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bastard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33
33화. Episode. 12 거, 눈총 쏘지 말고 (2)
호기롭게 외친 것과는 달리, 대련은 곧바로 성사되지 못했다.
“지금 기사들은 시간이 넉넉지 않습니다.”
자신을 제3기사단장이라 소개한 폴크 하이머가 내뱉은 말이었다.
“정 원하신다면, 해가 지고 날이 선선해졌을 때 주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여독부터 푸시지요.”
바쁘다는 이들을 붙잡을 수도 없다. 지금은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좋아. 그럼 숙소로 안내해 줘.”
폴크가 기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막사 하나를 새로 지으라는 명령이었는지 하급 기사로 보이는 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은 제 막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따가운 시선 속에서 걸음을 옮겼다.
어째 가는 곳마다 환영받는 법이 없다.
엘프의 숲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다소 어수선하지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럼.”
막사에 도착한 폴크가 곧장 고개를 꾸벅 숙이곤 사라졌다.
차라도 한 잔 내주는 과분한 대접까진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 정도면 거의 껄끄러운 혹 취급이다.
먼 길을 달려온 도련님을 아예 투명인간 취급하겠다는 의도가 아닌가.
“감히…….”
아델이 이를 박박 갈아 댔다.
내가 이런 취급을 받는 게 언짢은 모양이었다.
“도련님. 대련 때 진가를 보여 주겠습니다!”
아론은 오히려 분기탱천해서 내게 외쳤다. 주먹을 꽉 그러쥔 게, 꼭 저도 대련에 참가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대련은 나 혼자 할 거야.”
“어, 어째서입니까?”
“굳이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드래곤과의 격전이 코앞이다. 의미 없는 대련은 쓸데없이 체력만 갉아먹을 뿐.
다만 나는 앞으로 있을 전투에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들의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나저나…….’
손등에 새겨진 각인을 바라보았다.
검을 쥔 지 반년은 지났을까.
이제 난 오러까지 다를 수 있게 되었다.
이만하면 무언가 변화라도 생길 줄 알았건만, 예상과는 다르게 각인은 묵묵부답이었다.
‘드래곤을 사냥해도 그대로라면 발락에게 물어봐야겠어.’
언제까지고 기초 검술만 사용할 순 없는 노릇인데.
답답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 ◈ ◈
해가 떨어졌다.
넓은 공터로 걸음을 옮기자, 수많은 시선이 얼굴을 찔러 왔다.
“도련님. 기사들은 그리 섬세한 자들이 아닙니다. 부상을 입으실지도 모릅니다.”
“계급장 떼고 붙는 거야. 부담 갖지 마.”
나를 둘러싼 기사들에게 말했다.
“뭐 해. 퍼뜩 안 나오고.”
그들은 저들끼리 시선만 주고받을 뿐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 철없는 도련님을 누가 떠맡을지 눈치 싸움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내가 불씨를 지펴 줘야 할 것 같다.
“나한테 불만 있는 놈들 다 나와. 이 중에서 꽤 많은 것 같던데.”
제대로 찌른 걸까.
장내의 분위기가 소리 없이 들끓었다.
“이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을 거야.”
저들에게 나는, 자신들이 존경하는 전(前) 기사단장을 죽음으로 밀어 넣고 있는 최악의 망나니다.
설령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말이다.
원색 짙은 감정들이 내 피부를 쿡쿡 찔러왔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도련님과 검을 마주해 보겠습니다.”
좀 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하급 기사 하나가 나섰다.
“바로 시작하지. 덤벼 봐.”
그에게 수련검을 흔들어 보였다. 고개를 꾸벅 숙인 하급 기사가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컥!”
저만치 튕겨 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
침묵에 휩싸인 장내에 우두커니 서서 다음 상대를 기다렸다.
이것은 나의 자격을 증명하는 대련.
그리고 저들이 맡은 임무의 가치를 증명하는 대련.
“이번엔 제가 나서 보겠습니다!”
이제 시작이었다.
들끓는 분위기에 나는 검을 그러쥐었다.
◈ ◈ ◈
쿠당탕!
중급 기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나가떨어졌다.
그의 상대였던 리하르트는 숨을 거칠게 내쉴지언정,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 무슨…….”
폴크는 제 눈을 의심했다.
하급 기사 셋. 중급 기사 넷.
리하르트 앞에 검이 꺾인 기사들이었다.
“다음 상대는 없는 건가!”
언제부터 리하르트가 이런 용맹한 외침을 내뱉을 수 있게 되었나.
