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643)
00643 우린 아직 준비가 덜 됐는데… =========================================================================
직경이 5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폐쇄 모듈이 사라지는 바람에 효웅산업은 난리가 났다. 제니스 연구단지 전체가 벌컥 뒤집힌 것은 물론이다.
“설마 도둑이라도 맞았어?”
“그 큰 걸 무슨 재주로 가져가! 테러라고, 테러!”
“어느 망할 국가가 우리 연구단지를 시기해서 몰래 폭파한 게 틀림없어!”
유지웅이 전후사정을 설명하기도 전에 그런 소문이 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순식간에 조사팀이 구성되고 세종시는 철벽처럼 봉쇄되었다. 사전에 미리 사태를 예방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긴급히 소집된 청와대 안보회의에서는 국정원장 경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국정원장 경질을 논의하기까지, 그 모든 게 불과 20분도 안 되어 일어났다.
지금 이 순간 세종시 외곽에 무슨 혼란이 벌어지고 있는지, 국내 출입국 사무소를 비롯한 철도, 항구 등에 어떤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는지, 그리고 청와대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알 리 없는 유지웅은 겨우 정신을 차린 최윤 앞에서 멋쩍게 웃었다.
“정신이 들어요?”
병실에서 정신을 차린 최윤은 퀭한 눈으로 유지웅을 바라봤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는 물음이었다. 차마 입을 열 힘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어, 최 소장님. 폐쇄 모듈을 내가 좀 쓸 데가 있어서 잠시 빌렸어요.”
“……그럼 왜 진작 말씀을 하시지 않은 겁니까? 그리고 회장님이 그걸 어디에 쓰다고요?”
“그게, 본의 아니게 그리 됐어요. 말하자면 엄청 길어요. 그런데…….”
유지웅은 말끝을 흐리며 니트로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했다. 아까는 최윤이 기절하는 등 워낙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했다.
“니트로 교수님은 어쩌다가 연구소에?”
“폐쇄 모듈을 이용해 같이 결정 에너지 공동 연구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폐쇄 모듈이 사라졌으니…….”
으드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그게 사라진 건 아니고요. 그러니까……. 에휴. 일단 보고 설명 드리는 게 빠르겠네요. 오리나.”
“여기 있습니다.”
독특한 기계음에 니트로와 최윤은 동시에 흠칫 했다. 창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둥근 공처럼 생긴 무언가가 들어왔다. 크기는 한 30cm쯤 될까? 최윤은 저게 뭔가 하고 멍하니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폐쇄 모듈이잖아!”
그는 기겁을 했다. 아니, 왜 폐쇄 모듈이 작아졌어? 잠깐, 뭐라고? 작아졌다고? 그게 가능해?
놀랄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작아진 구체 뒤를 따라 둥둥 떠서 들어온 비비 인형을 보고 최윤은 눈을 비볐다. 좀처럼 놀라지 않는 니트로 교수도 흠칫 놀라서 저도 모르게 뒤로 반 발짝 물러날 정도였다.
비비 인형, 오리나는 사뿐히 병실 바닥에 착지했다. 구체가 허공에 둥둥 뜬 채 빙글빙글 회전하며 파르스름한 빛을 뿜었다. 오리나는 발레리나가 인사를 하듯 우아하게 한 발을 뒤로 뻗고, 두 팔로 가슴을 감싸듯이 하며 고개를 숙였다.
“창조주를 뵙습니다.”
“……창조주?”
최윤은 머리가 매우 좋다. 겨우 창조주란 단어 하나,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보고 거의 진실에 근접한, 아니 진실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추론해냈다.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이었다.
“저는 RPX-1이자 블리츠랭크였던 메탈 타입 몬스터입니다. 지금은 오리나라고 불러주세요.”
“오리……나?”
“저의 사용자가 붙여주신 이름입니다.”
“사용자면, 설마 회장님?”
“그렇습니다.”
최윤은 흠칫 놀라 유지웅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꼭 딸자식을 처음 보는 사위놈에게 빼앗긴 아버지를 연상케 해서 유지웅은 머쓱하게 웃고 말았다.
“그게요…… 어쩌다 보니.”
“RPX-1 사용자 인식 시스템이 가동한 거냐?”
“그렇습니다.”
“망할 마소! 그런 건 빠뜨리지 않고 꼬박꼬박……!”
구체가 뿜어내던 파르스름한 빛이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구체는 빙그르르 돌면서 이리저리 왔다갔다를 반복했다.
최윤은 내뱉듯이 말했다.
