이 저질러온 범행은 국가내란에 해당할 만큼 중대한 수준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들의 영향력은 재계, 행정부, 국회, 사법부, 검찰, 경찰, 학회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방면에 걸쳐 널리 영향력을 퍼뜨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저는 경찰과 검찰의 힘만으로는 그 뿌리를 뽑을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발표는 가파른 절정의 벽을 향해 오르고 있었고, 기자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발표 내용을 귀담아 들었다.
“이 카르텔을 실질적으로 지휘하고 지원해온 세력은 바로 투베 전 총리, 그리고 일본 자민당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을 끝낸 뒤 미처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잔재가 오랫동안 이 땅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미쳤다! 미쳤어!
―지금 이거 대통령 발표가 맞는 거야? 소수 야당에서 발언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 친일 잔재 세력에 김호 대통령도 들어가지 않나? 일본에서 태어났잖아.
―어차피 일본은 내전으로 정신없겠다, 이참에 자기 안위를 위해서 본진을 버리려는 거지. 원래 본진이 망하면 가장 부흥한 멀티가 새로운 본진이 되는 법이다.
“저는 대통령 하야까지 시도한, 일본발 카르텔 조직의 대담함에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 빌붙어 이 나라의 경제와 저력을 좀먹는 무수한 기업가, 정치인, 학자, 공직자 등의 존재에 비탄을 참기 어려웠습니다.”
―설마? 설마?
“이에 저는 국민 여러분께서 제게 위임해주신 국가통치권한에 기반하여, 이 자리에서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이들 카르텔의 존재를 발본색원하여, 이 땅에 정기가 살아있음을 온 국민들 앞에 보이고자 합니다.”
―진짜? 가나요?
원고에서 눈을 뗀 김호 대통령은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계엄이다! 계엄이 터졌다!
김호는 눈을 부릅뜬 채,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절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것은 한일전입니다, 국민 여러분!”
대통령 발표를 생중계로 지켜보던 김범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워 했다.
“역시 김호 대통령, 마냥 바보는 아니군. 꼼꼼하게 해처먹은 게 많은 만큼 꼼꼼하게 그림을 그릴 줄도 알아.”
김호는 자신을 몰아내고자 한 재벌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누구도 생각지도 못한 수를 두었다. 설마 이런 단시간 내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능성은 염두에 둘 수 있지만, 이렇게 빨리, 그리고 과감하게 나올 것은 전혀 가정하지 않았으리라.
“명분 만드는 실력도 나쁘지 않고.”
김호는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친일 카르텔을 들어 위기 상황을 강조했다. 본래 있지도 않았던 국가 내란은 이제 국민들의 눈앞에서 계엄이라는 둔갑을 뒤집어 썼다.
“헌재 만장일치 기각을 명분으로 잘 활용했군.”
애초에 만장일치로 기각될 탄핵을 강제로 밀어붙였다는 것은,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한없이 떨어뜨린다.
이제 국민들은 탄핵 소추에 찬성한 이들이 과연 카르텔과 연관이 있는지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김호가 국민들의 불신에 제대로 불을 붙인 것이다.
여기에 김호는 일본까지 끌여들이는 놀라운 기지를 발휘했다.
이것까지는 김범석도 가능성으로만 남겨두었을 뿐, 설마 실현되리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김호의 입장에서는 되돌아갈 다리를 완전히 불태워버리는 꼴이기 때문이다.
“일본에 남은 인맥을 완전히 저버리겠다는 건가. 아니면 일본의 인맥은 더 이상 거추장스럽기만 하다는 건가.”
어느 쪽이든 간에, 김호는 일본을 벗어나서 홀로 서기로 마음먹은 게 분명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자들에게 보복하기 위해서.
국내 명분은 완전히 김호에게 넘어갔다.
현재 국민들은 친일청산, 한일전이라는 단어에 완전히 도취돼 있는 상태였다. 그간 김호를 부정적으로 봤던 진보진영조차도, 이번에 한해서는 김호를 지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중이다.
―진정한 재벌 개혁을 위해서는, 이번만큼은 김호의 증오심을 이용해야 한다!
―김호가 좋은 마음으로 재벌들을 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이제이 작전으로 나가야 정의가 바로 설 수 있다. 김호를 쳐내는 것은 그 다음이다.
―어차피 김호 임기는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마지막으로 칼춤 한 번 신나게 추게 해주자. 그래야 재벌 개혁 완수한다.
존재하지도 않는 카르텔에 대한 선전포고에 한일전이라는 명분을 끼워 넣음으로써, 그간 존재감이 없던 김호는 단숨에 정국을 휘어잡았다.
김범석은 기도하듯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부디 주인님의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