마나 불감증으로 인해 일찍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탕한 일상을 되풀이하던 망나니였을진대.
충격과 혼란이 뒤섞인 공터에서 리하르트는 당당히 모든 시선을 받아 냈다.
그는 대련에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상대가 하급이든, 중급이든 모두 전력을 다해 검을 맞대었다.
“내 엉덩이를 걷어찰 기회야. 옹졸하게 뒤에서 씹어 대지나 말고 남자답게 덤벼.”
제3기사단원들은 알게 모르게 속이 곪아 있는 상태였다.
누구도 제 입으로 주군의 핏줄을 폄하하지 않았지만, 리하르트에 대한 불만은 쌓이고 쌓이던 중이었다.
거만하고, 오만하며, 나약하기 짝이 없는 망나니.
그런 망나니를 위한다며 담금질도 마다하지 않은 기드의 모습이 너무나 비통했다.
기사들에겐 제 설움을 토해 낼 욕받이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역할은 역시나 리하르트가 제격이었다.
그런 와중에 대뜸 당사자가 찾아와선 대련을 입에 담았다.
이것은 그들에게 다시 없을 기회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리하르트의 앞에 또 다른 기사가 예를 취했다.
기사는 뭉툭한 수련검을 쥐었지만, 마음속으론 칼을 갈고 있었다.
카가각-!
리하르트는 그 검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결코 피하는 법이 없이 우직하게 받아 냈다.
“다음!”
이후, 중급 기사 둘이 더 쓰러졌다.
인파로 만들어진 대련장은 대련이 이어질수록 과열되기 시작했다.
서로 앞다투어, 저 건방진 도련님의 엉덩이를 걷어차겠노라 검을 치켜세웠다.
“제3기사단 소속 상급 기사, 잭 슈웨거라 합니다.”
급기야는 상급 기사까지 나섰다.
“대련에 앞서 여쭐 것이 있습니다.”
“뭐지?”
리하르트에게 궁금한 것이라야 한가득이다.
잭 슈웨거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그러다 이내, 그중에서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정말 엉덩이를 걷어차도 됩니까? 전력으로.”
잭의 눈빛은 진지했다.
허가만 내려진다면 인정사정없이 발길질할 기세였다.
“물론. 할 수 있다면.”
“……좋습니다.”
잡담은 거기까지였다.
중급과 상급 기사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좀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압박감이 리하르트를 엄습했다.
“갑니다.”
그와 동시에 잭이 순식간에 짓쳐들어왔다.
일순 그의 신형이 사라진 것만 같은 재빠른 속도였다.
하나 그 정도는 리하르트도 반응할 수 있었다.
카가강-!
순식간에 수십 합이 얽혀 들었다.
허와 실이 절묘하게 뒤섞인 쾌검.
잭의 검은 폭풍과도 같이 휘몰아쳤다.
반면 그에 맞서는 리하르트의 검술은 단순하기만 한 기초 검술이었다.
“어찌 잭 경의 검을 기초 검술로……!”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기초 검술은 기사에게 아주 중요한 기본기와도 같다.
그러나 일정 수준 단련하면, 좀 더 상위의 검술에 매진하기 마련이다.
100층 탑을 쌓아야 하는데 1층에만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런데 리하르트의 기초 검술은 하루 이틀 수련한 실력이 아니었다.
대련을 지켜보는 기사들의 얼굴에 갖은 감정이 스쳐 지났다.
그런 기사들의 반응에, 아론이 작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선 저 기초 검술로 모리츠 도련님까지 꺾으셨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경들은 모르겠지만, 리하르트 도련님의 재능은 시시각각 개화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찬란하게 말이지요.”
아론은 그 이후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싶었지만, 백 번 말하는 것보다 실제로 보는 게 나을 테니.
“흐읍!”
리하르트가 흩뿌린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잭이 역공을 취했다.
싸악-!
허릴 숙여 간발의 차로 피해 낸 리하르트는 쉴 틈 없이 몸을 움직였다.
‘빠르다.’
잭의 검은 정말 빨랐다.
마나도 사용하지 않고 이렇게나 빠른 검술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상대 못할 것도 없었다.
『특기 – 초집중 발동.』
리하르트의 세상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정신 사나운 구경꾼들은 사라지고, 오롯이 잭만이 시야에 담겼다.
“큭!”
그때부터는 상황이 일변했다.
카가강!
잭이 연신 뒷걸음질 치며 리하르트의 공격을 막아섰다.