“어떻게 된 거냐?”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단지 직접 확인을 거치는 절차가 필요했을 뿐이다. 오리나는 기괴한 섬광을 뿜는 두 눈을 들어 최윤을 올려다보았다.
“블리츠랭크의 몸으로 존재하던 때, 저는 저의 자아와 기억을 체내의 결정체에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결정체는 일종의 두뇌 역할을 했습니다. 폭발로 몸은 잃었지만 블루 결정체는 무사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어떤 강력한 힘에 노출돼서 다시 생명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 인형 외에 적당한 몸이 없어 이 인형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너는 지금도 인간을 적대하나?”
“저는 블랭이던 시절에도 인간을 적대한 적은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윤도 알고 있다. 블랭은 진정으로 인간을 적대한 적이 없었다. 인간을 위해 결정해야 할 행동방침에서, 자신이 야기한 증오가 사소하면서도 결정적인 오류를 일으켜, 그런 무시무시한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만약 블랭이 진정으로 인간을 멸망시키고 싶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감추고, 시간을 들여 치밀하게 작전을 구상하면 충분히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블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노출시키고, 최윤이 막아주기를 바랐다. 그런 모순된 행동 방침은 바로 블랭이 고장 났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제 제 안에 오류는 없습니다. 저는 사용자의 지시를 따릅니다.”
“회장님이 사용자가 된 원인이 있나?”
“저는 사용자가 저에게 비춘 강력한 힘에 영향을 받아 깨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유지웅님을 사용자로 정한 것입니다.”
“폐쇄 모듈은 어떻게 된 거지?”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했습니다. 사용자가 사용하도록 승인을 해주었습니다.”
유지웅은 흠칫 놀랐다. 야! 아 다르고 어 다른 게 말이라는 건데, 그런 식으로 설명하면 안 되지!
최윤이 원망의 눈으로 쳐다보자 유지웅은 식은땀을 흘렸다. 설마 또다시 250개나 되는 블루 결정체를 모으기 위해 레이드 강행군을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최 소장님, 요즘 세계 경제가 말이 아닙니다. 250개나 되는 블루 결정체가 빠져나가면 많은 나라들이 결정체 부족으로 고통 받아요. 설마 그들이 영원히 고통받길 바라나요?”
“…….”
“……최 소장님, 나중에 어떻게든 짬을 내서 만들어줄 테니까 일단 넘어가죠. 지금은 이 녀석을 심문하는 게 먼저 아닙니까?”
최윤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폐쇄 모듈 때문에 여간 속이 쓰린 게 아니었다. 아니, 오리나의 수중에 넘어갔으니 잃어버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가슴이 떨렸다. 포기하지 않고 블랭의 부활을 연구해온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바로 녀석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서다.
창조주인 자신을 찾아와서 보여주었던, 친구의 마지막 모습. 이 세상에서 오로지 녀석만이 알고 있는 그 진실을 다시 한 번 듣고 싶었다. 아직 녀석이 말해주지 않은 감춰진 진실을 꼭 알고 싶었다.
친구의 유지를 잇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균열은 어디에 있지?”
이 세상에서 균열의 존재를 아는 것은 오로지 단 세 사람. 자신과 레지나, 그리고 토미 에슨뿐이다. 토미 에슨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최윤은 한시라도 빨리 균열을 찾고 싶었다. 토미 에슨이 균열을 먼저 발견하기 전에.
그러나.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다시 질문해 주십시오.”
“……무슨 소리냐?”
최윤은 당황했다. 설마 권한이 안 된다거나, 혹은 락이 걸려 있다거나 그런 것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오리나의 대답은 전혀 의외였다.
“질문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가늠할 수 없어 대답이 불가능합니다.”
“그게, 무슨……?”
“균열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적으로 지정해 주십시오. 그 말만으로는 이해불가입니다.”
최윤은 직감적으로 어떤 가정을 떠올렸다.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변수였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휘버 박사는?”
“알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데이터에 없습니다.”
한참을 힘없이 바라보던 최윤은 낭패라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데이터가 손상됐어.”
* * *
블랭은 제니스의 공격을 받고 몸을 잃고 결정체 상태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부활했지만 페널티 없는 편리한 재생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기억이 손상되고 만 것이다. 그 중에 하필이면 균열을 비롯한 휘버에 관한 기억이 있었다.
