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bastard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Episode. 36 역병 거인 (1)
여느 때보다도 더욱 짙은 마기가 하늘을 물들였다.
정원의 가호 아래에 있는 자들은 모두 그 어둠을 똑똑히 느꼈다.
결국, 3세대 역병 괴물이 나타났다.
성의 지휘관들이 구태여 말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온 성에 긴장감이 들끓고 있었다.
병사들은 눈을 감고 호르에게 기도를 올렸다.
“제발, 제발. 호르시여……!”
특히, 심신이 극도로 지쳐 있던 원군들은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기도를 올렸다.
일전에 하늘을 수놓았던 상서로운 빛.
소문만 무성하던 호르의 힘.
그러한 기적을 직접 겪은 이상, 그들은 신을 믿기 싫어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끔찍한 마기를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으니까.
빛을 떠올리며 기도를 올린 이들의 몸에 조금이나마 활기가 감돌았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리오 성은 저번처럼 축 처진 분위기로 머물지 않았다.
“쯧…… 아직 멀었군.”
한편, 그 면면들을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혀를 찼다.
엘프의 자비로 파수꾼의 특권을 나눠 받았으나, 아직 채 영글지 못한 원군은 자기들이 가진 게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빛을 입고 있음에도 저 멀리 있는 어둠을 두려워하고, 머릿속으로는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역병 괴물의 끔찍한 외양을 그리다니.
“상상은 때론 현실보다도 무서운 법이지요.”
리하르트의 옆에 있던 기드가 툭 말을 걸어왔다.
“사람은 대게 미지의 것에 공포를 느끼니 마련입니다. 하물며 그 대상이 역병임에야.”
깊은 눈으로 원군을 훑어본 기드가 고개를 돌려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저들도 전투를 거듭하면 훌륭한 정병으로 변해 갈 겁니다.”
“그렇지.”
어딘가 묘한 열기가 서린 음성에 리하르트는 동의를 표했다.
지금은 정병이 된 왕실의 병사들도 처음엔 겁쟁이들 투성이었다.
곰곰이 비교해 보면 지금의 원군은 그 시절의 왕실 병사들보단 제법 늠름했다.
“다시 보니 얘네가 낫긴 하군.”
리하르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어리숙한 일만의 병력이 하루빨리 다부져지기를 바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들이 곧 바렌의 전력이자 기반이니 말이다.
그렇게 폭풍전야의 나날이 흘러가다, 마침내 폭풍이 찾아오고 말았다.
뿌우우-
한밤중에 대뜸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첨탑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던 초병의 안색이 파리했다.
뿌우우우-!
초병이 다시 한번 뿔 나팔을 불었다.
성의 공기가 급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적습이다!”
“전 병력, 전투 배치!”
지휘관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움직였다.
그 뒤를 따라 성의 병력이 성벽 위로 우르르 늘어섰다.
그리고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쿵! 쿠웅!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발걸음.
코를 찌르는 역한 악취.
“……맙소사.”
역병 거인들의 모습을 본 병사 하나가 황망히 중얼거렸다.
◈ ◈ ◈
역병의 군대가 저 멀리서부터 진군해 오고 있었다.
나는 성벽에 붙어 안력을 돋웠다.
붉디붉은 거인들이 줄지어 진격해 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새빨간 성채가 다가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적은 거인뿐만이 아니었다.
스물의 거인 뒤로 수천의 역병 괴물이 괴성을 질러 대고 있었다.
이번에 3세대로 거듭나 한층 더 악랄해진 모습이었다.
끄워어어억-!
선봉에 선 거인들이 울부짖었다.
그게 꼭 우리에게 기 싸움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감히.
“질 수야 없지.”
나는 온몸으로 신앙을 피워 올렸다.
쿵. 쿵쿵!
성 곳곳에서 역병 거인의 진군보다도 더욱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부진 얼굴로 흉갑을 두드리는 기사들의 것이었다.
“우리는 정원을 지키는 파수꾼이며, 신을 따르는 신도요, 악을 처단하는 집행자로다!”
용맹한 사내들이 정원의 의무를 상기했다.
