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496)
00496 해답을 위하여 =========================================================================
「오직 하나 된 미합중국만이 작금의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굳은 힘이 담긴 목소리로 연설을 마치자, 사방이 떠나갈 듯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와아아!
칠드그린! 칠드그린!
페이커! 페이커!
VIP석에 앉은 비시는 환호하는 관중 틈에서 일일이 지지자들과 악수를 나누는 칠드그린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대통령으로서 한 마디 할 법도 하지만,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부통령이다.
“역시 칠드그린을 부통령으로 지명한 건 잘한 짓이었네.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각하. 대단한 선견지명이십니다.”
“무슨 선견지명까지야…….”
하지만 칭찬이 썩 싫지만은 않은지 비시는 좋아 죽는 표정을 감추진 못했다. 집권 중 가장 잘한 짓, 가장 효율적인 정책을 꼽으라면 역시 칠드그린을 부통령으로 지명한 일인 것 같다.
유권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칠드그린을 부통령으로 지명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의회에서 태클을 걸었고 공화당 내부에서도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식의 항의가 빗발쳤다.
그것을 잠재운 것은 단 한 장의 사진이었다. 유지웅과 칠드그린이 파텍필립 매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시계를 품평하는 장면에 모든 불협화음이 쏙 들어갔다.
‘제니스 회장과 같이 시계를 고르는 사이라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좀 알아 봐! 일개 첩보기관 부국장이 어떻게 제니스 회장과 인연이 있을 수 있냐고!’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남의 뒤를 캐기 좋아하는 파파라치들이 칠드그린이 운영해온 시계 동호회 사이트 및 회원 명단을 알아서 입수해 공개했다. 이십 년 간 운영해온 동호회 사이트에 유지웅이 가입한 것, 시계라는 공통점을 통해 사적인 친분을 다져온 두 사람의 국경과 나이를 초월한 우정(?) 등 자세한 전반 사정이 밝혀지자 분위기는 일순 돌변했다.
「음지에서 미국을 구한 영웅! 칠드그린 페이커!」
「미국의 숨은 칼, 페이커! 보이지 않는 검이 가장 무서운 법!」
「비시 정권을 승리로 CARRY한 영웅!」
미국만큼 영웅 좋아하는 나라도 참 없다. 백악관은 모든 힘을 총동원해 칠드그린 영웅 만들기에 나섰다. 공공기관, 언론 등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했다. 여기에 EIS도 자발적으로 나서서, 음으로 양으로 칠드그린 영웅 만들기에 가세했다.
「제니스 공격대장, 극적인 타협!」
「동호회장의 체면을 고려한 과감한 양보! 제니스의 마음을 움직인 놀라운 영향력!」
「페이커, 그의 모든 것을 밝히다!」
최윤은 제니스, 그리고 한국의 보물이다. 그런 자에게 옛 CIA 잔당이 미국 땅에서 또다시 테러를 가했다. 미국 정서상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유지웅은 가담자 및 관련자들의 인도와 전 재산 몰수 정도로 책임을 제한하겠다고 약속했다. 극적인 양보를 이끌어낸 게 칠드그린이 물밑에서 그를 설득한 덕분이라는 게 밝혀지자, 의회는 그의 부통령 지명에 전격으로 찬성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전미에 칠드그린 돌풍이 불었다. 그는 등장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강력한 대권 인사가 된 것이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칠드그린은 분리를 추진 중인 서부 10개 주를 일일이 방문해 설득에 나섰다. 특히 CIA의 테러로 초상집 분위기인 오리건 주에서는 진심 어린 사과와 관련자 체포를 통해 정의의 철퇴를 바로 내려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의 진솔한 태도에 설득당한 서부 10개 주는 결국 연방 분리를 철회하기로 결정을 했다. 칠드그린은 미합중국이 동서로 분리되는 것을 막아내는, 엄청난 공을 세운 것이다.
물론 속사정은 조금 다르다. 서부 10개 주는 유지웅의 후원을 입고 있다고 알려진 칠드그린의 뜻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미국의 혼란을 원하지 않는다.’는 칠드그린의 발언을, 유지웅의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칠드그린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분위기를 몰아간 것도 있고.
어찌 되었든 간에 하나 된 미합중국을 지켜 낸 칠드그린의 인기는 미국 내 어느 인물도 뛰어넘을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워싱턴 정가의 새로운 돌풍으로 떠오르며, 인기를 쓸어 모으기 시작했다.
* * *
CIA 잔당 체포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기껏해야 행동 요원들 일부만 검거하는데 성공했다. 머리라고 할 수 있는 토미 에슨이나, 주요 간부인 트위스트 베이트 같은 인물은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잘도 수배망을 빠져 나갔다.