빈틈을 노려 재빨리 검을 휘둘러 보지만, 리하르트는 모두 간발의 차로 피해 냈다.
‘허와 실이 보인다.’
이미 수십 합을 넘게 검을 맞댄 잭의 검술.
초집중은 그 검술의 허초를 어설프게나마 구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빠각!
기어코 리하르트의 수련검이 그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크윽!”
“내가 이긴 거지?”
“……아직 안 끝났습니다!”
호기롭게 외치는 잭의 모습에 리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든 도련님의 엉덩이를 걷어차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그럼 이제부턴 마나를 사용해 볼까-, 하고 리하르트가 화두를 던지려던 참이었다.
목책 위에서 보초를 서던 기사 하나가 산통을 깼다.
“다, 단장! 붉은 오크가 또 나타났습니다!”
한데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붉은 오크?”
마물의 습격인가?
리하르트는 좌중을 훑었다.
“젠장, 다음은 내 차례였는데!”
“속이 답답했는데 마침 잘됐어. 이번에야말로 그 빌어먹을 돼지의 목을 따야겠군.”
기사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이를 갈아 댔다.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한두 번 습격해 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쉽지만 대련은 중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사단장 폴크가 리하르트와 잭 사이로 끼어들며 말했다.
“습격인가?”
“음, 이것을 습격이라 해야 할지…….”
“일단 가 보지.”
하필이면 가장 달아올랐을 때 오크가 나타날 게 뭐람.
대련을 방해받은 리하르트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목책으로 향했다.
“취익!”
주둔지의 목책 너머, 저 멀리에 정말 오크 하나가 서 있었다.
온몸을 가로지르는 끔찍한 흉터가 인상적인 오크였다.
놈의 옆에는 웬 멧돼지 3마리가 목이 따인 채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네 이놈! 정녕 죽고 싶어서 또 찾아왔구나!”
“취이익, 인간 전사들이여! 그간 잘 지냈는지 궁금하구려!”
오크는 기사들의 적개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인사를 건넸다.
‘무슨 저런 놈이 다 있어?’
그를 바라보는 리하르트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세상에, 인간들한테 반갑게 인사하는 오크라니.
그때였다.
돌연 오크가 옆에 쌓아 놓은 멧돼지를 이쪽을 향해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전투 준비!”
안 그래도 예민한 기사들이 경계를 드높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리하르트도 드래곤 투스의 검자루를 잡으려 했다.
“이, 이건 공격이 아니오! 취익!”
그런데 정작 오크는 양손을 휘저으며 거리를 벌렸다.
“내 일용할 양식을 가져왔으니, 부디 반갑게 맞이해 주길 바라오. 취익!”
정말이지 웃음도 안 나왔다.
리하르트는 지금의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저놈은 대체 뭐야?”
“……한 달 전부터였을 겁니다. 저 오크가 대뜸 찾아와서 손을 잡자고 떠들어 댄 것이.”
“손을 잡아? 그건 또 뭔 소리야.”
“홉슨 산맥의 드래곤에게 원한이 있답니다.”
폴크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놈이 한두 번 찾아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취익…… 이야기라도 좀 나눠 주면 안 되겠소!”
리하르트는 오크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눈가에 기이한 빛이 일렁였다.
“제법 간절해 보이는데. 잠깐 다녀올게.”
“도련님!”
“명령이야. 여기서 대기해.”
그는 기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목책 앞으로 걸어 나갔다.
“취이익! 드디어 대화할 마음이 생긴 것이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저에게 다가오는 리하르트를 본 오크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처음 보는 인간이구려! 취익. 나는 핏빛 나무 부족의 마지막 전사, 휴거라고 하오!”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스릉-
리하르트가 드래곤 투스를 뽑아 들었다. 그러자 오크가 뒷걸음질 치며 손을 휘저어 댔다.
“취, 취이익! 검은 왜 뽑는 거요!”
“원래 오크는 몸으로 대화하는 걸 좋아할 텐데?”
“나는 싸울 생각이 없소!”
이게 정녕 오크의 입에서 나올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리하르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같이 드래곤을 토벌하고 싶다면서?”
“췩, 그렇소만…….”
“네 실력이 어떤지도 모르는데 뭘 믿고 힘을 합치자는 거야?”
그 말에 오크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대련 한번 하자.”
리하르트는 채 가라앉지 않은 대련의 열기를 일깨웠다.
한창 좋을 때 흥이 깨져 버렸으니, 오크가 책임을 져야만 했다.