결의와 사명 가득한 음성에 세계수의 가지가 잘게 흔들렸다.
어느 순간, 성의 기세가 급격히 끓어올랐다.
동시에 성벽에 고르게 분포한 성기사들에게서 신성력이 솟구쳤다.
“등불은 빛을 전해 주니.”
하급 성기사, 아론이 운을 뗐다.
“그 곁에 선 우리도 등불이라!”
모리츠가 기세등등한 얼굴로 노래를 이었다.
“어둠은 실낱같은 빛도 삼키지 못하고!”
“결국은 제 몸이 사그라들 뿐이더라!”
지금껏 성을 지켜온 사내들이 입을 모았다.
원군은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다만 그 눈가에 일렁이는 열기는, 더 이상 일말의 두려움조차 없다는 듯 전의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휘유~”
옆에서 누군가가 휘파람을 불었다.
고개를 돌리니 지크와 눈이 마주쳤다.
“이것 참 장관인데?”
담백한 감탄을 낸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묘하게 끈적이는 시선이었다.
“왜?”
“그냥. 가주께서 지금 이 광경을 보셨다면 어떤 심정이셨을까 해서.”
살기 흉흉한 적들이 코앞인데, 지크는 무척 태평해 보였다.
과연 바텐가의 차기 후계자다운 여유였다.
그나저나, 루드비히가 어떤 심정일까라니.
“글쎄. 나도 상상이 잘 안 되네.”
우리가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역병의 군대는 착실히 진군 중이었다.
쿵! 쿵!
저 멀리 있던 거인의 모습이 조금 더 자세히 보였다.
붉은 피부에 송곳니 가득한 아가리.
군단장 칼고스가 절로 떠오르는 외양이었다.
이내 놈들이 정원의 결계에 몸을 들이밀었다.
“전투 준비!”
지휘관들이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이 검을 빼들고, 정병들이 창과 활대를 꽉 부여잡았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건 아델부터였다.
콰드득-!
부지불식간에 땅에서 솟아나온 나무줄기가 거인 스물의 발목을 휘감았다.
훌륭한 판단이었다.
저 덩치 큰 놈들에게 성벽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니, 가까이 다가오도록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끄워어어어!”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굵고 단단한, 신앙을 잔뜩 머금은 아델의 뿌리에 얽매인 거인들이 괴성을 질러 댔다.
덩치 산만한 것들이 악다구니를 쓰니 마치 천둥이 치는 것만 같았다.
“쏴라!”
이에 마주 악을 쓰듯 성벽 위의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고, 활시위를 당긴 궁병들이 일제히 손을 놓았다.
진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성유 대신 빛이 담긴 화살 수천 발이 허공을 날았다.
대포의 포구는 철구 대신 광구(光球)를 뿜어냈다.
쾅, 콰쾅-!
빛을 머금은 지팡이를 쥔 엘프들이 일시에 마법을 흩뿌렸다.
“허…….”
옆에서 줄곧 여유를 부리던 지크가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신앙으로 무장한 리오 성의 전력이 꽤 놀라운 듯했다.
하기야, 요 며칠간 전투 물자에 부여한 신앙만 해도 일억을 넘어섰다.
“호르께서 워낙 이 성을 총애하셔서 말이야.”
난 어딘가 심사 복잡해 보이는 지크에게 웃어 보였다.
그때였다.
“끄워어어억-!”
발목을 붙잡힌 거인들이 흉성을 터뜨렸다.
화살 세례를 비롯한 갖은 집중 포화에도 불구하고 죽은 놈은 고작 둘.
콰직, 광란이 도질 대로 도진 거인들이 제 뒤편에 있던 괴물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그리곤 이쪽을 향해 냅다 집어 던졌다.
“기사들은 성벽을 수비하라!”
“괴물들을 격추하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들던 괴물들이 화살 세례에 격추당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많은 괴물들이 허공을 날았다.
쾅!
성벽에 부딪힌 놈은 피떡이 되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질퍽한 핏물이 성벽을 타고 길게 선을 그었다.
“오, 온다!”
콰앙, 수십의 괴물들이 온몸으로 성벽을 들이박았다.
