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800)
00800 %3C프리시즌 딜러편%3E 테러리스트? 아니죠 =========================================================================
‘맞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유지웅은 진심으로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지금 시기에 정효주는 사회적으로 아무 지위가 없다. 그에 비해 자신은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국제적으로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해외에서는 테러리스트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긴 하지만, 뭐 어쨌든…….
소꿉친구 시절에는 서로 비슷비슷한 처지였다가 그녀가 레이드를 하면서 차이가 벌어졌다. 그리고 지금 그 차이는 역전되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소중한 소꿉친구라 해도. 오히려 소중하기 때문에 벌어진 사회적 격차로 인해 불안함을 느낄 수 있다.
“효주 넌 그럼 어떤데?”
“뭐가?”
“남자로서 나 어떠냐고. 남자로서는 안 끌려?”
“…….”
질문이 잘못되었나. 영 대답이 없다. 유지웅은 뭐가 틀렸지 멋쩍어하며 말을 이었다.
“난 진짜 여자로서 니가 좋거든? 근데 말을 해줘도 못 믿으면 나도 하나밖에 방법이 없어.”
“그게 뭔데?”
“잠깐만 눈 감고 움직이지 말아 봐. 절대로! 움직이면 안 돼. 그럼 증명해볼게.”
“설마 이상한 짓 하려는 건 아니지?”
정효주가 새침한 표정을 띠고 물었다. 유지웅은 큰일날 소리를 들은 것처럼 과장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절대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무슨 짓을 하려고?”
“그건 직접 봐. 말로 해줘도 못 믿는다니 나도 이 방법 밖에 없다. 내가 널 여자로서 좋아한다고 증명할 수 있는 거.”
“…….”
“이상한 짓 절대! 절대로 안 할 테니까 눈 감고 아무 것도 하지 말아 봐. 절대로 움직이면 안 돼.”
“……진짜 이상한 짓 안 할 거지?”
“응. 약속.”
유지웅은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정효주도 살짝 풀어진 얼굴로 손가락을 맞걸었다. 그리고 도장까지 꾹꾹 찍었다. 음, 완벽한 언약이다.
“이상한 짓 하면 안 돼.”
“걱정말고, 나 믿고 눈 감아 봐.”
정효주는 나름 께름칙한 표정을 지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곧이곧대로 눈을 감았다. 원피스 아래로 뻗은 다리를 가지런하게 모으고 두 손을 허벅지에 올렸다. 그 단아한 자태가 그의 눈에는 그저 예쁘게만 보였다.
차분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전생에서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 그리고 앞으로도 사랑해줄 여자……. 그런 존재가 불안에 떨며 애정의 증명을 요하는 것에, 그는 야릇한 희열마저 느꼈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천천히 맨살을 감싸오자 그녀가 살짝 몸을 떨었다. 맨어깨를 만지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살갗을 접촉하는 것은 처음이다.
얼굴이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호흡소리가 조금씩 거칠고 커져만 간다.
붉고 고운 입술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와 처음 뽀뽀를 한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어린 시절 가벼운 뽀뽀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
그때와 지금이 다른 것은, 남자의 욕심이 흠뻑 적셔 있는 행위라는 것. 그 하나의 차이가 그녀의 마음에 얼만큼 큰 파문을 일으켜줄까.
숨결이 얽히며, 입술이 맞닿았다. 체온이 부딪치는 순간 그녀가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저항하지 않는다. 밀어내지도 않는다. 굳게 닫힌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그가 남기는 애욕의 향취를 수줍게나마 느껴 본다.
맨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 팔은 어느새 등뒤로 돌아가 날씬한 허리를 감듯이 안는다. 작고 가녀린 몸을 그대로 잡아당겨 품에 안으며, 더욱 짜릿하게 키스한다.
설육이 구강을 침윤한다. 숨결이 더욱 가쁘게 얽히며, 서로의 체온을 나눈다. 끈적한 숨소리를 함께 섞으며, 속살이 자그맣게 얽힌다. 연약한 설육은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며, 거친 희롱에 전신을 빼앗긴다.
여린 몸을 가볍게 들어 무릎 위에 앉힌다. 가느다란 두 팔이 호응하듯이 목을 휘감아 왔다.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둘은 정신없이 키스에 몰입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 것도 필요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철저하게 둘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숨이 가쁜 듯이 그녀가 얼굴을 떼어 냈다. 하얀 얼굴은 부끄러운지 잔뜩 홍조가 배여 있었다.
“뭐야. 아무 짓도 안 한다며…….”
“그걸 믿었어?”
“나빠. 거짓말이나 하고.”
“늑대는 원래 거짓말을 잘해.”
“치.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구나?”
유지웅은 키득거리며, 원피스 아래로 드러난 허벅지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녀는 다소 움찔하긴 했으나 손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럼 넌 왜 저항 안 했어?”
“……몰라. 그런 거.”
“우리 효주, 많이 귀엽네?”
“내가 애야?”
유지웅은 쿡 웃으며 얼굴을 다시 잡아당겼다. 그녀도 눈을 감고 그의 목을 팔로 감았다. 조금 전보다는 더욱 적극적으로 호응해온다.
온몸을 울리는 짜르르한 감각, 기분 좋게 휘감아오는 상대의 체온, 그 폭풍같은 희열 속에서 두 남녀는 서로의 마음이 하나로 엮이는 것을 느꼈다.
잠시 키스를 멈추고, 그가 나지막히 속삭였다.
“효주야.”
“응.”
“나 미리 거짓말 하나만 할게.”
