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bastard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10
8화. 미녀와 야수 (2)
“모, 못 본 새 더 아름다워지셨소.”
그건 말을 내뱉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무척 경직된 음성이었다.
한심하게 이게 뭐람.
휴거가 황급히 제 앞에 놓인 홍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숙맥 같은 모습이 퍽 우스웠던 걸까.
“후후.”
맞은편의 메리가 입을 가리고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 그녀의 품에 안긴 꽃다발이 미모를 잃고 말았다.
적어도 휴거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취익…….”
그녀와의 거리, 1미터.
고작 테이블 하나만을 사이에 둔 그 간격이 휴거에겐 유달리 멀면서도 가깝게 느껴졌다.
“그간 잘 지내셨소?”
“저는 늘 그렇듯 행복하게 지냈죠.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만큼 보람찬 일도 없답니다.”
“여전히 상냥한 마음씨구려.”
가만히 미소를 짓는 메리 주변으로 후광이 비추는 듯했다.
그야말로 성녀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품격과 성품이었다.
하지만 휴거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가 마냥 밝지만은 않다는 것을.
“췩, 내가 그대를 외쪽사랑한지도 벌써 십 년이 훌쩍 지났다오. 이쯤 되면 척하면 척이지.”
휴거가 기억하는 메리는 재앙 중에서도 가장 밝게 빛났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믿음을 전도할 때, 믿는 자들의 신앙심을 더욱 강하게 이끌어 낼 때 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다만 재앙이 끝난 이후의 메리는 어떠했던가.
“혹, 소저는 이 평화로운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모든 게 마무리된 이후의 소저는 단 한 번도 예전처럼 웃지 않았잖소.”
그녀가 이따금 짓는 미소는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
열의와 신앙심이 넘쳐흐르던 눈빛은 갈 길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그런 표정을 지어야만 했던 이들을, 휴거는 여럿 알고 있었다.
“……잖아요.”
어째서일까.
당황한 듯 숨을 삼키던 메리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테이블 아래 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그녀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소저? 방금 뭐라고 하셨소?”
“저희를, 속이신 거잖아요. 휴거 씨와 용사님들이 세상 모두를 속이셨잖아요.”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원망 어린 시선을 받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메, 메리 소저…….”
그래서 머릿속이 딱딱히 굳고 말았다.
“성자님께서 호르의 군단과 함께 마계로 진군하시기 전날, 저는 꿈을 꿨어요.”
메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난 십여 년간 홀로 삭여 오던 감정이 끝내 북받쳐 오른 모습이었다.
“가장 찬란했던 빛이 모든 걸 버리고 무저갱에 자리 잡는 꿈을요.”
그때의 메리는 깨진 하늘을 보며 자신이 보았던 꿈을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그 지독한 장면이 한낱 꿈에 불과하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그 소망을 들어 줘야 할 신은 결국 지옥에 가고 말았다.
“저와 선지자들은 당신들의 동료가 아니었던 건가요?”
마지막 전장에서 돌아온 호르의 군단은 온 세상에 빛이 승리했음을 알렸다.
피눈물을 참고, 오열을 삼키며, 뒤바뀐 흑백의 세상 속에서 기어코 진실을 숨겼다.
“…….”
“제가 언제까지 모를 것 같았나요? 울지 못해 웃는 당신들의 속도 모르고 마냥 평화를 반길 줄 알았나요?”
그들은 리하르트가 모두를 위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직후의 메리는 리하르트의 죽음을 두고 그들이 슬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차라리 그게 사실이기를 바랐다.
리하르트가 죽어 끝내 찬란한 천국으로 향했다고 믿고 싶었다.
그 위대한 영혼이 지옥에 갔다는 잔혹한 진실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그들이 솔직히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저도 당신들의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소저. 내 얘기를 들어 주시오.”
“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어.”
그토록 호르를 찬양하라 부르짖던 호르의 군단 중, 어느 누구에게도 신앙심이 느껴지질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저 천국의 존재들을 떠올릴 때면 이를 악물었다.
리하르트와 함께했을 적과는 명백히 다른 반응.
세상 모두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성녀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렇게, 성녀는 스스로 깨달았다.
아. 결국 꿈대로 되었던 것이구나.
그때의 참담한 기분이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메리 소저……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소?”
“일 년이 채 지나기 전부터요.”
“……속여서 미안하오.”
휴거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긴 시간 동안 홀로 비탄을 삼켜 왔을 그녀의 마음이 사무치게 느껴졌다.
“정말, 미안하오.”
그들에겐 아픔을 나눌 군단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였다.
그들이, 그녀만 홀로 내버려 두고 말았다.
“그대만큼은 부디 모르길 바랐소.”
신앙심만큼은 누구보다 강했던 그녀였다.
진실을 깨닫고서 수없이 울었으리라.
너무 아파서, 군단과 함께 아픔을 나누고 싶었으리라.
다만 침묵하는 군단에게 그녀가 선뜻 다가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분명 말해 주지 않는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언젠가는 꼭 말해 주겠지.
그리 믿으며 메리는 줄곧 혼자 버텨 온 것이었다.
“단 한 명도 그대와 선지자들을 동료라 여기지 않는 이가 없소.”
“그렇다면, 어째서.”
“그러니까 더더욱 그 아픔을 나눠 주고 싶지 않았던 거요.”
호르의 군단이 절망을 집어삼키며 온 세상에 승전보를 알릴 적에, 사람들은 진심을 다해 기뻐했다.
상처받아 울던 이들에게 거짓된 호르교는 분명한 위안이 되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들은 생각했다.