개중에는 운 좋게 성벽 위에 안착한 놈도 있었다.
“키에에엑!”
하늘에서 뚝 떨어진 괴물을 본 원군이 비명을 지르고, 수뇌부와 기사들의 고함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난전이었다.
◈ ◈ ◈
혼잡한 성벽 위, 지크는 가만히 서 있는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템플나이츠를 비롯하여 리오 성의 정예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데, 그의 동생은 그저 저 너머의 거인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리하르트가 손을 뻗어 성벽을 짚었다.
그러자 그곳을 중심으로 찬란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파아앗-!
신앙이 혼란한 성벽을 타고 질주했다.
“호르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 빛이 지나간 자리엔, 사기충천한 사내들만이 남았다.
예상치 못한 괴물의 난입에 당황하던 기사들이 평정심을 되찾은 것이다.
“궁병은 계속 화살을 쏴라!”
“기사들은 성벽의 괴물들을 처리한다!”
성벽을 살펴본 지크가 다시금 터져 나오려는 감탄을 삼켰다.
성벽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는 템플나이츠는 바텐베르크의 세 번째 검일 때보다도 더욱 강맹해졌다.
그들의 뒤를 받쳐 주는 연합의 기사들 또한, 바텐베르크의 기사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등 뒤에서 괴물의 괴성이 들려오는데도, 우직하게 화살만 쏘아 대는 궁병은 어떠한가.
괴물에게 둘러싸인 기사를 구하기 위해 창을 꼬나 쥐고 달려드는 창병들은 또 어떠한가.
아무리 저들이라도 3세대라는 괴물부턴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 예상한 지크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
끄워어어어-!
잔뜩 성 난 거인들의 고함이 천지를 울렸다. 거인들의 기세를 확인한 지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거인에겐 조금이나마 지능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여타의 괴물보다 그 위험도가 궤를 달리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뿌리로 묶어 두는 것도 한계가 있을 터.
“리하르트. 우선 저놈들부터 처리해야 할 것 같은……?”
지크의 음성이 뚝 끊겼다.
어째서인지 리하르트는 이 난리 통에도 눈만 꼭 감은 채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거룩하고 경건했다.
성자라더니, 전쟁터에서도 그 이름값을 하는구나 싶을 때였다.
쿠르릉-
돌연 하늘에 먹이 끼었다.
“이런…….”
지크의 얼굴에 염려가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혼잡한 전장인데 악천후까지 덮이면 그야말로 악재일 터.
“리하르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
아군의 피해를 염려한 지크가 리하르트를 불렀다.
하나 리하르트는 여지없이 요지부동이었다.
콰르릉-!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 사이로 번갯불이 꿈틀거렸다.
악천후도 이런 악천후가 없었다.
‘나 혼자서라도 거인들을 처리해야겠군.’
참다못한 그가 탈것을 부르려 할 때였다.
“가지 마.”
나지막한 음성이 지크를 붙잡았다.
드디어 눈을 뜬 리하르트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넌 이 상황에 잠이라도 잔 거냐?”
어이없다는 듯한 형의 물음에 동생이 히죽 웃었다.
그사이 하늘에서 굉음이 일었다.
눈 깜짝할 새에 덩치를 불린 먹구름, 그 사이사이로 번개가 용처럼 기어 다녔다.
“상황이 안 좋아. 폭우가 내리면 불리한 건 이쪽…….”
“폭우 아닌데.”
리하르트가 지크의 말을 끊었다.
꽈르르릉-!
하늘의 굉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난전에 정신이 팔렸던 성의 병력도 하나둘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눈을 부릅떴다.
호르를 섬기는 그들은 조금 더 빨리 눈치 챌 수 있었다.
저 먹구름 안쪽에 있는 건, 악천후 따위가 아니란 것을.
끄, 끄워어어-!
그 다음으론 거인들이 무언가 낌새를 느낀 걸까.
갑작스레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했다.
『기후에 대한 신격의 간섭.』
『천벌(天罰).』
먹구름이 어느 순간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윽고, 발버둥 치던 거인들을 향해 신의 철퇴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