한국은 출입국 검색망을 대폭 강화했다. CIA 잔당은 단 한 명도 한국 땅에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모든 외국인의 열 손가락 지문 및 사진 등록을 의무화하자 국제 사회에서 불만이 빗발쳤다.
그러나 과거 CIA로부터 효웅산업이 테러당한 것, 그리고 CIA 잔당이 최윤을 제거하기 위해 파울러 시티까지 날려버린 일은 한국의 검색망 강화에 훌륭한 명분이 되어 주었다.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자국 및 자국민을 지키겠다는데야 어쩔 수 없었다.
한편 유지웅은…….
“김 실장님, 오셨습니까?”
“재희는?”
“안 그래도 막 출근했습니다.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뒤늦은 유흥(?)에 맛을 들인 그는 요즘 일주일이 멀다 하고 강남 룸살롱을 드나들었다. 이곳 출입문을 넘어서는 순간 그는 유지웅이 아닌, 돈을 펑펑 쓰고 다니는 철부지 재벌3세가 된다. 그리고 정효주도 룸으로 들어오는 순간 현숙한 그의 아내가 아닌, 재벌3세만 상대하는 고급 술집 아가씨가 된다.
상황극을 좀 더 재미있게 즐기기 위해서 둘은 규칙을 정했다. 바로 일체 서로 말을 하지 않는 것. 무슨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보는 것도 아닌데, 어설프게 꾸며낸 대사를 읊어봤자 분위기만 깨진다.
아무 말 없이, 진짜 술집 아가씨인양 조용히 술을 따르고, 진짜 재벌3세인양 스커트 사이로 손을 넣고 주물럭거리면서 질펀하게 즐기는 것이다.
물론 그게 집에서 하는 거랑 뭐가 다르냐는 반문이 나올지 모른다. 하지만 장소가 바뀜으로서 생기는 야릇한 분위기라는 게 있다. 특히 이곳은 꾸며진 무대가 아닌, 진짜 유흥 술집이다. 진짜 술집을 배경으로 아무도 모르게 상황극을 즐기는 짜릿함은 확실하게 권태기를 예방해주고 있었다.
……권태기가 올 조짐이 있기나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권태기 예방한답시고 시작한 놀이가 이제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부 간의 유흥이 되었다.
“여기.”
유지웅은 오만 원권 뭉치 두 개를 꺼내 팀장에게 내밀었다. 얼굴이 급격히 밝아진 그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돈을 받았다.
무려 천만 원. 하룻밤 술값 치고는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 그것도 아가씨 한 명을 상대로 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럼 곧 들여보내겠습니다.”
“수고해.”
어두운 조명이 자리 잡은 복도 곳곳에는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며 껴안고 부비거리는 남녀가 즐비했다. 하나같이 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옷을 입은 아가씨들, 그리고 제법 나이가 있거나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성들뿐이다.
퇴폐한 육향이 가득 넘치는, 어두운 욕망이 집약된 곳. 이런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와이프와 은밀한 놀이를 하는 것은, 침실에서 즐기던 것과는 색다른 종류의 짜릿함이 있다.
* * *
“재희, 준비해라.”
“알았어요.”
방금 막 출근한 재희, 아니 정효주는 대기실에서 준비를 서두르느라 바빴다. 입고 있던 청바지와 흰 티를 벗고 가방에 챙겨온 슬립 드레스로 갈아입고 화장을 고치느라 분주하다. 머리를 틀어 올려 곱게 묶고 단정하게 속눈썹을 다듬는다.
옆에서 화장을 고치는 등 준비하고 있던 다른 아가씨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들의 입장에서 재희는 출근한 지 이제 겨우 석 달도 안 된 신참. 그것도 많이 나와 봐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밖에 안 되는데, 벌어들이는 돈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가 안 된다.
“재희, 또 그 재벌 손님이니?”
“……예.”
“좋겠다. 이 바닥에 발 디디자마자 그런 손님한테 딱 걸려서 고정 지명 받고.”
“그러게. 나중에 재벌가 첩으로 들어가는 거 아니야?”
정효주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줄곧 다른 아가씨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그들의 삶을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친해질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곳에 나오는 것은 신랑과 색다른 여흥을 즐기기 위해서일 뿐이니.