최윤은 땅을 치며 안타까워했다. 오리나가 블랭 시절의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면 큰 힘이 되어주었을 텐데,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기억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도 최윤은 포기하지 않고 오리나에게 다시 휘버가 남긴 비밀 기록을 찾을 것을 지시했다. 오리나는 비록 비비 인형의 몸으로 들어갔지만, 그 놀라운 연산 능력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오히려 구체를 통해 전자파 제어 출력이 폭발적으로 커져 더욱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킹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당하는 건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
“창조주의 말대로 제가 그에 관한 관련 데이터를 상실했다는 전제 하에 저의 행동을 해석합니다. 해석 중……. 결론은 하나뿐입니다. 제가 삭제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삭제?”
“그렇습니다. 저 이외의 다른 누구도 그 데이터를 얻지 못하도록 삭제를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오리나는 블랭이던 시절, 휘버가 남긴 영상 기록 등을 빼돌린 뒤 원본을 모두 폐기했다는 것이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이용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결정체로 돌아갔다가 오리나로 부활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잃었다.
결국 균열에 관한 단서는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뼈아픈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망할…….”
최윤은 눈에 띌 정도로 크게 안타까워했다.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유지웅이 그제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최 소장님, 균열이란 게 뭐죠?”
최윤은 흠칫 했다. 유지웅이 몹시 궁금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말해야 할까?’
언젠가는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균열로 인해 인류가 위험해질 위기에 처한다면.
하지만 최윤은 그 시기를 늦추고 싶었다. 가능한 균열의 존재를 더는 아는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 설령 그게 유지웅이라도. 아니 유지웅이기에 더욱 더.
「욕심 많은 이들이 균열을 탐내는 것만큼 지구에 있어 비극은 없네.」
휘버는 최후의 기록에서 그렇게 경고했다. 최윤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유지웅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가짐을 믿는다. 누구보다 그를 존경한다.
그러나 세월 앞에, 그리고 거대한 힘 앞에 과연 언제까지 변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는가? 당장 자기 자신도 과연 변하지 않을지 자신하지 못하는데.
균열의 존재를 알게 된 유지웅이 만약 시간이 흐른 뒤 변질해 균열을 자기 입맛대로 다루려 한다면? 그가 아니더라도 그의 주변인이 부추긴다면? 그의 자손이 그리 한다면?
“가급적…… 저도 찾지 않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게 균열이라는 건가요? 대체 뭐죠?”
“죄송합니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건 차라리…… 저 역시도 모르고 있는 게 나을지 모릅니다. 아니, 저도 판단을 못하겠습니다. 찾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무척이나 혼란스럽습니다.”
“…….”
“결심이 서면 꼭 회장님께 말씀드리고 힘을 빌리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유지웅은 뭐 대수냐는 듯이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됐어요, 그럼. 말하지 마요.”
“회장님…….”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들이대 봐야 헤딩밖에 더 하나요? 나중에 준비 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합시다. 그 대신이라기에는 뭣하지만…….”
“안 됩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입니다.”
“최 소장님, 지금 세계 경제가 영 아니라니까요? 도대체가 결정체를 뺄 틈이 없어요. 욕먹는다고요.”
“결정 에너지 연구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금의 결정체 부족 문제를 해소해줄 겁니다. 니트로 교수의 상온 핵융합 반응 연구도 이미 마무리 단계입니다. 그를 위해서라도 폐쇄 모듈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리나가 갖고 있잖아요?”
“전용 모듈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매번 빌려서 연구를 하면 효율이 낮습니다. 그러니…….”
“최 소장님!”
한편 둘이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동안 니트로는 쪼그리고 앉아 오리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아까부터 이 귀여운 인형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 입이 근질근질했다. 그러니까 이 녀석이 블랭의 화신이자, 세계 최고의 컴퓨터라 이거지?
“이 복합 방정식 해가 안 구해져서 말인데. 세계 제일의 수퍼컴으로도 30년은 걸려야 해가 구해진다고 해서 말이야. 혹시 넌 좀 더 빠르게 구할 수 없냐?”
오리나는 말이 없었다. 대신 구체가 파르스름하게 빛을 뿜으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구체가 반으로 갈라지며 안에서 눈처럼 생긴 뭔가가 튀어나왔다. 눈에서 쏘아진 빔이 허공 가득 복잡한 수식을 그리기 시작했다.
니트로는 수식을 보고 감탄했다.
“오! 3초도 안 걸려서 구하다니! 너 좀 대단한데?”
그는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났다. 입가에는 비장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좋다. 모든 공식은 완성됐어.”
시간은 해결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산뿐인가.”
그건 이미 해결됐다. 단지 깨닫지 못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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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3초는 레이저빔 예열 시간이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