“거짓말?”
정효주는 다소 의아했다. 미리 거짓말 하나를 하겠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갔다.
“결혼할 때까지 너 소중하게 지켜줄게. 그러니까 안심하고 나 믿어.”
“……뭐야. 거짓말이라며.”
“응. 거짓말. 미리 하는 거짓말.”
미리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소중하게 지켜주겠단다. 그럼 이 말뜻은?
“그게 뭐야. 결국 안 지켜주겠다는 거네.”
“지켜줄 건데?”
“미리 거짓말 하나 한다고 했잖아. 그럼 안 지켜주겠다는 거지.”
“아냐. 지켜줄 거야.”
“그러니까 그게 거짓말이잖아.”
미리 하는 거짓말이 소중히 지켜주겠다는 것은, 결국 안 지켜주겠다는 거 아닌가? 과연 무엇을?
그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하면 더 지켜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치. 사랑하면 지켜주는 게 맞지.”
“근데 왜 거짓말까지 미리하면서 면죄부 만들라구 해?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나쁘다?”
“너무 사랑하면 지켜주기 싫을 수도 있거든.”
“됐어. 나빴어.”
정효주는 토라진 듯이 그를 밀쳐내며 무릎 위에서 일어났다.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그녀가 물러나자, 그는 키득거리며 놀렸다.
“아무튼 난 미리 말했으니까 나중에 안 지켜줘도 잘못 없다?”
“못 지켜주는 것도 아니고 안 지켜준다고?”
“어. 안 지켜줄 거야. 그러니까…….”
“됐어! 나 갈래!”
그녀는 새침해서 쏘아붙이고는, 그대로 가방을 집어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혼자 남은 유지웅은 기분 좋게 키득거리며 소파에 깊이 몸을 기댔다.
문득 손을 들어 빤히 쳐다본다. 조금 전까지 잡혀 있던, 그녀의 뭉클한 감촉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듯하다.
* * *
“이놈들이 아직도 뻗댄다 이거죠?”
“예, 그렇습니다. 회장님.”
“아직 이것들이 쓴맛을 덜 봤나……. 지금 인류는 시간이 별로 없는데.”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런 게 있어요.”
영국에 위치한 펜탈 은행(Pental Bank). 거의 100조 원에 가까운 일성그룹 비자금을 예치한 은행이다. 이른바 일성 비자금의 대동맥이다.
그러나 펜탈 은행은 ‘비자금은 사실무근.’이라며 관련 사실을 일체 부인했다.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사 협조 요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100조 원도 안 되는 푼돈 가지고 이렇게 치졸하게 나간다 이거지?”
유지웅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기가 차고 어이가 없을 액수다.
그러나 김기영, 김범석을 비롯한 비서진은 달랐다. 100조 원 정도야 쌈짓돈 취급하는 고용주의 저 배포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진심 어린 복종심을 이끌어내는, 영혼이 찌르르 울리는 쾌감 뭐 그런 게 있다.
“영국 정부에서도 우리쪽 눈치가 아주 안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펜탈 은행 측에서 적극 로비를 하는 모양입니다. 회장님께는 별거 아닌 푼돈이지만 저쪽 입장은 달라서요. 아무래도 욕심이 나는 것 같습니다.”
“일성 오너측에서도 뒷일을 대비해서 펜탈 은행측에 뭔가 약속을 한 것 같습니다. 비자금 수사 협조를 거부하면 비자금의 몇 퍼센트를 주기로 한 모양입니다.”
“이형준 회장 지시인가요?”
“그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오너 일가측에서 펜탈 은행에 손을 쓴 것은 정황상 분명합니다. 특검에서도 의견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아마 망명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00조 원. 어마어마한 액수다. 기업은 물론이고 국가도 혹할 수밖에 없는 거액이다.
일성 오너측으로서는 쉽게, 아니 결코 놓을 수 없는 미련이자 최후의 보루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비자금만큼은 지키고자 할 것이다. 그럼 일성이 공중분해 되는 최악의 경우가 오더라도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을 테니.
“일성은 법적 절차가 끝나면 아마 감당할 수 없는 과징금을 물게 될 겁니다. 거의 도산 수준이죠. 그때 가서 저렴하게 사들이면…….”
“아, 됐어. 범석이, 아직도 내 스타일 몰라?”
“물론 알고 있습지요. 제가 실언했습니다.”
“김포공항도 샀고, 일성 날려보냈으면 그걸로 된 거야. 그쪽은 더 이상 관심 없어. 근데 펜탈 놈들은 좀 많이 괘씸하네?”
“그렇지요? 회장님이 손수 친절하게 경고를 보내줬음에도 놈들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미국도 전향적인 대화로 태도가 이미 돌아섰는데 말입니다.”
사실 미국이 대화로 노선을 완전히 변경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미국 내에서는 그가 테러범이냐 아니냐를 놓고 여론이 첨예하게 갈린다.
빌클런 정부는 유지웅이 보인, 수천킬로미터가 넘는 전략 타격능력의 자세한 재원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 공세를 멈춘 것뿐이다.
그렇지만 그런 속사정 따위 알게 뭔가. 김범석은 ‘회장님 킹왕짱!’하며 그저 손바닥을 비비고 아부하기 바빴다.
“안 되겠군. 김 실장님, 정부에 협조 요청을 좀 해보세요. 제가 부탁할 게 있다고요.”
“예. 말씀만 하십시오. 어떤 것을 요구할까요?”
“위조 신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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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순히 비자금을 내놓아도 유혈사태는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