그녀의 손님이 한 번에 내는 술값은 최소 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 룸 하나가 하룻밤 내내 벌어들이는 매출이 200만 원도 안 되는 것을 감안하면 비교가 안 된다. 당연히 가게에서는 그녀를 애지중지했다. 술값의 40%를 그녀에게 주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룻밤에 못해도 천만 원을 벌어들이는 아가씨. 당연히 그녀는 가게 최고 에이스로 급부상했다. 다른 손님들이 어떤 여자인가 궁금해 하며 접대를 요청했으나, 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꿋꿋하게 한 손님만 받았다.
‘주제를 모르고 절개라니.’
‘그런다고 그 손님이 진짜 받아주기라도 할 것 같아? 얼굴만 믿고 주제 파악을 못해!’
기존 에이스 아가씨들이 질시했으나, 가게 실장들이 끼고 도는 바람에 어떻게 손을 볼 수도 없었다. 기껏해야 혼자 따를 시킨다거나 하는 게 전부다.
준비를 마치고 그녀는 룸으로 향했다. 유지웅이 방문할 때면 언제나 가게에서 준비해주는 전용 룸이다.
맵시를 가다듬고 문을 여는데 안에 아무도 없었다. 정효주는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나 발정 난 짐승처럼 달려들던 이이가 어딜 갔지?
그때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지금 집에 엄마 왔대. 먼저 갈게.」
정효주는 놀라서 급히 통화 목록을 살폈다. 과연 시어머니가 두 번이나 통화를 한 내역이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의 ‘일탈’은 틀린 것 같다.
일어서려는데 팀장이 룸으로 들어왔다. 30대 초반으로, 이 가게에서 그녀를 관리하는 사람이다. 유지웅을 마중 나갔다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재희, 김 실장님 오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셨다면서 일어나셨다. 어쩌지?”
“그래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정효주는 모른 체 실망한 연기를 했다. 마음속으로는 그녀도 급했다. 어서 화장을 지우고 집에 돌아가서 시어머니를 맞이해야 했다.
“그냥 들어가려고?”
“그러려고요.”
“모처럼 나왔는데 그냥 가긴 그렇지 않아? 재희 보고 싶어 하는 다른 손님 있으니 한 번 뵈는 게 어때?”
“됐어요. 저는 김 실장님만 모실래요.”
“김 실장님만큼 능력 있으신 분이니까 한 번 얼굴이라도 뵈는 게 어때? 언제까지 김 실장님만 모실 순 없잖아? 몸값 높을 때 바짝 많이 벌어둬야지.”
“괜찮아요. 그냥 갈게요.”
가게 입장에서야 타당한 말이지만 정효주 입장에서는 기가 찰 소리다. 둘에게 이곳은 어디까지나 색다른 일탈을 위한 무대에 지나지 않았다. 가게에 미안한 마음 따윈 전혀 없다. 가게에 막 천만 원씩 넘게 술값을 내는 것은 일종의 무대 이용료니까.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봐. 진짜 한 번만 보면 너도 생각이 바뀔 거야. 그 분도 젊으셔.”
정효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따라 팀장의 태도가 강경했다. 평소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 하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게를 바꿔야겠다.’
무대 이용료는 분에 넘치도록 지불하고 있다. 아무리 사정을 모른다지만 과분한 대가를 지급해왔는데, 저렇게 나오니까 정효주는 내심 짜증이 났다. 당장 다음부터는 다른 가게로 바꿔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가볼게요.”
문을 열고 나서려는 팀장이 무심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가볍게, 정말 ‘가볍게’ 밀쳐냈다. 하지만 그는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콰당 하고 바닥에 부딪친 그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왜 이렇게 소란이야?”
문을 딱 여는데 밖에 웬 젊은 남자 셋이 서 있었다. 이십대 후반? 삼십대 초반쯤 되었을까? 팀장이 사색이 돼서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박 의원님!”
“얘가 재희란 년이야? 오, 제법 반반한대?”
욕심 가득한 눈이 위아래로 훑어보자 기분 나쁜 혐오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안 그래도 속이 다 비치는 슬립을 입고 있어 노출이 심한데. 저런 놈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정효주는 몹시 화가 났다.
‘어? 가만…….’
근데 얼굴이 낯이 익다? 어디서 봤더라, 곰곰이 생각하던 정효주는 머릿속에 번쩍 불이 켜졌다.
‘에너지 위원회 박정구 의원?’
박정구 초선 의원. 31세의 젊은 나이로 국회에서는 그야말로 말단 중의 말단이다. 그녀가 왜 기억하고 있냐면, 예전 결정체 관리본부 창설을 축하하기 위해 VIP로 초대받았을 때 봤기 때문이다. 저만치 아주 말단 좌석에 신병처럼 각을 잡고 앉아 있던 모습이 웃겨서 기억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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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강아지도 못되는 벼룩이 짖어대니 화도 안 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