“아픔은 우리만 짊어지면 된다고. 다른 이들은 그의 뜻처럼 행복하게 지내면 그만이라고.”
상심을 숨긴 군단에게 메리는 늘 웃어 주었다.
제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건 내색도 않은 채.
그래서 군단은 메리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엇갈려 버렸구려. 아니, 우리가 잘못 생각했던 것이구려.”
가장 먼저 호르 아래 모였던 메리와 선지자들만큼은 진실을 알 자격이 있었다.
그들을 속인 것은 기만에 가까운 행위였다.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소. 다시 한번 미안하오.”
휴거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탄식을 내뱉었다.
“휴거 씨.”
그런 휴거의 어깨 위에 가녀린 손이 얹어졌다.
“저희들에게도 알려 주세요, 그분께선 어째서 지옥으로 가신 건가요. 그 마지막은 대체 어땠나요.”
◈ ◈ ◈
신전에서 지내던 선지자들이 성녀의 알현실에 모여들었다.
그 뒤를 템플나이츠가 따랐다.
“휴거! 당신 설마……!”
“폴크. 이들에겐 말해야겠소. 이미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진실을 알려 주는 게 맞소.”
당혹스런 기색이 역력한 성기사들에게 휴거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허공중에 시선과 시선이 얽혔다.
이내 한쪽이 체념의 빛을 띠었다.
저들이라고 하여 그들을 속이고 싶었을까.
오히려 가장 지척에서 성녀를 호위하는 템플나이츠였기에 더욱 고달팠을 터였다.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하기에 휴거가 먼저 나섰다.
그가 고개를 돌려 알현실에 모여든 선지자들을 바라보았다.
“음…….”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리 모이라 하신 거래요?”
믿는 이 하나 없던 시절, 위대한 인간 전사는 저들의 도움을 받아 호르교의 세를 넓혔다.
당장 휴거와 성기사들이 호르를 믿도록 도움을 준 것도 눈앞의 선지자들이었다.
그러니 위대한 인간 전사도 이해해 주리라.
“그대들에게 알려 줄 것이 있다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선지자들이 침묵했다.
다만 오래가지 못할 침묵이었다.
“호르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있소.”
하나같이 부릅뜨여진 눈.
그 안에 담긴 불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이들의 경악이었다.
오직 성녀만이 슬픈 얼굴로 뒷말을 기다렸다.
“아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호, 호르께서 지옥에 계시다고요?”
혼란스러운 장내에 다시 한번 휴거의 입이 열렸다.
“다섯 호르. 마계의 다섯 군단장.”
본래 하나로만 알고 있었던 신이 어째서 다섯이 되었는지, 기나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 ◈
“…….”
휴거가 다시 입을 다물었을 때, 선지자들은 울고 있었다.
누군가는 침묵한 기사들을 향해 분노를 터트렸다.
누군가는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믿고 있던 모든 것에 배신당한 듯한 기분은, 지금껏 쌓여 온 시간만큼 아팠다.
“말도 안 돼. 그럴 수는 없는 겁니다. 그분께서 스스로 필요악이 되신 것이라니요!”
그럼 우리는 여태껏 누구를 찬양했나.
그럼 우리는 누구를 원망했나.
선지자들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제 손을 내려다보는 눈빛에 혐오가 일었다.
그건 마치 죄 많은 이교도를 보는 눈과도 같았다.
심마(心魔).
한때 군단을 괴롭혔던 마음속 병이 그들에게서 엿보였다.
“……여러분, 조금 더 본질을 바라보세요.”
그런 선지자들을 성녀가 나서서 진정시켰다.
언뜻 위험해 보이는 상태의 선지자들을 하나하나 품에 안으며, 그녀는 힘주어 말했다.
“정녕 호르께서 세상 모두를 이교도로 만들고자 자신의 군단에게 함구를 명하셨을까요?”
저 자신도 울고 있으면서, 다른 이들의 심정부터 헤아리는 그녀는 분명한 성녀였다.
“……성녀님의 말씀이 맞으십니다.”
“호르께선 스스로 모든 오물을 뒤집어씀으로 세상의 안정을 바라셨습니다.”
템플나이츠가 무거운 음성으로 선지자들을 달랬다.
지금껏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그들이 허리를 깊게 접었다.
“당신들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죄라면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들을 속인 저희에게 있겠지요.”
아픔을 알아서, 다른 이에게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게 훗날 더 큰 상처를 불러 오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굳건하던 사내들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참담히 일그러져 있었다.
장내에 잠시 적막이 일었다.
그 적막을 깬 건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린 선지자들이었다.
“……그분의 명을 따랐을 뿐인 당신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지금껏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저희를 볼 때 어찌나 가슴이 옥죄이셨는지요.”
신은 만인에게 용서를 권하고 이해를 종용한다.
적어도 그들이 아는 신이라면, 저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애꿎은 원망을 받는 것을 바라지 않을 터였다.
“…….”
폴크가 고개를 돌려 휴거와 눈을 마주쳤다.
그사이로 뜻이 오고갔다.
대륙의 중심, 가르텐에 보관되어 있는 맹세의 석판.
그 빈자리에 새길 이름이 이다지도 많다고.
누군가는 이리 말할지도 모른다.
너희들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 군단의 의사도 묻지 않고 그들에게 맹세의 석판을 보이느냐고.
그렇다면 이 자리에 있는 휴거와 성기사들은 이리 답하리라.
우리에게 대체 무슨 자격이 있어서, 저들이 그분의 뜻과 영원히 함께하지 못하게 막느냐고.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